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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혁명가 레린

나 그 네 2009. 1. 22. 12:45

 

레닌


 

1905년 1월 21일 토요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정교회 사제 게오르기 가퐁 신부는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인 니콜라이 2세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다. 다음날 아침 궁전으로 가서 전달할 편지였다.

 


“폐하! 저희 페테르부르크의 노동자와 주민, 처자식과 늙은 부모들은 정의와 보호를 구하기 위해 당신께 갑니다. 저희는 가난 속에 억눌리고 힘든 노동 속에 모욕 당하면서도 비참한 운명을 묵묵히 참아내며 노예와 같은 삶을 살아왔습니다. 저희의 인내는 고갈됐습니다. 고통을 견뎌내기보다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은 시점에 이른 것입니다. 저희는 일을 멈추고 고용주에게 최소한의 생존권만이라도 보장해달라고 간절히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요구는 거절됐습니다.”

 

1월 22일(러시아력 1월 9일)은 일요일이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시민들은 가볍고 편안한 기분으로 겨울 궁전 앞에서 열리는 평화시위에 참여했다. 일요일 외출답게 시민들은 가장 좋은 옷으로 차려 입었다. 모두 15만 명에 이르는 거대한 시위대였다. 가퐁 신부는 대열의 선두에 섰다. 가퐁 신부는 일년 전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공장 노동자들을 조직하고 있었다. 이날 시위도 그가 조직한 노동자회의를 통해 준비한 것이었다. 그는 오늘 니콜라이 2세를 면담해 어느 정도 민주적인 정치적 대의제를 포함한 보편적인 시민권을 보장해달라고 부탁할 참이었다.

 

시위대는 겨울궁전 근처에서 해산명령을 받았다. 군대가 총을 겨누고 있었지만 시위는 해산명령을 무시하고 계속 궁전을 향해 전진했다. 황제는 궁전에 없었다. 궁전 앞에 배치된 군대는 혼란에 빠졌고 장교들은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명령했다. 시위에 참가한 많은 군중들이 살해됐다. 1월 22일 일요일 하루 동안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1천여 명이 죽고 3천여 명이 부상을 당했다. 그야말로 ‘피의 일요일’이었다.
겨울궁전 앞에서의 학살 소식은 곧 러시아 전국으로 알려졌다. 이내 러시아 전 지역에서 항의 파업과 시위가 이어졌다. 월요일인 23일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노동자와 군대의 무력 충돌이 벌어졌고 모스크바에서 총파업이 시작됐다. 26일 리가에서 벌어진 파업과 시위에서는 70여명이 죽었다. 러시아 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1월 파업참가자는 44만 4천명으로 늘어났고 4월까지 파업 참가자는 81만 명에 이르렀다. 오를로프 보로네즈 쿠르츠크 등 중앙 흑토지대에서는 농민 봉기가 시작됐고 폴란드 그루지야 등 국경지역에서도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급기야 1905년 10월 하순에는 러시아 역사상 최대 규모의 총파업이 발생하여 국가 기능이 정지상태에 이르게 됐다. 결국 니콜라이 2세도 1905년 10월 17일 ‘10월 선언’을 발표, 시민적 자유와 입법 기능을 가진 국가 두마(의회) 소집을 허락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난 다음날인, 1905년 1월 23일 월요일 스위스 제네바. 스위스에서 망명생활 중인 레닌은 아침 일찍 자신의 아파트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루나차르스키 부부였다. 루나차르스키는 어제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일어난 ‘피의 일요일’ 소식을 담은 신문을 레닌에게 전했다. 수천 명에 이르는 러시아 시민들이 겨울궁전 앞에서 학살되거나 부상 당했다는 충격적인 내용이었다. 레닌은 기사를 읽자마자 이 사건이 러시아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될 것이란 걸 직감했다. 시민들이 학살된 것은 슬픈 일이지만 레닌이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짜르 체제가 벼랑 끝에 서 있다는 사실이었다.  

 

레닌 부부와 루나차르스키 부부는 서둘러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모이는 까루즈 가의 카페로 출발했다. 그러나 카페는 문이 닫혀 있었다. 조국에서는 혁명의 기운이 번지고 있었지만, 러시아 망명자들은 닫힌 카페 문 앞에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이들의 리더격인 레닌 조차 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에 대해 이역만리 망명지에서 할 수 있는 실천적 전략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실제로 레닌이 1차 망명을 끝내고 러시아로 돌아간 것은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난 지 8개월이 지난 뒤인 1905년 9월 8일이었다. 이 때는 이미 러시아 전역에서 혁명의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레닌은 9월 첫째 주에야 제네바에서 기차를 타고 독일로 출발했다. 독일에서 스톡홀름으로 건너 간 그는 위조여권으로 배를 타고 헬싱키로 갔고, 헬싱키에서 다시 기차를 타고 러시아로 갔다. 9월 8일 레닌은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핀란드역에 도착했다.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아노프가 본명인 레닌은 1879년 4월 22일(러시아력 4월 10일) 러시아 볼가강 연안에 있는 심비르스크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사이자 장학사였고 어머니는 유태계였다. 맏형 알렉산드르 울리아노프가 알렉산드르 3세 암살 계획에 연루되어 1887년 처형당하자 당시 17세였던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고 마르크스의 저작을 읽기 시작한다. 1887년 가을 레닌은 카잔대학에 입학했으나 이해 12월 불법집회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대학에서 쫓겨난다. 이후 레닌은 카잔에서 혁명가들과 사귀면서 마르크스의 ‘자본론’ 등에 대한 공부를 시작한다. 1889년 1월 레닌은 마르크스주의자가 되었다.

 

청강생으로 사법시험을 치를 수 있는 허가를 얻은 레닌은 시험에서 최고 점수를 받고 1891년 12월 변호사 자격증을 받았다. 사마라에서 1893년까지 변호사로 일했던 레닌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기 시작한다. 레닌은 당시 마르크스 해석의 1인자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를 우상처럼 떠받들었는데, 플레하노프를 비롯한 러시아 망명가들을 만나기 위해 1895년 서유럽으로 여행을 떠났다. 레닌은 파리 제네바 취리히 베를린 등을 방문하면서 플레하노프, 악셀로트 등과 마르크스주의에 대해 토론하고 마르크스의 사위인 폴 라파르그를 찾아가기도 했다. 레닌은 이때를 회고하면서 “마르크스, 플레하노프와 사랑에 빠졌다”라고 고백하기도 했다.

 


선진적인 마르크스주의자들과 교류 경험을 가진 레닌은 1895년 9월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왔다. 귀국하자마자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의 우파인 멘셰비키파의 리더인 마르토프 등과 함께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을 조직했으나 1895년 12월 당국에 체포돼 감옥 생활을 하게 된다. 1897년 시베리아 유배형을 받은 레닌은 시베리아 가운데에 위치한 크라스노야르스크를 거쳐 슈센스케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한다. 그는 1898년 유배지에서 크루프스카야와 결혼했으며, 그곳에서 주요 저작이 된 ‘러시아에서 자본주의의 발전’을 집필했다. 책은 1898년 8월 블라디미르 일린이란 가명으로 출판됐다. 

 

 

1900년 1월 서른 살이 된 레닌은 3년 유배 형을 마치고 모스크바 남쪽에 있는 포돌스크로 돌아왔다. 5월 다시 서유럽으로 떠난 그는 독일 뮌헨에서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등과 더불어 <이스크라>를 같은 해 12월 말 창간했다. 마르크스주의 최초의 정치신문인 <이스크라>는 러시아 지식인을 혁명운동으로 포섭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규합해 사회민주당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시기에 레닌은 팸플릿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써서 1902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레닌이란 필명을 처음으로 썼는데,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해 레닌은 혁명가 그룹에서 문제적 인물로 부각됐다. <이스크라> 편집진 사이에서도 노선 갈등이 시작됐다. 1902년부터 1903년 사이에 <이스크라> 본부는 경찰의 감시를 피해 뮌헨에서 런던으로 또 제네바로 옮겨 다녀야 했다. 이 기간에 <이스크라>를 통해 협력했던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트로츠키 등도 레닌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결국 런던 제네바에서 두 차례에 걸쳐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대회’에서 플레하노프는 주변부로 밀려났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레닌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과격 정통파)와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한 멘셰비키파(당내 우파)로 양분되었다. 서유럽으로 망명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격렬한 논쟁과 분쟁을 겪는 동안 그들의 조국 러시아에서는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면서 혁명의 열기가 불붙기 시작한다. 이에 레닌은 1차 망명을 끝내고 귀국하기로 한 것이다. 제1차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는 조국에서 레닌은 본격적인 혁명조직을 만들어감과 동시에 멘셰비키파와 격렬한 분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1907년 러시아에서 입헌 쿠데타가 일어나 혁명 지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됐다. 볼셰비키파는 지하로 숨어야 했고 레닌은 다시 해외 망명길에 올랐다. 두 번째인 이번 망명은 1917년까지 이어진다. 망명기간 내내 멘셰비키의 공격과 볼셰비키 내부 진영의 도전에 시달리던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론>(1908)을 발표하고, 1912년에는 프라하에서 볼셰비키만의 당대회를 소집하며 멘셰비키와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다.

 

 

1917년 2월 페트로그라드(191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개명)에서 드디어 니콜라이 2세가 물러났다. 스위스 취리히에 머물던 레닌은 32명의 러시아 망명자들과 함께 1917년 4월 3일 늦은 밤 러시아의 수도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에 도착했다. 페트로그라드에는 각 공장에서 선출된 노동자 대표위원회인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구성되어 있었다.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농민당 당원들이 중심이 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2월 혁명을 부르주아 혁명으로 간주했기 때문에 부르주아 지도자들이 새 정부를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볼셰비키는 여전히 소수파였다. 이에 레닌은 2차 망명을 마치면서 준비한 10개항의 ‘4월 테제’를 발표한다. ‘4월 테제’는 ‘임시정부 타도와 모든 권력은 소비에트로’라는 기치를 내걸었다.

 

1917년 7월 3일 있었던 볼셰비키의 무력시위가 임시정부에 의해 진압된 후 레닌은 다시 핀란드로 도피했다. 그러나 온건사회주의자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이끌던 임시정부는 전쟁에 대한 대중의 염증과 경제파탄으로 급격하게 지지기반을 잃어갔다. 9월 들어서자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전국적인 지지를 얻게 되고 다수파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 해 10월, 레닌은 비밀리에 페트로그라드에 잠입하여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중앙위원들을 설득했고 의장인 트로츠키의 협력을 얻어 ‘적위대’을 조직하는 데 성공한다. 결국 1917년 11월 7일(러시아력 10월 25일) 10시 볼셰비키 적위대는 임시정부 타도에 성공하고 모든 국가권력이 소비에트로 넘어왔음을 선포한다. 11월 8일(러시아력 10월 26일) 새로운 소비에트 정부인 소브나르콤(인민위원평의회)이 평의회의 갈채 속에 탄생했다. 레닌은 의장이 되었다. 10월 혁명이 완결되는 날이며,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세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완성된 날이었다. 레닌은 1918년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러시아 공산당으로 개칭했고, 1919년 3월에는 국제적인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추진하기 위해 코민테른(Communist International, 제3인터내셔널)을 창설했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저녁 6시 50분 고리키에서 뇌동맥 경화증으로 사망했다. 장례식은 사망 6일 후인 1월 27일 거행됐다.

 

 

레닌의 삶을 다룬 주요저작으로는 9백 쪽에 이르는 전기 <레닌>(로버트 서비스 지음, 시학사)을 들 수 있다. 편집증적이고 격정적인 레닌의 캐릭터뿐 아니라,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내분과 끊임없는 갈등, 그 속에서도 멈추지 않는 혁명에 대한 레닌의 확신을 소상하게 읽을 수 있다. 80년대 한국에서는 레닌의 저작이 비록 ‘불법 출판물’이었지만 공공연한 베스트셀러였다. ‘합법 출판물’로 출간되고 있는 지금, 서점가에서 만날 수 있는 책은 <무엇을 할 것인가>(레닌 지음, 박종철출판사)와 <제국주의론>(레닌 지음, 백산서당) 등 불과 두 종에 지나지 않는다.

레닌무엇을 할 것인가제국주의론

 

전집으로까지 출간됐던 수많은 레닌의 저작은 모두 절판 상태다. 역사의 아이러니인지 자본의 승리인지, 한국에서 레닌은 불법 출판물일 때가 전성기였다. 그밖에 1900년대 러시아 혁명기의 삶을 잘 말해주는 저작으로는 보리스 싸빈코프라는 실제 테러리스트가 쓴 소설 <검은 말>(뿔)과 그의 자전기 <창백한 말>(뿔)을 들 수 있다. 암살과 테러가 횡행했던 혁명기에 한 때 좌파였으나 무정부주의자로 돌아선 싸빈코프의 진술은 테러리스트의 내면과 갈등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특히 <검은 말>은 소설가 이병주 등에 의해 ‘강추’돼 알음알음으로 널리 알려진 저작이다. <창백한 말>은 1904년부터 1905년까지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던 무렵, 테러리즘의 진면목을 펼쳐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