Living daily/조선왕조, 왕릉

사도세자의 자손들,

나 그 네 2013. 8. 17. 15:24
<요절한 동생 앞에 선 정조의 눈물>
정조 친필로 된 은신군신도비
정조 친필 은신군신도비 서울시에 기증

 

 "군자께서 말씀하시기를, 안타깝도다! 명(命)이란 무엇인가? 원망도 탓도 할 수 없느니라 하셨으니 내 마음 속 깊이 허전하도다."( 君子曰噫 命也如何 匪怨匪尤 予懷孔多)

요절한 이복동생 은신군(恩信君)을 위해 조선왕조 제22대 군주 정조(正祖.1752-1800)는 이렇게 말면서 그 마지막 구절에서는 "혼이시여! 얼마나 안타까우신가? 유궁(幽宮. 무덤)에서 편안하소서"(魂兮奚憾 安此幽宮)라고 노래했다.

 

17세에 요절한 동생을 위한 정조의 이런 만가(輓歌)는 흥선대원군 묘소가 있는 경기 남양주시 화도읍 창현리 산22-2번지 일대에 있던 은신군(1755-1771) 묘소 앞에 있던 신도비(神道碑)에 새겨져 있다.

 

이 신도비가 올초에 서울시립박물관(관장 김우림)에 기증돼 이곳 광장 앞 녹지대에 다른 기증 석조물들과 함께 전시되고 있다. 화강암 머릿돌을 얹은 흑요암(일명 오석) 비신(碑身)에 정자체로 새긴 신도비문은 정조 친필로 돼 있다.

 

은신군은 어떤 인물이며 정조와는 구체적으로 어떤 관계일까? 이를 추적하는 과정에서 정조 조부인 영조 때 발생한 사도세자 옥사사건을 마주하게 되며, 아울러 그의 후손을 훑어가는 과정에서는 흥선대원군과 고종을 만나게 된다.

 

은신군은 아버지가 장헌세자(莊獻世子), 즉, 사도세자이지만 혜경궁 홍씨가 어머니인 정조와는 배가 달랐다.

 

은신군 외에도 정조에게는 이복 동생으로 은언군(恩彦君.1755-1801)과 은전군(恩全君.1759-1778)이 있었다. 하지만 순빈임씨 소생들인 은언군과 은신군, 경빈박씨 소생인 은전군의 세 이복동생은 모두 제 명을 살다가지 못했다.

 

정조 즉위 후 은전군은 억울하게 죽은 어머니의 복수를 한다며 역모를 꾀했다 해서 사사됐고, 은언군은 영조 47년(1771)에 사소한 죄를 지었다 해서 3년 동안 유배되었다가 정조 10년(1786)에는 그의 아들 상계군(常溪君)이 모반하려 했다 해서 강화로 유배되었가가 순조 원년(1801)에 결국은 사사됐다.

 

은신군 역시 영조 47년에 은전군과 함께 죄를 뒤집어 쓰고 제주도로 유배갔다가 거기에서 분에 넘치는 가마를 탔다는 '이상한' 죄목이 더해져 역시 사사되었다.

정조의 이복형제들에 대한 이런 처단은 결국 다음 왕위계승권자인 정조의 기반 강화를 위한 영조의 조처였다고밖에 볼 수 없다.

 

이와 같은 동생들의 희생을 발판으로 즉위한 정조는 그 원년에 은신군을 숙종의 서자로서 이미 죽고 없는 연령군의 양자로 들이게 하는 한편 즉위 7년째인 1783년에는 직접 신도비문을 손수 써서 추모하는 마음을 절실하게 표현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비문을 쓰면서 정조는 이복동생 은신군의 죽음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할아버지 영조를 탓할 수도 없고, 당사자인 은신군을 나무랄 수도 없었다.

이에 정조는 이 신도비문에서 그의 죽음이 명(命)이라고 했다. 문맥상으로는 네 팔자가 그렇다는 운명론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정조를 이어 즉위한 순조는 인조의 셋째아들 인평대군 후손인 남연군을 은신군의 양아들로 입적시켜 그 가계를 잇도록 했다. 남연군은 바로 흥선대원군 이하응의 아버지. 따라서 생물학적 혈통은 다르나, 억울하게 죽은 은신군은 손자가 대원군이 되고 증손(고종)을 왕으로 배출하게 된다.

 

그렇다면 흥선대원군과 고종-순종 시대에 은신군은 대대적으로 현창되었을까?

신도비 기증을 계기로 은신군 계보를 추적한 서울시립박물관 김문택 박사는 "이상하게도 고종 가문이 은신군을 족보에서 빼어버리려 한 흔적이 농후하게 드러난다"면서 "아무래도 서자인 은신군에서 계보를 찾기는 어려웠을 것"이라고 말했다.

 

 

 

드라마 <이산>의 인기가 높으니 정조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는데 많은 분들이 정조의 배다른 동생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계시는 것 같아 몇 자 적습니다.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는 정실부인인 혜경궁 홍씨 사이에서 정조를 두었고 후궁(세자의 후궁은 종2품 양제, 종3품 양원, 종4품 승휘, 종5품 소훈이라고 함) 임씨와의 사이에서 은언군과 은신군을 두었고 후궁 박씨와의 사이에서 은전군을 두어 총4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러나 이들 세 명의 아들과 그들의 후손도 왕족으로서 부귀영화가 아닌 많은 고생을 하였고 제명대로 살지도 못하여 왕족으로 살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잘 보여주는 것 같아 좋은 기분이 아니다.


은언군

이름은 인이며 1754년(영조 30년)태어나 1801년(순조 1년) 죽었는데 25대 임금인 철종(강화도령)의 할아버지가 된다.

1762년 사도세자가 죽을 당시 9세에 불과 하였으며 10세에 은언군에 봉군(封君)되고, 13세에 송낙휴의 딸과 혼인했다. 1771년(영조47년) 외람되게 하인배인 구종, 별배를 많이 거느리고 다니고 남여를 타고 다닌다고 정순왕후의 오빠인 김귀주 일당이 고발하여 할아버지인 영조로부터 은언군과 동생인 은신군을 관직에 기용되지 말라는 처벌을 받았고 당시 가마를 구해준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과 홍봉한의 아들인 홍낙성도 함께 처벌을 받았다.

이어 시장 상인들에게 진 빚을 갚지 않았다 하여 은신군과 함께 충청도 직산에 유배되었다가 제주도 대정으로 옮겨 위리안치되었다가 1774년 풀려났고 1776년 영조가 죽자 이복형인 정조에 의해 영조의 능을 관리하는 수릉관(守陵官)에 임명되고 이듬해 능 관리를 잘 했다고 정조가 흥록대부(興祿大夫)라는 벼슬을 시켜주었다.

당시 실권자이던 홍국영은 누이동생을 정조의 후궁으로 들였으나 이듬해인 1780년에 죽자, 은언군의 맏아들 담(湛)을 누이동생의 양자로 삼아 완풍군(完豊君:뒤에 常溪君으로 개칭)이라 하고 왕위를 잇게 하려 했으나 실현되지 않았다.  은언군은 1786년(정조10년) 아들 상계군(常溪君) 담(湛)의 모반죄로 인하여, 왕명으로 강화도로 옮겨져 살게 되었고 1789년 강화도에서 도망쳐 나왔으나 붙잡혀 다시 강화도에 안치되었다.

1800년 정조가 죽고 순조가 즉위하자 정순왕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1801년(순조1년)천주교도를 탄압한 신유사옥 때 처 송씨와 담의 처인 며느리 신씨가 청나라 신부 주문모로부터 영세를 받은 천주교도라 하여 붙잡혀 죽고, 은언군도 사약을 먹고 죽었다가 1849년 손자 원범이 철종으로 즉위하자 신분이 복원되었다.

은언군은 아들을 두 명 두었는데 상계군 담과 전계대원군(철종의 아버지) 광이다.


은신군(恩信君, 1755년-1771년)

이름은 정(禎)이며 형 은언군과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17세의 나이로 그곳에서 죽었다.  후손이 없어 16대 임금 인조의 아들인 인평대군의 6세손 남연군이 양자로 들어갔으며 남연군 구는 흥녕군 창응, 흥완군 최응, 그리고 고종의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이 남연군의 3째 아들이다.


은전군(恩全君, 1759년 - 1778년)

이름은 찬이며 1777년(정조1년) 일어난 홍상범 등의 역적모의가 적발되어 문초시 누구를 왕으로 추대하려 했느냐는 신문에 은전군을 추대하려 하였다는 범인들의 답변으로 인해 신하들이 들고 일어나 죽이기를 청하니 정조는 처음에는 반대하다가 신하들의 거듭된 강청에 의해 은전군을 사사하였다. 그가 죽을 당시 19세 였고 후손이 없이 죽었으며 철종의 큰형인 풍계군이 양자로 들어갔는데 이도 후손이 없어 또 양자를 들였다.


상계군 

은언군의 큰 아들인 상계군 담의 출생연도는 모르나 홍국영에 의해 홍국영의 누이동생으로 정조의 후궁이었다가 죽은 원빈의 양자가 되었다가 홍국영이 죽자 없던 일이 되었고 1786년(정조10년) 방에서 죽었는데 당시 아버지인 은언군이 33세 이므로 상계군은 20세 미만이었을 것이다. 후손은 없는 것으로 보이고 어머니와 아내 신씨는 독실한 천주교신자로 1801년(순조 1) 신유사옥 때 처형되었고 조카인 원범이 임금이 되고나서 역적모의를 했다는 억울함이 풀리고 정1품에 추증되었다.


 

전계대원군

은언군의 둘째아들로 출생연도와 사망연도가 분명하지 않다. 그는 부모와 형, 형수의 죄에 연좌되어 강화부 교동으로 쫓겨나 불우한 일생을 빈농으로 보냈다. 소생으로는 회평군 명(懷平君明, 초명은 元慶), 영평군 경응(永平君景應), 덕완군 원범(德完君元範)이 있다.

1849년 헌종이 후사 없이 죽어 그의 셋째아들 원범이 25대 임금인 철종으로 등극하자 전계대원군에 추봉되었다. 묘는 여주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