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ports/바 둑

한국바둑의 발전사와 바둑 스포츠화의 과제 (1편)

나 그 네 2015. 11. 9. 17:22
‘최종준의 스포츠현장탐색’ 일곱 번째와 여덟 번째 시간입니다. 세계 최고의 자리를 놓고 중국, 일본과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한국바둑이 큰 변화를 맞고 있습니다. 별다른 놀이가 부족했던 과거에는 바둑이 일반대중의 삶에 깊이 자리 잡고 예禮와 도道를 중시하는 ‘신선놀음’으로 불리면서 널리 성행했지만, 대중보급이 장기간 침체현상을 보이면서 지금 바둑은 본격적인 스포츠의 길로 새로운 활로를 찾고 있습니다.
 
 이번 달 스포츠현장탐색의 주제는 국민스포츠를 목표로 전진하고 있는 한국바둑의 역사와 바둑의 스포츠화를 완성하기 위한 과제에 관한 탐색입니다. 지금도 스포츠 계 일각에서는“바둑이 과연 스포츠의 범주에 포함 될 수 있는가?”라는 주장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의 바둑은 국가의 지원을 받는 스포츠종목으로 탄탄하게 성장하고 있습니다. 특히 바둑이 성장기 청소년의 지능개발과 인성함양에 더없이 유용한 수단으로 입증되면서 사회전반에 걸쳐서 바둑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좋아지고 있습니다. 그런 반면에 바둑보급의 침체현상을 해결하고, 지구촌에서 바둑이 성행하는 주요국가가 우리나라, 중국, 일본과 대만 정도에 한정되어 있는 비세계화 문제를 개선하는 일은 바둑강국인 한중일 3국의 공통과제입니다. 그리고 앞으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바둑은 두뇌스포츠Mind sports종목의 독특한 특성 때문에 스포츠시스템을 완전하게 정착시키기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과제가 많습니다.
 
 올해는 한국바둑의 선구자인 고 조남철 선생이 한국기원의 전신인 한성기원을 설립한지 70주년이 되는 뜻 깊은 해입니다. 그리고 바둑의 저변확대와 한국바둑을 수준을 대폭 향상시킬 원동력이 될 전국소년체육대회(이하 ‘소년체전’)와 전국체육대회(이하 ’전국체전‘)에 바둑이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의미 있는 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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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변화를 맞고 있는 한국 바둑 (사진 : 연합뉴스)


1. 한국바둑이 걸어 온 길
 
 가. 바둑의 국내 도입
 
Q : 안녕하세요? 이번 달의 주제는 조금 색다릅니다. 이번에 바둑과 관련된 자료를 조사하면서 생각보다 바둑의 저변이 넓고, 스포츠화가 상당히 진척되었다는 사실을 확인 할 수 있었습니다. 먼저 우리나라에서 바둑이 발전해 온 여정旅程을 간략하게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A : 반갑습니다. 바둑은 고대 중국에서 만들어져서 일본과 한국 등으로 전파되었으며 정확한 탄생의 기원에 대해서는 밝혀진 것이 없습니다. 바둑은 삼국시대에 우리나라에 들어 온 이래 우리의 삶에 밀착해서 발전했습니다. 잘 아시는 바와 같이 지금 우리의 일상생활에는 바둑용어가 상당히 많이 쓰이고 있고, 바둑경기의 원리인 부득탐승不得貪勝(지나친 욕심은 금물이다.), 사소취대捨小取大(눈앞의 작은 이익 보다 크게 봐야 한다.) 등과 같은 위기십결圍棋十訣은 정치는 물론 일반사회의 행동지침으로 자주 비유되고 있습니다. 2014년 10월부터 케이블TV에서 방영되면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미생未生’ 역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는 비정규직의 고충을 아직 완생完生을 보장하는 두 집을 얻지 못해서 고난한 행마를 하고 있는 바둑돌에 비유한 것입니다. 그 이외에도 승부수(를 던지다.), 꼼수(를 부리다.), 자충수(에 빠지다.), 정석, 국면, 실리.. 등등 헤아릴 수 없이 많습니다.
 
 일본으로부터 근대바둑이 도입되기 이전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초반 포석단계를 생략하고 바둑판의 주요 16개 지점에 흑돌과 백돌을 배치한 상태에서 대국을 시작하는 ‘순장順丈바둑’이 성행했습니다. 바둑이 기원을 중심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에 당대 최고수였던 노사초 선생과 몇몇 바둑애호가들이 조선말기의 정치인인 민영휘의 별장 사랑채를 임대해서 국내최초로 경성기원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그 무렵 기원은 학자, 문인, 예술인 등 비교적 상류계층의 사랑방 역할을 하였습니다.
 
나. 한국바둑의 선구자 고 조남철 선생과 1960년대의 도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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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 조남철 선생과 이창호 9단 (사진 : 연합뉴스)

 
한국바둑은 조남철 선생이 일본유학을 마치고 귀국해서 1945년 11월 서울 남산동에 ‘한성기원’을 설립한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발전하게 됩니다. 조남철 선생은 어릴 적부터 뛰어난 기재를 보여서 바둑천재소년으로 소문이 자자했습니다. 14세 때인 1937년에 그 당시 바둑선진국인 일본으로 건너가서 기타니 미노루木谷 實 선생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1941년에 한국인 최초로 프로기사 자격을 취득하였습니다.
 
 한성기원은 이후 조선기원(1948년 4월)과 대한기원(1949년 1월)으로 변천과정을 거친 다음 1954년 1월에 바둑행정의 총본산인 ‘한국기원’으로 새롭게 출범하면서 한국바둑행정의 기틀이 잡히기 시작하였습니다. 프로기사 제도가 정립되었고, 바둑보급을 위한 관련서적의 발간이 이어졌습니다. 또한 1956년 4월에 개최된 국수전을 필두로 최고위전, 명인전 등 각종 프로기전이 연이어서 탄생하였습니다. 한국바둑의 도약기를 이끈 조남철 선생은 1960년대 중반에 혜성처럼 등장한 김 인 9단에게 국수위를 넘겨줄 때까지 20여 년간 국내 최고수의 위치에 있었던 한국바둑의 전설적인 거목입니다.
 
 다. 1970년대의 발전기와 1980년대 ~ 1990년대의 중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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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둑황제 조훈현의 등장 (사진 : 연합뉴스)


한국바둑은 1970년대에 바둑황제 조훈현의 등장과 함께 본격적인 발전기에 돌입하게 됩니다. 1962년 세계최연소(9세)로 입단한 조훈현은 1963년에 도일해서 세고에 겐사쿠瀨越憲作 선생 문하에서 수학했습니다. 이후 군복무를 위해서 1972년에 귀국한 다음 서봉수 9단과 함께 이른바 ‘조서 시대’를 열면서 한국바둑을 이끌었습니다. 조훈현 9단은 1982년에 국내최초로 ‘입신入神’의 경지라는 9단에 올랐고, 국내 10개의 타이틀을 석권하는 전관왕의 대기록을 달성하였습니다. 특히 조훈현 9단은 1989년에 바둑의 올림픽이라 불리는 제1회 잉창치應昌期배에서 우승을 차지해서 한국바둑을 세계적인 수준으로 격상시켰습니다.
 
 한국바둑은 한때 큰 난관에 봉착하기도 했습니다. 프로기사들 상당수가 처우개선을 요구하며 한국기원을 탈퇴한 소위 ‘기사파동’을 2년이 넘게(1974년 10월 ~ 1976년 12월) 겪었고, 바둑이 사회적으로 배척해야 하는 병리현상인 도박의 수단으로 잘못 인식되는 큰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모든 바둑인 들이 힘을 모아서 위기상황을 지혜롭게 극복하였습니다.
 
 한편, 조훈현보다 1년 먼저 일본으로 건너가서 1980년 9월에 일본 최대기전인 명인 타이틀을 쟁취한 조치훈 9단이 조국의 위상을 드높였고, 세계최고의 공격수 유창혁을 비롯한 쟁쟁한 강자들이 동시대 한국바둑의 발전에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1988년에는 만 13세의 나이로 제8회 KBS바둑왕전에서 우승을 차지한 이창호라는 불세출의 천재기사가 등장해서 한중일 바둑삼국지에서 대한민국이 확실하게 우위를 점하는 계기를 맞게 되었습니다. 이창호 9단은 조훈현 9단이 유일하게 직접 지도한 내제자이기도 합니다.
 
Q : 네에. 우리나라에서 바둑이 발전하여 온 과정을 잘 이해했습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본격적인 의문이 생깁니다. 상류층의 여가문화에서 일반인에 대한 보급이 확대되는 과정에서도 바둑은 여전히 예의를 중시하는 오락문화였지 축구, 야구 등과 같은 스포츠로는 인식되지 않았습니다. 도대체 어떠한 연유로 한국바둑이 스포츠의 길을 걷게 되었는지가 대단히 궁금합니다. 그 내용을 설명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 2000년대 이후 - 본격적인 ‘스포츠바둑’ 시대의 개막
 
 A : 좋은 질문입니다. 한국바둑은 2000년대에 들어오면서 이세돌, 박정환, 김지석, 최철한 9단 등 수많은 신세대 천재들의 출현으로 절대강자가 즐비한 춘추전국시대에 돌입하였습니다. 국제적으로는 신흥강국으로 떠 오른 중국과 세계최강국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쟁을 펼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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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창호 9단과 이세돌 9단 (사진 : 연합뉴스)


한국바둑은 이때부터 ‘바둑의 스포츠’화를 목표로 설정하고 관련업무 추진에 매진하게 됩니다. 우리나라의 바둑이 지향목표를 스포츠화로 설정한 이유는 중국바둑의 급속적인 성장과 일본바둑의 장기적인 침체현상에서 그 당위성을 찾았습니다. 과거 세계바둑 시장을 주도했던 일본이 예의를 중시하는 정신문화에 집착하면서 성장에 한계를 보인 반면, 중국은 1956년에 일찌감치 바둑을 체육경기로 인정해서 국가적인 장려정책을 펼치면서 저변확대와 수준향상에 대성공하면서 엄청난 기세로 세계바둑계를 침공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한국바둑에 뜨거운 대중적인 열기를 불어넣기 위해서도 바둑에 스포츠체제를 장착하는 것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한국바둑은 먼저 대한체육회(이하 ‘체육회’)에 가맹경기단체로 가입하는 절차를 추진하였습니다. 그 과정에서 바둑의 스포츠종목 인정여부를 놓고 체육회 안팎에서 많은 논쟁이 있었지만 바둑계의 엄청난 노력과 체육회의 미래지향적인 결정으로 대한바둑협회는 2002년에 체육회의 인정단체로 가입한 것을 시작으로 2006년에 준가맹단체, 2009년에 정가맹단체로 단계적으로 승인되었습니다. 드디어 바둑을 국가가 스포츠종목으로 인정하고 지원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2015년 1월 27일의 체육회 제12차 정기이사회에서 바둑의 스포츠화를 위한 가장 실천적인 목표였던 소년체전(2015년부터)과 전국체전(2016년부터)의 정식종목 채택이 마침내 승인되었습니다.
 
 바둑이 체육회의 스포츠종목 인정에 이어서 양대 체전의 정식종목 채택에 노력을 기울였던 것은 바둑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절차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체육회의 사무총장으로 재직할 당시 바둑계의 지속적인 체전종목 채택요청에 대해서 “바둑이 국민스포츠로 발전 할 수 있는 훌륭한 컨텐츠Contents를 가진 종목이지만 무엇보다도 본격적인 스포츠의 체제를 갖추기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습니다. 올해 바둑이 양대 체전의 정식종목 입성에 성공한 것은 한국바둑의 발전 단계에서 매우 중요한 이정표를 남긴 쾌거입니다.
 
 그리고 현재 바둑은 다른 스포츠종목에 비해서도 결코 뒤지지 않는 훌륭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습니다. 두 개의 대학교(명지대, 세한대)에 바둑학과가 개설되어 있고, 바둑고등학교도 한 개교가 운영 중이며 전국적으로 학교 바둑부의 창단이 이어지고 있는 현상도 대단히 고무적입니다. 스포츠마케팅의 필수적인 파트너인 언론과 기업체의 바둑에 대한 관심과 지원의지도 상당한 수준이고, 두 개의 바둑전문 케이블TV가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사이버오로Cyberoro와 타이젬Tygem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바둑사이트에서도 전 세계의 수많은 바둑동호인들이 실시간으로 바둑경기를 즐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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훌륭한 인프라를 갖춘 바둑계 (사진 : 연합뉴스)


바둑행정을 관장하는 지도부의 의지와 조직력도 상당한 수준입니다. 체육회의 가맹단체이며 아마바둑과 국제관계를 담당하는 (사)대한바둑협회와 프로기사의 활동 및 권익보호와 기도의 보급을 총괄하는 (재)한국기원은 그동안 협력과 대립상태를 반복하기도 했지만 홍석현 중앙일보, JTBC회장이 2014년 1월 16일에 한국기원의 제18대 총재와 2014년 2월 13일에 대한바둑협회의 제4대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일관된 조직체계를 갖추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바둑계의 중심논객으로 활동해왔던 박치문 상임부총재와 프로기사 출신인 양재호 사무총장이 실무를 맡고 있는 행정조직도 매우 탄탄합니다.
 
 한국바둑은 우리사회에서 여성의 사회참여 확산에도 큰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랫동안 남성의 전유물로 인식되었던 바둑계에 여성파워가 적극적으로 참여했기 때문입니다. 긴 세월 침체상태였던 한국여자바둑은 중국 출신의 세계최강 루이나이웨이芮內偉 9단이 우리나라에서 한국기원 소속으로 기사생활(1999 ~ 2011)을 하면서 발전의 큰 계기를 맞았고, 지금은 중국과 세계챔피언을 다투는 최상위의 수준으로 성장하였습니다. 국내 랭킹 1위인 최 정 5단, 맏언니 박지은 9단, 학구파 조혜연 9단, 여류국수 박지연 4단을 위시한 많은 여자기사 들이 한국바둑의 스펙트럼Spectrum을 넓히고 있으며 군부대, 직장, 학교동아리, 어르신, 어머니 등 각계각층에 대한 보급 활동에도 활발하게 참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올해부터는 종합부동산그룹 ‘엠디엠’이 메인스폰서인 ‘2015엠디엠한국여자바둑리그’가 시작되면서 한국여자바둑도 본격적인 프로리그의 틀을 갖추게 되었습니다.


다음주에는 <한국바둑의 발전사와 바둑 스포츠화化의 과제 (2편)>이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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