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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8세

나 그 네 2009. 1. 9. 13:12

 

헨리 8세


캐서린, 앤 불린, 제인 시모어에 이어 클레브스의 공주, 앤과의 네 번째 결혼. 신랑 나이 49세, 신부 나이 25세. 전형적인 정략 결혼으로 외교적 이유에서 이루어진 결혼이었다. 당시 영국은 가톨릭 국가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로부터 위험에 처해 있었고 이에 대응하기 위해 유럽 북방 개신교 세력과의 동맹이 필요했다.

 

클레브스의 앤은 뒤셀도르프 근처 클레브스 공국의 통치자 요한 3세의 둘째 딸로 태어났다. 요한 3세는 에라스뮈스의 영향을 받아 온건한 종교개혁파의 입장을 취한 인물이었다. 클레브스 공국과의 정략 결혼은 헨리 8세의 총신 토머스 크롬웰의 주도하에 이뤄졌는데, 미인 좋아하기로 정평 난 헨리 8세는 앤의 용모를 확인하기 위해 궁정화가 한스 홀바인을 클레브스로 보내 그녀의 초상화를 그려오게 했다. 홀바인이 그려온 그림을 보고 앤과의 결혼을 결정한 헨리 8세는 실제 앤을 만나고는 그녀의 모습이 그림과 달라 실망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러나 헨리 8세는 처음부터 앤을 마뜩지 않아 했고 그림은 요식 행위에 불과했다는 설도 있으니, 그가 결혼을 결심한 것은 단지 외교적 실익이 중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헨리 8세는 결혼 이후 클레브스의 앤을 ‘플랑드르의 암말’이라고 공공연히 조롱하며 가까이 하지 않았고, 결국 같은 해 7월 이혼했다. 앤은 정숙한 주부 스타일이었지만 지적 교양이 부족하고 영어도 못했다. 더구나 헨리 8세는 궁녀 캐서린 하워드를 마음에 두고 있던 터였다. 6개월에 불과한 짧은 결혼 생활. 앤이 헨리 8세의 이혼 요구를 받아들인 것은 지혜로운 결정이었다. 이혼 요구를 거부하다가 간통죄를 뒤집어쓰고 처형당한 앤 불린의 사례가 있지 않은가. 이혼당한 클레브스의 앤은 영국에 머무르며 영지와 연금을 받고 왕실의 주요 행사에도 초청받는 등 평온하게 지내다가 헨리 8세가 사망한 지 10년 뒤인 1557년에 세상을 떠났다.

 


헨리 8세만큼 무수한 이야기를 낳은 왕이 또 있을까. 클레브스의 앤 이후로도 캐서린 하워드(불륜을 저지른 죄로 처형당함), 캐서린 파 이렇게 두 여인과 결혼했으니 6명의 왕비와 결혼하고 이혼하고, 또 그들 가운데 둘을 처형시키는 과정이 모두 극적인 요소를 두루 갖춘 ‘드라마’ 그 자체다. 사랑과 배신, 불륜과 죽음, 정치적 음모와 갈등, 종교와 외교 분쟁 등으로 점철된 그 드라마는 단지 헨리 8세의 개인적인 애정 행각이 아니라 당시 영국의 국내외 정치 상황과 맞물린 경우가 많았다. 이 점이 헨리 8세를 17세기 초 셰익스피어 희곡 <헨리 8세> 이후로도 오랜 세월동안 그를 서양 사극(史劇)의 단골 주인공으로 만들어주었다.
“맙소사! 하느님, 이건 너무 지독하군. 아냐! 저 여자가 그 초상화의 주인공이라니…. 나는 싫다. 저 여자는 안 돼. 천만에, 그건 안 돼.” 극단 산울림이 1971년 10월 국립극장에서 상연한 <헨리 8세와 그 여인들>(헤르만 그레이시커 원작)의 대사 중 헨리 8세가 클레브스의 앤을 처음 보고 그 추한 용모에 소스라치게 놀라 실망하는 대목이다. 이렇게 연극, 드라마, 영화, 소설에서 주로 헨리 8세의 결혼과 여성 편력을 다루어서인지는 몰라도 영국 국왕으로서의 헨리 8세, 즉 정치가로서의 그를 간과하는 경우가 많다.
헨리 8세가 국왕으로 등극할 무렵(1509년) 영국은 오랜 혼란기를 거쳐 안정기로 들어선 참이었다. 헨리 8세의 부왕(父王) 헨리 7세는 장미전쟁의 소용돌이와 반란의 폭풍을 잠재우고 각종 제도를 정비하면서 왕권을 강화시켰다. 그는 장미전쟁의 숙적 랭커스터가의 헨리 7세와 요크가의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니(첫째 아들은 일찍 사망), 헨리 8세의 탄생 자체가 평화와 안정을 뜻했던 셈이다.

 

부왕이 닦아놓은 평화와 안정, 그리고 강화된 왕권 위에서 이 다혈질의 변덕쟁이 기분파에 여색을 밝히면서도 교양이 풍부하고 운동, 사냥, 춤에도 다재다능한 왕은 어떤 정치를 펼치게 될 것인가? 국내 정치의 안정이 국외로 눈을 돌리게 만든 것일까? 헨리 8세는 교황 율리우스 2세(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의 후원자로 유명하다)가 베네치아에 대한 영향력을 놓고 신성로마제국과 스페인을 동맹 세력으로 끌어들여 프랑스와 벌인 전쟁에 뛰어들었다. 1513년 9월 헨리 8세는 프랑스와 손을 잡은 스코틀랜드군을 격파했지만 남은 것은 전쟁으로 인한 재정적 부담과 전쟁에서 승리했다는 영국 국민들의 자부심이었다.

 

 

헨리 8세의 잦은 이혼을 두고 호색가의 여성 편력으로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는 천생 국왕, 그러니까 정치가였다.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한 것은 그녀와의 사이에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위를 계승할 혈통이라고는 메리 공주뿐이었는데, 헨리 8세는 공주가 왕위를 이을 경우 발생할 정치적 혼란을 깊이 염려했다. 예컨대 부왕 헨리 7세만 해도 모계를 통해 랭커스터 왕가의 가장으로 인정받은 탓에 많은 반발과 반란을 겪어야 했다. 더구나 병약하여 늘 몸져누운 아라곤의 캐서린에 대한 애정도 식은 지 오래였다.

 

캐서린과의 이혼은 성공회(聖公會, The Anglican Domain)라 일컬어지는 영국국교회가 확립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이혼을 금하는 가톨릭교회의 원칙에 따라 헨리 8세의 이혼을 허락하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아라곤의 캐서린은 신성로마제국 카를 5세의 이모였으니, 클레멘스 7세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심기를 건드릴 수 없었다. 이혼 불허. 이에 대해 헨리 8세는 1533년 1월 25일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불린과 비밀 결혼을 하고 1534년에는 수장령으로 맞섰다. 수장령이란 국왕을 영국 교회 유일의 최고 수장(首長)으로 규정한 법령이다. 수장령으로 영국 교회는 로마 교회에서 분리됐다.

 

앤 불린은 1533년 9월 훗날의 엘리자베스 1세를 낳았고, 이듬해 유산했으며, 1536년에는 왕자를 사산했다. 헨리 8세가 그토록 고대하던 왕자는 태어나지 않았다. 잔인한 표현이지만 앤 불린의 용도가 폐기된 셈이었다. 헨리 8세의 이혼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은 앤 불린은 간통 혐의를 뒤집어쓰고 1536년 5월에 처형당했다. 이는 리처드 버튼이 헨리8세로, 주느비에브 뷔졸드가 앤 불린으로 분한 찰스 재롯 감독의 영화 <천일의 앤>(1969년)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알려져 낯설지 않은 이야기이기도 하다.

 

다음 왕비는 앤 불린의 시녀였던 제인 시모어. 그녀는 헨리 8세가 그토록 고대하던 왕자, 훗날의 에드워드 6세(1537~1553년)를 낳았다. 그러나 제인 시모어는 왕자를 낳고 출산 후유증으로 곧 세상을 떠났다. 헨리 8세가 사실상 진정한 왕비이자 아내로 여긴 여인은 아들을 낳은 제인 시모어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제인 시모어를 이은 다음 왕비가 바로 클레브스의 앤이었고, 그다음은 캐서린 하워드였지만, 하워드는 거듭 불륜을 저질러 1542년 참수당했다. 마지막 왕비 캐서린 파는 이미 두 번 결혼한 경력이 있었고, 제인 시모어의 오빠 토머스 시모어를 연모하고 있었지만 헨리 8세를 거부할 길이 없었다. 그녀는 노년의 헨리 8세를 보살피며 순종하다가 헨리 8세가 죽은 뒤 토머스 시모어와 결혼했다.

 

이 긴 결혼과 이혼의 과정에서 주목해야 할 ‘세 사람의 토머스’가 있다. 토머스 울지, 토머스 크롬웰, 그리고 토머스 모어다. 이들은 이름이 ‘토머스’라는 공통점 외에 모두 헨리 8세의 총신이었고 또한 헨리 8세에 의해 처형당했다. 대주교, 대법관, 추기경으로서 헨리 8세의 뜻을 실행에 옮기는 데 누구보다 충실했던 울지는 권력 남용과 귀족 억압, 그리고 부정 축재로 지탄의 대상이 된 끝에 실권하고 반역 혐의로 체포된 뒤 죽었다(1530년). 헨리 8세는 울지에게 집중되던 비난의 화살이 자신에게로 향할 것을 염려했다. 더구나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는 문제를 해결하는 데 울지는 별 소용이 없었다.

 

울지 이후 헨리 8세의 신임을 받은 인물이 울지의 측근이었던 토머스 크롬웰이다. 크롬웰은 수도원을 해산시키고 그 재산을 몰수하는 등 교회 권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일에 주력했다. 수장법 제정과 의회 통과에서도 그의 역할이 매우 컸다. 크롬웰은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에서 해결사 역할을 한 셈이다. “정치가는 아무도 모르게 왕의 입맛을 만족시키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그의 말을 통해서도 그가 헨리 8세의 대단한 충복이었음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크롬웰의 운명은 한때 자신이 모셨던 울지와 같았다. 일련의 개혁 조치를 추진하면서 많은 정적을 만든 크롬웰의 운명은, 사실상 자신이 추진해 성사시킨 클레브스의 앤과 헨리 8세의 결혼이 파경으로 치달으면서 급전직하했다. 추진할 때부터 결혼에 반대하는 이들이 많았던 터에 크롬웰의 정적들은 책임론을 강하게 제시했고, 결국 왕의 이혼 직후(1540년 7월)에 처형당했다. 두 사람의 토머스를 처형시킨 헨리 8세는 더 이상 총신을 두지 않았고, 오랜 재위와 풍부한 정치 경험을 통해 쌓은 노련함도 노쇠함으로 바뀌게 되었다.

 

또 한 사람의 토머스는 소설 <유토피아>로 유명한 인문주의자 토머스 모어다. 그의 식견에 매료된 헨리 8세는 그를 대법관으로 임명하며 친구처럼 신임했지만, 모어는 정치가라기보다는 학자이자 문장가였다. 헨리 8세의 뜻을 정치적으로 충실히 이행하는 집행자가 아니라 일종의 학술 고문과 비슷한 역할에 머물렀던 것. 헨리 8세가 아라곤의 캐서린과 이혼하는 데 반대한 모어는 교황청에 보낼 이혼 청구서에 서명하는 것도 거부했고(모어는 1935년에 가톨릭 성인이 됐다), 결국 반역죄로 1535년 7월 목이 잘렸다.

 

 

 

총신 세 사람을 처형시키고 여섯 차례 결혼했으며 그 가운데 왕비 둘을 처형시킨 국왕. 이렇게만 보면 헨리 8세는 폭군의 요소를 갖춘 것 같지만 ‘국왕’ 헨리 8세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비교적 후한 편이다. 그는 전쟁에서 거듭 승리를 거두었고, 국민의 원성을 살 만한 정치를 펴지도 않았으며, 대외적으로도 복잡한 국제 정세 속에서 무난하게 영국을 이끌었다. 무엇보다도 왕권을 강화하고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영국 국민들 입장에서 보면 그의 치세는 무척이나 다사(多事)했으되 그렇게 다난(多難)하지는 않았다고나 할까.

 

죽음이 가까워진 헨리 8세의 마음은 온통 후계자 에드워드에 대한 걱정뿐이었다. 열 살에 불과한 늦둥이 에드워드가 즉위하면 과연 안정적으로 통치할 수 있을까? 자신의 치세를 통해 강화된 왕권을 계속 유지할 수 있을까? 네 번째 토머스, 즉 영국국교회의 기틀을 다지는 데 크게 공헌한 대주교 토머스 크랜머에게 에드워드를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는 헨리 8세의 마지막 모습과 (삼국지>에서 제갈량에게 유선을 부탁하는 유비의 모습이 오버랩된다면 지나친 감상일까. 1547년 1월 28일, 헨리 8세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앨리슨 위어의 <헨리 8세와 여인들>(루비박스)은 역사인가 싶으면 소설 같고, 소설인가 싶으면 역사다. 마치 헨리 8세와 그 여인들을 곁에서 관찰하고 그 속내까지 들여다본 것 같은 필치가 인상적인 책이다. 두 권 합쳐 700쪽이 넘는 구구절절한 사연에 도전하려면 결심이 필요할 것이다. 필자도 ‘아직 읽는 중’이다.


필리파 그레고리의 <천일의 스캔들>(현대문화센터)은 저스틴 채드윅 감독의 동명 영화(원제 )의 원작 소설이다. <천일의 앤 불린>


이라는 제목으로 같은 출판사에서 2007년에 나왔던 책을 영화 개봉과 함께 제목과 표지를 영화의 그것으로 바꾸어 2008년 다시 출간한 것. 왕의 사랑과 권력을 둘러싼 앤 불린, 메리 불린 자매의 갈등 구도가 축을 이룬다. 역사적으로 알려진 생애를 봐도 메리 불린이 더 분방하고 복잡하며 극적인 요소를 많이 갖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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