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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F, 케네디 - 미국 35대 대통령

나 그 네 2009. 1. 20. 18:15

존 F. 케네디


 “국민 여러분, 조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 것인지 묻지 말고, 여러분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스스로에게 물어 보십시오. 세계의 시민 여러분, 미국이 여러분을 위해 무엇을 베풀 것인지 묻지 말고, 우리 모두가 손잡고 인간의 자유를 위해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십시오.” 

 

오늘날에도 널리 회자되곤 하는 존 F. 케네디의 제35대 미 대통령 취임 연설의 유명한 대목이다. 1960년 11월 9일 치러진 선거에서 케네디의 상대 후보는 현직 부통령이던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 선거전은 치열했다. 각 당 전당대회를 마친 뒤 실시된 여론 조사에서도 47% 동률일 정도였다. 투표 다음 날 11월 10일 아침에 승부가 판명됐고, 닉슨이 패배를 인정한 것은 그날 정오가 다 되어서였다. 케네디는 총 6천8백83만8천979표 중 11만2천803표의 우세를 보여 전국 지지율에서 0.2% 차이밖에 나지 않았지만, 선거인단에서 303명을 확보하여 닉슨 후보(219명)를 따돌렸다.


(부통령 자격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시어도어 루즈벨트를 제외하면) 미국 역사상 최연소(43세)의 대통령이 나온 것이다. 또한 20세기에 태어난 사람으로선 처음으로 미국 대통령이 됐다. 더불어 최초의 가톨릭 신자 대통령이 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선거 과정을 놓고 뒷말이 무성했다. 예컨대 하와이 주는 재개표를 통해 당초의 닉슨 승리에서 케네디 승리로 번복됐고, 닉슨은 억울함을 참으며 2차 재개표를 요구하지 않고 패배를 인정해야 했다. 이를 두고 2000년 대선에서 민주당 엘 고어 후보와 공화당 조지 W. 부시가 맞붙었던 상황과 각 당 처지만 바꾼 모양새라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취임식에서는 로버트 프로스트가 자신의 시 ‘아낌없는 선물’(The Gift Outright)을 낭송했다. ‘우리가 이 땅의 사람이기 전부터 이 땅은 우리에 속했다’로 시작되는 이 시는 식민지 상태를 투쟁으로 극복하고 개척의 역사를 일구어 온 미국에 대한 자부이며 결의다. 케네디를 위해 새로 쓴 헌시(獻詩)를 낭송하려 했지만 의사당을 덮은 눈이 햇빛을 반사시켜 읽기 어렵게 되자, 오래 전(1942년)에 썼던 시를 암송했다는 뒷이야기가 전해진다. 우연찮게 선택한 이 시는 케네디의 연설과 어울리는 것이었다.

 

 

 

존 F. 케네디를 이야기하면서 케네디 가문을 빼놓을 수는 없다. 케네디는 아일랜드 이민자의 후손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와 보스턴 시장과 의원을 지낸 존 F. 피츠제럴드의 딸 로즈 피츠제럴드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프는 금융, 부동산, 영화산업, 주류업 등으로 많은 재산을 모아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을 재정적으로 후원하고 영국 주재 대사로도 활동했다. 그들 사이에 태어난 케네디 대통령을 포함한 아홉 남매는 다음과 같다. 조지프 패트릭 케네디 2세(1915-1944. 2차 대전 중 전사), 존 피츠제럴드 케네디(제35대 미국 대통령), 로즈마리 케네디(1918-2005. 정신지체와 뇌수술 실패로 수용시설에서 지냄), 캐슬린 아그네스 케네디(1920-1948. 프랑스에서 비행기 사고로 사망), 유니스 메리 케네디 슈라이버(1921-. 딸 마리아 O. 슈라이버가 영화배우 아놀드 슈왈제네거와 결혼), 퍼트리셔 케네디(1924-2006), 로버트 프랜시스 케네디(1925-1968. 법무장관, 상원의원. 로스앤젤레스에서 암살당함), 진 앤 케네디(1928-. 클린턴 정부 시절 아일랜드 주재 대사 역임), 에드워드 무어 케네디(1932-. 상원의원).

 

 

아홉 남매 가운데 둘이 암살당했고 장래가 촉망되던 장남은 스물아홉 살 때 전사했으며, 딸들 가운데 하나는 비행기 사고로 사망, 하나는 수용시설에서 생애를 보냈다. 막내 에드워드도 1969년 여비서와 함께 자동차를 타고 가다 사고로 여비서가 사망하는 스캔들과 약물중독 등으로 더 큰 정치적 꿈을 펼칠 수 없었다. 존 F. 케네디의 아들 존 F. 케네디 주니어도 1999년 마흔 살에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정치인으로 대성한 존 F. 케네디, 로버트 F. 케네디 그리고 에드워드 M. 케네디가 모두 하버드대를 졸업했다는 점도 예사로운 것은 아니다. 이들의 아버지 조지프 P. 케네디도 하버드 출신이며 외조부(조지프 패트릭 케네디의 장인) 존 F. 피츠제럴드도 하버드 의대에 재학한 적이 있다. 대기근의 참상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민한 아일랜드 인들 가운데 자수성가하여 막대한 부와 사회적 영향력을 확보한 집안이, 자녀들을 물심양면으로 뒷받침해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게 하여 마침내 미국 주류 사회의 최고 리더로 만든 셈이다.


역사는 가정을 허락하지 않지만, 존 F. 케네디가 암살당하지 않았다면 그 동생 로버트 F. 케네디와 에드워드 M. 케네디까지 대통령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추측하는 이들마저 없지 않다. 반면 이들의 아버지 조지프 케네디가 부를 쌓은 과정이 떳떳하지 못했던 것을 꼬집는 시각도 있다. 조지프 케네디는 미국에 금주법(1920-1933)이 시행되고 있을 때 캐나다에서 미국으로 주류를 밀반입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정확한 증거는 없다). 1933년 금주법이 폐지된 뒤 그의 수입회사는 주류 수입권을 독점하게 되었고, 나중에 회사 주식을 매각하여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이 수익을 바탕으로 그는 미국 내 주요 사무용 건물을 사들여 역시 엄청난 수익을 올렸다.

 

 

 


케네디가 형제들이 정치인으로서의 자질을 갖게 된 것은 집안 식탁에서부터 길러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어머니 로즈는 자식들에게 뉴욕타임스를 비롯한 주요 신문, 잡지에서 토론 주제가 될 만한 중요한 기사를 읽게 하고 식사 시간을 토론의 장으로 이끌었다. 의견을 주고받는 사이에 토론의 기술은 물론이거니와, 상대 의견을 경청하고 자기 의견을 펼치면서 자연스럽게 민주 정치의 기본을 몸에 익힌 셈이라 할까. 아버지가 만난 유명 인사들이나 사업에 관한 이야기도 식탁의 단골 메뉴였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자녀들은 넓은 세상에 관한, 아니 미국을 이끌어 가는 주류 사회와 리더십에 관한 식견을 키울 수 있었다.

 

사실 존 F. 케네디보다는 형 조지프와 동생 로버트가 집안의 기대를 모았다. 이에 비해 존은 말썽도 제법 피웠고 공부에 전념하는 스타일도 아니었다. 존이 청소년 시절 말썽을 피웠을 때 아버지는 이런 편지를 써서 아들에게 전했다. ‘잔소리꾼이 되기 싫다. 너의 재능은 탁월해. 판단이 정확하고 이해력 깊은 사람이 되어주기를!’ 존이 하버드대를 졸업할 때 아버지는 축전을 보냈다. ‘믿어 의심치 않는다. 네가 누구보다 지혜롭다는 것, 그리고 나의 멋진 아들이라는 것. 졸업 축하한다.’ 아낌없는 물적 뒷받침과 함께 절대적인 신뢰와 격려를 보내고 자부심과 자신감을 키워주었던 것이다. 

 

 

케네디 대통령은 재임 시절 많은 업적을 쌓았을까? 이에 대한 대답은 ‘그렇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하다’는 것이 아닐지. 2년 10개월의 짧은 재임 기간도 한계였겠지만, 국내 정치에서는 의회와의 관계가 그다지 원활하지 못했다. 예컨대 인종, 종교, 국적 등에 따른 차별을 철폐하기 위한 포괄적인 민권법안은 케네디가 제안했지만 의회에서 통과되지 못했고, 그가 세상을 떠난 뒤 대통령직을 승계한 부통령 린든 존슨의 노력으로 1964년 7월 2일에 통과됐다. 이는 미국 역사상 시민권에 관한 가장 중요한 연방법으로 평가 받는다. 린든 존슨은 이 법안을 통과시켜 케네디를 추모하자고 상하원에 호소했다.

 

또한 케네디 행정부는 여성지위자문위원회를 통해 여성들의 정치적, 경제적, 교육적 지위를 진단하고 개선하려는 노력을 했다. 이러한 노력은 1963년 동등 임금법 통과로 이어졌고 민권법에도 많이 반영됐다. 복지 분야에서도 노인의료보험제도 도입과 실시를 의회에 강력히 권고하면서 정부에 사회보장자문위원회를 설치했다. 이 역시 케네디 정부 시절에는 결실을 맺지 못하고, 린든 존슨 정부에 들어와 노인의료보험제도(메디케어)와 저소득층 의료보호제도(메디케이드)를 포함한 사회보장법 개정안이 1965년 통과됐다.

 

1962년 10월 22일부터 11월 2일에까지 핵전쟁 발발 직전까지 갔던 쿠바 미사일 위기 사태를 해결한 것은 케네디의 위기 극복 의지를 보여주는 사례다. 이 사태는 소련이 핵 탄도 미사일을 미국 코 앞의 쿠바에 배치하려 하자, 미국이 운반선을 막기 위해 군함을 보내면서 벌어진 것이다. 결국 협상으로 막을 내린 이 사건은 소련과 미국 간 핫라인 개설과 부분적인 핵실험금지조약 체결로 이어졌다.

 

개발도상국의 발전을 돕기 위해 봉사자들을 훈련시키고 파견하는 단체인 '평화봉사단'을 창설한 것도 케네디의 업적이다. 또한 중남미 20여 개 국가들과 ‘진보를 위한 동맹’도 추진했다. 미국이 경제원조와 민간투자를 시행하고 중남미 각국이 경제 및 사회발전을 위해 노력한다는 이 계획은 쿠바혁명의 영향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케네디는 1961년 4월 17일 약 1천500 명의 반(反)카스트로 쿠바 망명자들이 쿠바를 침공했다가 실패한 피그스 만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 이 침공은 미 중앙정보부의 적극적인 지원 하에 이루어졌다. 비록 전 정부 하에서 계획되었고 중앙정보부가 잘못된 정보를 보고했다고는 하지만, 이 사건으로 쿠바와의 적대관계가 깊어지고 동서 냉전의 긴장도 높아졌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에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 받는다. 또한 케네디는 1963년 말까지 남베트남에 1만6천명의 군대를 최초로 파견했다. 그는 베트남전의 부정적 전망을 간파했지만 빠져나올 기회를 좀처럼 잡지 못하고 깊이 개입하게 되었다. 재임 중 배우 마릴린 먼로를 비롯한 많은 여성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가진 것도 입방아의 대상이 되곤 한다. 

 

 

1963년 11월 22일 오후 12시 30분(미국 중부 표준시) 텍사스 주 댈러스. 퍼레이드에 참석해 영부인과 함께 무개차를 타고 가던 케네디가 저격 당했다. 오후 1시 공식 사망 선고. 1시 50분경 용의자로 체포된 인물은 리 하비 오스월드. 그러나 오스월드는 범행을 부인했다. 이틀 뒤 오스월드는 댈러스 경찰서 지하실에서 나오는 순간 나이트클럽 운영자 잭 루비에 의해 사살됐다.

 


케네디 암살의 진상을 둘러 싼 음모론과 갖가지 추측과 논란은 현재도 진행형이다. 그로부터 약 한 달 전인 10월 27일 케네디는 애머스트 칼리지에서 로버트 프로스트를 추모하는 연설을 했다. (프로스트는 1963년 1월 29일 사망) 연설에서 케네디는 자신이 꿈꾸는 미국의 미래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나는 미국의 위대한 미래를 바라봅니다. 군사력이 도덕적 억제력에 부합하고, 부(富)가 지혜에 부합하고, 권력이 목적에 부합하는 미래입니다. 나는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미국, 환경의 아름다움을 보호하는 미국,…… 예술적 성취 수준을 꾸준히 높여가고, 국민 모두를 위하여 문화적 기회를 꾸준히 확대하는 미국을 바라봅니다. 비단 힘 때문만이 아니라 그 문명 때문에 세계로부터 존경 받는 미국을 바라봅니다.’ (번역가 정영목 번역)

  

그가 미국에 관해 꾸었던 이러한 꿈은 실현됐는가? 적어도 조지 W. 부시 정부 시절 미국의 현실을 보면 꿈은 멀기만 하다. 부(富)가 지혜에 부합하지 못하여 세계적인 경제위기와 불황의 원인을 제공했다. 도덕적 억제력이나 국제간 협력보다는 군사력에 바탕을 둔 일방적 대외정책으로 일관했다. 전 지구적인 환경 문제에 대해서도 미국은 할 말이 별로 없다. 그 문명 때문에 존경 받기보다는 그 힘 때문에 두려움의 대상이 됐다. 바로 그렇기에,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이 케네디를 이야기하고 그의 죽음을 깊이 아쉬워한다. 요컨대 케네디는 많은 사람들에게 이루지 못한 하나의 위대한 꿈으로 남아 있는 것이다.

 

 

로버트 댈럭의 <케네디 평전>(전 2권, 푸른숲)은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케네디 관련 도서 가운데 양과 질에서 압도적이다. 특히 케네디 가문의 가풍부터 시작해 유년기와 청년기를 통해 케네디가 성장해가는 모습이 그 외부 환경과 내면을 넘나들며 자세하게 펼쳐진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케네디가 세 살부터 갖은 병마와 싸우며 죽음에 대한 강박을 지니게 되었다는 점도 각별하게 다가온다.

 

존 바네스의 <케네디 리더십>(마젤란)은 케네디 리더십을 11가지 원칙들로 재구성하고 있다. 저자에 따르면 케네디는 경제 불황과


케네디 평전케네디 리더십

냉전, 핵전쟁의 공포 등에 시달리는 미국인과 세계인들에게 새로운 희망과 비전을 제시한 리더였다. 낙천적인 모습, 열정의 표출, 어울리는 옷맵시, 항상 태연한 태도, 거리낌 없는 행동 등으로 자신만의 이미지와 스타일을 창조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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