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일본이 항복을 선언하자 중국 대륙에서는 국민당과 공산당의 각축이 시작됐다. 마오의 공산군은 4년여의 전투 끝에 차례로 국민당을 몰아내며 1949년 1월 베이징에 입성했다. 4월에는 난징, 5월에는 상하이, 8월에는 창사를 손에 넣었다. 그리고 1949년 10월 1일, 마침내 마오는 베이징 톈안먼 관망대에 서서 ‘중화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했다. 이어 1950년에서 1953년까지 이어진 한국전쟁이 휴전 조약으로 끝나자 마오는 국가 재건 사업인 대약진운동에 착수했다. 1958년까지 이어진 이 운동을 통해 전국적인 토지개혁운동, 협동농장사업 등이 실시됐다. 마오가 생각했던 대약진운동은 대규모 협동농장식 농업을 통해 직업, 성, 연령, 교육 정도의 차이를 없애는 유토피아에 가까운 꿈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1960년부터 2년여 동안 대기근이 중국 전역을 휩쓸면서 비현실적인 계획을 이룩하려는 대약진운동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아무런 곡식도 자라지 않는 논밭에서 곡물을 조달하는 법은 여전히 시행됐고, 마오의 꿈은 악몽이 됐다.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자 류사오치와 덩샤오핑을 중심으로 한 실용 수정주의 노선이 당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 그러나 정치적 위기를 느낀 마오의 교조주의적 노선이 1967년 1월 8일 이른바 친위 쿠데타라고 할 수 있는 정쟁을 일으켜 당시 당권을 쥐고 있던 류사오치와 펑더화이, 덩샤오핑을 축출한다. 문화혁명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대약진운동이 실질 경제에서 이상적인 평등 사회를 꿈꾼 것이라면, 문화혁명은 생활 문화에서의 탈권위 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정치적으로 보면 마오를 중심으로 한 교조주의 노선이 경제 계획에서 실패하자 또 다른 혁신 운동을 통해 권력 강화를 노린 것이라고 해석할 수도 있다.
수정주의 노선을 지향하다 실권한 류사오치와 펑더화이는 투쟁 집회에서의 비판 등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곧 사망했다. 덩샤오핑은 장시 성의 트랙터 공장에서 노동을 하며 치욕의 세월을 견뎌야 했다. 1976년 마오가 사망할 때까지 무려 200만 명의 공산당 간부가 가혹한 자아비판 심문을 받았다. 1976년 9월 9일 마오는 83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야 마오가 전 생애를 통해 이루고자 했던, ‘이성이 만들어낸 완전한 유토피아’를 향한 노력도 끝이 났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