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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채플린

나 그 네 2009. 1. 21. 18:31

 

찰리 채플린


아기를 안은 여인이 정신병원에서 나온다. 여인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큰 저택 앞에 놓인 지프에 아기를 뉘어놓고 도망친다. 잠시 차를 세워두었던 두 명의 청년이 온다. 차림새나 생김새가 불한당 같은 두 청년은 아기를 발견하고는 쓰레기통 옆에 버리고 간다. 그 아기는 어느 부랑자(찰리 채플린 분)에게 발견된다.

 

부랑자는 아기를 다른 사람에게 맡기려고 하지만 여의치 않자 할 수 없이 자신의 누추한 집으로 데려온다. 부랑자와 아기의 동거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찰리 채플린의 첫 장편영화 <키드 The Kid>는 이렇게 시작된다. 영화 <키드>는 채플린의 경험이 총체적으로 결합된 작품이다. 정신병원을 드나들어야 했던 어머니, 어머니가 아플 때마다 고아 신세가 되었던 어린 시절, 지독하게 가난하여 끼니를 걱정하고 거리에서 잠을 자기도 했던 소년기, 런던에서 탄탄한 연기력을 인정받았던 희극배우, 영화계에 진출해서 개발한 부랑자 캐릭터 등 채플린의 경험은 눈물 머금은 웃음을 자아내는 독특한 희극적 드라마를 탄생시킨다.

 

 

 

이 영화가 편집 단계에 들어설 무렵 퍼스트내셔널 영화사와 다툼이 있었다. 당시 채플린은 배우 밀드레드 해리스와 이혼절차를 밟고 있었다. 영화사는 밀드레드를 이용해 <키드>를 이혼 위자료조로 압류할 생각이었다. 채플린은 영화사의 눈을 피해 솔트레이크시티로 가서 편집 작업을 했다. 40만 피트(120킬로미터)가 넘는 필름은 자그마치 500롤이나 되었다. 채플린 일행은 솔트레이크 호텔에 방을 잡고 침실 하나에 필름을 늘어놓았다. 선반, 찬장, 서랍 속까지 호텔방 전체가 필름으로 뒤덮였다. 편집시설 하나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 그들은 편집작업을 마치고, 수건에 투사해서 영화를 보았다. 채플린의 눈에서는 저절로 눈물이 나왔다. 장장 15개월 간의 기나긴 작업이었다.


“자, 이런 건 어때요? 뜨내기는 유리창 수리공이고, 어린아이가 거리를 돌아다니면서 유리창을 깨는 거예요. 그러면 뜨내기는 얼른 달려와서 유리창을 수리해주고는 하죠. 아이와 부랑자가 같이 살면서 겪는 온갖 모험!” 배우들에게 이렇게 자신의 아이디어를 소개하고 채플린은 아역 스타 재키 쿠건을 발굴한다. 슬픈 듯하면서도 맹랑한 눈빛의 소년은 어눌한 듯하면서도 영리한 부랑자와 어울려 관객들을 울리고 웃기는 마술사가 된다. 어머니를 잃은 고아와 세상에 적응하지 못한 부랑자의 눈물겨운 사랑과 낙천적인 삶, 그것은 찰리 채플린의 신산했던 어린 시절과 성공을 향한 집념의 또 다른 표현이었다.


1921년 1월 21일 드디어 찰리 채플린의 첫 장편영화 <키드>가 뉴욕에서 개봉되었다. 채플린은 뉴욕에 가지 않았다. 자신이 감독한 첫 영화가 개봉될 때 그 감독의 심정은 어떨까? 두려움과 설렘이 교차되어 부풀어오른 그의 마음은 아예 무게가 없어져버릴 것이다. 난산한 영화 <키드>의 개봉을 채플린은 직접 확인할 수 없었다. 영화는 대중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고, 비평가들로부터 대단한 호평을 받았다. 이미 채플린은 영화배우이자 감독으로서 좋은 대우를 받고 있었지만, <키드>로 그는 본격적인 명장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채플린의 어린 시절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불우했다. 1889년 4월 16일 찰리는 뮤직홀 배우였던 찰스 채플린과 해너 채플린 사이에서 태어났다. 술주정뱅이 아버지가 어머니와 곧 이혼했기 때문에, 어머니와 찰리, 형 시드니(아버지가 다른)가 함께 살았다. 어머니가 후두염으로 목소리를 잃고 뮤직홀에 나갈 수 없게 되면서 지독히 가난하게 살았다. 끼니도 제대로 못챙겨 먹어 빈민구호소에서 생활하기도 했다. 어머니가 정신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재혼한 아버지 집에서 살기도 했는데, 12살 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이후로 자주 정신병원을 드나드는 어머니 때문에 고아나 다름없이 지내야했다. 그러나 찰리 채플린에게는 험난한 세상을 극복할 수 있는 특별한 재주가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타고난 연기력이었다. 8살 때에 ‘8명의 랭커셔 소년들’ 극단에 들어가 처음으로 무대에 섰다. 14살 때 <짐, 런던내기의 사랑>, <셜록 홈스> 등에 출연하여 관객의 주목을 받았다. 그에게 서서히 희극배우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여러 극단을 거쳐 1908년(17세) 카노 극단에 입단하여 1913년까지 희극배우로서 명성을 쌓았다. 이때 미국과 프랑스의 순회공연도 다녀온다.

 

 

 

1913년 두 번째 미국 순회공연 중 찰리 채플린이 할리우드 스타가 될 수 있는 기회가 생겼다. 채플린의 탁월한 연기력이 키스톤 영화사의 맥 세네트의 눈에 띄었던 것이다. 채플린은 키스톤 사와 영화 출연 계약을 맺고, 그 해 12월부터 주급 150달러를 받고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 그는 어떤 캐릭터를 만들어내야 할지 고민했다.

 

분장실로 가면서 헐렁한 바지와 커다란 구두, 지팡이에 중산모를 쓰기로 했다. 헐렁한 바지에 위에 꽉 끼는 상의를 입고 작은 모자와는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는 큼지막한 구두를 신어 과장된 스타일을 연출했다. 우리가 익히 아는 채플린의 캐릭터가 이때 만들어진 것이다. 여기에 나이가 조금 들어 보이게 콧수염을 붙이니 그야말로 안성맞춤. 채플린은 영화 속에서 매우 똑똑한 부랑자가 되었다.


 

자서전에서 채플린은 자신의 캐릭터를 맥 세네트에게 이렇게 설명했다고 말한다. “이 인물에 대해 설명드릴 것 같으면, 정말 다재다능한 사람입니다. 뜨내기이면서 신사이자 시인이고 몽상가인가 하면 외톨이이기도 하죠. 항상 로맨스와 모험을 꿈꿉니다. 그리고 남이 자신을 과학자, 음악가, 공작, 폴로 선수로 알아주었으면 하지요. 그렇지만 겨우 한다는 짓이 담배꽁초를 주워 피우거나 아이들 코 묻은 사탕이나 뺏어 먹는 거예요. 그리고 가끔이기는 하지만 화가 머리끝까지 오르면 부인의 궁둥이도 서슴지 않고 걷어찹니다.”
 

 


처음으로 출연한 영화 <메이벨의 알 수 없는 곤경 Mabel’s Strange redicament>(1914)에서부터 채플린의 연기는 좋은 반응을 얻었다. 영화가 거듭될수록 애수를 띤 희극적인 부랑자는 대중의 자리에 깊게 각인되었지만, 채플린의 독특한 아이디어와 감각은 오히려 감독들과 불화하는 원인이 되었다. 명성을 얻은 채플린은 결국 스스로 감독이 되어 자신의 영화에 출연했다.

 

영화계에서 잔뼈가 굵을수록 채플린의 보수는 천문학적인 숫자로 치솟아 올랐다. 1915년 채플린은 에사네이 영화사와 주급 1,250달러와 보너스 1만 달러에 계약하고 <찰리 채플린의 카르멘 Charlie Chaplin’s Burlesque on Carmen>을 만들었다. 1916년 뮤추얼 영화사와는 주급 1만 달러와 보너스 15만 달러를 받고 <매장 감독 The Floorwalker> 외 11편을 만들었다. 1917년 퍼스트내셔널 영화사와는 8편의 영화를 만들기로 하고 100만 달러를 받았다.

 

단 몇 년 사이에 채플린은 일약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가 된 것이다. 퍼스트내셔널 영화사와는 <키드>를 비롯하여 <개 같은 생활 A Dog’s Life>(1918), <어깨총 Shoulder Arms>(1918), <유한계급 The Idle Class>(1921) 등을 만들었다. <순례자 The Pilgrim>(1923)를 끝으로 퍼스트내셔널과의 계약을 마무리한 채플린은 당대 유명 스타였던 배우 메리 픽퍼드와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감독 D. W. 그리피스 등과 함께 유나이티드 아티스트 영화사를 가동하기 시작한다. 그야말로 찰리 채플린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파리의 여인 A Woman of Paris>(1923)을 필두로 <시티 라이트 City Light>(1931), <모던 타임스 Modern Times>(1936), <위대한 독재자 The Great Dictator>(1940), <무슈 베르두 Monsieur Verdoux>(1947), <라임라이트 Limelight>(1952) 등이 모두 이 영화사에서 만들어진다. 미국을 떠난 후에 만든 아치웨이 영화사의 <뉴욕의 왕 A King in New York>(1957)과 유니버설 영화사의 <홍콩에서 온 백작부인 A Countess from Hong Kong>(1967)을 끝으로 더 이상 영화를 만들지 않았지만, 그가 영화사에 남긴 발자취는 시간이 갈수록 오히려 선명해지고 있다.

 

 

이렇게 영화계에서 성공했음에도 그의 개인적인 삶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어린 시절의 고생은 말할 것도 없고, 성인이 된 후에도 파란만장했다. 그는 네 번이나 결혼했다. 자신의 영화에서 주연을 맡았던 밀드레드 해리스(1918), 리타 그레이(1924), 폴레트 고더드(1936) 등과 혼인했으나 모두 오래 가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1943년 극작가 유진 오닐의 딸 우나 오닐과 결혼하여 여생을 함께했다.

 

매카시 선풍이 할리우드를 휩쓸었을 때 <무슈 베르두>가 상영 금지되기도 했고, 공산주의자로 몰리기도 했다. 1952년(63세) <라임라이트>의 런던 시사회를 위해 영국에 갔을 때는 미국 법무성이 그의 귀국을 허가하지 않겠다고 발표해 돌아오지 못했다. 왕년의 최고 스타 채플린에게 등을 기댈 언덕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그렇게 강제 추방된 채플린 가족은 1953년 눈물을 머금고 스위스의 브베에 둥지를 틀었다. 이후로도 오랫동안 젊은 시절의 꿈과 추억을 함께 한 미국 땅을 밟을 수 없었는데 1972년 4월, 마침내 20년 만에 미국으로 돌아와 아카데미 특별상을 수상하게 됐다. 그 때의 감회는 눈물로도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렇게 찰리 채플린은 가난과 영광, 허탈과 웃음, 그리고 눈물이 함께하는 이승의 이미지를 남기고, 1977년 12월 25일 스위스의 자택에서 세상을 떠났다.


 

세계의 영화는 끊임없이 변화를 거듭해왔다. 40만 피트가 넘는 필름 500롤을 호텔 방에서 편집하는 일은 이제 꿈에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카메라 기법도 눈부시게 발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찰리 채플린의 영화를 끊임없이 되새기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 물음에 대한 답은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겠지만, 다음과 같은 그의 말 속에서 우리는 더 이상 설명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나는 연기를 배워서 잘할 수 있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나는 오히려 똑똑한 사람이 연기를 못하고 아둔한 사람이 연기를 잘하는 것을 많이 봤다. 연기는 본질적으로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이다.”


찰리 채플린은 다섯 살에 어머니 대신 무대에 오른 이후 팔십 평생을 연기자로 살았다. 그의 연기는 단순한 흉내가 아니다. <키드>의 부랑자가 이를 증명한다. 그는 온전히 자신의 영혼과 육체를 극중 인물에 투사하여 연기해냈다. 연기는 사랑이다. 그러기에 그의 웃긴 연기에도 우리는 웃으면서 눈물 흘리고, 시디로 구워진 <키드>를 편안하게 보면서도 편안하지 못하고, 편안하지 못한데도 행복하다.

 

 

찰리 채플린의 <찰리 채플린, 나의 자서전>(김영사)
이 책을 읽으면서 나는 몇 번이나 눈물을 흘렸다. 산업혁명과 식민지 개척으로 영국은 당시 세계에서 손꼽히는 부자였지만, 빈부격차는 오히려 심해졌다. 가난한 사람은 말로 형용하기 어려운 고생을 감당해야 했다. 배우였던 어머니가 목소리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정신병까지 걸렸으니 고통의 연속이었다. 그런 가정환경에서 채플린이 선택한 것은 희극배우였다. 8세 때부터 시작된 희극배우의 길은 육체와 정신의 가난을 극복하는 유일한 길이었던 듯싶다. 그것이 애수 어린 코믹 연기를 하는 배우로 평생을 살게 한 힘이었다.

찰리 채플린, 나의 자서전

 

가난을 재산으로 만들어내는 채플린의 삶을 확인하는 나의 마음은 눈물 속에서도 행복했다. 이 책은 채플린이 1964년 75세의 나이에 펴낸 자서전이다. 그는 놀라운 기억력으로 자신의 삶을 세세하게 기록했다. 그의 글은 그의 연기만큼이나 감칠맛 나고 눈물겹다.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길게 느껴지지 않는 것은 그의 영화처럼 그의 글도 드라마틱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내게 최상의 것과 최악의 것을 동시에 선사했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좋지 않은 일을 많이 겪었지만 나는 행운과 불운이 떠다니는 구름처럼 종잡을 수 없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런 믿음 때문에 나는 아무리 나쁜 일이 일어나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오히려 좋은 일이 일어나면 놀라면서 한편으로는 기뻐했다.”(1034쪽) 찰리 채플린은 불행한 사람일까, 행복한 사람일까? 행운만이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은 아닐 것이다. 찰리 채플린이 말년에 행복했다면, 행운만이 아니라 불운도 그의 행복에 크게 기여했음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