旅行/지리산 이야기

[스크랩]지리산 이야기 - 둘. (산죽. 황금능선. 구곡산. 무재치기 폭포. 장당골. )

나 그 네 2015. 8. 30. 16:07


산죽(조릿대).



지리산은 온통 산죽으로 뒤덮여 있는듯 하다.
등산로에서 벗어나면, 산죽이 진로를 막는다.
황금능선의 빼곡한 산죽밭은 악명 높기로 유명.

1950년대 빨치산들의 산죽잎 침낭.
밀가루 푸대에 산죽잎을 넣은 침낭.
토벌대에게 쫓길 때 사용했던 침낭.

겨울에 얼어죽지 않은 것이., 기적.
동상에 걸린 발이 썩어문드러지고
죽지 못해 살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원래 산죽은 대나무 중에서 가장 작은 대나무.
쌀을 씻어 건지는 '조리'의 원료라 일명 조릿대
중부 이남의 산에 빽빽하게 무리지어 흔히 자란다.

산죽은 인삼을 능가한다고 할 만큼 놀라운 약 성분.
당뇨병 고혈압 위염 위궤양 만성 간염 암 등에 효험.

키는 1∼2미터, 지름은 3∼6밀리미터쯤 자라고
일본에서도 자라지만 일본 산죽은 약효가 별무.
산죽은 그늘에서도 잘 자라고 추위에도 강한 편.

잎은 긴 타원 형 피침 꼴로 길이 10∼25cm이고
잎은 뾰족하고 가장자리는 가시같은 잔톱니와 털.
꽃이 피고나면 죽기에 일생에 한번 꽃피고 맺는 열매

꽃은 4월에 피며 열매는 6월에 익는데
열매의 모양새는 보리나 밀을 닮았다.

조릿대 열매로 떡을 만들거나 밥도 짓는다.
수십년, 또는 수백년 만에 한번 꽃이 핀다.

갖가지 암에는 조릿대 뿌리 10∼20그램을 달인 물
씨앗을 불로 살짝 볶아 가루 낸 것을 한 숟가락씩
하루 세 번 식전 복용 또는 조릿대 다린 물을 복용.

조릿대는 심장의 열과 위장의 열을 씻어 내며
간장의 열독을 풀어주고 마음을 편안하게 하고
오줌을 잘 나가게 하는데 더할 나위 없는 치료약

당뇨병 고혈압 간염 위궤양은
조릿대 뿌리달인 물이 치료약.

조릿대 뿌리를 12시간쯤 달인 뒤
물이 진득진득해질 때까지 졸여서
오동나무 씨앗 크기로 알약을 만들어
10∼20개씩 하루 세 번 식전 30분에 복용.

불면증이나 신경쇠약에도 조릿대 잎차를 마시면 효험
조릿대 잎을 달인 물을 돐 지난 아기에게 먹이면 튼튼
자궁경관염으로 냉이 흐르고 허리와 아랫배 아플 때 직효.

조릿대 잎(산죽)을 가루내어
한번에 3g씩 하루 3번..복용

조릿대는 성질이 차므로
냉한 체질이나 저혈압은
복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지리산 산죽은 조랫대 원료이다.
지리산 일대는 산죽 공예 생산지.




황금능선.




"황금 빛이 마음에 어두운 그림자를 만들고,
애욕의 불꽃이 마음에 검은 그을음을 만든다."

'이 말이 실감나게 떠오르는 황금능선 산세.'

마치 애욕에 몸부림치는 여인의 자태같은 산세.
불교에서는 욕망에 마음이 사로잡히는 일이 애욕.
이성(異性)에 집착하는 인간의 성적욕망 또한 애욕.

'황금능선 산죽밭에 잘못 빠져 들면
그 시작과 끝을 알 수 없어 위험천만.'

웅석봉 - 밤머리재- 도토리봉 -왕등재 습지
- 외고개 - 새재 - 국골 사거리 -하봉 -중봉
천왕봉 동쪽으로 뻗어내린 능선이 동부 능선.

황금능선은 지리산 동부능선의 가지능선.
구곡산 - 국사봉 - 써리봉 = 20km 황금능선.
'구곡산 능선' 이라고도 불리우는.. 황금능선.

내원골과 장당골 두 계곡 사이에 있는 황금능선.
두 계곡의 합수지점인 내원사가 황금능선 들머리.
뢍금능선은 내원골이 생가인 정순덕 여인의 은신처.

토벌군에게 쫓길 때마다
정순덕 여인에게는 생명줄.
최후의 빨치산 은신처였던 곳.

대원사길과 중산리길이 나뉘는 산청군 시천면 덕산마을
그 서쪽에 솟은 구곡산에서 국사봉을 거쳐 써리봉 능선.
영호남 산악인에게는 지리산 종주 코스로서 알려진 코스.

황금능선은 기점을 어디로 잡느냐에 따라 차이가 많다.
가장 긴 코스는 구곡산 남쪽 마을인 외송 마을 들머리.
산 중턱에 위치한 도솔암까지는 차량으로 오른 후 산행.

능선 중간으로 질러 오르는 산길 중 인기 높은 코스
중산리에서 국사봉 또는 느진목으로 오르는 산길이고,
내원골에서 국수재를 거쳐 써리봉으로 오르기도 한다.

외송마을 들머리는 도솔암 직전 왼쪽 계곡부터 시작.
계곡이 두 갈래로 나뉘는 지점에서 산길은 왼쪽 계곡.
구곡산에서 써리봉 못미처 물가름이까지는 샘이 없다.

하여, 도솔암 왼쪽 계곡에서 식수를 마련해야 한다.
구곡산에서 써리봉까지는 중간중간 한 길 넘는 산죽
눈으로 길이 확인안될 때에는 발로 길을 찾아야 한다.

써리봉 직전 안부상 늪지대인 '물가름이'
그곳에서 써리봉 오름길은 여러 가닥이다.
길이 헷갈리면 곧장 치고 오르는 편이 낫다.

써리봉 능선에 올라 오른쪽 길로 내려서면 치밭목산장.
왼쪽 길을 따라가면 중봉 거쳐 천왕봉에 오르는 등산로.
구곡산에서 써리봉까지 하루에 가는 일정은 만만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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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통 산죽으로 뒤덮여 헤쳐나가기 악명 높은 황금능선.
1979년 세석산장 관리인(정원강)이 낫으로 개척한 산길
써레봉에서 구곡봉 지나 덕산의 덕천강가로 이어진 능선

가을 산죽밭 황금빛에 반해 명명한., '황금능선'

서산에 걸린 오후 햇살 아래 구비쳐 내달리는 능선
중봉 인근에서 바라다 보면 그 풍경에 어울리는 이름.
지독스러운 산죽밭에 빠져들면 탈진하기 쉬운 황금능선.

마치, 숨은 매력까지 온통 드러낸 여인의 유혹.
그 품속에 빠져들수록 앙칼지게 거부하는 산죽밭.
결국, 잘못 헤메면 눈앞이 노랗게 변하는 황금능선.

내원골 - 내원사 - 안내원 - 국수재 - 황금능선.
황금능선 국수재에서 발원한 내원골은 덕천강 상류
황금능선의 산행기점은 덕산과 내원사를 꼽을 수 있다.

내원사 앞의 다리를 건너 왼편 깊숙한 골짜기로 신판도로
이 도로 끝까지 따라 오르면 해발 800m고지에 안내원 마을
써리봉에서 국사봉으로 흘러내리는 황금능선과 연결되는 곳.

안내원 마을 끝집인 지리산 농장식당 마당 지나
오른쪽에 차단기가 설치된 옆으로 오르면 들머리.

마을에서 국수재까지 약 1시간 거리.

내원사 - 안내원 - 국수재를 잇는 길은 옛 등산로
시외버스가 시천면사무소인 덕산까지 운행할 때는
천왕봉 오르던 사람들이 주로 이 길을 이용했었다.

구곡산은 써래봉에서 이어지는 일명 황금능선의 정점
가을철 억새와 산죽이 어울어져 산악인을 유혹하는 곳.
특히 써래봉에서 국수봉을 거쳐 구곡산에 이르는 능선

좌우로는 빨치산 최후의 인물인 정순덕의 활동무대.
내원골과 장단골은 아직도 숨겨진 비경으로 남은 곳.
신비의 마야계곡에는 빨치산아지트가 자리잡았던 협곡.

'그 신비의 계곡을 일궈낸 육중한 능선이 황금능선.'

지리산 동부능선의 비경지대인 원시림지역이기도 하다.
특히 지천에 널린 산죽은 보호동물인 반달곰의 먹거리.
이일대는 반달곰의 서식지로서 분류되어 관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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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왕봉 자태를 가장 가까이 느낄 수 있는.. 황금능선.
천왕봉- 중봉- 써레봉- 국사봉 - 구곡산 = 동남부능선.
천왕봉에서 30km에 달하는 가을 능선 초원은 황금 물결.

덕산 뒷산 구곡산까지 이어져., 일명 구곡능선.
꼬리 아홉 달린 여우를 연상하게 하는 구곡능선.

천왕봉에서 써레봉 거쳐 치밭목산장으로 이어진 등산로
써레봉에서 오른쪽 등산로를 비켜 나가면 황금능선이다.
써레봉 주변은 등산로 구분이 희미해 길 찾기가 어렵다.

이 부근만 지나면 별 어려움이 없이 산행을 할 수 있다.
그러나, 안개속에서는 길을 잃고 여우에 홀린 듯이 방황.
구곡능선에서 뻗어내린 좌우 18 골짜기로 헤메이기 쉽다.

가을에는 한껏 멋스러운 여인의 화려한 몸단장
애욕에 몸부림치는 여인의 흐느낌 같은 바람소리.
마치, 베일에 가려진 매력까지 드러낸 여인의 유혹.

능선에는 초지대와 함께 산죽들이 우거져 있고
오른쪽에 천왕봉이 고고한 자태로 우뚝 솟았다.
가을날 이 능선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황룡 같다.

여기에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순두류계곡과 중봉골,
천왕골의 넉넉함과 1,037봉과 국사봉 단조로운 맛.

국사봉은 안내원마을에서 한시간 가량 거리.
국사란 신라와 고려 때 승려의 최고 법계이다.
국사봉은 원나라 지배를 받았던 고려 때의 지명.

이 봉우리를 기점으로 큰 절골, 작은 절골 등등.
'외탑이' 분지 지점과 골짜기에는 옛 여러 사찰터.

수많은 탑이 세워졌을 만큼 불교문화가 융성했던 곳
현재 잡초와 수림에 덮혀 절터 흔적조차 찾기 어렵다.
절골은 통일신라 말 화랑들의 심신수련장으로 추정된다.

'내원마을에서 국사봉에 이르는 길.'

1960년대까지 순두류 거쳐 천왕봉 가는 등산로로 각광.
지금은 이 코스로 천왕봉을 오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국사봉은 덕산과 천왕봉 사이 일직선 상의 가운데 위치

지형 특성상 옛날의 국사봉은 봉화대 역할을 한 통신기지
또 국사봉은 가지 능선들이 발달해 있어 빨치산 지휘본부
깊은 산중이면서 민가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절묘한 은신처

동남부능선은 천왕봉에서 구곡산 정상에 이르기까지
중간 중간에 하산 또는 탈출할 수 있는 길들이 많다.

..........정순덕 여인의 비상통로..............
치밭목 산장에서 중산리 지름길은 무재치기폭포
- 1250안부 -늦은목재 - 마야계곡(중산리계곡)-
순두류 - 중산리는 정순덕 여인이 많이 이용한 길

안장단골에서 내원능선으로 오르는 비상통로들.
정순덕 여인이 자기 마을을 찾을 때 비상통로들.

마야계곡에서 써레봉,중봉,천왕봉 동사면으로 통로
중산리계곡 상류에서 황금능선으로 오르는 길이 발달

써레봉에서 순두류 또는 장당골로 빠질 수 있으며,
국사봉에서 내원마을이나 순두류로 하산할 수 있다.

또 국사봉에서 구곡산으로 가다가 곡점이나 시천면 동당,
외공마을로 빠질 수 있는 것이 이 능선의 지형적인 장점.
국사봉에서 두어 시간 걸어 마지막 봉우리가 구곡산 정상

구곡산에서 맑은 날엔 천왕봉과 다도해가 한눈에 들어온다.
도솔암 거쳐 덕산중학교까지의 하산 시간은 1시간 40분 정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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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능선 등산로

1. 중산리에서 국사봉 또는 느진목으로 오르는 산길
내원골에서 국수재를 거쳐 써리봉으로 오르기도 한다
.
외송마을 기점 등산로는 도솔암 직전 왼쪽 계곡에서 시작.
계곡의 두 갈래 지점에서 산길은 왼쪽 계곡으로 이어진다.
이 등산로는 산행하기 전에 식수를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2. 써리봉 능선에 올라 오른쪽 길로 내려서면 치밭목대피소
왼쪽 길을 따르면 중봉(1,875m)을 거쳐 천왕봉에 오르게 된다.
구곡산에서 써리봉까지 황금능선 코스 당일 산행은 쉽지 않다.

따라서, 치밭목산장에서 일박 아침 일찍 산행을 시작해야 한다.
만약, 시작이 늦었다 싶으면 야영 장비를 갖추는 것이 현명하다.


구곡산(황금능선 끝봉) 하산길.

동당마을, 곡점, 외공리, 덕산등 여러 곳이 있다.
그중 차편은 덕산 쪽이 편하나 길 찾기가 어렵다.
외공리로 내려가는 길이 비교적 수월하고 무난하다.

외공리 마을회관 앞에 높이 60㎝ 여근석과 남근석.
이 한쌍의 음양석은 남녀 생식기를 닮아 신기하다.
이 음양석은 60년 전 마을 주민이 주워온 것이란다.




구곡산(961m).



구곡산은 글자 그대로 아홉 계곡이 있다고 하여 구곡산.
'꼬리 9 달린 여우' 내원골은 구곡산의 9 계곡에서 유래.
구곡산은 황금능선 끝 봉우리이자 '산악 마라톤대회 코스.'

덕산에서 바라보는 구곡산의 골짜기들.
골짜기가 골짜기를 가지치는 골짜기 늪.
꼬리 아홉 달린 여우를 떠오르게 하는 곳.

지리산 천황봉이 손에 잡힐듯이 가까워 보이며,
구곡산은 항상 규제없이 산행이 가능한 산행코스
봄이면 철쭉, 가을이면 단풍아 아름다운 산행코스.

천왕봉 코밑까지 무성한 산죽구간 탐험코스.

구곡산은 1950년대 빨치산과 토벌군 간의 격전지.
마지막 남부군으로 알려진 정순덕 여인의 활동무대.
신출귀몰한 도피행각으로 구미호로도 불렸던 정순덕.

구미호는 술수와 변화를 부려 인간을 괴롭히는 요물.
여우는 무덤을 파서 송장을 먹는다하여 '죽음의 상징'.
옛날부터 사람의 죽음을 예고한다는 구미호의 울음소리.

남자를 홀리는 요염한 여성으로서 자유롭게 변신하며
여우가 천년을 묶으면 구미호로 둔갑한다고 전해온다.
구미호는 고대중국 '은나라 주왕의 비' <달기>의 별칭.

주왕은 어진 신하의 충언은 외면하고 달기 만을 총애.
죄인을 숯불 위에 걸쳐놓은 구리 기둥을 걷게 한 주왕.
죄인이 미끄러져 타죽는 형벌을 보면서 웃고 즐긴 달기.


"여우 같은 지지배!"
"여우 같이 약은 녀석.

원래, 여우는 우리 민족에게 사랑받던 동물이었다.
어린 시절 기억 속에 아스라이 남아있는 '여우놀이‘.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잠 잔다~~."

깊은 산속에서 달밤에 목놓아 우는 여우의 울음소리.
전설의 고향에 단골로 등장한 구미호, 백여우, 여우골.
이제는 우리나라에서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사라진 여우.

"아우~~우우우우~~~~"
"어우~~~어우 어우 우~~ "

여우가 짝을 찾아 서로 울부짖는 소리는 매우 애달프다.
짝찟기 상대를 쉽게 구할 수 없어 밤새 울부짖는 것 같다.
깊은 산속에서 야영을 하면 간간히 들려오는 여우 울음소리.

'여우는 긴 꼬리, 쫑긋한 귀, 뾰족한 입이 특징.'

특히, 붉은 여우는 꼬리 끝이 하얀 매혹적인 자태의 동물이다.
하여, "여우 같은 계집애."는 아름다운 여성을 극찬하는 감탄사.
현재, 한반도 휴전선 남쪽 여우는 거의 멸종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여우는 왜 우리나라에서만 사라진걸까?’

여우는 주변에서 너구리처럼 흔하게 볼 수 있었던 동물.
여우 모피를 얻기 위한 사냥과 쥐약 살포가 직접적 원인.
일제시대 여우털 목도리는 부를 뽐내려는 귀부인의 상징.

1960/70년대 전국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진 쥐약 살포.
죽은 쥐는 여우의 먹이가 되므로 방방곡곡에서 숨져간 여우.
그러나, 배고팠던 시절인 당시 여우의 죽음은 관심 밖이었다.

몽골 대초원에서 여우굴을 파고 자유롭게 사는 여우.
안타깝게도 휴전선 비무장지대(DMZ)에 가로막힌 통로.
이제는 불러도 대답 없는 전설 속 이름이 되어버린 여우.

우리나라에는 아직도 여우골 또는 여우고개 지명이 많다.
예전에 인적없고 산세 험한 여우 출몰지역 남태령(南泰嶺).
사람으로 변신한 천년묵은 여우까지 나타난다는 호랑바위골

그 남태령 서울과 과천 경계이며 관악산과 우면산 사이 고개
18세기 말 정조임금이 수원 선친 사도세자 능(陵)을 자주 참배
어느날 이 고개 이름을 묻자 남태령이라 엉겁결에 대답한 신하

여우고개 지명이 상스러워 감히 왕에게 말못한 신하.
서울 남쪽으로 맨 처음 큰 고개라 남태령이라 했던 것.
그후 그 여우고개는 남태령으로 지명이 바뀌게 되었다.

서울 북한산에서 가장 인적없고 으슥한 '여우골'.
여성 산악인 고미영을 배출한 시발 산악회 야영장.
지금은 폐쇄된 야영장으로 산꾼들의 은밀한 비박지.

그곳에 숨겨진 동굴 절벽을 거쳐 백운대 오르는 골.
시발 야영장 - 여우굴 - 처녀샘 - 백운대 = 여우골.
아직도 여우 전설은 우리 주변에 친근하게 남아있다.

야생동물이지만 개과 동물인 여우.
그래서 친숙하게 느껴지는 것일까?

"여우야, 여우야, 뭐하니?"
"......................."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에 자리잡은 구곡산
써래봉에서 이어지는 일명 황금능선의 정점
가을철 억새와 산죽이 어울어진 환상의 코스

특히 써래봉에서 국수봉을 거쳐 구곡산에 이르는 능선
그 좌우로 내원골과 장단골 및 빨치산 아지트 마야계곡.

그 신비의 계곡을 일궈낸 황금능선은 지리산의 동부능선
그 능선 따라 크고 작은 협곡과 원시림은 반달곰 서식처.
특히, 능선 전체를 뒤덮은 산죽은 반달곰에게 중요한 식량.

이 일대 산죽밭은 원래 반달곰 서식처로 알려져왔다.
최근 이 일대에는 흑해주 연안 원산지 반달곰을 방사.
과연 자연환경에서 적응하며 살아갈지 귀추가 주목된다.


구곡산 산행코스

1코스 : 덕천서원→우농원→도솔암→계곡→안부→헬기장→정상.
2코스 : 동당→기도원→제2계곡→전망대→헬기장→정상→덕천서원
3코스 : 동당→기도원→헬기장→정상→제2헬기장→제3계곡→동당
4코스 : 덕천서원→안부→정상→제2헬기장→천잠→덕치재→덕치


교통안내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 단성IC→시천(국도20번)→덕천서원→구곡산
- 산청IC→금서면 매촌(국도59번)→밤머리재→시천→덕천서원→구곡산

<국도3호선> - 신안면 원지→시천(국도20번)→덕천서원→구곡산
- 산청읍→금서면 매촌(국도59번)→밤머리재→시천→덕천서원→구곡산

현지교통 : 진주- 덕산(30분 간격) 버스로 덕산주차장 하차
주변관광지 : 덕산서원, 조식유적지, 대원사, 내원사, 양수발전소




무재치기 폭포.




지리산에는 크고 작은 골짜기들이 아흔 아홉.
저마다 그 나름대로의 비경을 간직하고 있다.
골짜기마다 간직하고 있는 크고 작은 폭포들.

큰세개골 대성폭포
천왕봉 법천골 유암폭포
반야봉 함박골 실비단 폭포

한신지곡 <천령, 내림> 폭포
칠선계곡 <칠선, 대륙, 마> 폭포

단천골 용추 폭포.
장당골 무재치기폭포
그외 수많은 무명폭들.

맑은 계류가 떨어지며 쏟는 하얀 포말
탁한 세속을 맑고 깨끗하게 씻어주는듯
'생명의 근원' 천신의 정기가 쏟아지는듯

지리산에서 가장 높은 곳에 위치
아울러 가장 깊고 은밀한 곳에 위치.
무재치기 폭포는 마치 '왕의 여자'인듯.

흰 白(백)은 백의민족의 상징
百(백) 성씨가 모여 사는 민족.
100 성씨 통치자는 신격화된 왕.

백의민족에게 백색은 '신의 정기'.
폭포는 '생명의 근원' 천신의 정기.

아흔 아홉이란 숫자는 인간세계.
아흔 아홉을 넘어서면 하늘나라.
아흔 아홉은 인간 세계의 한계선.

.............'아흔 아홉 골'의 유래...............
한라산 자락 수많은 골짜기로 이루어진 아흔아홉골.
백에서 하나가 모자라 불행이 시작됐다는 설화 내용.

'아주 먼 옛날 한라산은 100 골짜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사자와 호랑이 같은 맹수들이 뛰놀며 백성들을 괴롭혔다.
그러던 어느날 중국 스님이 찾아와 백성들에게 이르기를

"대국동물대왕입도(大國動物大王入島)
라고 외치면 맹수들을 없애 주겠다."

백성들은 스님이 시키는 대로 외치자
맹수들이 모두 한 골짜기로 몰려왔다.
스님은 불경을 외고 나서 맹수들을 향해

"이제 너희들은 떠나라.
이 골짜기는 없어지리니
만일 너희가 또 다시 오면
너희 종족을 모두 멸하리라!"

스님이 큰 소리로 외치자
그 골짜기는 사라져 버렸다.

그 후부터 제주에는 맹수가 없어졌을 뿐만 아니라
큰 인물이 나지 않아 백성들 고난이 시작됐다는 설.

와룡산에도 이와 유사한 아흔아홉골 전설이 있다.
한라산 와룡산은 지리산과 아울러 동식물의 보고.
대홍수 시절 동식물들이 '종의 명맥'을 유지한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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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짜기 중의 골짜기' 경남 산청 장당계곡
기암괴석과 옥류,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곳.
휴대전화도 터지지 않는 심산유곡 자체인 장당골.

써리봉에서 남쪽으로 뻗어내려 내원사를 거쳐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 덕천강에 합류하는 50여리
대포마을에서 계곡을 거슬러 올라가면 사찰 내원사

이곳에서 내원사 왼쪽은 내원골, 오른쪽이 장당골.

무재치기 폭포 물줄기와 써리봉이 있는 바깥 장단,
남단부에서 발원한 물줄기 등이 있는 곳이 안장당.

장당골은 지리산의 광대함과 비극을 고스란히 간직한 곳.
깊은 골짜기로 인해 피란과 비극의 역사현장이 되었던 곳

1862년 산청일대 농민항쟁과 동학혁명에 실패한 사람
일제강점기에는 의병 은신처, 6.25때는 빨치산 은거지.
1963년 11월 마지막 빨치산 이홍이와 정순덕이 잡힌 곳.

'장당골의 발원지인.. 무재치기 폭포.'

무재치기는 '무지개 + 치기' 합성어 줄임말.
바위벽을 치는 폭포 물방울이 빚어낸 무지개.
'무재치기 폭포'는 '무지개가 뜨는 폭포'란 뜻.

.................무지개......................
무지개는 태양 반대 방향에서 흔하게 보인다.
비행기 등을 타고 하늘에서 바라보면 둥굴다.
바깥 쪽으로부터 빨주노초파남보 색깔로 핀다.

무지개는 사랑하는 연인 간 환희의 상징.
사랑의 기쁨으로 흘리는 눈물의 아름다움.
무지개 깃발은 동성애 문화를 상징한 표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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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에서 무지개는 성령의 7가지 열매를 상징
사랑 기쁨 평화 인내 친절 선행 진실 온유 절제

클라이막스 황홀경을 상징하는 무지개.
삶의 마지막 꿈과 희망을 뜻하는 무지개.
다양한 의미를 품고있는 합성어.. 무재치기.

무지개 뜰 무렵 환상처럼 나타나는 폭포.
비가 개이고 개울이 마르면 평범한 바위벽.
그곳이 폭포인지 조차., 모르고 지나칠 정도.

무재치기 폭포는 비가 온 직후에 아름답다.
마치, 기품 있는 여인이 목욕하는 모습인듯.
여왕이 목욕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듯한 느낌.

사랑하는 여인보다 강렬한 아름다움.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을 품어내는 여인.
한번 빠져들면 헤어나올 수 없는 관능미.

.........신윤복의 '목욕하는 여인들.........
기생인듯한 4 여인이 주요 부분만 치마로 가리고
젖가슴과 속살을 드러낸 채 개울에서 목욕하는 모습
치마로 가리워진 음부를 고목 둥치에다 그려놓은 발상.

그 옆 개울가에 주저앉아 때미는 여인.
살포시 일그러진 얼굴 표정이 절묘하다.
이조 말 성풍속도를 짐작할 수 있는 그림.
젖가슴은 드러내도 엉덩이는 가리려 했던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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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욕하는 여인들을 그린..세기의 명화들.
자연의 아름다움보다 더 돋보이는 것 같다.
폭포는 옛부터 전설 속 선녀가 목욕하는 장소.

지리산 10경 불일폭포는 세석고원에서 발원.
음양샘 따라 삼신봉 계곡과 내원재골과 합류.
쌍계사가 있는 화개천을 거쳐 섬진강으로 간다.

무재치기폭포는 써리봉(1642m) 밑에 있는 폭포.
조개골과 한판골이 합류되어 폭포수를 형성한다.
무재치기 폭포는 장당골을 거쳐 덕천강으로 간다.

지리산에서 가장 깊고 높은 곳에 숨겨진 폭포.
마치, 하늘 높은 여인의 자존심을 상징하는듯.
목욕하는 선녀가 은밀한 자태를 한것 드러낸듯.

......'남성을 사로잡는 여성의 몸짓.'.........
유혹하고 싶은 마음을 일으키는 여성의 관능미.
여성에게 이성에 대한 설레임은 정신적인 순결.
여성의 다소곳한 수줍음은 남성을 사로잡는 매력

사랑은 무엇인가 모를 이끌림으로부터 시작된다.
여성의 관능적인 매력도 그 아름다움 중 한가지.

'과연, 여성의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흥미로운 점은 여자들과 남자들의 기준이 다른 점.
여성 매력은 끊임없는 미의 축적 과정을 통해 완성
건강미 지성미 청결한 아름다움이 대표적인 여성 매력.

남자들은 화려한 여자보다 깨끗한 여자를 좋아한다.
깨끗한 이미지 여자에게 섹시함을 느끼게 되는 남자.
짙고 화려한 화장보다는 청순한 외모 연출이 이상적.

남자는 화려한 여자보다는 섹시한 여자를 선호.
여성의 아름다움 기준은 시대에 따라 변하는 듯

여성의 날씬함이 이상형으로 부각된 일제시대
규방에선 풍만함을., 기녀는 '개미허리’를 선호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 중 하나는 바로 ‘통념’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지배자들이 갈망한 이데올로기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는 '상박하후’여성을 보여준다.
빈약한 상체와 풍만한 하체는 이조후기 양반 여성의 자랑.

유방은 여성의 육아 능력 상징.
아름다움의 척도는 아니었던듯.

구한말 서민층 어머니들은 유방을 자랑하듯 노출.
젖가슴은 관능미의 상징이 아닌 육아 능력의 상징.
동아시아에서는 여성의 관능미를 보는 눈이 달랐다.

일제시대 여성의 풍만함을 보는 시각은 이중적.
“몸이 뚱뚱한 사람, 이렇게 고쳐라”(<중외일보>,
1930년 10월4일 다이어트를 알리고, ‘뚱뚱보 조롱’

일제 식민지 시대 화가들의 눈에 비친 이조 여인
오늘날 각선미나 날씬한 몸매와는 거리가 멀었다.
'꽃동 저고리와 주름 곱게 접힌 치마' 얌전한 여성.

'다소곳 새침한 표정이 여성스러운 관능미.'

오지호(1905~82)와 같은 인상주의적 화가의 <나부>(1928)
1930년대말 이조 화가들은 여체의 풍만을 부각시키기 시작.
1945년 이후 남한에서는 여성의 날씬함을 절대시한 아름다움

적당히 풍만함은 전통시대 기혼녀의 아름다움 기준.

짧은(15~20cm) 저고리와 엉덩이를 한껏 부풀린 치마
18~19세기 유행한 겉치마 밑에 7~8겹으로 속옷을 착용.
당나라 시대에 절세미인 양귀비(719~756)는 풍성한 몸매

일본 최초 장편소설 <겐지모노가타리 11세기경)에서
'포동포동 풍만한 여인’들이 주로 미녀로 묘사되지만,
13~14세기 이후 ‘미인’의 키가 커지고 체형이 작아진다.

규방이 대를 잇기 위한 곳으로 인식되었던 시대에는
산아·육아 능력이 있을 법한 풍만한 여인이 관능미

18~9세가 남성들이 성적 대상으로 여긴 기녀, 유녀.
“버들가지 같은 개미허리” “질끈 묶은 가는 허리”
스쳐 지나가는 가벼운 바람에라도 휘어감길듯한 허리.

385~433 경 중국 미녀는 '가는 허리와 자그마한 뼈'
동아시아 남성들에게 ‘가는 허리’는 성적 판타지.
에도시대 일본 유녀의 미인도는 가는 허리가 특징.

여성의 아름다움은 시대 가치관에 따라 천차만별.

사회 혼란기에는 육아 산아 능력이 여성의 관능미
자유연애가 성행하는 태평성대에는 날씬함이 매력.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아름다움은 목욕하는 여인.

눈부시게 빛나는 백옥같은 피부의 아름다움.
속세의 아름다움을 한껏 뽐내는., 여인의 몸짓.
번뇌와 속박에서 벗어나게 하는 천상의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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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사 계곡 끝, 치밭목산장 아래 있는 폭포.'

이 폭포는 바위에 부딪치면서 3단으로 떨어지며,
이 때 물안개가 형성되면서, 산 바람의 기류 현상
떠오르는 동쪽 햇빛과 조화를 이루어 무지개가 핀다.

하여, 맑은 날 오전에 무지개를 감상할 수 있다.
무재치기폭포란 이름은 무지개 치기 폭포의 준말.
장구한 세월동안 장당골을 빚어왔던 무재치기 폭포.

그러나, 아쉽게도 전설이 없는 무재치기 폭포.
하여, 이곳과 유사한 환경의 폭포 전설을 소개.
이곳에 있음직한 전설을 상상 속에서 떠올려보자.

...................설악산 오색 옥녀폭포..................
우리나라의 폭포 대부분은 선녀들의 은밀한 목욕처.
설악산 오색약수터에서 200m 정도 계곡따라 올라가면
좌측 탕건바위와 감투바위는 선관의 탕건과 감투 형상.

선녀탕에서 약수계곡까지 흐르는 물을 음수(陰水)라 하고,
독주폭포에서 흘러내려 오는 물을 양수(陽水)로서 건강식수
이곳에는 옛부터 선녀에 관한 흥미로운 전설이 전해내려온다.

옛날 병풍바위 밑에서 7 선녀가 옷을 벗고 목욕
몰래 뒤따라 온 선관이 두 선녀의 옷을 감추었다.

옷을 잃은 두 선녀는 끝내 승천하지 못하고 한탄.
한 선녀는 옥녀폭포, 그리고 다른 선녀는 여신폭포

선관은 두 선녀가 폭포로 변한 것을 까맣게 모르고
두 선녀를 찾아 혼자 전력을 다해 계곡을 올라가다가
끝내는 힘에 겨워 그 자리에서 굳어져 바위로 변했단다.

선관이 홀로 오른 계곡이 독주(獨走)계곡과 독주폭포.
이때 선관이 감추었던 선녀들의 옷은 물에 흘러 흘러
지금의 남설악 오색앞에 와서 치마폭포와 속치마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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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관은 고려시대 국가제사를 주관하는 관리.
하늘나라 산신을 관리하는 천상선관에서 유래.
설악산 오색 옥녀폭포 전설은 고려 때 유래된듯.

한반도 고대국가마다 성대하게 치뤘던 국가제사
국가에서 엄선한 선녀들이 목욕재개 후 의식 거행.
선녀는 시대에 따라 '무당 또는 여사제'로 불리웠다.

고대 모계사회에서는 무당.
삼국시대 국가제사 여사제.

.......여사제(무당)............
태초에 햇볕만 따뜻하게 비출 뿐
눈에 보이는 물체라고는 없었다.

오직 8여(呂)의 음만이 하늘에서 들려 왔는데
이 음에 의하면 천국과 낙원이 있는 지상에서
가장 높고 오래된 마고성에 마고가 살았었다.

마고는 두딸을 낳았는데 궁희(穹姬)와 소희(巢姬)

이것은 <부도지> 첫머리에 나오는 글이다.
부도지는 우리에게 전해지는 인류의 창세기
우리나라 민족의 상고사라고 말할 수가 있다.

이 부도지에서 태초에 8여의 음으로 천지가 창조되고
삼신이라 하는 마고와 두 딸 궁희와 소희가 태어났다.
마고, 궁희, 소희 = 인류 최초의 인간들로 모두 여자.

즉 고대사회는 모계중심 사회였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모계중심 사회에서 모든 일은 여성이 주관하였을 것이다.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일에서부터 종족을 다스리는 일까지

점점 부족이 커지면서 이웃 부족 간의 전쟁이 일어나고
전쟁을 수행하기는 여자들보다 남자들에게 맞는 일이었다.
하여, 모계사회에서 부계사회로 넘어가는 계기가 되었던듯.

신라 때 천관녀가 하늘에 제를 지냈다는 기록
하늘을 섬기는 일만큼은 여성들이 지켜왔던 것.
즉 삼신이라고 하는 마고와 궁희, 소희인 여성들.

절대신으로 모신 제사장은 바로 무당인 여성들
이것은 세계 어느 민족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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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국가제사 첫기록.
고조선 시대 단군과 7 선녀.

국가에서 선녀같은 기우제 미녀를 엄선.
기우제에 파견한 이조 제관은 종 3품 벼슬.
여사제는 전설 속의 선녀, 남자 제관은 선관.

'설악산 오색 옥녀폭포'에 얽힌 전설.

고대국가 국가제사 풍습에서 유래된 전설 같다.
신라 고려 때 국가제사를 주관한 여사제는 귀족.
이조시대 유교식 국가제사에 동원된 무당은 천민.

'가뭄 때 비를 기원하며 지내는 국가제사.'

지금은 관계 수리 시설의 발달로 사라진 가우제.
비에 의존하는 농경 사회에서 가뭄은 가장 큰 재앙.
기우제는 조정에서 마을에 이르기까지 가장 큰 행사.

삼국시대에는 명산대천이나 시조묘에서 기우제.
고려시대에는 불교식 법회 태일(太一)이나 초제.
그리고, 국가에서 무당을 모아 지낸 기우제 풍습.

이조시대에는 유교식 각종 주술을 동원된 기우제.
가뭄이 들면 왕을 비롯한 조정 대신들이 모두 근신.
왕은 천명을 잘못 받들었던 부덕함을 뉘우친다는 인식.

'왕은 전국적으로 죄를 사면하거나 감형.'

이조 초 용재총화 기록에는 국가 기우제 설명.
동제(洞祭) 기우제를 지낸 다음 주술방법 동원
정초 줄다리기는 줄을 용으로 인식한 기우 풍습

밤에 여러 마을이 함께 지낸 기우제의 장관
조정 또는 민간에서 북묘 용에게 지내는 용제
통나무에 짚을 감고 흙을 바른 용 형상을 제작.

용신이 거주한다고 믿는 못에 개의 생피 뿌리기
용이 비를 내려 그것을 씻어내리길 기대하는 용제
사립문에 금줄 치고 처마 끝에 물병 거꾸로 매달기.

폭포는 천상을 연결하는 사닥다리.
폭포는 옥황상제 침소와 연결된 통로.
옥황상제에게 음기를 받치는 기우 의식.

'생명의 단비'를 내려달라는 기우제.
선녀같은 여성들이 목욕재개하는 모습.
옥황상제를 감동시키기 위한 기우 행위.

'지성(至誠)이면 감천(感天)’기우제.

이조에서는 기우제를 지낼 때 무당을 동원.
여성의 음기로 '천신의 정기'인 비를 부른다.
목욕재개한 여인이 속옷 차림으로 천신을 유혹.

'천신의 정기가 대지를 적시길 바라는 염원.'

그 선녀같은 자태를 훔쳐보고 반한 나무꾼.
나무꾼에게 목욕하는 여인은 선녀 같았을 듯.
우리나라 명산마다 폭포에서 목욕하는 선녀 전설.

'기우제에서 비롯된 선녀의 전설 아닐까?'

요즘 예술인들이 누드모델을 동원한 파포먼스.
폭포는 행위 예술가와 사진 작가들의 활동 무대.
선녀들이 목욕하는 모습을 재현하는 행사가 인기.

'선녀탕 옥녀탕 밀금폭포와 같은 소와 폭포.'

우리나라의 폭포는 대부분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목욕하는 선녀들의 자태를 나무꾼이 훔쳐보는 전설.
또는 폭포와 소를 선녀의 아름다운 자태에 비유한 명칭.

속치마 여인의 자태와도 같은 무재치기 폭포.
여인의 신비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비추는 속옷.
우리나라에서 폭포는 옛날부터 여성의 음기를 상징.

폭포 = 천신을 유혹하는 듯한 여인의 자태.
비 = 모든 동식물의 젖줄이자 천신의 정기.
천신의 정기 =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는 근원.

폭포는 비온 다음에 물줄기가 철철 넘쳐흐른다.
비가 오랫동안 오지 않으면, 폭포는 말라 버린다.
폭포는 가뭄 때에는 폭포인줄 모를 만큼 볼품 없다.

'골이 깊고 숲이 무성할수록 아름다운 폭포.'

폭포는 비온 직후가 가장 아름답게 보인다.
사랑을 호소하듯 촉촉하게 젖는 여인의 자태.
하여, 폭포를 여인의 음기에 비유하는 것일까?

폭포는 그 은밀한 음기가 비를 불러온다는 믿음.
기우제 장소로 높은 산 북사면 계곡의 폭포 인근.
지리산에서는 한신계곡 가네소 폭포가 기우제 명소.

'일년 내내 물줄기가 철철 넘치는 폭포.'

속치마 여인들이 방망이를 두드리는 기우제.
젊은 여인의 유혹적인 자태일수록 영험한 효과.
목욕 재개후 알몸 속치마 무녀들이 천신을 유혹.

방망이로 바위를 두드려 목마른 애틋함을 호소
천신의 정기인 비가 쏟아지길 바라는 주술 행위.
비가 메마른 대지에 생명을 불어넣게 해달라는 바램.

'고대 국가마다 가뭄 때 올렸던 기우제 풍습.'

무지개는 폭포의 음기가 하늘로 올라간다는 믿음.
이와 같은 믿음은 중국과 아메리카 인디언의 공통점.
그러나, 이에 대한 해석은 서로 상당한 차이점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옛부터 무지개를 보고 홍수를 예상.
서쪽에 무지개가 서면 '소를 강가에 매지 말라.'는 속담.
즉, 서쪽 무지개는 동쪽에 태양이 있고 서쪽에 비를 뜻한다.

무지개는 짧은 시간에 빗방울이 굵은 소나기를 동반한다.
하여, 홍수가 일어나기 쉽고, 하천이 범람하는 것을 예고.
무지개는 종교에 따라 동서양 나라마다 다른 뜻을 품고있다.

노아의 홍수 같은 멸망은 다시 없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보증.
인디언, 아프리카 바이라족, 말레이반도 주민은 뱀으로 해석.
하늘나라의 거대한 뱀이나 용이 물을 마시러 온 것이라고 생각.

동남아시아는 무지개를 산신령이 다니는 사다리로 해석.
선녀(仙女)들이 무지개 타고 지상으로 오르내리는 통로.
무지개는 하늘나라 선녀가 목욕처로 오가는 천상의 다리.

동양에서는 흑백청홍황(黑白靑紅黃)의 오색이색채의 기본.
서양에서는 백은 선(밝음)이고, 흑은 악(어두움)으로 표현.
동양은 적(赤)과 청(靑)의 색채로 대립의 감정을 표현한다.

붉은 색은 남성, 경하(慶賀), 불, 피, 하늘, 열정을 뜻함.
물론 청색은 그 모든 붉은 색이 가지고 있는 의미의 반대.
우리나라에서 무지개가 뜨는 일대는 으례히 상서로운 장소.

선녀가 무지개 타고 지상에 내려오는 곳.
상서로움을 뜻하는 오색 영롱함이 있는 곳.
'나무꾼과 선녀'의 전설을 떠오르게 하는 곳.

천상의 다리 무지개가 걷히는 바람에 지상에 남은 선녀.
하늘로 올라가지 못하고 꽃으로 변했다는 전설의 꽃창포
베토벤이 사랑하는 연인에게 받친 꽃창포도 아이리스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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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무지개)는 신비로운 아름다움의 상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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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무지개)는 그리스 신화 속에서 여신 쥬노의 시녀.
사랑스럽고 예의바른 아이리스의 젊음과 미모에 반한 쥬피터
쥬피터는 아내인 여신 쥬노가 없을 때 아이리스에게 프로포즈.

아이리스가 거절할수록 애타게 사랑을 고백한 쥬피터.
쥬피터의 사랑을 받아들이자니 쥬노를 배반하게 되고,
그렇다고 쥬피터를 더 이상 애타게 할 수 없는 속마음.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아이리스는 쥬노에게 고민을 고백.

"쥬노님! 저는 주인을 배반할 수도 없고
쥬피터를 애타게 만들고 싶지도 않습니다.
저는 멀리 다른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마는..."

이 말을 듣고 여신 쥬노는 아이리스의 갸륵한 마음씨에 감탄
하늘을 날 수 있는 신통력과 아울러 무지개라는 목걸이를 선물.

"자! 우리를 위해 어디이건 네 마음대로 가다오.
나는 너에게 진심으로 고맙기에 너를 지켜주겠다."

하여, 무지개 목걸이를 달고 꽃으로 환생한 아이리스
꽃이 된 지 얼마 후 꽃들의 무도회에 참석한 아이리스
무도회장은 지상의 모든 꽃들에게는 아름다움의 경연장.

그들이 한창 아름다움을 뽐낼때 먹구름과 세찬 소낙비
모든 꽃들은 저마다 젖지 않도록 숨을 곳 찾아 난리법석
난장판 무도회장에서 아이리스 만이 무지개 빛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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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꽃의 여왕처럼 찬란하게 피어난 아이리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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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꽃향기처럼 다가와
밀려오는 안개처럼 눈앞을 가리고
여름날 소나기처럼 온 몸을 적시는 것.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하고,
나를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사랑한다.
때론 못 이룰 사랑 때문에 흐르는 눈물.

'가슴이 터질듯, 숨이 막힐듯..'

내가 누구인가를 간절히 사랑하고 있는 동안
또 다른 누구인가가 나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랑.
이루어질 수 없고 받아들여지지 않아 애타는 사랑.

타는 목마름을 애타게 호소하듯
온 몸이 촉촉하게 젖어드는 사랑.
그 은밀한 여성스러움과 같은 폭포.

'비에 젖은 여인의 아름다움' 같은 무재치기 폭포.
그 누구라도 그 유혹에서 헤어나기 어려운 아름다움.
목욕하는 선녀의 모습을 연상하게 하는 무재치기 폭포.

폭포에서 쏟아지는 물이 많은 날엔 더욱 아름답다.
마치, 영롱한 무지개 빛 폭포로 수줍음을 가린 모습.
폭포에 부딪친 물줄기마다 피어오르는 환상적인 물안개.

메마른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사랑의 빗줄기.
비에 젖어들듯 사랑 앞에 젖어드는 여인의 자태
그 은밀한 아름다움을 뽐내는듯한 무재치기 폭포

'어디로 가면 그곳을 찾아갈 수 있을까?'

지리산 동쪽 대원사 계곡 등산로는 두 갈래로 나뉜다.
대원사에서 무재치기폭포 치밭목산장 천왕봉 가는 코스.
대원사 상류 조개골은 치밭목산장을 오르는 이들이 이용.

치밭목까지 힘들이지 않고도 오를 수 있는 한적한 코스.
대원사를 한참 지나 더 도로 따라 올라가야 조개골 들머리.

천왕봉을 오르는 제일 동쪽 코스인 대원사 들머리는 늘 호젓.
산행 도중 불일폭포 다음으로 큰 무재치기 폭포를 볼 수 있고,
써리봉의 암릉을 체험할 수 있는 지리산에서 가장 투박한 코스.

대원사 입구 매표소와 대원사교를 지나면 왼쪽 사면에 대원사.
본격적 산행 코스는 대원사에서 약 1km 떨어진 유평리에서 출발
대원사 계곡 안쪽 3km 지점의 새재마을은 천왕봉 지름길 들머리.

우선 초입에 이정표가 있어 쉽게 찾을 수 있는 유평리.

등산로는 작은 첫 능선 하나를 넘는 것부터 시작된다.
능선 마루에 올라서면 천왕봉 위용이 눈앞에 펼쳐진다.
장당골 상류로 4.5km 더 가면 오른쪽 새재로 넘는 갈림길

'갈림길에서 15분 거리에 있는 무재치기 폭포.'

이 폭포에서 치밭목산장까지는 약 40분 도보거리.
'취나물 밭 길목'을 세 글자로 줄인 말., 치밭목
무재치기 폭포에서 중봉까지는 치밀한 암릉 등산로.

중봉에서 천왕봉까지 약 30~40분 도보거리.
유평리에서부터 천왕봉까지 약 6 시간 소요.

무재치기폭포는 대원사계곡 깊숙한 새재마을이 들머리.
조개골 산장식당 왼쪽 계곡을 가로지른 녹색 구름다리
다리를 건너 산자락 비슴듬히 작은 지류와 능선을 횡단.

급하지 않은 두 번째 고개를 넘어서면
유평리에서 올라온 등산로와 합류한다.

'대원사- 무재치기 폭포- 치밭목 산장' 코스.
산행거리만 따지면 유평리 들머리보다 가깝다.

무재치기 폭포는 써리봉에서 발원한 물줄기
무재치기폭포는 치밭목산장보다 아래에 있다.
해발 1000 m 암벽에서 떨어지는 40 m 3단 폭포.

1단은 세 갈래 물줄기가
2단은 8갈래로 흩어졌다가
3단에서 양갈래로 쏟아진다.

마치, 현악기 줄과도 같은 폭포의 여러 갈래 물줄기.
폭포에 움푹 패인 곳은 악기의 울림통 역활을 하는 듯.
폭포수 물줄기마다 바위에 부딪쳐 빚어내는 자연의 소리.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는 듯한 폭포수 소리.
여러 악기들이 합주 하는 듯한 신비한 하모니.
고혹적인 선녀가 속삭이듯 토해내는 천상의 소리.

인간의 지친 영혼을 애무하는듯 황홀한 음률.
속수무책 감정의 찌꺼기를 배설하게 하는 소리.
모진 산상 비바람에 버텨온 천년 고목의 맺힌 한.

'천년 고목에 선녀의 옷자락 같은 실.'

우륵이 폭포 소리를 듣고
나무에 실을 매달아 튕기며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곳이다.

우륵은 가락국이 신라에 합병 당할 무렵
신라에 망명한 궁중악사로서 알려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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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 년전 우륵이 가야금을 만들었다는 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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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 그는 어떤 인물일까?'

가야금의 명인으로 6세기 신라 진흥왕 때 악사.
가실왕이 당나라 악기를 보고 가야금을 만든 후,
그에게 12곡을 짓게 했는데 가야국이 어지러웠다.

이때 우륵은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 진흥왕에게 투항.
진흥왕은 우륵을 국원(지금의 충주)에 거처하게 하고
대나마, 법지 계고와 대사 만덕을 보내 전수하게 했다.

세 사람은 11곡을 전수받고 서로 말하길

"이것은 번다(繁多)하고 음란하여,
우아하고 바른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우륵은 처음에는 화를 내다가,
탄식한 후 12곡을 5곡으로 요약.

"이젠 즐겁고 방탕하지도 않으며,
애절하면서도 음률이 슬프지 않으니
바르다 할만 하다. 왕 앞에서 연주하라."


...............진흥왕.................
신라 제24대 왕(540~576 재위).
신라 영토를 최대로 확장한 왕.
불교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왕.

대대적인 정복을 통해 신라영토를 최대 확장
불교를 적극 지원했고 이름은 삼맥종 심맥부.

아버지는 법흥왕 동생 입종갈문왕(立宗葛文王),
어머니는 법흥왕 딸 김씨. 왕비는 박씨 사도부인

7세 때 즉위하여 어머니 법흥왕비가 섭정했다.
551년(진흥왕 12) 건원 연호를 고쳐 개국(開國)
이때부터 진흥왕의 친정(親政)이 시작되었을 듯.

553년 월성 동쪽에 새 궁궐을 짓다가 황룡이 나타나자
계획을 바꾸어 절을 짓게 하고 황룡사(皇龍寺)라 명명.
568년 대창(大昌), 572년 홍제(鴻濟)로 연호를 바꿨다.

진흥왕은 두 아들 이름을 각각 동륜(銅輪) 사륜(舍輪)
만년에 머리 깎고 승복을 입었으며 스스로 법운(法雲)
불교에 귀의해 남은 여생 동안 불교 중흥에 힘을 썼다.

한편 삼국사기에 의하면 576년 원화 화랑 제도를 창설
576년 8월에 죽자 진흥이라 하고, 애공사 북봉에 장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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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륜 왕자는 훗날 법흥왕이고 선덕여왕의 아버지.
'사륜의 딸' 승만공주는 선덕여왕 사후 진덕여왕.

법흥왕의 첫째 부인 이름은 마야부인
선덕여왕, 진덕여왕은 미륵보살의 화신.
신라에서 미륵보살 신앙을 일으킨 주역들.

'그무렵 신라에서 성행한 비로자니불.'

두루 비치는 부처의 몸빛을 뜻하는 비로자니불.
비로(毘盧)자나불은 불교에서 법신불을 뜻한다.
'비로(毘盧)전'은 비로자니불을 모신 법당이다.

'비로봉은 그 산의 가장 높은 봉우리.'

무재치기 폭포는 비로자니불 몸빛의 상징.
선덕여왕을 법신불로서 상징하는 폭포인듯.
선덕여왕은 공주일 때 화랑을 이끌었던 원화.

..................법신불...................
법신불(法身佛)은 청정법신 비로자나불
법신이란, 말 그대로 진리(法)의 몸(身)
진리를 인격화해 모시는 것이 비로자니불.

부처는 빛처럼 청정무구 자체이므로
청정법신 비로자나불’이라고도 한다.

오고 감이 없고 나고 죽음이 없으며,
중생과 함께 하는 영원한 존재란 믿음

몸은 번식의 주체이자 쾌락과 일탈의 주축.
몸은 변화의 주체이고 변화는 배움의 시작.
몸은 욕망의 사다리이면서도 수행자의 실체.

불자들은 늘 연화장 세계에 살기를 꿈꾼다.
세상 밑바닥에 풍륜이 있고 그 위에 향수해
그 바다 속 한송이 연꽃 속이., 연화장 세계

비로자나불은 연화장 세계에서 상징적인 중심.
비로자나불은 연화장 세계의 교주로 받들어진다.
따라서 비로자나불은 우주 전체를 총괄하는 부처

화엄의 교주 비로자나불을 극진히 섬겼던 신라
해인사, 부석사, 범어사를 비롯한 화엄 사찰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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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
.........


로키산맥 해발 3천미터 수목 한계선 지대.
모진 눈보라와 비바람에 뒤틀린 천년 고목
곧게 자라지 못해 다소곳 무릎꿇고 앉은 자태.

열악한 자연환경 속에서 생존을 위한 몸부림.
생존을 위해 오랜세월 견디어낸 인내심의 한계.
가장 공명이 잘 되는 세계적인 명품 바이올린 원료.

'아름다운 영혼의 소리를 빚어내는듯 절묘한 선율.'

온갖 역경과 아픔을 담고있는 황홀한 바이올린 음률.
가야금과 거문고의 공명통 재료 석상오동(石上梧桐)'
그 중에서도 산중의 폭포바위 위에서 자란 것이 으뜸.

가야금은 가야국 국호에서 유래된 악기 이름.
가락국은 가야(연방)국이라고도 하는 고대국가.
지리산은 삼국시대 이전에 가락국의 영역이었다.

'가야금은 가락국의 궁중에서 사용한 악기.'

가야금은 6세기에 당나라의 악기 쟁을 보고 만든 악기.
가락국에서 신라로 망명한 악사 우륵이 12곡 작곡했다.
가야금은 삼한(三韓)시대 민족악기가 가실왕 때 더 발전.

가실왕은 가야 연맹국 중 어느 나라 왕인지 확실하지 않다.
그러나, 신라 진흥왕(540~576 재위)과 비슷한 때의 왕인 듯.
악사 우륵에게 가야금을 만들게 했고 12곡을 작곡하게 했다.

이때 우륵이 지은 12곡은 하가라도 상가라도 보기 달이
사물 물혜 하기물 사자기 거열 사팔혜 이사 상기물 12곡.

그 후 가야가 망하자 우륵은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로 투항
진흥왕은 그를 국원(國原;지금의 충주)에 두고 3명의 제자.
계고 ·법지 ·만덕' 우륵의 제자들이 가야의 음악을 계승한다.

가야금은 오동나무로 만든 공명판 위에 명주실로 꼰 12 줄 악기.
줄마다 기러기 발을 세워 버텼고, 법금가야금과 산조가야금 2 가지.

법금가야금은 아악 또는 전통적 정악에 사용.
산조가야금은 민속악, 산조에서 사용되었다.
19세기 말 빠른 산조음악과 함께 널리 보급.
음색이 맑고 우아하여 아악과 민속악에 사용.

음악은 인간에게 말의 뿌리이고 의사소통의 도구.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고 동물을 흉내낸 소리가 말.
인간의 외침이 말이 되고 글로 변하고 음악이 된 듯.

우리나라의 전통 음악에는 민족 혼이 담겨있다.
가야금은 한국 고유의 현악기의 하나.. '가얏고.'
가늘고 섬세한 선률이 여성적인 느낌을 주는 악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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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加耶).
.............


기원 전후 시기로부터 6세기 중반까지
경상도 서부지역 세력집단 국가들 총칭.

한때 가야사는 4세기 후반 무렵부터 6세기 중엽까지
일본 야마토 정권의 식민 지배지로 왜곡되기도 했다.
그러나 고고학 발굴성과에 따라 이러한 억설을 극복.

가야사는 5세기 후반을 경계로 전기와 후기.

전기는 김해지역 구야국(狗邪國)을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
후기는 고령지역 대가야국을 중심으로 한 가야연맹을 의미.
기원 전후 철기문화 보급으로 경상도 해안지역 정치세력 통합.

이들 소국들은 동일한 문화적 기반을 토대로
3세기경에 이르러 상호연맹관계를 형성했다.
이 무렵부터 이들은 변한(弁韓)으로 불렸다.

전기 가야연맹의 맹주국은 수로왕

김해지역 9간을 통합해 건설한 구야국.
그러나 백제국 중심으로 통합된 백제
사로국을 중심으로 통합되어 간 신라

전기 가야연맹의 분포 범위는 김해 중심으로
낙동강 하구 및 경남 해안 일대 소국들에 국한
내륙지역에는 아직 가야문화가 보급되지 않았다.

이들 지역은 해상교통의 요지 위치이며
풍부한 철산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낙랑과 왜를 잇는 해상교역 중개지로 발달.

따라서 이 지역의 교역거점들은 일찍부터
중국의 선진문물이 밀려들어와서 소국 단위
수준높은 문화를 이루고, 각기 독자적인 교역권.

따라서 가야는 신라 백제 이웃 국가들이 주목하는 대상
내부적으로는 가야 소국들이 각기 강력한 독자세력 형성

고성·사천·마산·동래 등 경상남도 해안 일대에서
김해에 못지않은 유적과 유물들이 발굴되고 있는 것
전기 가야연맹은 이웃 신라·백제 등의 도전에 직면

하여 재빨리 대처하는 민첩성을 발휘하지 못하는 취약성
4세기 교역상대국 후원세력 역할을 담당했던 낙랑과 대방
고구려와 백제에 의해 축출되면서 주변의 세력판도가 일변

고구려는 경쟁국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신라를 적극 후원
신라는 고구려를 통해 북중국 문물을 도입해 왜까지 영향력.
신라가 정치 중심으로 부상하며 그 중심지인 가야지역을 잠식.

백제는 왜와 연합해 가야지역에 친백제세력을 만들어갔다.
이로 인해 가야연맹은 친 신라세력과 친 백제세력으로 양분
김해지역은 가야 중심지역이라 친신라를 표방하였고,
탁순국(지금의 창원)을 중심으로 한 가야 서부세력

5세기초 고구려 광개토왕이 가야지역 백제계 세력에 대한 정토
가야 세력들은 고구려의 후원을 받는 신라에 정치적으로 예속
5세기 이후 가야 구심점은 낙동강 서안 경상도 내륙지역으로 이전.

상대적으로 후진적이던 내륙지역은 전화(戰禍)를 거의 입지 않았고,
해안지역 선진세력들이 이주해 철산지를 개발하면서 각광을 받기 시작.

특히 고령 반파국(伴跛國)은 집권적 정치세력이 대두하여
가야 지역의 새 맹주국으로 부상했고 일명.<대가야 연맹>.

후기 가야연맹은 반파국 중심으로 통합력을 발휘하였다.
이를 발판으로 5세기 후반 중국 남조의 제(齊)에 사신 파견
가야연맹은 삼국관계에 강력한 정치적 변수로 작용하게 되었다.

백제·신라와 함께 고구려의 남진을 저지,
백제·왜와 더불어 신라에 대항하기도 했다.

6세기초 백제와의 국경지역인 기문(임실)지역을 둘러싸고
백제와 일전을 치르기도 했지만 기문 전투에서 패배하여
왜와 교역중심지 대사(하동)지역마저 백제에게 빼앗겨
대왜교역권을 상실하게 되면서 급격히 쇠약해져갔다.

그후 요충지에 성을 쌓고 신라와 제휴하여
가야연맹을 유지하려는 마지막 노력을 시도.
전기 가야연맹 소국들이 잇따라 신라에 복속

562년(진흥왕 23) 신라 장수 이사부 사다함
(斯多含)에 의한 대가야 정벌로 소멸하였다.




장당골.



무재치기 폭포는 판소리 가락처럼 흘러 장당골로 간다.
여인의 손끝에서 튕겨지는 아스라한 가야금의 선율처럼.
우리나라 근대사의 뼈아픈 민족 애환이 서려있는 장당골.

'동부능선 일대는 삼국시대부터의 전략적 요충지.'

중봉 - 하봉 - 국골 사거리 - 새재 - 외고개
- 왕등재 습지 - 도토리봉 - 밤머리재 - 왕재.
- 웅석봉 - 경호강(지리산 태극종주 동부능선 일대)

'가야국 마지막왕의 마지막 항전처'

장당골은 통일신라 시대 화랑들의 심신수련장.
하여, 옛부터 무관이 많이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장당골 지명에 관해서는 다양한 유래가 전해져온다.

동부능선 일대는 삼국시대부터 치열한 격전지.
원래, 당골은 성황당, 산신당, 칠성당, 기우제당,
도당, 별신당 등이 많이 남아있는 곳을 일컫는다.

.................당골.......................
호남지역에서 단골판을 매개로 하여
맺어진 세습무(世襲巫)와 신도집단.

단골은 호남지방에서 무당을 일컫는 말.
세습무는 일정 지역의 무속의식을 전담
단골무당은 늘 정해두고 거래하는 무당.

단골·당골네·단골에미라고도 한다.

당골이란 우랄알타이어계의 천신(天神)을 의미
'tengri'가 단군·당굴 등으로 변화하면서 정착
세습무로서의 당골은 혈통에 의한 사제권의 세습,

사제권에 의한 단골판의 계승,
강신체험이 없어 영력이 없다.

신관(神觀)이 확립되어 있지 않은 점,
집에 신단(神壇)을 설치하지 않는 점,
신을 향한 가무로 굿을 주재하는 특징

대개 부부가 함께 굿을 하는데,
남편은 주로 악기를 연주하며
굿의 실제적인 주관자는 부인.

당골은 자기가 맡은 지역 내에서만 굿을 할 수 있으며,
이 단골판의 권리는 사고 팔거나 세를 놓을 수도 있다.

신도집단의 상담역할도 하며,
길흉과 관련하여 점을 치거나
굿을 하는 사제기능을 담당했다.

이들은 특히 호남지역에서
각종 민속예술을 창조하고
전승시키는 중역이기도 했다.
...........................................

................단골판.......................
당골(단골) 또는 당골네(단골네)라는 다양한 명칭
호남지역에서 세습무인 무녀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전통사회에서 이들은 극심한 차별을 받아 왔다.
비록 신분제도가 엄격한 봉건시대의 일이었지만
마을 주민들은 그들에게 경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무녀들은 그들이 의례를 제공하고
마을에서 받는 보수를 '하시 값'이라 한다.

그들은 또한 일반인들과 혼인할 수도 없고,
다른 직업으로 바꿀 선택의 자유도 없었다.
이런 전통적인 차별의식은 아직도 남아있다.

따라서, 신분제 사회가 오래 전에 철폐되고
무속에 대한 인식이 바뀌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대도시로 이사해 신분을 감추고 산다.

당골네는 원칙적으로 모계 전승이다.
어머니와 딸, 또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단골판은 마을과 당골, 개인과 당골간 제도화된 조직
단골판은 수개 마을과 일정한 종교적 독점관계에 있다
즉, 당골판(단골판)은 당골의 사회적 관할구역을 말한다.

무당은 의례를 주재하며 종교적 행사를 행하고,
마을 사람들은 당골 무당의 경제적 후원자이다.

당골은 마을차원이나 주민들이 부양할 의무가 있다.
당골은 당산굿을 주제하고, 정초에 안택굿을 해야 하며,
결혼, 출산, 사망, 질병, 재액에 관련된 의례를 해야 한다.

반면에 신도는 당골의 생계를 책임지는 차원에서
봄철에는 보리 한 말, 가을철에는 나락 한 말, 또는
목화나 삼농사를 지을 경우에도 수확의 일정 양을 제공.

'이러한 종교적·경제적 관계망 = <단골판>.'

단골판은 독점적 권한을 행사하는 불가침 지역이기에
대대로 세습되거나 공식 거래를 통해서 소유권이 매매.

예컨대 당골이 이사를 하거나 무업을 그만 둘 경우,
그 단골판을 팔고 소유권을 넘겨 주는 것이 관례이다.

이때 댓가 지불 방식은 현물로 하는 것이 보통이지만,
때로는 경작 관행에서 '도조'라는 방식처럼 지불한다.
매년 봄철이나 가을철에 약속된 댓가를 지불하는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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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
단골은 가무를 하면서 제를 주관하는 곳
일정 보수를 받고 풍어제 기우제를 주관

산업사회가 되면서 단골 무당은 사라지고
말만 남아 단골 손님으로 그 뜻이 변한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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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골손님 = 늘 정해 두고 거래를 하는 손님.
오늘날 흔히 통용되는 단골은 단골판에서 유래.
장당골은 무속인들이 많았던 '무당골'로 추정된다.

무당골은 전국 어느 곳을 가도 흔한 굿 음식.
제법 먹음직한 돼지머리를 비롯해 떡 과일 등.
하여, 숨어사는 은둔자에게 귀중한 식량 공급원.

................무당골.....................
구한 말 출세할 수 있는 길은 세 길이 있었다.
민씨, 외세에 붙거나 무당에게 붙어야만 했다.
명성황후가 무당을 신뢰해 무당이 기승을 부렸고
무당 인맥은 상류사회를 아는데 좋은 지표가 되었다.

어느날 대원군 심복치 청나라 보정부에 인질 잡혀가자
대궐 기도를 맡은 장님 이당주 기도 내막을 살피라 명.
한석진은 덕수궁 석조전 뒤편에 있는 이당주 집에 잠복.

이당주가 젊은 첩을 데리고 대청에 들어가는데
음식을 차린 신탁 정면에 영정 하나가 걸려있고
그 아래 '대원군 이하응'이라 씌어있는 것을 발견.

이당주가 경쇠를 흔들며 저자를 아비지옥으로
가두어 주소서 하는 내용의 축사를 49번 외우고
첩이 벽에 걸린 활을 꺼내 영정을 향해 49번 쏘았다.

대원군에게 사실을 고하고 이당주를 잡아들이니
대원군은 그를 사랑에 들여 정중히 모시게 하고
밥상도 함께 하며 사나흘 융숭하게 대접해 보냈다.

그간 불안했던 사람은 저주기도를 시킨 명성황후.

바로 이당주를 불러들여 자초지종을 물으니
대원군에게 융숭히 대접받고 나왔다고만 하자
대원군에게 매수당해 고자질한 것으로 오해하고
이당주를 쥐도 새도 모르게 처치해버린 명성왕후

그렇게 될 것을 가늠한 대원군의 노련한 술책.

이처럼 명성왕후는 무당의 점술이나 주술을 신뢰
임오군란 피난 때 충주의 과부 점장이를 데려왔다.

언제 난리가 멎고 궁에 언제 돌아갈 수 있냐고 묻자
과부 점장이 박소사는 창밖 먼 산을 손가락질 하면서

"이 산 이름이 국망봉이요, 방위도 서북쪽에 있어
망일(15일)에 서북방으로 환궁할 수 있나이다" 예언.

공교롭게 그 보름날 대원군은 청나라로 납치 당하고
왕은 청나라 용병 100명의 호위를 받고 8월 1일 환궁
명성황후가 무엇보다 놀란 것은 박소사의 예언이었다.

명성황후는 박소사를 자신을 보호하는 수호신이요
신령이라 믿었기에 박소사는 명성황후를 따라 환궁.
명륜동 관우를 모시는 북관묘에 박소사를 데려다놓고
신령군 군호를 내렸고 창덕궁과 통하는 새길을 만들었다.

하여, 박소사는 황후의 대소사를 좌우하기에 이르렀다.
고종과 왕세자마저 이 북묘에 행차하여 행례를 했으니
권세의 길은 북관묘 박소사로 크게 트일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고종의 아관파천을 주도한 대신 이범진
아버지가 천주교 박해를 담당했던 포도대장이요
대원군 심복이라 명성황후 세도하에 출세는 불가능

그러나, 신령군에게 접근, 무당 추천으로 출세의 길.

이렇게 뿌리내린 무당 인맥은 국운을 기울게 했다.
조정에 기생하는 북묘 인맥을 배경으로 날뛴 진령군,

경운궁 창덕궁을 자주 내왕한다는 이궁 여대감,
신당 이름을 옥황당이라 하였기에 일명 옥황부인
평양 할미(평양파), 코가 컸던지 코보, 서강 할미
구한말 나라를 망치는 8 무당을 '팔망'이라 불렀다.

'지금도 전국의 명산마다 자리잡은.,무당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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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골의 공통점은 옛 사찰터가 많았던 골짜기.
미인의 유방 또는 향로 형태의 봉우리가 있는 곳.
예를 들면 북한산 수리봉 독박골 옆 골짜기가 무당골.

여인의 탐스러운 젖가슴처럼 눈부시게 고운 수리봉.
그곳으로부터 흘러내리듯 뻗어내린 골짜기가 무당골.
그 옆 독박골은 '이괄의 난' 당시 은밀한 반란군 훈련처.

'전국의 무당골 및 당골 대부분은 전란 격전지.'

장승이 서 있던 곳, 돌을 던지며 기원하던 적석(積石),
혹은 부군당이나 국사당, 마을 동제를 치루는 곳도 당골.
장당골은 우리나라 당골 중 우두머리 당골이란 주장도 있다.

통일 신라시대 불교가 성행했던 장당골 일대.
이조시대 불교 탄압 영향으로 폐쇄된 사찰들.
그후 잦은 전란에 휘말려 남은 사찰마저 소실.

토벌군이 빨치산 근거지를 없애려 작전상 소개.
대원사 벽송사를 소개할 때 함께 소실된듯 싶다.
하여, 안타깝게도 옛 절터 지명들만 전해져올 뿐.

장당골은 신석기시대부터 민간신앙이 성행했던 곳.
유교, 불교, 도교가 합쳐진 '유불선' 사상의 진원지.
민간신앙과 무속과 불교가 합쳐진 미륵사상의 진원지.

'1950년대 '반란의 역사'로 피비린내 나던 격전지.'

대원사계곡에서 몇겹 산허리 돌아 내원사가 있는 장당골.
장당골은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여인과 이홍이의 은닉처.
1948년부터 1963년까지 무려 15년 간이나 산속에서 생활.

1952년 대성골 전투에서 무너졌던 지리산 빨치산 주력부대.
1953년에는 거의 투항하거나 민가로 숨어 들어갔다가 검거.
그 이후 10년을 더 산속에서 살아 마지막 빨치산이라 한다.

함양군 마천면 삼정리 하정계곡 = 인민재판 즉결처형장
삼장면 유평리 = 경남도당 야전병원 암굴아지트 방앗간
하동군 화개면 대성리 =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 사살된 곳.

경남은 빨치산과 토벌대 루트를 관광지로 개발할 계획.
산청군 함양군 하동군에서 20 여곳 빨치산 관련 유적지.
기존 6개 노선 등산로를 연결한 34km의 빨치산 관광 루트.

함양군 마천면 군자리 한 솔밭 아래 40여기 무덤들.

빨치산들이 양민들에게 구덩이를 파게 한뒤 집단 학살
연고자가 안 나타나 마을사람들이 봉분을 만들어 수습
군자리 아래 삼정리 하정계곡 = 인민재판 즉결 처형장.

"계곡마다 송장들 썩는 냄새 때문에 코가 아팠다"

일부에서는 빨치산을 영웅화 할 우려가 있다고 지적.
베트남이 베트콩 게릴라 본거지를 관광명소로서 개발
관광객 유치에 성공하자 경남 당국이 이 사업을 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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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장면 대포리 장당골은 불교용어 장등(長燈)에서 유래 설.
'밤새도록 부처 앞에 등불을 켜 둔 골짜기'라는 뜻의 이름.
배의 돛대 꼭대기에 달아 앞을 비추는 항해등도 장등(檣燈)

밤바다를 항해하는 배에게 별빛은 커다란 위안.
칠흙 같은 밤바다에서 방향을 알려주는 별 하나.
그것마저 없다면 밤바다는 지옥같은 암흑의 세계.

'별빛마저 없는 밤바다에서 길잡이는 항해등.'

언제 어느 곳에서 암초가 나타날지 모르는 두려움.
배가 어느 방향으로 항해하고 있는지 모르는 두려움
자신의 존재를 알려주는 유일한 신호등이 바로 항해등.

'망망대해에서 오직 신의 가호가 있기만 빌뿐..'

항해등은 칠흙같은 망망대해에서.. 유일한 빛.
옛날부터 뱃사람들에게 등불은 꿈과 희망의 상징.
등불은 저지대민족으로부터 비롯된 민간신앙 흔적.

장당골은 밤새 등불 행렬이 줄 잇던 곳.
1950년대 빨치산 토벌과정에서 전부 소각.
지금은 폐사지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진 곳.

매년 초파일 무렵 10 여 암자가 등불 밝히던 곳.
하여, 산등성이로 등불이 길게 줄을 이어., 장당골
그러나, 지금은 초파일 무렵에도 등불 하나 볼 수 없다.

각 사찰에서 법당에 밝히는 등불이.. 인등 자명등.
사찰 도량과 불교 신도 가정에서도 등불을 밝힌다.

'사찰 등불은 어디에서 유래된걸까?'

사찰의 등불은 최초의 비구니와 관련 깊다.
최초의 비구니 난타에 관해 알아보기로 하자.

..................비구니 난타....................
'설일체 유부경전'에 의하면 기원정사 법회에서 유래.
아사세 왕이 부처님께 법문을 들을때 동참한 불제자들
기름 등불을 켜 법회 자리를 밝힌데서부터 유래되었다.

이때 난타라는 가난한 여인이 자신의 머리카락을 짤라
그것을 팔아 기름 한 되를 구해 등불을 밝혔다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기름 등불 공양을 올리는 것을 보고,
스스로도 복을 쌓고 싶었으나 가진것이 없었던 때문.
아침이 되어 모든 불은 꺼졌으나 그녀 불만 타올랐다.

'지극한 성심으로 밝혔기에 꺼지지 않는 등불.'

그후 난타는 출가하여 계를 받고 비구니가 되었다.
이때부터 부처님 전에 지극 정성으로 등불을 켜면
공독을 입을 수 있다 하여 밤새도록 사찰마다 등불.

'불교에서 비구니의 유래가 된 여인.. 난타.'
..............................................................

장당골은 불교문화에서 유래된 지명.
원래, 비구니와 관련 깊은 지명 같다.
앞으로 풀어야 할., 베일 속 수수께끼.

장당골은 지리산 야생동물들의 낙원.
장당골에는 '경상대 연습림'이 있다.
피서철 장당골 개울가는 은밀한 휴식처.

개울을 거슬러 올라갈수록 비경의 연속.

하늘나라 선녀가 내려와 목욕할만한 소.
혹시, 선녀를 엿볼 수 있을까 마음 설렌다.
그래서인지 선남 선녀 연인간 은밀히 찾는 곳.

무재치기 폭포 - 장당골 - 내원골 합류 - 대포리
무재치기 폭포는 장당골을 거쳐 덕천강으로 유입.

장당골로 들어가는 가장 알려진 등산로는 3군데 정도.
무재치기 폭포 넘어 헬기장 등산로 또는 황금능선 소로
요즘은 출입통제된 내원사 매표소 들머리 등산로가 있다.

장당골은 내원사에서 시작되어 무재치기폭포에서 끝난다.
장당골 가는 길은 찾아 헤멜 필요가 없을 만큼 찾기 쉽다.
내원골과 장당골이 만나는 지점 언덕에 내원사가 있기 때문.

내원사에서 장당보호소까지 10km는 호젓한 산책로

장당골 특유의 깨끗하고 푸른 계곡물을 만날 수 있다.
큰 폭포, 산중호수 같은 소. 오밀조밀한 계곡의 풍치.
사계절마다 색다른 자연미를 보여주는 절경을 자랑한다.

장당골 진주 경상대학교의 연습림은 지리산의 자연공원.
대자연의 경이로운 세계를 한 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곳.
하늘을 찌르는 잣나무 숲은 일제 때 조림한 규퓨대 연습림.

'1945. 8.15 광복과 함께 경상대에서 인수받은 연습림.'

.................장당골 가는 길.................
덕산에서 대원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대포마을
대포마을에서 계곡을 거슬러 가다보면 내원사 앞
왼쪽은 내원골, 오른쪽이 바로 장당골에 해당된다.

장당골은 바깥장당과 안장당

무재치기폭포로 이어지는 지류
써리봉과 남단부에서 발원한 지류
써리봉∼국사봉을 잇는 황금능선 지류.

경상대 연습림 장당보호소 주변에서 모여
내원사 앞 내원골과 합류해 대포마을로 간다.

경상대 연습림은 널은 산판도로와 8차례나 교차.
등산로라기 보다 산책로 정도로 평가되고 있으나
상류는 울창한 수림이 뒤엉켜 원시림이 가득한 곳.

대포마을에서 내원사까지는 차량 이용이 가능
내원사에서 경상대 연습림 장당보호소까지 도로
장당골의 경상대 연습림 전체 면적은 4천5백37ha

옛 화전민 가옥과 화전민 삶터가 있는 곳.

장당골에는 6.25 이전까지 50여 가구의 화전민 마을.
빨치산 근거지로 이용되며 주민들은 뿔뿔이 흩어졌다
1960년 대 다시 장당골에 들어왔던 화전민 옛 주민들

통나무집을 짓고 가축을 기르며
바깥 세상과 동떨어진 생활을 영위

1964년 화전 민가전 방화사건과
1967년 국립공원 지정후 모두 이전.
자연학습원이 복원한 두류옥(귀틀집)

사실은 장당골 화전민들 폐가인 통나무집
굵기가 비슷한 통나무를 일정한 길이로 잘라
네 귀퉁이를 연결해 쌓아올린 뒤 흙을 발랐다.

지붕은 원래는 갈대나 산죽 등을 엮어 이용
남아있는 이들 집엔 양철지붕이 씌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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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사봉 가는길인 내원골은 정순덕 여인의 활동 근거지
빨치산 활동 루트를 중심으로 관광지가 조성된 곳이다.
마지막 남부군, 남장 여인으로 유명했던 그녀가 잡힌 곳.

1963년 12월11일 새벽 1시.
그녀가 태어난 내원골 민가.

그곳에 보름간 잠복한 경찰에 의해 이홍이는 현장 사살
정순덕 여인은 오른쪽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서 붙잡혔다.

황금능선을 가운데 두고서 내원골과 장당골이 감싼 산세.
따라서, 내원골과 장당골의 합수지점은 전략적인 요충지.
황금능선은 빨치산의 도주로 및 은신처이자 활동무대였다.

산죽밭 무성한 곳마다 도사리고 있는 빨치산 비트.
남부군 무덤으로 추정되는 주인없는 6~7 기 무덤들.
장당골 빨치산을 숨겨주었음직한 산죽밭과 실개울들

'남부군 소탕할 목적으로 사용했음직한 폐 헬기장.'

천왕봉에서 동남쪽 방향으로 길게 뻗어내린 황금능선.
푸른 초원이 가을 황금빛에 물들면 능선은 꿈틀대는 황룡
써리봉 동남쪽 국사봉 거쳐 구곡산까지 약 20km의 긴 능선.

학술조사 등 특별한 목적이 있는 경우에 출입이 허용되며
그것도 관리사무소의 입산허가를 받아야 산행이 가능하다.
황금능선은 등산객들이 거의 이용하지 않아 울창한 원시림

왼쪽으로 있는 안장당골과 오른쪽으로 있는 순두류계곡 사이
산행 중 돌아보면 저토록 험한 곳을 지나왔을까 할 정도 산세.
안장당골이나 안내월에서 보면 지례 겁먹고 중도에서 포기한다.

장당골은 지리산의 광대함과 비극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깊은 골 안에 거미줄 같은 미로 투성이라 피난과 비극의 현장.
1862년 농민항쟁과 동학혁명에 실패한 사람들의 화전민 마을터.

이조의 봉건적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한 18세기
농업, 산업, 수공업, 신분제도 등등에서도 변화
실학(實學)과 함께 새로운 평민 의식이 일어난다.

그 단적인 예가 1811년(순조 11) '홍경래의 난.'
그 후 1862년(철종 13) 진주(晉州)의 농민 봉기
삼남 각 지방에서의 농민 반란은 전국으로 번진다.

농민 혁명의 이념적 바탕이 된 최제우의 동학
유(儒),불(佛),선(仙)의 교리를 토대로 인내천

'인내천(人乃天) = 천심즉인심(天心則人心)’

새로운 세계는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 있음을 갈파
당시 재야에 있던 몰락 양반계급과 백성들이 가세.
불길처럼 퍼져나가 커다란 종교세력을 이루게 된다.

조정에서는 최제우를 체포, 1864년 사형에 처하였다.
그러자, 동학교도들이 뭉쳐 동학 농민혁명을 일으킨다.
그 동학군을 영도한 인물로 전봉준(全琫準)이 등장한다.

동학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뿔뿔이 흩어진 농민들.
장당골은 그들이 그들만의 이상향을 꿈꾼 화전 터.

일제시대에는 의병들의 은신처,
6·25전쟁때는 빨치산의 본거지.

하여, 장당골로 깊숙이 들어가면 길 찾기가 쉽지 않다.
중산리-자연학습원-황금능선-장당골 -무재치기폭포-대원사
황금능선에서 장당골로 가려다 보면 지독스러운 산죽길이다.

좌측으로 내려가면 장당골이고 능선 따라 내려가면 내원사
산죽사이로 내려와 좌측 장당골 하산로, 우측 지리산신제단.
장당골은 남향에 가까워 이른봄에는 야생화를 관찰하기 좋다.

장당골은 지형도와 등산안내도에 대부분 '한판골'이라고 표기.
써래봉 위에 서면 황금능선이 굽어보이고 그 아래 숨은 장당골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내원골과 장당골은 그 길이 만 합쳐 100 리.

내원사 입구에는 약 20년 전통의 민박집들.

텐트 30 동 정도 칠 수 있는 규모의 야영장도 있다.
그곳 음식점에는 산나물, 도토리묵, 조껍데기 동동주,
닭도리탕, 백숙, 정식, 국수, 파전 등을 맛볼 수 있다.

민박집 앞마당이 내원골 계곡이고 뒤꼍은 장단골 계곡.
잠자리에 들면 정겨운 밤하늘의 별들이 친구가 되는 곳.
피서객들이 제법 많이 찾아드는 계곡임을 알게 해준다.

'여기에서 영계백숙에 조껍대기 술 한잔.'

조껍데기술은 더위를 씻어주는 좁쌀 막걸리.
영계백숙 보드라운 속살 맛은 여름철의 별미.
수박 한조각 곁들이면 더할 수 없는 신선놀음.

이조시대 이곳을 찾았을 풍류 문인과 기생들.
무더위 피해 이곳에서 질퍽하게 어울렸을 듯.
그 풍경 머리에 떠올리면 마음 심란해지는 곳.

'잠 못 이루는 이에게 밤은 길고,
피곤한 나그네에게는 지척도 천리.

바른 진리를 깨닫지 못한 이에게
어둠 속 윤회의 길은 멀고 멀어라.'

- 법구경 제 60 -


황금능선(구곡산) 국사봉을 올라 천왕봉 조망.
신라의 천년 고찰 내원사에 들러 마음 다스리기.
내원골 빨치산 관광 코스를 둘러보는 것도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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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당골은 관리공단에서 출입통제하는 휴식년제 구간
하여, 장당골의 산행계획은 세우지 않는 것이 바람직.
하여, 장당골이 어떤 곳인지는 이 글을 통해 알아보자.

'장당골'은 적막감 마저 감도는 지리산 동부의 숨은 계곡.
써리봉 남쪽에서 산청군 삼장면 대포리 덕천강까지 20km.
가야금 소리 같은 무재치기폭포 물소리.. 길게 이어지는 골.

기나긴 여정 길과도 같은.. 장당골.
마치 골짜기 속에 숨은 골짜기 같다.
장당골은 지리산 관리공단이 출입통제

자연보호를 위한, 휴식년제 구간., 장당골
덕산에서 내원사 가는 길목.,대포마을 계곡.
장당골과 내원골이 합류하는 곳에 있는.,내원사.

대한불교 조계종 제12교구 본사인 해인사의 말사.
대원사 입구에서 덕천강 따라 5km 남쪽, 내원사 입구.
대포 초교에서 대포리 숲과 매표소 지나., 약 3km 거리.

내원사 앞 반야교를 건너면 곧바로 사찰 내.
대웅전 앞마당 단풍나무 가지를 흔드는 바람
계곡의 우람한 바위들을 돌아 흐르는 물소리.

사대부 한옥의 후원과도 같은 사찰 분위기.
태평양 고기압골 폭우가 훓고간 수마 흔적.
더 높고 견고하게 새 반야교 건설(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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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사 비로전에 봉안된 비로자나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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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자니불은 지혜가 뛰어난 지리산 산신 문수보살.
문수사리(文殊舍利)에서 문수는 묘(妙)하다는 뜻이고
사리는 으뜸, 덕, 길상(吉祥)의 뜻으로 묘길상(妙吉祥)

내원골과 장당골이 만나는 산세는 여성 음부를 닮은 듯.
비로자니불이 있는 내원사는 그 묘한 위치에 자리잡았다.
내원골과 장당골이 만나는 음부골 산세에서도 핵심 위치.

황금능선이 황룡처럼 9번 구비치는 산세라 하여 구곡산.
좌우 18골짜기 지옥 x 9윤회의 고통 = 108 번뇌의 상징.
9 차례 윤회의 고통 그 시작과 끝을 상징하는 내원사 터.

음부골은 생명의 산실이자 지옥을 뜻하는 윤회의 들머리.
태어남은 순간의 희열 끝에 죽음 못지 않은 기나긴 고통.
인생은 삶이라는 연옥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사형수에 불과.

고통의 늪에서 태어나 죽기를 무한 반복한다는 윤회사상.
문수보살은 고혹적인 모습으로 구도자를 유혹하기도 한다.
순간의 선택이 십년 수도생활을 헛 것으로 만들 수도 있다.

'윤회의 고통을 택할 것인가?'
'해탈의 경지에 들어설 것인가?'

부부의 삶은 전생의 원수끼리 만나 화해를 하라는 인연.
자식 키우기는 전생에 진 빛을 모두 갚고 죽으라는 인연.
전생과 미래의 업보라는 굴레를 단절하는 삶이 구도의 길.

문수보살이 일만 권속과 함께 오대산에 상주한다는 신앙.
화엄경에 의해 중국에서 화엄종이 일어나 성행하게 된다.
불교는 정법(正法), 상법(像法), 말법(末法) 시기로 구분.

석가모니가 입멸하여 500년은 정법의 시대
다음 천년은 정법(正法) 흉내만 내는 시기.
석가모니가 입적한 1500년 이후는 말법 시대

문수는 용과 뱀을 나누지 않고,
남녀와 선악의 차별을 초월한다.
즉, 대승불교 정신이 문수의 지혜.

소승불교(小乘佛敎)와 함께 불교의 2 갈래.
대승불교는 한국·중국·일본·티베트에 전파.
1세기 무렵 석가모니 가르침을 개방적으로 해석.

대승불교는 스리랑카 미얀마 타이 라오스 캄보디아
내원사 비로자니불은 남방계 불교의 한반도 유입경로.
하여, 내원사 비로자니불 불상은 보물 제 1021호로 지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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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원사는 삼장면 대포리, 내원리, 장당리 경계에 있는 사찰
1300 년전 신라 태종 무열왕 때 무염국사가 창건했던 덕산사.
덕산사는 창건 이후 1,000 신도와 10 암자를 거느렸다는 사찰.

현재 12 개 사찰 터 흔적만이 당시의 융성했음을 말해준다.
500 년전 불탄 후 1959년 3월 원경스님 복원 내원사로 개명.

'계곡 물안개와 단풍이 고운 내원사 반야교.'

내원사는 다른 사찰과는 달리 항상 인적이 드문 절이다.
원경스님이 수도승을 위해 방문객 인파를 꺼리는 때문이다.
원경스님은 국전입상 서예경력에 낙관은 붓으로 그린 원(ㅇ).

'내원사를 감싼 불교적 산세와 어울리는 낙관.'

사찰 경내에는 주지스님과 수도승 몇분이 전부.
불경과 목탁소리, 계곡 물소리와 산새의 지저귐,
숲과 바람이 어울어져 빚어내는 자연의 합창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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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갈래의 물줄기가 합쳐지는 절묘한 위치에 자리잡은 내원사.
두 계곡이 하나로 합쳐 흘러내린 위에 솟은 듯 숲에 감춰진 곳.
마치, 매력적인 여인의 자태가 유혹하는 듯한 산세에 위치한 사찰.

왼쪽은 내원골, 오른 쪽은 장당골(바깥 장당, 안 장당)
무재치기 폭포, 써리봉 남단, 황금능선 물줄기가 모인 골.
경남대학 자연학습 연습림 장당보호소 인근에서 내원골로 합류.

장당골은 무재치기 폭포로 이어지는 상류 물줄기
써리봉과 국사봉을 잇는 황금능선으로부터 물줄기
무재치기폭포 말고는 이렇다 할 명소가 거의 없다.

그러나, 깊이 파고 들수록 태고적 신비감과 순수함
경상대학 연습림의 산판도로와 8 차례 뒤엉킨 상류
울창한 수림이 뒤엉켜 넘어진대로 썩은 장당골 상류.

내원사 주차장 오른쪽 위로 계속 이어지는 산판도로.
내원사 주차장은 산판도로의 출발점이자 들머리인 셈.
국립공원 관리공단에서 차량운행 통제시설을 설치했다.

내원사에서 장당 보호소 구간은 10km 2 시간 도보거리.
이 구간은 장당골 특유의 깨끗하고 짙푸른 개울로 유명.
거대한 폭포수, 산중호수, 넓고 깊은 소, 오밀조밀 계곡

천왕봉과 동떨어져 찾는 사람이 드문 곳.
여름철 무더위를 피해 찾는 피서객들 뿐.
        
처음 이곳을 찾는 이에겐 실핏줄 같이 무수한 갈림길.
지리산을 수없이 왔다 해도 수박 껍대기만 핥은 기분.
지도를 보아도 선뜻 구분할 수 없어 마음이 답답해진다.

수박은 단단한 껍질 속에 숨겨진 속살이 시원 달콤하다.
껍대기의 밋밋하고 비릿함과 붉은 속살 맛은 사뭇 다르다.
이곳에 오면 지리산 산꾼이라 자처하던 자부심도 작아진다.

장당골로 가는 길은 굳이 찾아 헤메일 필요까지는 없다.
대포리 내원사 표지판과 차량도 다닐 만큼 넓은 산판도로.
장당골 초입에서 두어 시간 걷고나면 상황은 차츰 달라진다.

어디에서 시작해, 어디로 가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등산로.
장당골 골짜기 속의 골짜기 그 신비의 계곡은 꼭꼭 숨은 듯.
어느 길이 그 신비의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인지 알쏭달쏭하다.

'마지막 민가를 지나면서 희미한 길은 그나마 산길.'

그러나, 그곳에서 써리봉으로 가는 산길은 더욱 아리송.
산죽터널 잡목숲을 헤치고 지류 건너 건너편 능선을 넘고
써리봉과 멀어졌다가 뒤늦게 장당골 등산로와 반가운 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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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재치기로 이어진 장당골의 마지막 길은 산판도로
계곡을 건너 소로를 따라 걷다보면 최후 통첩 같다.
지루한 산판도로는 지친 몸에 가해지는 가혹한 형벌.

산죽 숲 오르막은 좌측 황금능선 능가하는 거대한 규모.
숨차.. 도저히 걸을 수 없고 오를 기운도 없어 죽을 지경.
장당골 최후의 수문장처럼 진로를 가로막고 있는 산죽 터널.

누구도 예외 없이 이곳에 빠져들면 기어갈 수 밖에 없다.
고개를 뻣뻣하게 세워들 수 있는 이는 그 누구도 없을 듯.
마치 범해서는 안될 곳을 침범한 죄인처럼 무릎걸음의 고행.

그리고, 그 끝은 천상의 요새와 같은 무재치기 폭포.
치밭목 산장이 코 앞이지만 더 움직이고 싶지가 않다.
이렇게 좋은 곳을 두고 가려면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길.

'마침내, 여인이 신비의 베일을 드러낸 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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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부딪쳐 무지개를 빚어내는 지리산 제 2의 폭포.
가야금 반주에 맞춰, 판소리를 토해내는 듯한, 물소리.
애간장을 녹이는 듯 가늘고 길게 이어지는 여인의 숨결.

어둠이 내리면, 긴 산등성이 위에 10 여 암자들의 초롱불.
청사초롱 불 밝히고 오지 않는 님을 기리다가 지쳐 쓰러진듯.
무재치기 폭포로 가는 오밀조밀 장당골은 신비로운 여인의 비밀.

마치 그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듯한 느낌
점점 더 깊이 빠져들 수 밖에 없는 유혹의 계곡.

'가야금 장단처럼 애간장 끓는 듯한 물소리~~'

그것은 장당골 미궁 속에서 들려오는 여인의 속삭임.
역사 속에서 이미 명맥이 끊어져 버린 가락국의 장단.
그 가야금은 전해오지만 연주법은 명맥이 끊어져 간다.

가야금은 전통적으로 여인네들에게 사랑 받던 악기였다.
그 맺힌 한을 호소하는 듯,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는 가락.
가야금 장단에 맞춘 '서편제의 판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가야금은 우륵에 의해 가락국에서 신라의 궁중악기로 정착.
신라시대 장보고의 지원을 받아 지리산 일대의 사찰은 융성.
신라를 흡수한 고려 시대에도 지리산의 사찰은 영화를 누린다.

그러나, 이조 시대에 들어와 지리산 사찰들은 탄압 받는다.
내원사도 이조시대에 탄압 받았던 사찰 중 하나로 추정된다.
하여, 장당골 일대에는 옛 사찰터였던 흔적이 이따금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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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80년간 원나라 속국., 고려 애환도 담긴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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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시대에는 공녀를 착출해 원나라로 보냈던 제도.
미혼의 규수들은 공녀를 뽑히지 않으려 서둘러 혼인.
그 바람에 남자가 귀해 꼬마 신랑도 가리지 않을 정도.

'남자들의 조혼 풍습은 여기에서부터 유래.'

가난한 규수 집은 식구 하나 줄이려 민며느리로 보냈다.
식구란 말은 우리말로 뜻풀이 하면 '밥을 먹는 입.'이다.
그 바람에 시어머니가 며느리 구박하는 악습이 성행했다.

'소가 꼴값을 해야 하듯,
민며느리에게 밥값 강요.'

아들 없는 집은 일손 하나 얻으려고 데릴사위를 선호.
데릴사위는 일꾼으로 쓸만한 총각이 처가살이하는 제도.

처가집 기둥 금 색시가 자랄 때까지 머슴을 살던 제도.
색시 예쁘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간 처가집 기둥 금
처가집에서 장가도 못가고 실컷 머슴만 살았던 병폐도 발생.

'색시가 고우면 처가집 말뚝에도 절한다.'는 속담의 유래.

데릴사위를 업수이 여기고 기둥 대신 말뚝에 금을 그은 탓.
하루 속히 장가 가고 싶은 총각에게는 말뚝 금이 꿈과 희망.
색씨가 말뚝 금 만큼 크게 해달라고 조석으로 절하며 빌었다.

아무튼 옛 우리나라 전통 풍습에서는
민며느리나 데릴사위는 서러웠던 존재.
고려 때 공녀제도 때문에 생긴., 풍속도.

고려 충렬왕때 들어와 공민왕때 폐지된 황비홍 머리.
원나라의 강요에 의해 왕의 이름 머릿자에 붙였던 충.
고려의 왕위를 계승할 세자는 어릴 때부터 원나라 유학

원나라 공주와 결혼해야 고려 왕위에 오를 수 있었다.
원나라의 속국인 고려의 영토는 원나라에서 관할한 듯.
그 원나라의 공주와 일족에게 넘겨진 고려의 넓은 토지.

토지를 잃어버린 농민들이 산속으로 들어가 일군 화전.
장당골의 화전터는 고려시대로부터 유래된 듯 추정된다.
그후부터 은둔 세력이 살 길을 찾아 숨어 들었던 장당골.

'정순덕 여인의 은둔지였던 장당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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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재치기폭포 가는 길은 정든 님 맞이하는 여인의 몸짓.
그리웠던 님을 반기는 듯 수줍게 감춰진 품을 열었다가도
돌아서는 님의 발목 붙잡는 듯, 살며시 옷깃을 잡는 손길.

차마 뿌리치지 못해 뒤돌아 서면, 뒤엉킨 잡목에 걸린 옷.
장당골은 야속한 님 발목잡는 여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골.
한번 빠져들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깊이 빠져들고야 만다.

장당골 깊숙이 숨어있는 비경은 뿌리칠 수 없는 유혹이다.
몸을 감는 덩쿨, 싫다고 뿌리치면, 옷 찢고 얼굴도 할퀸다.
이별의 통한이 담긴 연대 미상 <가시리> 가요와 같은 물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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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시리 가시리잇고..바리고 가시리잇고
날러는 엇디 살라고..바리고 가시리잇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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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시리>는 <청산별곡>과 아울러 연대 미상의 고려가요.
청산별곡은 서경별곡 만전춘별사와 함께 고려가요 대표작.

청산별곡은 머루 다래를 따먹고 사는 유랑민들의 노래,
농민 노예 광대 실연자 민중들이 슬픔을 잊기 위한 노래.
왕으로부터 버림받거나 그밖의 어려움을 잊기 위한 노래.

청산에 숨어들은 지식인들과 고려 여인들 한이 담긴 노래.
원나라에 공녀로 착출된 고려 여인들의 애환이 담긴 노래
원나라 병사들에게 옷 찢기고 겁탈 당한 고려 여인들 노래.


'일명 몽고 아리랑'., <청산별곡>.

"살어리 살어리랏다
쳥산(靑山)애 살어리랏다
멀위랑 달래랑 먹고
쳥산애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우러라 우러라 새여
자고 니러 우러라 새여
널라와 시름 한 나도
자고 니러 우니로라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가던 새 가던 새 본다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잉 무든 장글란 가지고
믈 아래 가던 새 본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이링공 뎌링공 야
나즈란 디내와손뎌
오리도 가리도 업슨
바므란 엇디 호리라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어듸라 더디던 돌코
누리라 마던 돌코
믜리도 괴리도 업시
마자셔 우니노라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살어리 살어리랏다
바래 살어리랏다
자기 구조개랑 먹고
바래 살어리랏다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가다가 가다가 드로라
에졍지 가다가 드로라
사미 대예 올아셔
금(奚琴)을 혀거를 드로라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가다니 브른 도긔
설진 강수를 비조라
조롱곳 누로기 와
잡와니 내 엇디 리잇고

얄리얄리 얄랑셩 얄라리 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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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은 당나라의 쟁을 본딴 가야국 가실왕 시대의 악기.
삼국사기에 의하면, 6세기에 악사 우륵이 연주한 궁중악기.
가야금은 가야국이 6세기 전부터 당나라와 교역한 물적 증거.

9 족장 추대를 받아 가락국을 창건한 김수로왕
가야 6소국을 연합한 가락국의 맹주.. 김수로왕.

김수로 왕은 가락국의 시조이고 김해 김씨의 시조이기도 한 인물.
그것은 장당골이 6 세기부터 가락국 사람들의 왕래가 있었다는 뜻.
장당골은 흐르는 물소리 만으로도 지리산의 인간역사를 알게 한다.



찾아가는 길.

치밭목산장에서, 무재치기 폭포, 내원사 주차장까지 17km.
버스를 이용하여 대포마을에서부터 출발하면 3km 더 멀다.
내원사 주차장 오른편 도로는 국립공원 관리공단이 차량통제

내원사에서 경상대 연습림 장당보호소까지 도로가 잘 다듬어져 있다.
8번 쯤 계곡을 건너야 하므로 지프차 만 그곳 험로를 통과할 수 있다.
장마철에 그곳 계곡 물이 불어나면 지프차도 무용지물이 될 수 있다.

내원사∼장당보호소 간은 대략 10km거리로 두시간 가량 걸어야 된다.
이 구간은 호젓한 산책로 같아 장당골의 맑고 깨끗한 계곡수로 유명하다.
큰 폭포도 있고 산중호수를 연상할 만큼 넓고 깊은 소와 오밀조밀한 계곡.

이 일대는 아직 덜 알려져 있는데도 여름철이면 피서 인파로 붐빈다.
장당골은 사계절 각각 색다른 맛을 보여주지만 여름철에 주로 찾는다.
하여, 장당골은 산꾼에게만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신비로운 여인의 비밀.

장당골은 천왕봉과 동떨어진 위치
하여, 아직까지 알려지지지 않은 곳.       

시간적 여유가 있다면 둘러볼만한 주변 명소들.
산청 사람들 정신적 지주인 남명 조식의 덕천서원.
문익점 유물과 각종 베 관련품이 전시된 면화 시배지. 

 

출 처 : 산사모 산악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