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21]한국전쟁기 ‘지리산 빨치산 대장’ 최정범씨 인터뷰
그들은 별을 보았다. 지리산, 월악산, 한라산…. 입산한 그들은 발아래 사람의 마을을 내려다보았다. 숱한 불안의 밤, 그들은 마을을 비추는 별을 보았다.
빨치산. 갑년도 훌쩍 지난 두억시니 세월 전쟁통. ‘만인이 평등한 세상’을 희망하며, 총과 죽창을 들고 그들은 스스로 산에 누운 미륵이 되었다. ‘보투’(보급 투쟁)를 은밀히 나가던 밤에도 하늘에는 ‘빨치산 별’이 초롱초롱했을 것이다.
“하지만 참 기다림은 결국 해방 당신, 혁명 당신뿐이라는 것을 깨달을 때/ 날마다 밤마다 죽는 지 꿈의 별똥별이 떨어져 잠든 곳으로/ 지도 가서 누워야겠구만요/ 하여 엎어진 길들이 일어서고 쓰러진 강이 다시 흐르고/ 무너진 산들이 더 큰 나라로 솟을 때까지/ 저 강, 저 산, 저 길들을 남몰래 비추는/ 지도 빨치산 별이 되고 말겠구만요/ 당신처럼 한없이 착한 이들의 아름답고 넉넉한 밤을 위하여/ 낮이면 죽었다 밤이면 다시 떠오르는/ 온누리 빨치산 별이 되겠구만요/ 두고 두고 사랑해야 할 해방 당신을 생각해보는구만요”(이원규 시, ‘빨치산 별’, 1989)
최근 강동원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19대, 전북 남원·순창)은 <지리산 달궁 비트>(한울 펴냄)를 엮어 출간했다. “격동기인 일제강점기에 남원에서 태어나 강제징용을 당하고 해방 정국을 맞아 좌·우익 충돌을 겪었던 한 남자에 대한 기록”이다. 강 전 의원이 밝힌 발간 이유. “우리에게 빨치산은 금기의 영역이자 그저 ‘빨갱이’로 인식되고 있다. 하지만 이제 분단된 민족의 아픔을 재조명할 때가 되었다. 언제까지 조국 분단의 아픔이 대립과 갈등으로 이어져야 하겠는가.”
“완전히 이 사회가 썩었다”
6월6일 현충일, 전북 남원을 찾았다. 책의 주인공인 ‘지리산 빨치산 대장’ 최정범(88)을 만났다. 그는 부인과 단둘이 지낸다. 삶의 노을이 짓붉은 부부다. 3남4녀는 다 장성했다. 셋째아들은 여러 해 전 암벽 등반을 하다 사고로 먼저 떠났다.
최정범은 1928년 남원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제 말 강제징용을 두 차례 당했다. 천신만고 돌아온 고향에서 사회주의를 만났다. 한국전쟁기 지리산에 들어가 빨치산이 되었다. 남원군당 작전부장, 1사단 참모장 등을 맡았다. 그의 몸에는 총상이 아홉 군데 있다. 방한모를 총탄이 뚫고 간 적도 있다. 복숭아뼈가 부서질 정도로 총상을 입은 한쪽 발은 지금도 상흔이 선명하다. 지팡이 없이는 잘 걷지 못한다.
방에 들어서자 한편에 <한겨레>와 <한겨레21>이 수북했다. 한 달치는 될 법. 돋보기 없이 그는 날마다 신문을 읽고 주마다 주간지를 꼼꼼히 읽는다고 했다. 목소리에 구릿빛 녹이 묻어났다. 그는 기자에게 말했다. “만인이 평등한 세상… 지금도 옳다고 생각하고 있다. 변함이 없다. 그 사회가 돌아오면 얼마나 좋으냐고. 지금 세상? 아주 잘못돼가고 있다. 지도자들부터 부패돼 있기 때문에, 완전히 이 사회가 썩었다.”
왜 빨치산이 되었는가. 책머리 ‘구술자의 글’에 그는 이렇게 적었다. 지리산 별을 보며 그는 참세상을 꿈꾸었다.
“‘만인이 차별 없이 평등하고, 그래서 인민이 풍족한 삶을 구가하는 세상!’ (…) 모든 것을 결과만을 두고 판단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가지 단언을 하자면, 내가 목숨을 바쳐 이루려고 했던 세상과 지금의 북한 체제는 닮은 구석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김일성의 항일투쟁은 인정할 만한 일이지만 전세계의 현대국가에서 그 예를 찾아보기 어려운 세습체제, 다른 무엇보다 인민을 억압과 굶주림과 도탄에 빠뜨린 북한의 현재 모습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잘못된 현실임이 분명하다. 내가 목숨을 던져 만들고자 했던 세상은 결코 그런 것이 아니었다.”
빨치산은 프랑스어로 도당·동지를 가리키는 ‘파르티’(Parti)에서 비롯한 말이다. 적의 후방에서 무장 인민투쟁을 벌이는 독립부대, 적 점령지에서 자발적인 군사조직의 대원으로 참여한 사람을 이른다. 중국 공산당을 이끈 마오쩌둥은 빨치산 대신 ‘인민유격대’라는 호칭을 썼다.
남한에서 빨치산 활동은 1946년 9월 노동자 총파업을 계기로 일어난 대구 ‘10월 폭동’ 사건을 기점으로 1948년 남한 단독선거에 반대한 2·7 사건, 여순 사건과 제주 4·3 사건, 이후 한국전쟁기를 거치며 지속적으로 전개됐다. 빨치산은 1955년 봄 군경에 의해 대부분 소탕됐으며, 그해 4월1일 지리산 민간인 입산통제가 해제됐다. 마지막 빨치산은 1963년 경남 산청에서 이홍이가 사살되고 정순덕이 생포되면서 공식 기록에서 사라졌다.(김영택, ‘한국전쟁기 남한 내 적색 빨치산의 재건과 소멸’, 2003)
일제 말 강제징용 두 번 끌려가
최정범을 사회주의, 빨치산으로 이끈 것은 무엇인가. 역설적이게도 참담한 강제징용이었다. “나는 어린 나이에 식민지 백성의 대표적인 고난 중 하나인 ‘징용’을 두 차례나 온몸으로 겪어냈다. 그 덕분에 세상을 보는 눈이 또래의 다른 친구들보다 일찍 떠졌으니 그만한 행운이 어디 있겠는가.”
그는 14살이던 1942년 아버지를 대신해 함경도 장진호 강계수력발전소 공사판에 끌려갔다. 이듬해 겨울 그는 귀향했다. 다시 이듬해인 1944년, 16살 그는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로 다시 징용을 갔다. 육군 병참기지에서 취사장 노무자로 노역했다. 그리고 이듬해 해방을 맞았다.
18살이던 1946년 남원 인민위원회 청년교육캠프에서 <공산주의 ABC>를 처음 보았다. 1919년 러시아 볼셰비키 제2차 당 강령을 풀어쓴 책이다. 미군정의 사회주의 인사 단속에 휘말려 1년간 경북 김천과 인천의 소년형무소에 수감됐다.
1949년 겨울 21살에 한옥연과 결혼했지만 이듬해 한국전쟁이 터졌다. 신부를 처가에서 데려오지도 못한 채 인민군을 맞았다. 이후 조선노동당 입당(후보당원), 인천상륙작전, 인민군 패퇴, 지리산 입산…. 현대사의 울돌목이 그를 휘감았다.
1951년 겨울 최정범은 자신의 은거지 ‘달궁 비트’ 근처에서 “말로만 듣던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1905~53)과 조우하기도 했다. 그는 이현상을 이렇게 기억했다. “건장하고 당당한 신체에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인물이었다.”
지금도 그는 한 여성을 잊지 못한다. 신애덕(85). 비전향 장기수 류낙진(1928~2005)의 부인이자, 영화배우 문근영의 외할머니다. 신애덕은 남원에서 중학교를 졸업한 뒤 광주 전남방직에 취업했다. 총파업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16살에 반년 옥살이를 했다. 석방 뒤 광주의 한 병원에서 간호부로 일했다. 한국전쟁기 그도 빨치산이 되어 최정범을 만났다. 발목 관통상으로 ‘환자트’(환자 비밀 아지트)에 머물던 최정범은 과다 출혈로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신애덕이 자신의 팔에 고무줄을 감더니 주사기를 찔러 피를 뽑기 시작했다. 나는 뭐라고 한마디 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나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렇게 그녀는 자신의 몸에서 피를 뽑더니 주사기를 내 팔뚝에 찔러 수혈해줬다.” 두 사람의 혈액형은 같은 B형이었다.
이후 신애덕은 1953년 9월 임실에서 네 군데 총상을 입고 경찰에 체포됐다. 최정범은 지금도 신애덕을 생명의 은인으로 여긴다. 반백년 세월이 넘도록 두 사람은 전화를 주고받거나 만나왔다. 신애덕은 현재 오스트레일리아의 자녀 집에 머물고 있다.
1953년 봄 최정범은 은신처에서 주민 신고로 경찰에 붙잡혔다. 1950년 가을 시작한 빨치산 생활 2년 반 만이었다. 남원경찰서로 압송된 그는 최난수 서장을 만났다. 그는 일제강점기 악질 친일 경찰이었다. “최난수는 능글맞은 웃음으로 나를 조롱했다. 내가 만들고자 했던 나라는 이런 자들이 우쭐대는 나라가 아니었다.”
산에서 만난 생명의 은인
포로 전범 심사를 받은 그는 ‘을’ 판정을 받았다. 갑 판정을 받으면 총살형이었다. 자신에게 호의적인 경찰의 도움으로 그는 재판 없이 불기소 처분을 받았다. 무고한 민간인을 살상하지 않았고, 오히려 억울하게 죽을 수도 있는 양민을 여럿 구명한 점이 참작됐다는 게 최정범의 회고다. 1953년 초가을의 일이었다. “전선에서 총성이 사라지고 공식적으로 종전이 선언된 직후 나는 ‘대한민국’이라는, 그동안 내가 인정하기 싫어 투쟁했던 질서 속으로 온전하게 유입되었다.”
전쟁 뒤 최종범은 자유당 독재에 맞서 집회·시위에 종종 참여했다. 지역 야권 인사들의 선거도 도왔다. 교육청 발주 공사를 수주하던 조합에서 총무부장으로 일하기도 했다. 조합이 파산한 뒤 그는 부친의 농사를 도우며 지냈다. 1961년 5·16 쿠데타가 터지자 한밤중 경찰에 끌려가기도 했다. 반공을 국시로 앞세운 군인들의 이른바 ‘예비검속’이었다. 박정희 독재가 끝날 때까지 ‘요시찰 인물’인 그에 대한 사찰·감시는 내내 이어졌다. 그러나 그는 당당했다.
“그것은 내 방식의 애민이고 애국이었다. 내 행동이 남한의 체제 유지에 위배된다고 해서 체포되었고, 이어서 소정의 사법절차까지 거쳤다. 그 모든 것을 다 거친 뒤에 자유의 몸이 되었으니 이제는 한반도 남반부의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라도 활발히 활동하며 살아가야 하지 않겠나. 주눅 들 필요가 뭐 있나.”
지금도 최정범은 누구에게든 자신의 빨치산 이력을 숨기지 않는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다. 공직을 탐하지 않았던 그의 자녀들 또한 연좌제로 특별히 고통받은 일이 없다고도 했다. “그때 나는 적어도 그것이 정의라고 믿었다. 후회는 왜 하나. 스스로 한 것이다. 그게 다 운명이다.”
최정범이 목숨을 걸고 꿈꾼 ‘사회주의 국가’는 무엇인가. 정교한 혁명 논리는 그의 몫이 아니었다. 거센 세월에 태어나 식민지, 분단, 전쟁을 겪었다. 그가 믿은 사회주의는 ‘당연과 물론’의 세계다.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사람이라면 마땅히 희망하는 세상. 프랑스의 정치가 레옹 블룸이 말한 사회주의다.
“그때는 그것이 정의라고 믿었다”
“사회주의는 인간 영혼의 가장 고귀한 감정의 항거에서 태어난 것이다. (…) 사회주의는 비참함, 실업, 추위, 배고픔과 같은 견딜 수 없는 광경이 성실한 가슴들에 타오르게 하는 연민과 분노에서 태어난 것이다. (…) 한쪽엔 호화, 사치가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엔 궁핍이, 또 한쪽엔 견딜 수 없는 노동이 있는가 하면 다른 쪽엔 거만한 게으름이 있는, 이 터무니없고도 서글픈 대비에서 사회주의는 태어난 것이다. 사회주의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 가장 천한 인간의 동기인 시샘의 산물이 아니라, 정의의 산물이며 가난한 자에 대한 동정의 산물인 것이다.”
2016년 여름, 빨치산을 말하는 이유는 또렷하다. ‘평등 세상’은 왔는가. 10년 가까운 세월, 자기성찰 내팽개친 권력, 우두망찰 신음하는 시민. 최정범의 지리산, 평등의 쑥부쟁이는 아직 피지 못했다. 별을 보았던 사람들이 꿈꾼 ‘해방 조국’은 아직 지상에 내려오지 못했다.
*기사에 인용한 최정범의 말은 <지리산 달궁 비트>와 인터뷰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남원=전진식 기자seek16@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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