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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나비 알리, 그리고 잭 존슨
세상을 바꾼 나비 알리, 그리고 잭 존슨
"오랜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오늘 밤 마침내 미국에 변화가 찾아왔다."
버락 오바마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지난해 11월4일 시카고의 그랜트 공원에서 많은 청중들이 모인 가운데 당선 소감을 밝혔다.
아프리카 흑인 20여명이 노예선을 타고 미국 땅에 내린 지 389년 만에, 링컨 대통령이 노예 해방을 선언한 지 149년 만에, 잭 존슨이 헤비급 복싱 사상 최초의 흑인 챔피언에 오른 지 100년 만에, 미국은 가장 강력한 세계 정치의 헤비급 챔피언이나 마찬가지인 미국 대통령에 그들 손으로 흑인 대통령을 선출한 것이다.
변화는 아무런 대가 없이 불쑥 찾아온 것은 아니었다.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말콤 엑스와 같은 흑인 지도자들이 인권 운동을 이끌었고 수많은 유명, 무명의 인권운동가들이 더 나은 세상을 꿈꾸며 희생해 일군 변화였다.
스포츠계에서는 복서 무하마드 알리가 그랬다. 잭 존슨이 미국 사회에서 처음으로 흑인 스포츠 스타의 가능성과 그 영향력, 방향 설정을 제시했다면 알리는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그 같은 영향력과 가능성을 극대화 하는 역할을 했다. .
비슷하면서도 다른, 다르면서도 비슷한 잭 존슨과 알리의 삶을 비교하며 미국 사회의 변화를 따라가보자.
▶ 잭 존슨의 분신
알리가 등장한 60년대 초반 많은 사람들은 그를 보고 최초의 흑인 챔피언 잭 존슨을 떠올리며 그가 일으킬지도 모르는 격랑을 경계했다.
잭 존슨은 전세계가 백인을 중심으로 백인을 위해 돌아갈 때 주먹 하나 믿고 나타나 백인 사회를 뒤흔든, 백인에게는 악마와도 같은 존재였다. 흑인과는 타이틀전을 벌이지 않겠다는 백인 챔피언 토미 번즈를 유럽-호주까지 따라다니며 도전권을 따냈고 끝내 백인들에게 참담한 모멸감을 안겨주며 챔피언의 자리에 올랐다.
게다가 세 번의 결혼 상대가 모두 백인여성이었다는 점은 그를 더욱 '용서할 수 없는 검둥이'로 만들었다.
잭 존슨을 최초의 흑인 헤비급 챔피언으로 만들어준 1908년 12월 26일 호주 시드니에서 벌어진 경기에서 호주의 백인 경찰들은 두 번이나 경기를 중단시켰다. 더 이상 백인이 흑인에게 처참하게 두들겨 맞는 꼴을 관중들이 보게 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들은 경기 사진이 유출되지 않도록 경기 후반 촬영을 금지했고 카메라도 압수했다.
잭 존슨은 경기 도중 말을 많이 하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주로 백인 상대들을 모욕하는 말들이었다.
토미 번즈와의 타이틀매치에서는 "네 피부는 마치 항복을 상징하는 백기처럼 하얗다"고 조롱했고 토미 번즈가 기력을 잃고 쓰러지려 하면 교묘하게 잡아 지탱한 뒤 더 많은 펀치를 날렸다. 노예의 아들로 태어나 백인에게서 받은 수모를 그는 링 위에서 그대로 백인 상대와 관중들에게 되돌려 주려 한 것이었다.
백인 사회는 잭 존슨에 맞설 '위대한 백인의 희망(Great White Hope)'으로 은퇴한 전 챔피언 제임스 제프리스를 복귀시켰으나 그 역시 무참한 KO패를 피할 수 없었다.
60년 로마 올림픽 복싱 라이트헤비급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뒤 프로에 전향한 알리는 여러모로 잭 존슨과 비교됐다. 빠른 발과 레프트 잽을 앞세운 경기 스타일은 둘 모두 시대를 앞서간 혁명적인 것이었고 경기 도중 말을 많이 하는 것도 비슷했다. 알리는 한술 더 떠 자신이 지은 시를 읊고 언제 상대방을 KO 시킬 것을 예상하기도 했다.
노예의 아들로 태어난 잭 존슨이 어려서부터 백인들에 대한 적대감을 안고 자랐다면 알리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딴 뒤에도 변함없는 흑백 차별에서 벗어날 수 없음에 좌절하며 세상이 불공평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기에 흑인 인권 운동가 말콤 엑스를 만나 블랙무슬림이 되며 그의 좌절은 백인들에 대한, 백인 우월주의에 대한 적대감으로 바뀌었다.
조 프레이저, 조지 포먼, 무하마드 알리 (왼쪽부터)
▶ 세상을 뒤흔든 나비
알리가 유명해진 건 1964년 당시 무적으로 여겨지던 철권 소니 리스튼을 누르고 챔피언에 오르면서부터다. 그가 읊어 유명해진 '나비같이 날아 벌같이 쏜다(Float like a butterfly, Sting like a bee)'는 말도 리스튼과의 경기를 앞두고 나온 것이었다.
알리가 떠오른 60년대 초반은 잭 존슨이 활약하던 50년 전과는 상황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잭 존슨이 활약할 때 백인들은 유난히 '세계헤비급 챔피언'이라는 지위에 집착했다. 세계헤비급 챔피언의 자리는 곧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남자라는 의미였고 그 상징적 자리를 흑인들에게 내주는 것을 치욕으로 생각했다. 자연히 잭 존슨의 상대는 백인이 많았다.
하지만 30년대 후반 '갈색 폭격기' 조 루이스가 등장한 뒤 헤비급 복싱계는 새로운 시대에 접어들고 있었다. 조 루이스는 잭 존슨을 반면교사로 삼아 그와는 정반대의 행동 강령을 세우고 '착하고 말 잘 듣는 흑인'으로서 자신을 포장하는 데 성공해 백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조 루이스 이후 에자드 찰스, 조시 조 월코트, 플로이드 패터슨과 같은 흑인 챔피언이 나왔고 이제 헤비급은 완전히 흑인들이 주무르는 세상이 됐다. 모두가 잭 존슨과는 다른, '착한 흑인'으로서였다.
플로이드 패터슨을 두 번이나 1회 KO로 제압하고 챔피언이 된 리스튼은 어린 시절부터 교도소를 드나든 범죄자 출신으로 악명 높았다. 그가 챔피언이 되자 백인 사회는 다시 한 번 '못된 흑인' 챔피언의 등장을 염려했다.
이에 리스튼은 자신의 이미지를 선하게 고치기 위해 착한 흑인의 대명사 격이던 조 루이스에게 돈을 주고 자신의 캠프에 머물게 해야 했다. 하지만 여전히 필라델피아 경찰은 세계챔피언이 된 그를 감시했다.
1999년(좌), 1964년 (우) SportsIllustrated 커버를 장식했던 무하마드 알리와 소니 리스튼 <출처. SportsIllustrated 홈페이지> |
그는 챔피언이 된 뒤 블랙무슬림으로 개종하며 캐시어스 클레이라는 이름도 무하마드 알리라는 이름으로 바꿔 미국 사회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알리의 친 아버지 조차도 섭섭한 감정을 표시할 정도였다.
부모가 지어준 이름을 바꾸는 것도 괘씸한 데 그에게 새로운 이름을 지어준 '네이션 오브 이슬람'이라는 블랙무슬림 단체는 흑인들의 무장봉기까지 선동하던 과격단체였다. 이후 알리는 50년 전 잭 존슨처럼 백인들의 기독교적 가치를 위협하는 공공의 적 1호가 됐다.
60년대 헤비급 복싱계에 위대한 백인의 희망은 없었다. 단지 백인들은 착한 흑인, 말 잘 듣는, 기독교를 믿는 흑인이 알리를 때려눕히길 바랄 뿐이었다. 그 중 대표적인 선수가 전 세계 챔피언인 플로이드 패터슨이었다.
알리는 자신을 기독교의 대리인으로 세계헤비급타이들을 기독교 품 안으로 가져오겠다고 밝힌 플로이드 패터슨에 대해 극도의 거부감을 보였다. 65년에 벌어진 경기는 일방적이었다. 알리는 수 차례 경기를 끝낼 기회를 잡고도 경기를 끝내지 않았다.
결국 패터슨은 12회 알리의 잽을 맞고 무릎을 꿇었고 심판은 경기를 중단했다. 한 기자는 이 경기에 대해 장난꾸러기 어린이가 벌레를 잡아 날개와 다리를 차례로 떼어내며 괴롭히는 것 같았다는 평을 하기도 했다. 1908년 잭 존슨이 쓰러지는 토미 번즈를 부축한 뒤 주먹세례를 날리던 잔인한 모습이었다.
관중들은 이 경기 후 퇴장하는 알리에게 방석 등을 던지며 야유를 퍼부었고 알리 역시 주로 백인들인 관중들을 향해 손을 내저으며 강한 경멸의 표시를 보였다.
▶ 저항과 시련의 세월
링 위에서 알리를 제압할 선수는 없었다. 알리의 복싱은 절정을 향해 가고 있었고 그가 보여주는링 위에서의 몸동작은 우아한 발레와도 비교됐다. 알리의 발목을 잡은 건 상대방의 주먹이 아니라 정부가 내건 법이었다. 이 역시 잭 존슨의 상황과 비슷했다.
1910년 잭 존슨이 제임스 제프리스 마저 일방적으로 두들기며 승리하자 당시 백인 의원들은 얼토당토 않은 법을 만들어 잭 존슨의 발을 묶으려 했다. 백인 여성의 매춘을 막기 위해 만들었다는 이 법은 여자가 성행위를 목표로 주 경계를 넘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백인 아내를 데리고 다닌 잭 존슨을 겨냥한 법이었다.
결국 잭 존슨은 이 법 때문에 유죄판결을 받은 뒤 캐나다로 탈출, 유럽과 남미 등지에서 도피 생활을 하며 타이틀전을 벌여야 했다. 그의 첫 번째 백인 아내는 그 중압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했다. 잭 존슨은 "백인들의 증오심과 편견이 내 아내를 죽였다"고 탄식하기도 했다.
잭 존슨은 37세의 나이로 전성기를 훨씬 넘긴 1915년 쿠바의 하바나에서 백인 거한 제시 윌라드에게 26라운드 KO패로 패했다. 타이틀을 잃은 잭 존슨은 멕시코에서 활동하다 1920년 미국으로 돌아와 자수, 스스로 감옥행을 선택했다.
그의 백인에 대한 증오심은 그저 개인적으로 뜨겁게 타오르다 꺼진 모닥불이었다. 제임스 제프리스를 누른 날 흑인들이 거리로 뛰쳐나와 행진을 벌이고 일부 도시에서는 백인들과 충돌하며 폭동으로 이어지기까지 했으나 그건 단지 한 순간의 한풀이였다.
정치적으로 힘을 얻기에는 당시 흑인들의 사회적 기반이 너무 약했고 잭 존슨 스스로 문란한 사생활을 이어갔기 때문에 자신의 지위를 정치적으로 이용할 수도 없었던 탓이었다.
그에 비해 알리는 고난의 시대에 자신의 영향력이 정치적으로 활용되고 거대한 시대 흐름을 이끄는 마법을 경험했다.
1964년 첫 신체검사에서 지능지수 78로 면제 판정을 받은 알리는 재검 끝에 현역 입영대상자가 됐으나 입영을 거부했다. 종교적인 이유로 월남전에 참전할 수 없다는 것이 거부의 이유였다.
이에 67년에는 유죄판결을 받았고 이제 그의 상대는 지구상 최고의 파워를 자랑하는 미국 정부가됐다.
그가 유죄판결을 받자 뜻하지 않은 움직임이 일어났다. 이슬람 국가인 이집트와 파키스탄에서는 단식 투쟁과 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그 같은 소식이 세계에 퍼져 순식간에 알리는 단순한 복싱선수가 아닌 세계 평화와 반전의 상징이 됐다.
딸 라일라의 승리를 축하하는 알리 |
미국 정부는 뒤늦게 협상을 시도했다. 군복만 입고 있으면 복싱선수로 활동할 수 있게 해준다는 귀가 솔깃할 만한 제안이었다. 하지만 알리는 "세계챔피언보다는 백인들이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저항의 검둥이가 되겠다"며 투쟁을 선언했다.
때로는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할 때 더 소중한 것을 얻을 때가 있다. 알리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돈과 명예, 인생의 전부와 마찬가지인 복싱도 포기했다. 이후 그의 신념을 확인한 세계의 팬들은 알리를 성원했고 그는 훗날 더 많은 것을 누릴 수 있었다.
▶ 공공의 적에서 국민의 챔피언으로
잭 존슨과 알리의 가장 큰 차이는 결국 알리는 국민의 인정을 받았지만 존슨은 그렇지 못한 채 글러브를 벗어야 했다는 점이다.
1971년 알리는 대법원 상고심에서 병역 거부에 대해 배심원 만장일치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의 병역 거부가 단순히 군입대를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신념을 따르기 위한 것이었다는 걸 배심원들이 인정했다.
링에 복귀한 알리는 자신을 대신해 챔피언이 된 조 프레이저에게 도전했다가 생애 첫 패배를 안기도 했으나 재기에 성공, 74년 자이레의 킨샤샤에서 조지 포먼을 8회 KO로 누르고 다시 한 번 세계헤비급 챔피언에 올랐다. 67년 정부에게 빼앗긴 타이틀을 조지 포먼에게서 되찾은 셈이었다.
'럼블 인 더 정글'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당시 경기는 헤비급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이후 '더 그레이티스트(The Greastest)'라는 알리 전기 영화가 제작됐고 포먼과의 경기를 취재한 더큐멘터리 필름은 아카데미상을 받았다. 그만큼 알리의 재기는 극적이었다.
잭 존슨의 드라마틱한 삶도 '위대한 백인의 희망'이라는 제목으로 훨씬 앞선 70년대 초반 영화와 브로드웨이 연극으로 만들어졌다.
당시 브로드웨이 연극 공연을 관람한 알리는 "잭 존슨의 이야기 가운데 백인 아내 대신 군대 문제를 넣으면 완전히 내 이야기가 되는 것 아니냐"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밝혔다.
알리에게는 분디니라는 영적 트레이너가 있었다. 슈거레이 로빈슨의 개인 비서와도 같았던 그는알리의 자신감을 키워주고 투지를 북돋는 게 임무였다. 분디니는 이후 경기를 할 때면 "잭 존슨이 여기 와 있다. 유령이 여기 있다(Jack Johnson is in the house. The ghost is here)"고 외치며 알리를 응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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잭 존슨은 1946년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텍사스에서 열린 한 행사에 참가했다가 뉴욕에서 벌어지는 조 루이스의 타이틀 방어전을 보기 위해 급히 차를 몰던 중 노스캐롤라이나 랄리라는 도시에서 충돌사고를 일으켜 사망했다. 그의 나이 68세였다.
알리는 파킨슨씨 병 후유증으로 주먹보다 강하고 빨랐던 말을 잃었다. 초점을 잃은 눈과 표정도없는 얼굴 모습은 그의 기분이 어떤지도 짐작할 수 없게 한다. 하지만 알리는 '무하마드 알리 센터'를 운영하며 살아 있는 성인 대접을 받고 있다.
이제 미국에 흑인 대통령이 선출됐다. 100년 전 헤비급 복싱 챔피언마저 받아들이지 못하던 미국 사회는 지금 47년 재키 로빈슨이 메이저리그에 데뷔할 때보다도 여유롭게, 74년 행크 아론이 베이브 루스의 홈런 기록을 깨뜨릴 때 보다도 더 부드럽게 흑인 대통령을 받아들이고 있다.
미국 사회의 1백년 변화를 두 복서의 삶으로만 설명할 수는 없다. 게다가 잭 존슨은 사회의 변화를 추구하던 깨어있는 의식의 소유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인종적인 편견과 증오의 시대에 그를 딛고 세계 챔피언이 됐다는 점은 이후 조 루이스와 알리의 탄생에 자양분이 됐다는 점에서 결코 과소평가 할 수 없다.
오바마 대통령의 당선은 잭 존슨과 알리가 겪은 투쟁을 더욱 가치 있게 만들고 있다.
따지고 보니 1월17일은 알리의 생일이다. 67세가 된 그의 생일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조이뉴스24 | 김홍식 기자 diong@joynews24.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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