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8세의 잦은 이혼을 두고 호색가의 여성 편력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는 천생 국왕, 그러니까 정치가였다.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한 것은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위를 계승할 혈통이라고는 메리 공주뿐이었는데, 헨리 8세는 공주가 왕위를 이을 경우 발생할 정치적 혼란을 깊이 염려했다. 예컨대 부왕 헨리 7세만 해도 모계를 통해 랭커스터 왕가의 가장으로 인정받은 탓에 많은 반발과 반란을 겪어야 했다. 더구나 병약하여 늘 몸져누운 아라곤의 캐서린에 대한 애정도 식은 지 오래였다.
캐서린과의 이혼은 성공회(聖公會, The Anglican Domain)라 일컬어지는 영국국교회가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혼을 금하는 가톨릭교회의 원칙에 따라 헨리 8세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아라곤의 캐서린은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이모였으니, 클레멘스 7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다. 이혼 불허. 이에 대해 헨리 8세는 1533년 1월 25일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과 비밀 결혼을 하고 1534년에는 수장령으로 맞섰다. 수장령이란 국왕을 영국 교회 유일의 최고 수장(首長)으로 규정한 법령이다. 수장령으로 영국 교회는 로마 교회에서 분리됐다.
앤 불린은 1533년 9월 훗날의 엘리자베스 1세를 낳았고, 이듬해 유산했으며, 1536년에는 왕자를 사산했다. 헨리 8세가 그토록 고대하던 왕자는 태어나지 않았다. 잔인한 표현이지만 앤 불린의 용도가 폐기된 셈이었다. 헨리 8세의 이혼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앤 불린은 간통 혐의를 뒤집어쓰고 1536년 5월에 처형당했다. 이는 리처드 버튼이 헨리8세로, 주느비에브 뷔졸드가 앤 불린으로 분한 찰스 재롯 감독의 영화 <천일의 앤>(1969년)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낯설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음 왕비는 앤 불린의 시녀였던 제인 시모어. 그녀는 헨리 8세가 그토록 고대하던 왕자, 훗날의 에드워드 6세(1537~1553년)를 낳았다. 그러나 제인 시모어는 왕자를 낳고 출산 후유증으로 곧 세상을 떠났다. 헨리 8세가 사실상 진정한 왕비이자 아내로 여긴 여인은 아들을 낳은 제인 시모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인 시모어를 이은 다음 왕비가 바로 클레브스의 앤이었고, 그다음은 캐서린 하워드였지만, 하워드는 거듭 불륜을 저질러 1542년 참수당했다.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는 이미 두 번 결혼한 경력이 있었고, 제인 시모어의 오빠 토머스 시모어를 연모하고 있었지만 헨리 8세를 거부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노년의 헨리 8세를 보살피며 순종하다가 헨리 8세가 죽은 뒤 토머스 시모어와 결혼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