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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브리드 공격수 박지성의 진정한 가치

나 그 네 2011. 1. 23. 15:58

하이브리드 공격수 박지성의 진정한 가치

 

 

 

다시 박지성이다. 달이 바뀌고 해가 가도 박지성에 대한 국내 축구팬들의 관심은 여전히 드높다. 2002년 월드컵 이후 줄곧 한국 축구의 중심에서 집중 조명을 받아온 박지성의 입지는 2009년 이 순간에도 여전히 굳건하다. 그라운드 위에서의 동작 하나부터 직접 끓인다는 떡국에 이르기까지 박지성의 이름 석 자가 등장하는 소식이라면 빠짐없이 세세하게 보도되는 풍경은 언제부턴가 더 이상 낯설지 않은 모습으로 자리잡았다. 좋든 싫든, 한국 축구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은 그는 왕년의 박찬호가 야구계에서 그러했듯 한국 축구계의 온도를 좌우하는 대표적 인물이 되었다. 이제 ‘김연아’에 견줄(?) 축구계의 유일한 스타로서 자신에게 주어진 숙명을 묵묵히 감당해야 할 그에게 2009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의미있는 해로 남을 것이다.

다소 장황한 설명은 이쯤에서 접고 2009년 박지성의 현재와 미래에 초점을 맞춰보자. 그의 이름 위에 가장 먼저 오버랩되는 것은 단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다. 맨유 입단과 함께 한국을 너머 아시아 축구를 대표하는 인물로 확고한 입지를 굳힌 박지성은 2010년 여름이면 만료되는 현 계약 조건으로 인해 다시금 집중 조명을 받고 있다. 그의 재계약 여부가 현지 언론을 통해 관심사로 떠오른 덕분이다. 계속된 골 가뭄과 1월 이적 시장의 개장이 만나면서 박지성 재계약 논란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맨유가 앞으로도 박지성을 원할까’라는 질문에 집중된 논의는 박지성의 가치에 대한 제대로 된 평가 없이 연말연시 내내 허공을 맴돌았다. 여기에 지난달 28일 미들즈브러 전에서 박지성이 완벽한 문전 찬스를 놓친 이후 논란은 오히려 더욱 증폭됐다. 그렇다면, 과연 박지성의 맨유 잔류 가능성은 정말 불투명한 것일까. 여기서, 나는 질문을 이렇게 바꿔볼 것을 제의하고 싶다. “맨유가 박지성을 버릴 수 있을까?”

 

질문을 뒤집은 이유는 한 가지다. 계약은 상호 합의 하에 이뤄지는 것이며 따라서 맨유와의 재계약 여부는 온전히 맨유의 의사에만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칼자루는 박지성의 손에 있다. 맨유가 박지성을 붙잡아야 할 이유가 ‘놓아줄’ 이유보다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1. 하이브리드 공격수 박지성

그러한 판단의 첫번째 근거는 박지성의 스타일이다. 박지성의 ‘공식’ 포지션은 윙포워드지만 그의 스타일은 매우 독특하다. 유례(類例)를 찾기 힘든 ‘공격수’ 박지성 스타일을 한마디로 정의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생각 끝에 떠올린 단어가 바로 ‘하이브리드(hybrid)’다. ‘두 가지 이상이 합쳐진 것’ 혹은 ‘잡종’이나 ‘복합’ 정도로 풀이될 이 단어는 공격수이면서도 공격수답지 않은 역할을 두루 도맡는, 공수에 걸쳐 광범위한 영역에 자신의 발자국을 찍는 박지성의 스타일을 표현하는 데 꽤나 적절한 단어다. 스리톱의 측면, 혹은 투톱 때는 미드필드의 한 측면을 담당하는 선수로 출격하는 박지성이지만 그 지점에서 공격에 몰두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다. 공수에 걸쳐 지독할 정도로 많이 뛰며 팀의 밸런스를 지켜주는 박지성의 존재는 1) 폴백들의 공격력을 담보하고 2) 동료 공격수들의 슛 공간을 열어주며 3) 상대의 역습을 지연시키는 데 큰 효과를 발휘하며 팀 성적 향상에 기여한다.

이것은 단순한 인상 비평이 아니다. 실제로 올 시즌 맨유의 경기 기록을 살피면 ‘하이브리드 공격수’ 박지성의 진가가 그대로 드러난다. 대표적인 것이 박지성 출전과 팀 실점의 상관 관계다. 올 시즌 맨유는 현재까지 27경기를 치러 19실점(경기당 0.7실점)을 기록 중인데 박지성이 뛴 17경기에서는 단 3실점(경기당 0.11실점) 밖에 내주지 않았다. 수치 상으로 6배가 넘는 안전도다. 3실점은 모두 프리미어리그 경기에서 나왔는데 맨유는 올 시즌 박지성이 뛴 11차례의 리그 경기 가운데 에버턴전과 아스널전을 제외한 전 경기를 무실점으로 틀어막았다. 박지성이 출전한 경기에서 실점이 발생한 경우도 있지만, 해당 실점들은 전부 박지성이 교체투입되기 전이나 교체아웃된 후에 나왔다. (표1 참조)

 

*올 시즌 박지성 출전 시 평균 실점 : 리그 12경기 3실점 (경기당 0.25실점), 총 18경기 3실점 (경기당 0.16실점)

*맨유 올 시즌 리그 기록 : 팀 리그 18경기 10실점 (경기당 0.55실점), 총 28경기 19실점 (경기당 0.7실점)

2008 FIFA 클럽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한 뒤 동료들과 환호하는 박지성

이처럼 박지성이 그라운드에 있는 동안 맨유의 수비가 보다 견고해지는 것을 단순히 우연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다. 스리톱의 측면 공격수, 혹은 4-4-2 전형의 측면 미드필더로 나서는 박지성의 역할은 공격수에 방점이 찍힌 포지션이면서 미드필드와 수비를 강화하는 임무를 포함하는데 이처럼 독특한 그의 존재는 맨유가 상대 역습에 쉽사리 골을 허용하지 않는 팀으로 자리를 굳히게 하는 데 도움을 준다.

2. 대체재를 찾기 힘든 독특함

맨유가 박지성을 버릴 수 없다고 믿는 두번째는 ‘하이브리드 공격수’라는 특성에서 오는 희귀성이다. 현역 선수 중에서도 비근한 예를 찾기 힘든 박지성의 스타일은 이 같은 선수를 원하는 팀이 대체 선수를 찾기 어려운 이유로 작용한다. 공격성을 갖추고도 상대의 공격을 최전선에서 지연하는 박지성의 플레이는 ‘공격수답지 않다’는 비난의 저편에서 그만의 가치를 발현한다. 이러한 특성은 적지 않은 국내 전문가/축구팬들이 박지성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느끼는 이유와도 맞닿는다. 이를테면, 퍼거슨 감독이 박지성을 기용하는 이유가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라면서 ‘강팀과의 경기에는 내보내지 않는다’고 덧붙이는 것이 그렇다.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이 두 가지 평가가 공존하는 것은 박지성 스타일을 정의하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퍼거슨 감독이 나니, 긱스 등의 경쟁자들보다 더 많은 기회를 부여하는 이유이기도 한 이 특성은 ‘공격수’로서의 전형성을 답습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종종 폄하되곤 하는 지점이기도 하다. 즉, 그 스타일 자체로 가치를 부여받기보다 기존 윙포워드 스타일 선수들의 역량을 기준으로 내린 평가에 의해 장점보다 단점이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 그랬듯 퍼거슨 감독은 고정 관념이 아닌 박지성 고유의 스타일에 초점을 맞춘 평가로 박지성의 가치를 이해하는 지도자다. 박지성의 성과를 같은 포지션에 기용되는 여타 선수들과 공격 포인트 숫자로 저울질하는 것이 아니라 ‘하이브리드(두 가지 이상의 기능이 합쳐진 것. 잡종 혹은 복합)’라는 ‘대체불가능’한 특성을 높이 평가한다. 더군다나 전형적인 ‘팀 플레이어’로서 팀내 잡음이나 자기 욕심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이기까지 한 선수를 쉽게 놓아줄 리는 만무한 것이다.

 

3. 그래도 남는 2%의 아쉬움

앞서 언급했듯 박지성은 맨유가 호성적을 거두며 상위권을 유지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는 선수다. 크게 봤을 때 역할이 뚜렷하게 구분된 맨유의 ‘일레븐(11명)’에서 박지성은 공격을 주된 임무로 하면서도 골에 대한 부담은 크게 받지 않는 선수였다. 그보다는 공수의 밸런스를 유지하는 것이 박지성에게 부여된 최대 임무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루니, 호날두, 테베즈, 베르바토프 등이 ‘득점자’의 역할에 충실하는 동안 박지성은 그들이 남긴 공간에서 공격을 노리고 수비를 지원했다. 골이 필요한 자리이기는 하지만 앞서 언급한 선수들과 달리 보다 폭넓은 임무를 수행하는 것으로 자신의 가치를 입증한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박지성의 존재는 그 임무를 모자람없이 수행하며 팀이 안정적으로 승점을 추가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해왔다.

하지만, 최근 맨유의 득점력이 급전직하하면서 박지성이 느끼는 부담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기존의 다양한 득점 옵션이 막히면서 새로운 득점 루트 개척이 필요해진 맨유 입장에서 여전히 지지부진한 박지성의 득점력이 점점 더 큰 공백으로 느껴지고 있는 것이다. 지난 시즌처럼 다른 공격수들이 무시무시한 득점력을 과시할 때에는 덜 느꼈던 부담이 요즘처럼 맨유가 득점력 난조에 시달릴 경우 매우 크게 다가오는 것이다

대체 불가능한 박지성 스타일의 특징은 선수 본인이 원할 경우 팀에 계속 남아 같은 역할을 기대하게 하는 지점이면서 그 이상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된다. 따라서, 팀내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한 시즌에 10개 안팎의 공격 포인트를 따낼 수 있어야 한다. 공격 옵션으로 자리를 확고히 하지 않는다면 현재와 같은 ‘스쿼드 플레이어’, 즉 베스트 세븐틴(Best 17)을 뛰어넘을 수 없고 경우에 따라 큰 경기에서 벤치 말석도 지키지 못하는 지난 시즌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같은 상황이 반복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리하면, 박지성에게 재계약은 더 이상 그리 중요한 이슈가 아니다. 앞서 바꿔 물은 ‘맨유가 박지성을 버릴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답은, 그래서 박지성의 맨유 생활은 결국 선수 본인의 의지에 달렸다는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스쿼드 플레이어라는 현 위치에 만족한다면 박지성과 맨유의 사이(?)를 가로막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하지만, 지난 7년간 쉼 없이 발전을 거듭한 박지성의 역량은 그가 좀 더 고차원적인 하이브리드 공격수 이상의 존재로 나아갈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다. 보조자의 역할에 만족하는 것이 아닌 주도자의 영역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단계에 이르게 된다면 그의 역할과 가치를 두고 벌어지는 작금의 논란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팀의 간택을 받을 것인지 여부가 관심의 초점이 되는 일 역시 먼 이야기가 된다. 5개월 남은 박지성의 2008/2009 시즌, 즉 이제 막 시작된 2009년은 그래서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시간으로 남게 될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