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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공산주의의 혁명가 마오쩌둥

나 그 네 2009. 1. 9. 13:15

마오쩌둥


시작과 끝이 명확하지 않은 전대미문의 문화대혁명. 문화혁명의 정치적 열광이 정점에 이른 시기를 1967년 1월 8일 반마오파를 제거한 시점부터라고 보는 데는 학자들 사이에서도 이견이 없다. 이른바 마오의 후반기 권력 독점이 시작되고 폭력적인 운동으로 전개되기 시작된 것이 가 제거된 시점부터라고 보는 것이다.

 

 

문화혁명이 언제 시작돼서 언제 끝났는지 정확하게 판정할 수 있는 논리적인 방법은 없다. 단지 베이징(北京)대학교 학생들이 학교 당국에 대대적인 도전을 시작한 1966년부터 마오의 추종자인 4인방 세력이 축출되고 마오가 사망한 1976년까지를 문화혁명 기간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때 ‘만민 평등과 조직 타파를 부르짖는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혁명’이라는 평가를 받았던 문화혁명은 1981년 6월에 열린 중국공산당 제11기 제6차 중앙위원회 전원 회의에서 ‘당 국가 인민에게 건국 이래 가장 심한 좌절과 손실을 가져다준 마오쩌둥의 극좌적 오류이며 그의 책임’이라고 규정되며 마침내 역사적 평가에서도 종언을 고했다. 전대미문의 혁명을 지지하고 조종하고 이를 통해 권력을 유지했던 마오를 미국의 대표적인 중국사학자 조너선 D. 스펜스(1936~ )는 ‘전통적인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해 무질서를 만들고 지배한 정치가’라고 평가한다. 스펜스는 중국의 한 빈한한 농촌 출신의 젊은이가 ‘어떻게 그 괴상한 비행(飛行)을 그토록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었는지’ 의문을 던진다. 그 이유를 스펜스는 “무질서라는 한정된 개념을 크게 확장한 뒤 그것을 장구한 격변의 모험 속에 끌여들였다”고 말한다. 스펜스가 말한 무질서란 바로 중국공산당에 의해 1981년 ‘극좌적 오류’라고 평가받은 문화혁명을 지칭하는 것이다. 마오는 문화혁명이라는 무질서를 극단적으로 확장해 괴상한 비행을 오래 지속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마오는 1893년 12월 26일 중국 후난(湖南) 성 창사(長沙) 남서쪽 사오산(韶山) 마을의 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마오의 형제는 모두 7명이었는데 이 중 아들 셋만 살아남았다. 마오는 살아남은 삼형제 중 맏이였다. 여섯 살 때부터 농사일을 도운 마오는 여덟 살 때 마을 서당에 입학해 글을 배우면서도 당시 중국의 모든 농촌에서 그랬듯이 농사일을 계속했다. 서당에서 5년간 유학을 배운 마오는 열세 살 되던 1907년, 이웃 마을 뤄(羅) 씨 가문의 여인과 결혼했다. 마오 부부는 2~3년 동안 함께 농사를 지었으나 아내는 스물한 살에 죽고 말았다. 이 결혼에 대해서 마오가 훗날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둘 사이에 자식은 물론 별다른 사건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일찍 아내를 잃었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마오는 1910년 집을 떠나 인근에 있는 샹탄(湘潭)이란 도시에서 임시직으로 일을 시작했다. 일을 하면서 한 법학도와 중국학자로부터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는데, 이 무렵 마오는 다양한 독서를 처음으로 시작했다. 이 때 읽은 책 중 하나가 제국주의의 식민 지배를 다룬 <중국의 분할>이라고 한다. 1910년 샹탄 가까이에 있는 샹샹(湘鄕)중학교에 입학한 마오는 본격적으로 세계 정세를 공부했고, 중국의 유명 개혁가의 저작도 읽기 시작했다. 마오는 자신이 샹샹중학교를 선택한 이유는 ‘급진적이고 서양의 신지식을 강조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세계에 대한 관심과 지식에 대한 열정이 불붙기 시작한 마오는 샹탄으로 온 지 불과 몇 달 만에 성도인 창사로 가 창사의 한 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마오는 청 황실에 반대하는 혁명당을 조직한 쑨원에 대해 알게 되고, 그에 관한 글이라면 무엇이든 닥치는 대로 읽었다.


1912년 2월 마침내 청조가 멸망했다. 마오는 1913년 가을 창사사범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창사의 공공 도서관에 틀어박혀 엄청난 양의 독서를 했다. 훗날 마오는 이때 ‘세계 지리와 세계사’를 집중적으로 공부했다고 회상했다. 이 시기에 마오는 처음으로 서구의 정치 이론을 진지하게 학습하기 시작했다. 그 무렵 그가 읽은 저작으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다윈의 <진화론>, 허버트 스펜서의 <논리학> 등이 있다. 그 밖에 존 스튜어트 밀, 루소, 몽테스키외 등도 ‘스무살 마오’가 닥치는 대로 읽어치운 저작 가운데 하나였다.


 

창사사범학교에서 마오는 그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스승이라고 할 수 있는 교사 양창지(楊昌濟)를 만난다. 마오는 양창지에게 사회과학 전반에 대한 폭넓은 지식을 배웠다. 1918년 창사사범학교를 졸업한 마오는 양창지가 베이징대학교 교수가 되자 그의 도움을 받아 베이징대학교 도서관 사서 보조로 일하기 시작했다. 사서 보조로 일하는 동안 사서 리다자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리다자오는 베이징대학 교수들과 만든 잡지 <신청년>에 세계 각국의 정치 정세에 대한 글을 싣고 있었다. 마오는 <신청년> 1918년 10월호에 실린 리다자오의 글 ‘볼셰비즘의 승리’라는 글을 읽고 볼셰비키 혁명(1917년) 이후 소련에 들어선 혁명적인 새 질서에 대해 알게 되었다. 리다자오는 당시 중국에서도 가장 선진적인 사상이라 할 수 있는 볼셰비즘을 소개하면서 정기적으로 혁명 이론을 토론하는 ‘마르크스주의 연구회’를 결성했다. 물론 마오는 이 연구회는 물론 베이징의 지식인 그룹에 끼지 못했다. “나는 정치와 문화를 주제로 그들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지만 그들은 워낙 바빴다. 그들은 남부 사투리를 쓰는 사서 보조원의 말을 한가롭게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라고 당시를 회고한 바 있다.

 

1919년 어머니가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고향으로 돌아온 마오는 창사소학교와 중학교에서 역사 교사로 12월까지 재직한다. 이 기간 동안 마오는 거의 혼자서 모든 기사를 쓴 잡지 <상강평론>을 발행했다. 잡지는 7월 14일부터 8월 14일까지 주간으로 네 차례 발행됐으나 지역 군벌에 의해 곧 폐간됐다. 그러나 1919년 7월 14일자에 실린 <상강평론> 창간 선언문은 당시 마오가 가지고 있던 정치적 견해를 분명하게 요약하고 있다. 그는 창간 선언문에서 ‘베이징의 리다자오’의 수사법에서 영향을 받은 것이 분명한 사뭇 감동적인 어조로 “바야흐로 인류 해방을 위한 운동이 시작됐으며 모든 낡은 편견에 의문을 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오는 창간호에 모두 스물여섯 편의 글을 썼고, 2000부를 인쇄해 거리에서 직접 팔았다.


1919년 10월 5일 어머니가 사망하자 마오는 장례식을 치르고 12월 다시 양창지 교수를 만나기 위해 베이징으로 갔다. 그때 양창지 교수는 심한 병을 앓고 있었다. 1920년 1월 17일 양창지 교수가 숨을 거두고 장례식을 치른 다음 날 마오의 아버지가 고향에서 사망했다. 불과 몇 달 사이에 마오는 어머니를 비롯해 자신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스승, 아버지 이렇게 세 사람을 한꺼번에 잃었다. 그러나 마오는 아버지의 장례를 치르러 고향으로 가지 않고 베이징에 머물렀다. 이미 마오는 자신의 정치적 미래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 리다자오와 친해져 양창지 교수의 죽음을 애도하고 있었다. 당시 리다자오는 ‘공산당 선언’을 번역 중이었다.


1920년 11월 중국 공산당이 창당되고 1921년 7월 23일 상하이에서 중국 공산당 제1차 당대회가 열렸다. 마오는 창사 지역의 소그룹에서 온 2명 가운데 한 사람으로 참가했다. 이 대회에서 마오는 후난에서 당을 건설하라는 지침을 받고 1921년 8월 창사로 돌아왔다. 이후 마오의 활동 범위는 급속하게 넓어졌고, 당 조직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또 마오는 정신적 아버지였던 양창지 교수의 딸 양카이후이와 동거를 시작했다. 그리고 1922년 10월 장남 마오안잉(毛岸英)이 태어났다. 1923년 11월에는 둘째 아들 안칭(岸靑)도 태어났다.

 

 

 

1926년 8월 마오는 농민 세력을 규합해 국민당과 합작으로 후난 성의 군벌을 물리치고 창사에 들어가는 등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나 국민당과의 합작이 깨지고 마오의 홍군은 1930년 10월 창사를 공격했으나 실패했다. 이때 양카이후이는 창사에서 어린 세 아들과 은밀하게 살고 있었으나 국민당의 소탕 작전에 걸려 양카이후이는 총살당했다. 세 아들과 유모는 친구들의 도움으로 상하이로 보내졌으며, 이 시기에 막내는 죽고 안잉과 안칭은 1936년 소련으로 보내졌다.

 


공산당의 기세에 위기감을 느낀 국민당은 1927년부터 대대적인 공세를 시작했다. 국민당의 공세에 밀린 공산당은 ‘경이적인 업적’으로 기록되는 대장정을 시작했다. 1934년 10월부터 1935년 6월까지 이어진 대장정 기간 동안 중국공산당은 죽음과 고통으로 가득 찬 악몽 같은 행군을 이어갔다. 6월 옌안에 이르기까지 마오의 군대는 칭하이와 간쑤의 늪지와 산악 지대를 행군하는 지옥 같은 행군을 이겨냈다. 이 과정에서 마오는 부인 허쯔진과의 사이에서 딸을 낳았으나 워낙 위급했던 상황이라 갓난아이를 현지 농민 가정에 맡기고 떠나야 했다. 이 딸은 나중에도 찾지 못했다.


1936년 옌안에 닻을 내린 마오와 공산당은 전투가 치열한 동쪽 접경 지역과 달리 상대적으로 안전한 서부 지역에 머무르면서 내부의 힘을 기를 수 있었다. 대장정을 완수한 마오가 분파 투쟁을 종료시키고 당의 지도권을 획득한 시기도 옌안 시대였다. 대장정은 마오와 그의 군대에 가혹한 시련을 주었으나 마오 개인에게는 당에서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질 수 있는 기회도 주었다. 자신을 중심으로 당 지도력을 확보하기 시작한 마오는 1943년 중국공산당에서는 그때까지 아무도 가지지 못했던 두 가지 새로운 직함을 받았다. 공산당중앙위원회 주석과 정치국 의장을 동시에 겸임하게 된 것이다. 공산당 총비서는 “이제 중국은 강력하고 위대한 혁명가로서 시련을 이겨낸 진정한 지도자를 갖게 되었다”고 선언했다.

 

1945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중국 대륙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각축이 시작됐다. 마오의 공산군은 4년여의 전투 끝에 차례로 국민당을 몰아내며 1949년 1월 베이징에 입성했다. 4월에는 난징, 5월에는 상하이, 8월에는 창사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1949년 10월 1일, 마침내 마오는 베이징 톈안먼 관망대에 서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어 1950년에서 1953년까지 이어진 한국전쟁이 휴전 조약으로 끝나자 마오는 국가 재건 사업인 대약진운동에 착수했다. 1958년까지 이어진 이 운동을 통해 전국적인 토지개혁운동, 협동농장사업 등이 실시됐다. 마오가 생각했던 대약진운동은 대규모 협동농장식 농업을 통해 직업, 성, 연령, 교육 정도의 차이를 없애는 유토피아에 가까운 꿈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60년부터 2년여 동안 대기근이 중국 전역을 휩쓸면서 비현실적인 계획을 이룩하려는 대약진운동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아무런 곡식도 자라지 않는 논밭에서 곡물을 조달하는 법은 여전히 시행됐고, 마오의 꿈은 악몽이 됐다.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실용 수정주의 노선이 당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 그러나 정치적 위기를 느낀 마오의 교조주의적 노선이 1967년 1월 8일 이른바 친위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 정쟁을 일으켜 당시 당권을 쥐고 있던 류사오치와 펑더화이, 덩샤오핑을 축출한다. 문화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대약진운동이 실질 경제에서 이상적인 평등 사회를 꿈꾼 것이라면, 문화혁명은 생활 문화에서의 탈권위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마오를 중심으로 한 교조주의 노선이 경제 계획에서 실패하자 또 다른 혁신 운동을 통해 권력 강화를 노린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수정주의 노선을 지향하다 실권한 류사오치와 펑더화이는 투쟁 집회에서의 비판 등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곧 사망했다. 덩샤오핑은 장시 성의 트랙터 공장에서 노동을 하며 치욕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1976년 마오가 사망할 때까지 무려 200만 명의 공산당 간부가 가혹한 자아비판 심문을 받았다. 1976년 9월 9일 마오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마오가 전 생애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이성이 만들어낸 완전한 유토피아’를 향한 노력도 끝이 났다.

 

마오의 삶을 다룬 책으로는 로스테릴이 쓴 <마오쩌둥>(이룸)이 대표적이다. 또 대장정을 일궈낸 마오의 인생에 대해 쓴 유명한 저작으로는 에드가 스노우의 <중국의 붉은 별>(두레)도 있다.

 

어쩌면 문화혁명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마오의 삶을 읽는 것보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 민중이 겪은 신산한 삶을 다룬 소설을 읽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만민의 평등한 삶을 위해 조직된 문화혁명이 실제로 민초에게 얼마나 가혹한 형벌이 됐는지를 읽다 보면, 마오이즘이라는 극단적인 이성주의의 한계가 어떤 것인지 잘 알게 된다. 문화혁명 기간 동안 개인이 겪은 뼈아픈 삶을 기록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다이허우잉의 여러 작품이 있다. <사람아 아, 사람아!>(다섯수레), <시인의 죽음>(을유문화사)는 또 다른 췌언이 필요 없을 정도로 시대의 수레바퀴에 치인 개인의 아픔을 다루고 있다. 젊은(1960년생이니 젊지도 않지만….) 중국 작가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위화가 쓴 소설 <형제>(휴머니스트)도 문화혁명 와중에 고통받는 개인의 삶을 감동적으로 그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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