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道(길)

道行之而成, 物謂之而然

나 그 네 2022. 4. 7. 19:30

도행지이성, 물위지이연(道行之而成,物謂之而然)

'등산로는 미리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다님으로써 만들어집니다'

오늘날의 표현으로 한다면

'길은 관계의 흔적이고 소통의 결과로 생겨나는 '주름'입니다'

 

도(道)를 아십니까?

도의 의미는 무엇인가.


길을 가는데 낯선 사람이 다가와 “도를 아십니까?” 하고 묻는다. 예전에는 이런 사람들이 주로 지하도에 많았는데 이제는 도처에 포진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 말려들거나 소극적으로 대처하다가 돈을 뜯기거나 몇 년 동안 조직적인 괴롭힘을 당한 사람의 얘기를 심심찮게 듣는다.

그에 대처하는 방법이 인터넷에 많이 올라와 있다. 그런 사람이 다가와 “도를 아십니까?” 하고 물을 때 “너는 아니?” 하고 신경질적으로 되물었다는 지인의 말을 들은 적이있다.

노자를 읽은 친구는 “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도를 도라고 말하면 그것은 이미 도가 아니다)의 뜻을 아느냐?”고 되물어 상대방을 당황하게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도 있다.
도대체 도(道)가 무엇이기에 21세기 대명천지에 이렇게 오가는 행인을 붙들고 당황케 하는 것일까.


국어사전에는 도의 의미가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 ‘종교적으로 깊이 깨우친 이치나 경지’, ‘무술이나 기예 따위를 행하는 방법’이라고 나와 있다. 사전적 해석이 너무 간략해 편의점에 진열된 인스턴트식품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 도교의 본고장인 중국에서 생성된 상형문자 ‘道’의 의미는 단순하지도, 간결하지도 않다.

머리 수(首)+책받침( )으로 이뤄진 道에서 ‘책받침’은 ‘십자로+발(足)’의 형상을 합한 의미라 하니 길을 가리키는 도는 여러 갈래의 갈림길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머리로 고뇌하는 인간의 형상을 그린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상형문자의 의미야 어떻든 중국에서 도는 수천 년 전부터 최고의 선(善), 무상(無上)의 진리로 자리 잡았다. 물론 노자와 장자의 역할이 지대했으나 도라는 무형의 가치가 중국의 정신 사상에 중요한 본류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도가에서 말하는 도가 우주적 범주를 지닌 것이라면, 공자로 대표되는 유가의 도는 인간의 도리를 앞세운 인륜의 범주를 지닌 것이었다.

 

노자와 장자가 도에서 만물이 이뤄지고 그것이 운용되는 과정에 관심을 보이면서 초월지(超越智)를 이상적인 것으로 제시한 반면 공자는 도가 인간에 의해 창조되고 이뤄질 수 있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사람이 길을 넓힐 수 있는 것이지 길이 사람을 넓힐 수 있는 것은 아니다(人能弘道飛刀弘人)”라고 가르쳤다.

주희(朱熹)는 “도란 모든 사물의 당연한 이치(事物當然之理)를 이름이요, 사람들이 공통으로 말미암아야 할 길이다”라고 주석했다.

 

왜 도는 닦아야 하는 것일까.


도에 관한 한 우리말에서는 ‘도를 닦는다’는 말이 가장 많이 쓰인다. 누군가 외출을 삼가고 집에만 머물면 전화를 걸어 “도 닦느냐?” 하고 물을 정도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물으면 ‘도’에 대해서도, ‘닦는다’는 표현에 대해서도 정확한 의미를 말하지 못한다. 도의 의미도 애매하지만 그것을 ‘닦는다’고 표현하는 이유도 모호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일상 용어 중에는 ‘도’ 자 붙은 말이 정말 많다.

태권도, 유도, 합기도, 주도, 다도, 도사,도리, 도승, 도인, 도덕 등등. 단어를 자세히 보면 갈고닦아야 할 분야나 갈고닦는 사람들이나 갈고닦는 일을 가리킬 때가 많다.


도’ 자가 붙은 어휘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단 한 가지, 자세를 중시한다는 점이다. 그것이 태권도라면 태권을 대하는 자세가 곧 태권도다. 이때의 도는 물론 육체적 자세에 국한되지 않고 정신적 자세까지 포함한다.

유도, 합기도, 주도, 다도처럼 세분화된 도가 많지만, 그 모든 것을 통틀어 인간의 자세, 인생의 자세로 환원하면 도는 순간적으로 의미를 바꿔 나와 너, 그리고 우리의 문제가 된다. 인생의 도는 무엇인가.


우리가 하루하루 인생을 살아가는 것은 길을 가는 것과 하등 다를 게 없다. 길을 가는 것이니 당연히 도리(道理)를 지키고 살아야 한다. 하지만 그것을 지키고 산다는 게 말이나 생각처럼 쉽지 않다. 누가 몰라서 안 하나, 그것이 실천하기 어렵기 때문에 못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의 도는 날마다 닦아야 한다. 날마다 닦지 않고 방치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 녹이 슬고 부식해버려 폐기 처분해야 할 지경에 이른다.

우리 주변을 둘러보면 그렇게 방치당한 채 녹이 슬고 부식되는 피폐한 심신이 얼마나 많은가. 남이 아니라 나부터 돌아봐야 할 일이다.


살아가는 모든 순간이 도이다.


우리가 태양계의 한 행성인 지구에 태어나는 순간부터 우리는 일정한 한계에 갇히게 된다. 육체의 한계, 뇌의 한계, 생명의 한계. 결국 그것은 죽어야 풀린다. 그것이 지구인의 운명이다.

물리적으로 설명하면 더 섬뜩해진다.


"인간은 이미 물리적으로 자유롭지 않다. 지금 이 순간에도 중력이 우리를 끌어당기고, 우리 몸의 분자구조는 전자기장을 통해 정해지며, 강한 핵력과 약한 핵력이 있어 몸의 7×1027개 원자를 구현하는 쿼크와 전자·입자가 존재한다. 지구는 적도 기준으로 시속 1,670km를 돌고 있고, 위도 38도에 자리 잡은 한반도는 지금 이 순간에도 시속 약 1,316km를 돌고 있다. 동시에 지구는 시속 10만8,000km로 태양 주위를 회전하고, 태양계 자체는 시속 82만8,000km로 은하수 중심을 돌고 있다. 인간의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말이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야 하는 인간은 적어도 물질적으로는 자유로울 수 없다."

-<김대식의 빅퀘스천>(김대식 지음, 동아시아 펴냄)

우리는 세상에 태어나 죽는 날까지 다람쥐 쳇바퀴 돌듯 24시간 단위의 하루살이를 반복한다. 엄마 뱃속에서 나와 수평으로 누워 있던 아이가 수직으로 자라 성년의 전성기를 보낸 뒤 늙고 병들면 다시 수평 상태가 되어 생명을 마감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수평으로 잠자리에 누워 있던 사람은 잠에서 깨자마자 수직으로 일어나 하루 종일 자신에게 주어지는 미션에 시달리다 밤이면 집으로 돌아와 다시 수평으로 눕는다. 하루를 늘이면 평생이 되고, 평생을 압축하면 하루가 된다. 한 평생 2만5,000~3만 번의 수평-수직적인 하루살이를 되풀이하면서 우리는 지구에 와서 대체 무슨 일을 하는 것일까.


세상에 똑같은 인생을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든 지문이 다르듯 저마다 다른 인생을 살면서 저마다 다른 학습 과정을 되풀이하는 게 인생이다. 시간만 때운다고 절로 인생이 성취되는 것도 아니다.

무수한 선택, 무수한 성공과 실패, 무수한 희망과 좌절을 겪으며 우리는 뭔가가 되어가고 있다. 그 무엇이 무엇인지 마지막 순간까지 알지 못하지만, 그러면서도 무엇인가가 되기 위해 부단히 갈고닦는다. 살아가는 하루하루, 살아 있는 순간순간이 모두 도의 밑거름이 되는 것이다.

 

삭발하고 출가하는 사람만 도를 닦는 게 아니다. 죽을 각오로 히말라야 설산에 가서 도를 닦아야만 해탈에 이르는 게 아니다. 아침저녁 출퇴근을 위해 콩나물시루 같은 전동차와 버스 안에서 짓이겨지면서도 우리는 도를 닦아야 한다. 거창한 목표를 세운 특별한 사람만 도를 닦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지금은 21세기, 이제는 도를 닦는 방식도 세상에 걸맞게 바뀔 필요가, 그것을 누구나 실용적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요컨대 밖이 아니라 안, 거대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미미하고 세세한 것에서 도가 실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아침마다 양치질을 하면서 잡생각에 시달리지 말고 마음속으로 ‘양치도’를 되뇌어보라. 자신도 모르게 욕설이 튀어나오는 운전을 할 때마다 ‘운전도’를 되뇌어보라. 밥알을 씹는 것인지 모래를 씹는 것인지 모른 채 식사할 때는 ‘식사도’를 되뇌어보라. 황망하게 몸을 부리지 말고 걸음을 걸을 때는 ‘보행도’를 되뇌어보라. 누군가를 만나 대화를 나눌 때는 나를 앞세우지 말고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며 ‘대화도’를 되뇌어보라. 휴식을 취할 때도 멍하니 백일몽에 빠져 있지 말고 내면을 들여다보며 ‘휴식도’를 되뇌어보라. 화가 치밀어 올라 숨이 거칠어지면 호흡에 집중하며 ‘호흡도’를 되뇌어보라.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나의 존재에 집중하고 망상과 잡념에 시달리지 않기 위해서다. 그렇게 매 순간 자신에게 집중하는 게 도를 닦는 것이고, 나를 닦는 것이고, 인생을 닦는 것이다.


장자는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이라는 표현으로 도의 진정한 의미를 설파했다. 길은 걸어가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는 뜻이니, 우리가 하루하루 살아가는 길이 곧 도가 된다는 뜻이다.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하는 말에 휘둘리지 말고 마음이 가는 길을 도의 이정표로 삼으라는 가르침일 터이다.


글 박상우(소설가) 일러스트 김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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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도비상도(道可道非常道)


앞의 道는 명사다. 뒤 可道의 道는 '말하다' 라는 뜻의 동사로 쓰였다.

직역하면 "道를 (道라고) 말할 수있으면 이미 도가 아니다." 라는 말이다.

 

한마디로 道가 무엇이다, 있다 없다, 말하지 말라는 말이다. (입 다물어라)

노자가 세상에 잘났다고 도가 어떻구 저떻구 떠드는 사람한테 하는 일성이다.  (공자한테 한 말로 안다) 

 

되는 것을 일러 됨이라 하고 되지 않는 것을 일러 되지 않음이라 한다.

道可乎可 不可乎不可 (도가호가 불가호불가)

길은 다녀서 생기고 사물도 그렇게 불러서 그렇게 된다.

道行之而成 物謂之而然 (도행지이성 물위지이연)

도는 자연이 생성되고 사라지게 하는 원리이자 흐름 혹은 패턴이다.

어느 순간 4계절이 생겨나고 봄, 여름, 가을, 겨울의 과정이 매 해 반복되게 하는 원리를 도라고 명명한 것이다.

4계절처럼 만물을 생장 쇠멸하게 하는 그 어떤 패턴 혹은 그 이치가 도이다.

없음에서 있게 하고 있음에서 없게 하는 대원칙에 따라 모든 만물은 존재하고 사라지는 것이다.

 

장자에서는 유학에서 말하듯 道는 天理는 아니다.

만물의 근원이라는 점에서 비슷하지만, 만물 모두가 따라야 하는 합법칙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태극이 있기 전, 육합이 생기기 전 천지가 있기 전에 존재했지만 그렇다고 사물을 초월해 있는 것은 아니다.

사물 각각에 내재한다.

동시에 사물에 내재하면서 사물들 사이에 존재한다.

만물을 초월해서 만물을 주재하는 법칙이 아니라.

만물에 내재하면서 만물이 그렇게 부딪치고 그렇게 되도록 만드는 힘이다.

 

노자의 “도를 도라고 하면 항상하는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 하면 항상 하는 이름이 아니다.

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도가도 비상도 명가명 비상명)

도(道)라고 하나의 정의를 내리는 순간 더는 도가 아니다.

도(道)는 원리이지만 도가 만물 각각에 내재한다는 점에서 도는 하나의 절대 보편의 진리는 아니다.

장자는 순환이라는 자연의 대원칙에 동참하면서 그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사는 것이 도였던 것이다.

 

결국 도(道)만물(萬物)이 스스로 그렇게 살아가는 방법이다.

 

 

道行之而成 物謂之而然 ( 도행지이성 물위지이연 )

()은 사람이 오가며 다니므로(行之) 이루어(만들어) 지는 것이고(而成),

만물(萬物)은 그렇게 불러줌으로서(謂之) 그렇게 되는 것이다(而然).

 

인간(人間)의 정도(正道), 즉 사람으로서 올바른 도리(道理)와 도덕(道德)을 행하는 것.

덕행(德行)을 쌓는 것 등은 말, 생각, 이론(理論)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고 실행(實行),

실천(實踐)에 옮겨야만 비로소 이루어지는 성립(成立)되는 것이며, 세상 만물은 모두 본디

,본래(本來) 생긴 자연(自然), 천연(天然) 그대로가 제 참모습, 본연(本然), 진면목(眞面目)

이라는 말씀.

- 莊子 內篇(장자 내편) 齊物論(제물론).

 

道行之而成(도행지이성)을 새기며,,,,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 물위지이연(物謂之而然)

신선(神仙), 도사(道士)들의 선문답(禪問答) 같은 장자(莊子)’의 이 말씀을

단편적인 글귀, 문구(文句)만으로는 도저히 이해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제물론(齊物論)’ 구절(句節)을 좀 더 내려가 살펴 보지만 역시(亦是)

눈앞이 캄캄하고 머리가 복잡(複雜)하기는 마찬가지...

이럴 때는 단순 무식(單純無識)’ 해지는 것이 최상(最上), 최선(最善)의 방법

너무 철학적, 학문적으로 심층 깊이 파고들거나 고상(高尙)하게만 풀이하려

들면 머리만 아프고 생각(生覺)났던 생각마저 혼돈(混沌)이 생긴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그냥 , 언어(言語) 장난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부담없이 가볍게 다가가면

마음, 심사(心事) 편하고 재미, 흥미(興味)도 있다.

장난은 노소(老少)와 무관(無關)하게 재미 있으니까.

세상살이, 세상사(世上事), 인생사(人生事)정답(正答)‘도 없거니와 꼭 정답만

옭은 것고 아니니 설사 풀이, 해석(解釋)이 틀렸다 하더라고 그냥 그러려니 하면 된다.

내 맘(我心)이니 누가 옳다 그르다, 맞다 틀렸다, 시비(是非)를 걸든 말든...

도행지이성(道行之而成)‘은 몰라도 하나는 조금 알 듯 하기도 하니...

 

물위지이연(物謂之而然)...

김 춘수(金 春洙) 시인(詩人)’의 꽃이란 시() 한 구절에 나오는 것.

그런 거 아닌가... ?!

 

 

因是因非(인시인비) 因非因是(인비인시)

옳은 것이 있으므로 그릇된 것이 있고, 잘못된 것이 있기에 바른 것도 있다.

是亦彼也 (시역피야) 彼亦是也(피역시야)

이것() 역시(亦是) 저것() 또한 이것()이니

 

彼亦一是非(피역일시비) 此亦一是非(차역일시비)

저것 역시 하나의 시비(是非)이고, 이것 또한 하나의 시비(是非)일 뿐 ...

果且有彼是乎哉(과차유피시호재)

과연(果然) 저것(), 이것()이란 게(것이) 있기나 한 것인가?!

果且無彼是乎哉(과차무피시호재)

아니면 저것도 이것도 아무 것도 없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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