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0년 1월 서른 살이 된 레닌은 3년 유배 형을 마치고 모스크바 남쪽에 있는 포돌스크로 돌아왔다. 5월 다시 서유럽으로 떠난 그는 독일 뮌헨에서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등과 더불어 <이스크라>를 같은 해 12월 말 창간했다. 마르크스주의 최초의 정치신문인 <이스크라>는 러시아 지식인을 혁명운동으로 포섭하고 마르크스주의자들을 규합해 사회민주당을 만드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 시기에 레닌은 팸플릿 <무엇을 할 것인가>를 써서 1902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레닌이란 필명을 처음으로 썼는데,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 사이에서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켰고, 이로 인해 레닌은 혁명가 그룹에서 문제적 인물로 부각됐다. <이스크라> 편집진 사이에서도 노선 갈등이 시작됐다. 1902년부터 1903년 사이에 <이스크라> 본부는 경찰의 감시를 피해 뮌헨에서 런던으로 또 제네바로 옮겨 다녀야 했다. 이 기간에 <이스크라>를 통해 협력했던 플레하노프, 마르토프, 트로츠키 등도 레닌을 비판하기 시작했다. 결국 런던 제네바에서 두 차례에 걸쳐 열린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대회’에서 플레하노프는 주변부로 밀려났다.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레닌을 중심으로 한 볼셰비키(과격 정통파)와 마르토프를 중심으로 한 멘셰비키파(당내 우파)로 양분되었다. 서유럽으로 망명한 러시아 마르크스주의자들이 격렬한 논쟁과 분쟁을 겪는 동안 그들의 조국 러시아에서는 1905년 ‘피의 일요일’ 사건이 일어나면서 혁명의 열기가 불붙기 시작한다. 이에 레닌은 1차 망명을 끝내고 귀국하기로 한 것이다. 제1차 러시아 혁명의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고 있는 조국에서 레닌은 본격적인 혁명조직을 만들어감과 동시에 멘셰비키파와 격렬한 분쟁을 시작한다. 그러나 1907년 러시아에서 입헌 쿠데타가 일어나 혁명 지도자들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됐다. 볼셰비키파는 지하로 숨어야 했고 레닌은 다시 해외 망명길에 올랐다. 두 번째인 이번 망명은 1917년까지 이어진다. 망명기간 내내 멘셰비키의 공격과 볼셰비키 내부 진영의 도전에 시달리던 레닌은 <유물론과 경험론>(1908)을 발표하고, 1912년에는 프라하에서 볼셰비키만의 당대회를 소집하며 멘셰비키와 완전한 결별을 선언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