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세 계 인 물

히포크라테스(Hippocrates)- 서양 의학의 선구자

나 그 네 2012. 6. 11. 18:08

히포크라테스

“의사 한 사람이 사망하자마자 ‘의학의 아버지’라고 불릴 정도로 유례없는 명성을 누리게 되었기 때문에, 히포크라테스주의의 역사적 자취를 효과적으로 간략하게 살펴보기는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2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히포크라테스는 철학 사상에 아리스토텔레스가 영향을 끼쳤듯이 의학 사상에 영향을 끼쳐 왔다. 어쩌다가 도전을 받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더욱 많은 칭송을 들었으며, 또한 사용 의도에 따라 더욱더 빈번하게 왜곡되기도 하면서, 히포크라테스 총서는 고대에서 시작하여 19세기에 이르기까지 서양 의학에서 공인된 권위를 지니고 있었다.” (자크 주아나)

 

 

히포크라테스의 생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의사이며 의학의 대명사인 히포크라테스. 그러나 고대의 여러 인물과 마찬가지로 그의 생애에 관해서는 알려진 바가 많지 않다. 히포크라테스는 BC 460년에 그리스의 코스 섬(현재는 터키 남서부 연안에 위치한 그리스 영토)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의술에 종사했고, 족보를 거슬러 올라가면 전설 속의 명의 아스클레피오스까지 도달한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도 언급된 바 있는 아스클레피오스는 당대 최고의 의사로 명성을 떨쳤으며, 후대에 가서는 아폴론의 아들이며 의술의 신으로까지 격상된 인물이다. 따라서 의사 히포크라테스가 의신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예라는 것은 제법 그럴듯하기는 하지만, 물론 뚜렷한 근거가 있는 주장까지는 아니다. 당시의 의사는 지금처럼 엄격한 자격요건이 필요하지 않았다. 주로 히포크라테스의 경우처럼 대대로 의술에 종사한 가문에서 전수되는 의학 지식을 물려받은 사람들이 의사가 되었으며, 대개는 한 곳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각지를 편력하며 의술을 펼쳤다.


 

당시의 의사는 특별히 존경받거나 천대받은 직업은 아닌 순수 기능인의 성격이 강했다. 또한, 실력 못지않게 평판이 중요했기 때문에, 종종 환자를 실제로 치료하는 것보다도 청중을 앞에 두고 벌이는 변론이나 논쟁이 더욱 중시되었다. 히포크라테스도 이런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진 않았지만, 가급적 합리적인 자세를 고수한 덕분에 좋은 평판을 얻었다.

 

가업을 계승한 히포크라테스는 결혼해서 자녀를 셋 두었으며, 그중에서 아들인 테살로스와 드라콘도 훗날 의사가 되었다고 전한다. 히포크라테스의 생애에 관해 확실히 알려진 사실은 여기까지가 전부다. 그 외의 나머지는 전설이거나, 또는 다른 기록을 토대로 간접적으로 추측한 바에 불과하다. 전설에 따르면 히포크라테스는 훗날 고향 코스 섬을 떠나 테살리아로 갔으며, 이곳에서 의사로 활동하며 큰 명성을 얻었다. 워낙 명성이 대단했기 때문에 페르시아의 군주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를 초빙하려 했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는 “적국인 페르시아에서 부귀를 누리거나, 페르시아인을 질병에서 구한다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면서 초빙 제안을 거절해서 더욱 명성이 높아졌다.

 

히포크라테스는 테살리아의 라리사에서 사망했다고 전해지는데, 정확한 사망연도는 알려지지 않아서 BC 377년에서 BC 350년까지 여러 가지 주장이 있다. 다음과 같은 묘비명도 전해지지만, 역시나 진짜인지는 알 수 없다. “여기에 태양신 아폴론의 불멸의 후손, 코스 사람의 후예, 테살리아 사람 히포크라테스가 누워 있노라. 그는 건강으로 무장을 하고 질병을 물리쳐 무수한 승리를 거두었으며, 우연이 아니라 과학으로 커다란 영예를 안았노라.” 정작 생애에 관해서는 거의 알려진 바가 없는 히포크라테스가 사후에 큰 명성과 영향력을 발휘한 까닭은 그의 이름으로 간행된 저술 때문이다. 히포크라테스는 평생 60여 편의 논문을 저술했다고 하는데, 기원전 1세기에 처음으로 그의 저술집과 용어집이 편찬되어 널리 보급되었다.

 

그러나 히포크라테스의 저술에는 그 표현에서나 내용에서나 상당히 이질적이고 상반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이는 히포크라테스 일개인의 저술이라기보다는 오히려 히포크라테스 학파에 속하는 여러 세대 여러 저술가의 공동 저술로 추정된다. 가령 피타고라스의 제자들이 각자의 연구를 더 권위 있는 스승의 이름으로 발표한 것처럼, 히포크라테스의 제자들 역시 각자의 학설을 더 권위 있는 스승의 이름으로 발표했다고 보는 것이다. 고대로부터 갈레노스를 비롯한 여러 의사들이 편찬하고 주석을 붙인 여러 가지 판본이 있었지만, 지금은 19세기에 프랑스의 에밀 리트레가 편찬한 [히포크라테스 총서]가 가장 권위 있는 판본으로 여겨진다.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 대개는 음악이나 미술이나 연극 같은 분야에서 예술가들의 이야기를 하면서 인용되는 이 유명한 말도 사실은 히포크라테스 총서에 등장하는 구절이다. 여기서 말하는 “예술”(art)은 사실 “기술”(art)의 오독이라는 지적이 종종 나온다. 물론 고대 그리스에서 “기술(techne)”이라는 단어는 오늘날의 “예술”과 “기술” 모두를 지칭했지만, 원래의 문맥을 살펴보면 “인생은 짧고, 의술은 길다”라는 해석이 더 어울린다. 참고로 원문인 ‘경구’ 제1장 1절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인생은 짧고, 의술은 길다. 기회는 흘러간다. 실험은 위험하고, 결정은 어렵다. 의사는 자신이 보기에 올바른 일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환자와 조수와 외적 요소들의 협조를 이끌어낼 준비가 되어 있어야만 한다.”

 

아르타크세르크세스 1세의 초빙 제안을 거절하는 히포크라테스. 안 루이 지로데트리오종의 그림. 1792년. <출처 : Wikipedia>

 

 

히포크라테스 선서


‘히포크라테스’의 생애나 업적에 관해서는 정확히 모르는 사람이라도 아마 ‘히포크라테스 선서’라는 이름은 들어 보았을 것이다. 이른바 의사의 자세, 또는 의료 윤리에 관해서 규정한 내용으로 유명하지만, 찬찬히 뜯어보면 아주 단순명료하거나 이해하기가 쉬운 내용까지는 아니다. 이것 역시 히포크라테스가 직접 지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며, 몇몇 대목에서는 오히려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일반적인 주장과 배치되는 부분이 드러나기 때문에 후대에 지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설득력이 있다. ‘히포크라테스 선서’라는 명칭도 모호하긴 마찬가지다. 원래의 명칭은 그냥 ‘선서’였다. 다만, 1세기에 편집된 히포크라테스 저술집에 들어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히포크라테스의 저술로 간주되어 ‘히포크라테스 선서’라고 부르다가 그대로 굳어진 것뿐이다.

 

선서는 크게 두 부분, 즉 의사와 의사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부분과 의사와 환자 사이의 관계를 규정하는 부분으로 나뉜다. 특히 앞부분에 나오는 의학 교육(보수와 계약, 그리고 전승)에 관한 부분을 근거로 들어서, 이는 아마도 대대로 의술에 종사한 히포크라테스 가문에서 외부의 인물을 제자로 받아들일 경우에 일종의 의식으로서 거행한 선서였으리라는 추측이 일반적이다. 그리고 내용 가운데 ‘치명적인 약,’ ‘낙태용 페서리,’ ‘칼’과 ‘결석 환자’ 같은 특별한 언급은 그 당시의 진료에 따르는 여러 가지 관습을 간접적으로 시사해주는 것으로 여겨진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선서’를 그리스어 원문에서 옮긴 히포크라테스 연구가 반덕진 교수의 번역을 인용했다.)

나는 의술의 신 아폴론과 아스클레피오스, 휘기에이아, 파나케이아, 그리고 모든 남신과 여신의 이름으로 나의 능력과 판단에 따라 이 선서와 계약을 이행할 것을 맹세합니다.
나는 이 의술을 가르쳐 준 스승을 부모처럼 여기고 나의 삶을 스승과 함께하여, 그가 경제적으로 어려울 때 나의 것을 그와 나누며, 그의 자손들을 나의 형제로 여겨 그들이 의술을 배우기를 원하면 그들에게 보수나 계약 없이 의술을 가르칠 것이며, 내 아들들과 스승의 아들들, 그리고 의료 관습에 따라 선서하고 계약한 학생들에게만 교범과 강의와 다른 모든 가르침을 전하고, 다른 사람들에게는 전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나의 능력과 판단에 따라 환자를 돕기 위해 섭생법을 처방할 것이며, 환자들을 위해나 비행으로부터 보호하겠습니다.
나는 어떤 요청을 받아도 치명적인 약을 누구에게도 주지 않을 것이며, 그 효과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나는 어떤 여성에게도 낙태용 페서리를 주지 않겠습니다.
나는 나의 삶과 의술을 순수하고 경건하게 지켜 가겠습니다.
나는 칼을 사용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결석 환자도 그 일에 종사하는 사람에게 맡기겠습니다.
나는 어느 집을 방문하든지 환자를 돕기 위해 갈 것이며, 고의적인 비행과 상해를 삼가고, 특히 노예든 자유민이든 여자들이나 남자들과 성적 접촉을 삼가겠습니다.
내가 환자를 진료하는 동안, 또는 진료 과정 외에 그들의 삶에 관해 보고 들은 것이 무엇이든지, 그것이 외부로 알려져서는 안 되는 것이라면, 그것들을 비밀로 지키고 누설하지 않겠습니다.
이제 내가 이 선서를 지키고 어기지 않는다면, 내가 나의 삶과 나의 의술에 대해 모든 사람들로부터 영원한 명예를 얻게 하시고, 만약 내가 선서를 어기고 위증한다면 나에게 그 반대를 주소서.

오늘날 세계 각국의 의과대학에서는 졸업생이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하면서 의사로서의 본분을 지키기로 다짐하는 것이 일종의 관례처럼 되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56년에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의 졸업생부터 ‘선서’를 낭독했다는 기록이 있다. 하지만, 지금 사용되는 선서는 대부분 고대 그리스어로 작성된 원본이 아니라 1948년에 세계 의사협회에서 제정한 일종의 수정판인 ‘제네바 선언’이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나치의 인종학살에 참여한 일부 의사들의 죄과를 반성하는 의미에서, 인종과 계급 등에 관한 언급을 포함한 것으로 이후 모두 네 차례에 걸쳐 개정되기도 했다. ‘제네바 선언’의 전문은 다음과 같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써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는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
나는 환자가 알려준 모든 내정의 비밀을 지키겠노라.
나는 의업의 고귀한 전통과 명예를 유지하겠노라.
나는 동업자를 형제처럼 여기겠노라.
나는 인종, 종교, 국적, 정당 정파 또는 사회적 지위 여하를 초월하여 오직 환자에 대한 나의 의무를 지키겠노라.
나는 인간의 생명을 수태된 때로부터 지상의 것으로 존중하겠노라.
나는 비록 위협을 당할지라도 나의 지식을 인도에 어긋나게 쓰지 않겠노라.
이상의 서약을 나는 나의 자유의사로 나의 명예를 받들어 하노라.

 

히포크라테스의 영향

히포크라테스의 업적, 또는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업적은 관찰에 근거한 진단과 처방을 중시한 ‘합리주의’로 요약된다. 지금과 비교하자면 과학이 크게 발달하지 못했음을 감안하더라도, 히포크라테스 총서에 나온 여러 의학 이론에서는 의외로 합리적인 사고가 두드러진다. 물론 잘못된 전제 때문에 잘못된 결론이 나오는 경우도 종종 있었지만, 적어도 그 추론 과정만큼은 충분히 논리적이었다. 가령 당대에는 ‘신이 내리는 질병’으로 여겨진 간질에 대해서도 그 원인이나 처방을 신비주의로 설명하지 않으려 경계했고, 또한 실력도 없으면서 극적인 치료법을 이용해 대중의 관심을 끌려는 일부 의사의 행태에 대해서도 반대했다.

 

물론 히포크라테스 학파도 그 시대의 굴레를 완전히 벗어버린 것까지는 아니었다. 가령 인체를 직접 해부해 보지 않고 동물 해부에 근거해서만 지식을 쌓았기 때문에 종종 오판이 불가피했다. 가령 신경을 단순한 인대로만 알았고, 동맥과 정맥의 차이를 몰랐으며, 특히 여성의 자궁에 관해서는 완전히 오판을 범해서 마치 이 기관이 체내 곳곳으로 움직여 다니며 질병의 원인이 된다는 식으로 서술했다. 이처럼 남성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비롯된 오류며, 신비주의를 완전히 타파하지 못하고 종교나 비학의 원리를 끌어들인 것은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분명한 한계다.

 

그런 오류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이른바 ‘체액설’이다. 이는 인체의 건강과 질환을 네 가지 체액(혈액, 점액, 황담즙, 흑담즙)의 조화와 이상에서 비롯된 결과로 설명하는 의학 이론으로, 훗날 이를 계승한 갈레노스가 더욱 강조함으로써 고대의 대표적인 의학 이론으로 각인되었다. 물론 체내 기관의 실제 구조나 작용과는 무관한 상상과 억측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체외로 배출되는 여러 가지 체액을 직접 관찰한 데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에, 당대에는 제법 설득력 있는 이론으로 간주되었다. 하지만, 히포크라테스 학파가 모든 질병을 체액설로 환원시켜 설명한 것은 아니며, 그보다는 더 합리적이고 효율적인 치료법을 더욱 권장한 것이 사실이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12세기 비잔틴의 사본으로, 기독교의 상징인 십자가 모양으로 본문을 배치한 것이 이채롭다. 히포크라테스의 권위는 중세에도 여전했지만, 기독교의 영향으로 선서의 서두에는 의술의 신 ‘아폴론’의 이름 대신에 ‘야훼’와 ‘예수’의 이름이 들어가곤 했다. <출처 : Wikipedia>

 

체액설의 경우에서 드러나듯이,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기본 입장에 따르면 건강이란 신체가 조화를 이룬 상태이고, 질병이란 그런 조화가 깨진 상태였다. 따라서 환자에게는 적극적인 치료법보다는 부드러운 치료법을 통해서 몸의 자연스러운 회복 능력을 북돋우는 것이 중요하다고 보았다. 즉 식이요법이나 운동이나 목욕 같은 섭생법이 우선이고, 약물이나 절개나 소작 같은 치료법은 어디까지나 차선책이라고 보았다. “약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은 칼로 고칠 수 있으며, 칼로 고칠 수 없는 병은 불로 고칠 수 있다. 그리고 불로 고칠 수 없는 병은 불치의 병이라고 여겨야 한다.”

 

히포크라테스 총서에는 단순히 질병의 진단과 처방뿐만 아니라 백과사전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질병은 인체와 직결된 요인뿐만 아니라, 계절의 변화 같은 환경 요인에서도 비롯된다고 본 까닭이었다. 따라서 진단에는 주위 환경도 고려되어야 한다는 점에 착안하여 기후와 지형과 인종과 문화, 심지어 법률과 관습 등에 관해서도 분석하는 것이다. 이에 착안해서 일각에서는 히포크라테스야말로 본격적인 인문과학의 창시자라고 본다. 특히 최초의 역사가이며 이국 문물에 관해서도 많이 언급한 헤로도토스의 기록과 비교해도, 히포크라테스 학파의 기록에서는 합리적인 관찰과 분석이 상당히 두드러진다.

 

생전에는 물론이고 사후에도 히포크라테스는 큰 명성을 얻었다. 플라톤은 [프로타고라스]와 [파이드로스]에서 “코스 섬의 유명한 의사 히포크라테스”를 언급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정치학]에서 그를 “한 인간이라기보다는 의사로서” 위대한 인물이라고 평했다. 대(大)플리니우스는 의학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있다가 히포크라테스에 와서야 비로소 광명을 되찾았다.”고 예찬했다. 히포크라테스의 명성을 확립하는 데 누구보다 혁혁한 업적을 세운 인물은 로마시대의 의사 갈레노스였으니, 수많은 저술에서 종종 히포크라테스를 인용하고 예찬했기 때문이다. 물론 후대에 가서는 히포크라테스의 권위가 워낙 높아진 까닭에 오히려 다른 새로운 학설을 억압하는 경우도 없지 않았다.

 

여러 가지 한계와 문제에도 불구하고 히포크라테스의 가르침은 오늘날까지도 의학의 본질과 의사의 자세에 관해 많은 것을 알려준다. 히포크라테스 연구가인 자크 주아나는 다음과 같이 평가를 내린다. “과학적 입장에서 본다면 이제는 비록 히포크라테스의 이름으로 전승 되던 저술이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 해도, 그의 인간적 측면은 의사들의 귀감으로 남았다. 결과적으로 볼 때 히포크라테스 총서는 그리스와 서구 세계에 과학 정신을 일깨워 주던 가장 풍부하고 가장 감명 깊은 유산 가운데 하나로서 존재해 왔으며, 앞으로도 계속 그러할 것이다.”

 

 

참고문헌: 에르빈 H. 아커크네히트, [세계의학의 역사], 1987; 히포크라테스, [의학 이야기], 1998; 자크 주아나, [히포크라테스], 2004; 반덕진, [히포크라테스 선서], 2006.

 

 

 

박중서 / 출판기획자, 번역가
글쓴이 박중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인 [뉴욕 침공기]와 [월스트리트 공략기] 등 수 십권의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번역가다. 1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했으며, 독서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불굴의 용기] [끝없는 탐구] 등 인물 논픽션을 번역했으며 외국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발행일 
2011.01.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