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그때 그시절

1900년 전후 한국풍경

나 그 네 2016. 6. 25. 17:28




      가을 수확기에 마을 사람들이 함께 모여 벼를 수확하고 있다. 이 때 쯤이면 마을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빠지지 않고 일을 도왔다. 추수가 끝나면 마을 사람들은 역시 함께 모여 도리깨질을 하곤 했다. 복 사세요..복(福)조리를 사고 파는 모습. 복조리는 섣달 그믐날 한밤 중부터 정월 초하룻날 아침 사이에 사서 걸어놓는 조리. 조리장수는 초하루 전날 밤부터 복조리를 사라고 외치며 돌아다녔다. 각 가정에서는 밤에 자다 말고 일어나서 1년 동안 쓸 수 있는 양의 복조리를 사는데, 밤에 미처 사지 못한 사람은 이른 아침에 샀다. 복조리는 일찍 살수록 좋다고 믿었다. 조리는 쌀을 이는 도구이므로 그 해의 행복을 조리와 같이 일어 얻는다는 뜻에서 이 풍속이 생긴 것으로 보인다 수많은 생선을 차곡차곡 쌓아 말리고 있다. 초가지붕 만들기.. 짚을 이용해 초가집 지붕을 만드는 일도 쉴 새 없이 손이 많이 가는 일이었다. 어린 아이들도 어릴 때부터 집안 일을 돕는 것이 관례였다. 경성 거리를 행군하고 있는 일본 군인들. 한국을 전쟁터로 삼았던 러일전쟁 조선의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가기 위해 배가 정박해 있다. 일제 강점기에는 생산된 쌀의 약 20~30%가 일본으로 반출됐다. 이에 조선인들은 쌀이 모자라 보리쌀과 만주에서 들어온 조와 수수 등 잡곡을 혼식하는 것으로 대신했다. 게다가 1937년에는 일본이 지나사변을 일으킨 것이 세계 2차 대전으로 확대되어가자 일본정부는 전시동원령을 내려 군량미를 싼 값으로 확보하기 시작했다. 이 때에도 우리 농민들은 공출미라는 이름으로 일본 정부에 쌀을 헐값으로 바쳐야만 했다. 공출제도에 시달렸던 우리 농민들은 일제로부터 해방은 곧 공출제도의 폐지라고 여길 정도였다. 근대 비운의 역사 한 가운데 있었던 고종황제의 장례식. 그는 일제가 대한제국을 무력으로 합방하자 이태왕(李太王)으로 불리다가 1919년 정월에 세상을 떠났다. 이때 당시 고종이 일본인에게 독살당했다는 풍문이 유포되기도 했다. 이는 민족의 의분을 자아냈고 인산례(因山禮)로 국장이 거행될 때 전국 각지에서 기미독립운동이 일어났다. 타향살이에도 밝은 러시아로 이주한 한인들의 모습이다. 조국을 떠나 타향살이를 하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은 해맑은 어린이들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돌아가신 부모님 묘소 앞에서 곡을 하는 모습. 곡은 상(喪)을 치를 때 소리내어 우는것을 말한다. 회갑연. 회갑은 61세(만60세) 되는 생일로 육갑년도(六甲年度)에서 태어난 지 60년이 지나면 다시 돌아온 간지년(干支年)의 생일을 뜻한다. 환갑이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사람들이 60세를 넘기는 경우가 드물었다. 이에 환갑을 맞이하는 일은 경사 중의 경사로 그 자손이나 제자들이 잔치를 마련하고 축하하는 관습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