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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구스타프 융- 심리학자

나 그 네 2012. 6. 11. 18:15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 나의 저술들은 내 생애의 정류장이라 여겨질 만하다. 그것들은 나의 내적 발달의 표현이다. 무의식 내용을 탐구하는 일은 사람을 만들고, 그에게 변환을 일으키기 때문이다. 나의 생애는 내가 행한 것, 내 정신의 작업이다. 이것들은 하나하나 떼어놓을 수가 없다.”

-칼 구스타프 융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정신의학자가 되다

칼 구스타프 융(이하 편의상 ‘융’으로 통일)은 1875년 7월 26일에 스위스 북부 투르가우 주의 시골 마을 케스빌에서 개신교 개혁파 목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융 가문은 본래 독일 마인츠에서 살았지만, 이 유명한 정신의학자의 할아버지(역시 의사였고, 역시 ‘칼 구스타프’라는 이름이었던) 때에 스위스 바젤로 이사하여 이후로 스위스 국적을 갖게 되었다. 융은 바젤 근교의 클라인휘닝겐에서 성장했고, 11세 때에 바젤의 김나지움에 입학해서 중등 교육을 받았다.

 

회고록에 따르면 융은 어린 시절부터 상당히 예민한 기질의 소유자였고, 심령 현상에 관심이 많았다. 거짓으로 신경증을 일으켜서 학교를 빼먹기도 했으며, 자신이 두 가지 인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생각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사춘기에 접어들면서는 기독교 신앙에 대한 회의로 목사인 부친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특이한 꿈과 환상을 체험하면서 점차 품게 된 인간의 내면에 대한 관심은 훗날 그의 인생 행보를 결정한 요인이었다. 1895년에 융은 김나지움을 졸업하고 바젤 대학에서 의학을 전공하게 되었다.


 

1896년에 부친이 사망함으로써 융은 대학에 다니면서 어머니와 여동생의 생계를 책임지는 가장의 의무를 떠맡아야 했다. 1900년에 의사 자격시험을 앞두고 융은 정신의학자 리하르트 폰 크라프트에빙의 책을 읽다가 정신과 의사가 되기로 작정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정신의학은 아직 개척 중인 분야였으며, 의과대학에서 정규 과목으로 편입된 지도 얼마 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융은 정신의학을 통해 본인이 관심을 갖는 정신과 자연이라는 두 가지 영역의 조화가 가능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었다.

 

1900년에 대학을 졸업한 융은 취리히 의과대학 부설 부르크횔츨리 병원에 취업한다. 그는 ‘정신분열증’이라는 용어를 고안한 정신의학자 오이겐 블로일러(1857-1939) 밑에서 연구와 치료에 전념했다. 융은 정신질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기존의 ‘자유 연상’ 기법을 개선한 ‘단어 연상’ 기법을 제안해서 주목을 받았고, 아울러 환자가 지닌 고통의 근본 원인이 되는 “다양한 생각의 집합”을 일컫는 ‘콤플렉스’라는 단어를 고안했다(지금은 흔히 ‘열등의식’과 동의어로 여겨지지만, 모든 콤플렉스가 열등의식까지는 아니다).


1903년에 융은 엠마 라우셴바흐와 결혼했다. 스위스에서도 손꼽히는 시계 제조업자의 딸인 엠마는 막대한 유산을 상속받아서 융의 연구에 독립성을 보장해주었다. 엠마는 훗날 프로이트와 서신을 교환하고 정신분석가로 활동할 만큼 지적이고 명석했기 때문에, 융에게는 이상적인 배우자 겸 동료 노릇을 해 주었다. 1905년에 융은 취리히 의과대학의 교수가 되어 더욱 명성이 높아진다. 그리고 이 시기에 융은 또 한 명의 중요한 인물을 만난다. 바로 오스트리아 빈의 정신의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와의 만남과 결별

칼 구스타프 융과 지그문트 프로이트. 존경과 우정에서 시작되어, 사상적 갈등을 거치고, 결국 결별과 반목으로 마무리된 두 사람의 관계는 정신분석학은 물론이고 현대 지성사에서도 가장 유명한 일화 가운데 하나다. 일반적으로는 융이 프로이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았던 것이 갈등과 결별의 이유로 거론되지만, 히스테리 연구에 근거를 둔 프로이트의 이론과 정신분열증 연구에 근거를 둔 융의 이론은 애초부터 근본적인 차이를 드러내고 있었다.

 

프로이트와 융의 관계에 관한 가장 큰 오해는 두 사람을 ‘사제지간’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프로이트와 만났을 당시에 융은 이미 정신의학 분야에서 나름의 입지를 구축한 중견 학자였다.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 수많은 환자와 손님이 찾아왔고, 취리히 의과대학에서는 재학생 이외의 일반인 수강생도 많아 강의실이 초만원이었다. 따라서 비록 19년이라는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융은 학자 대 학자라는 비교적 대등한 입장에서 프로이트와 교우할 수 있었다.

 

1910년, 취리히 의과대학 부설 부르크횔츨리 병원 앞에 서 있는 융. 이곳에서 정신분열증 환자를 치료한 경험은 융이 훗날 분석심리학으로 일컬어질 이론을 구상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출처: en.wikipedia.org>


정신분석 운동의 초기에 융은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1900)을 읽고 나서, 격렬한 찬반양론을 불러온 이 새로운 이론이 자신의 고찰과도 상당 부분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음을 깨닫고 흥분했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동조자가 되는 데에는 적잖은 위험이 따랐다. 융이 논문과 저서에서 프로이트의 입장을 지지하자, 주위의 동료들은 자칫 학계에서 매장될 수 있다며 충고를 빙자한 위협을 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융은 이렇게 응수했다. “프로이트가 말하는 것이 진리라면, 나는 기꺼이 그의 편에 서겠다.”

 

1906년부터 1913년까지 융은 프로이트와 활발히 서신을 교환했으며, 1907년 2월에 빈으로 찾아가 프로이트를 처음으로 만났다. “우리는 낮 한 시에 만났다. 그리고 열세 시간 동안 정말 쉬지 않고 이야기를 나누었다.” 프로이트의 입장에서 융의 지지는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한편으로는 융의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방식이 지닌 장점 때문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유대인 위주의 정신분석 운동에 비(非)유대인인 융이 가담함으로써, 이 운동의 성격에 대한 오해가 줄어들 수 있으리라 기대한 까닭이었다.

 

프로이트는 정신분석 운동에서 융을 기꺼이 2인자, 또는 황태자로 인정하려는 의향을 드러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점차 입장의 차이가 두드러졌다. 가장 첨예한 갈등은 프로이트의 성 이론에 대한 융의 비판이었다. “나는 꿈과 히스테리의 복잡한 메커니즘을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프로이트처럼 어린 시절의 성적 외상(트라우마)에 유일한 의미를 부여하지는 않는다. 또 프로이트처럼 성을 과도하게 전면에 부각시키지도, 성이 심리적 보편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1909년에 융과 프로이트는 7주간 미국을 방문했다. 이 여행은 두 사람의 결별을 가속화시킨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경험을 통해서 융은 프로이트가 “진리보다는 개인의 권위”를 더욱 앞세운다는 인상을 받았으며, 프로이트의 이론이 일종의 도그마와 개인숭배로 변질되었다는 점에 거부감을 느꼈다. 프로이트 역시 융이 종교나 신비주의 같은 미심쩍은 “고대의 잔재”에 관심을 보이는 것에 불만을 느꼈다. 1910년에 융은 국제 정신분석 협회의 초대 회장으로 선출되었지만, 양쪽의 갈등은 점점 깊어졌다.

 

1913년에 이르러 융과 프로이트는 마침내 결별하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우리의 사적인 관계를 모두 중단하기로 하자”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고, 융도 “더 이상 당신과 함께 일하는 것이 불가능하게 되었다”고 시인했다. 이후로 프로이트는 융에 대한 언급을 가급적 피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 결별을 오랫동안 아쉬워했다는 증언이 있다. 융 역시 프로이트의 사상에서 받은 영향을 기꺼이 인정했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 없었더라면, 나는 (심리학 분야의 여러 문제에 대한) 해결의 열쇠를 찾지 못했을 것이다.”

 

1909년에 미국 여행 중의 기념사진. 앞줄 왼쪽부터 프로이트, 미국의 심리학자이며 클라크 대학의 총장인 G. 스탠리 홀, 그리고 융. 이 미국 여행은 프로이트와 융의 결별을 가속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commons.wikimedia.org>

 

 

독자적인 정신의학 이론의 전개

프로이트와의 결별은 융의 인생에서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1913년에 융은 오래 몸담았던 취리히 의과대학에서 사임했고, 학문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일시적인 고립에 빠져들었다. 융은 “방향상실 상태”인 동시에 “완전히 허공에 떠 있는 느낌”으로 무의식의 세계에 대한 본격적인 탐사에 몰두했다. 이 시기에 그는 여러 가지 불가사의한 신비 현상을 체험했다. 가령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기 직전에는 대규모 재앙에 대한 환상을 보았으며, 유령을 목격하거나 의미심장한 꿈을 꾸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때부터 융은 영지주의와 연금술의 연구에 몰두했으며, 무의식의 본질을 탐색하는 과정에서 자기 안의 또 다른 인격의 목소리를 듣고, 만다라를 치료의 도구로 응용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 융은 자신의 내면을 깊숙이까지 들여다보는 작업을 수행했고, 그 부산물로 여러 권의 개인적이고 비밀스러운 기록을 얻게 되었다. 이런 기록 가운데 하나를 읽어보는 특권을 누렸던 한 친구는 다음과 같이 의미심장한 평가를 내리기도 했다. “융은 그 자신이 걸어 다니는 정신병원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병원의 최고 의사이기도 했다.”

 

융의 이론에 내재된 이중적인 성격은 아마도 그의 관심이 평생 동안 심령과 과학으로 양분된 까닭이었을 것이다. 의사인 동시에 신비체험자였던 그는 과학의 방법만으로는 쉽게 규명할 수 없는 거대한 세계가 인간의 내면에 들어있다고 확신했다. 그 새로운 세계를 규명하려는 후반기의 저서는 종종 모호하고 혼란스러운 인상을 주기 때문에, 융은 종종 과학자를 빙자한 공상가로 오해되곤 한다. 하지만 과학적으로는 설명이 불가능한 현상에 대해서도 융은 정신의학의 입장에서 최대한 객관적인 해명을 시도했다.

 

1922년에 융은 취리히 호수 인근의 볼링겐 마을에 땅을 구입하고, 수도나 전기 같은 편의시설을 의도적으로 배제한 소박한 별장을 지었다. 설계와 공사에 직접 참여하여 33년간 증축을 거듭한 볼링겐 별장은 융의 사상적 발전과 업적의 상징이나 다름없었다. 나아가 그는 동양학자 리하르트 빌헬름이 번역한 [황금 꽃의 비밀(太乙金花宗旨)]를 읽고 연금술의 의미에 관해 새로운 시각을 얻게 되었으며, 여러 차례 아프리카와 인도를 여행하면서 유럽 이외의 문화와 사상에 대한 관심을 넓혔다.

 

1911년에 열린 국제 정신분석 협회 회의의 기념사진. 엠마 융(맨 앞줄 오른쪽에서 다섯 번째)의 바로 뒤에 약간 몸을 숙이고 서 있는 사람이 칼 융이고, 그 왼쪽이 지그문트 프로이트다. 이 사진에서는 한가운데에 나란히 서 있었지만, 당시에도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긴장이 지속되고 있었다. <출처: commons.wikimedia.org>

 

 

나치 동조자라는 비난과 말년

1933년에 히틀러가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권력을 장악했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되기 전까지의 기간 동안 프로이트를 비롯한 여러 정신의학자들은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독일 학계에서 퇴출되고 망명을 떠나야 했다. 반면 융은 스위스 국적에 비(非)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여전히 명성을 유지하며 활동을 펼쳤다. 이후 독일 학계가 노골적인 친(親)나치 입장으로 선회하자, 그 일원인 융도 자연스레 나치 협력자, 또는 반(反)유대주의자로 여겨졌다. 여기서 비롯된 비난은 지금까지도 융의 이력에 그늘을 드리운다.

 

융이 나치에 적극적으로 반대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유대인에 대해서 오해의 여지가 있는 발언을 남긴 것도 사실이며, 독일 학계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함으로써 자칫 나치에 악용될 수 있는 빌미를 남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만 놓고 융을 반유대주의자나 나치 동조자로 모는 것은 속단이다. 나치의 서슬이 시퍼렇던 1939년에도 융은 프로이트의 사망 소식을 듣고 “프로이트라는 이름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정신사에서 빼놓고 생각할 수 없는 이름”이라고 추모사를 발표할 정도로 신의를 지켰다.

 

융의 반유대주의가 히틀러의 반유대주의에 영향을 주었다는 주장도 근거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오히려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융은 미국의 앨런 덜레스를 도와 OSS의 정보원으로 활동했다. 이때 융은 나치 수뇌부의 심리 상태에 대한 분석을 내놓았으며, 특히 히틀러에 대해서는 궁지에 몰릴 경우 자살할 가능성이 있음을 지적했다. 전쟁이 끝나고 논란이 일자 융은 “내가 나치이거나 나치였다는 것은 악명 높은 거짓말이다”라고 단언했지만, 이후로도 그의 행적에 관한 악의적인 소문은 그치지 않았다.

 

1944년에 융은 사고로 다리가 부러지고, 심근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다. 그 와중에 그는 임사체험을 경험했으며,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차라리 이 상태로 세상을 하직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 정도로 황홀감을 느꼈다. 1947년에는 두 번째 심근경색으로 병원 신세를 졌지만, 건강을 회복한 다음부터는 다시 활발한 연구에 돌입했다. 1948년에는 취리히에 C. G. 융 연구소가 설립되었다. 욜란데 야코비(1890-1973)와 마리 루이제 폰 프란츠(1915-1990) 등은 융의 제자들 가운데에서도 가장 주목할 만한 인물이다.

 

말년의 저서 중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분석으로 큰 논란을 일으킨 [아이온](1951)과 [욥에게 보내는 답](1952), UFO 현상을 집단무의식의 발현으로 해석한 [현대의 신화](1958), 융 사상의 입문서로 유명한 [인간과 상징](1961) 등이 유명하다. 82세 때인 1957년부터는 5년간 집필 및 구술을 통해 자서전을 만들었다. “나의 생애는 무의식의 자기실현의 역사다.” 이 유명한 말로 시작되는 자서전은 융의 생애와 이력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신비 체험에 대한 증언을 담았고, 그의 사후인 1961년에야 간행되었다.

 

1955년에 취리히에서는 80세 생일을 맞이한 융을 위해 대대적인 축하 행사가 펼쳐졌다. 하지만 그 해 말에는 반세기 넘게 해로한 부인 엠마가 사망하면서, 융도 급속히 노쇠의 기미를 보였다. 1961년 6월 6일 저녁, 칼 구스타프 융은 퀴스나흐트의 자택에서 사망했다. “부르든 부르지 않든, 신은 존재할 것이다.” 융의 묘비에 적힌 문구는 언젠가 그가 인터뷰에서 한 말을 상기시킨다. 신을 믿느냐는 질문을 받자, 융은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그분을 믿는 게 아니라, 그분을 압니다.”

 

볼링겐 탑. 1922년부터 무려 33년간 증축을 거듭한 이 별장은 수도나 전기 같은 편의시설을 의도적으로 배제했으며, 융의 사상적 발전과 업적을 상징하는 공간이다. <출처: commons.wikimedia.org>

 

 

융과 분석심리학

1913년의 어느 강연에서 융은 자신의 이론을 ‘분석심리학’이라고 명명했다. 이는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이나 블로일러의 ‘심층심리학’과 대비되는 개념이었다. 프로이트가 ‘개인무의식’의 규명에 열중했다면, 융은 보편적이고 원초적인 차원의 ‘집단무의식’이 있다고 보았다. 인간의 마음은 여러 층으로 나뉜다. 우선 의식에 해당하는 자아(나, 또는 에고)가 있고, 그 아래에 개인무의식(‘그림자’가 있는 곳)과 집단무의식(‘아니마’와 ‘아니무스,’ ‘원형’이 있는 곳)이 있고, 마음의 맨 한가운데에 바로 ‘자기’가 있다.

 

분석심리학의 핵심은 ‘개성화 과정,’ 즉 자아가 무의식의 여러 측면을 발견하고 통합하는 “무의식의 자기실현 과정”이다. 우리가 정신적으로 건강해지기 위해서는 의식과 무의식이 조화를 이루어야 하지만, 개인은 사회생활을 하면서 사회가 원하는 모습, 즉 ‘페르소나’를 취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다른 인격적 측면이 무의식 속에 억압되면, 그렇게 억압된 만큼의 보상을 치러야 한다. 이처럼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에서 균형이 깨지면 히스테리와 정신질환 같은 문제가 발생한다.

 

꿈을 통해 우리는 평소에 몰랐던 무의식의 여러 측면을 접한다. ‘그림자’는 무의식에 들어 있는 자아의 어두운 면, 또는 다른 면이며, 대개 의식이 부정하거나 외면하는 성격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그림자를 다른 사람에게서 발견하는 ‘투사’ 작용을 행한다. 그림자와 유사한 것이 ‘아니마’와 ‘아니무스’이다. 아니마는 남성의 내부에 있는 여성적 경향의 인격화이며, 아니무스는 여성의 내부에 있는 남성적 경향의 인격화이다. 우리는 그림자와 아니마/아니무스의 존재를 인정함으로써 우리 의식에 통합시킬 수 있다.

 

융의 이론에서 가장 유명한 개념은 바로 ‘집단무의식’과 ‘원형’이다. “집단무의식은 모든 사람에게 공통된 것으로, 고대에서 만물의 공감이라고 불렀던 것의 기초”라고 융은 설명했다. 또한 원형은 “집단무의식의 내용”이며, 그 중에서도 “고대의, 또는 원초적 유형, 즉 고대로부터 존재해 온 보편적 이미지”를 뜻한다. 원형은 칸트의 물자체와 마찬가지로 우리가 알 수 없지만, 원형의 이미지는 우리가 알 수 있다. 가령 ‘모성/부성,’ ‘영웅’ 같은 것이 그런 원형의 이미지이며, 신화나 민담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자기실현의 최종 단계인 ‘자기’는 의식과 무의식이 온전하게 통합된 것을 말하며, 우리의 의식을 일컫는 ‘자아’보다는 더욱 큰 개념이다. 융은 이것을 ‘자기원형’이라고 불렀으며, 그 궁극의 형태는 신(또는 기독교에서 말하는 하느님)과도 유사한 개념이라고 간주해서 주목을 받았다. 따라서 자기의 영향력이 압도적인 경우에는 사람이 자칫 개인지상주의나 자아팽창에 빠져서 결국 과대망상을 품기 쉽다고 지적했다. 그 외에도 융은 “의미심장한 우연의 일치”를 의미하는 ‘동시성’이라는 개념을 제안하기도 했다.

 

융의 사상 가운데 일반인에게 가장 익숙한 것은 심리학적 유형론이 아닐까. [심리적 유형론](1921)에서 융은 두 가지 유형(내향성, 외향성)과 네 가지 기능(사고, 감정, 감각, 직관)을 범주로 성격 구분법을 제안했다. 물론 이는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진료의 편의를 돕는 도구에 불과했지만, 상당히 타당성이 있는 것으로 간주되었다. 1921년에 미국의 심리학자인 캐서린 브릭스와 이자벨 브릭스 마이어 모녀가 만들어서 오늘날까지 널리 응용되는 마이어-브릭스 유형지표(MBTI)도 바로 융의 개념을 토대로 한 것이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헤르만 헤세(왼쪽)는 1916년에 처음 융을 만났으며, 그의 대표작인 소설 [황야의 이리](1927)는 분석심리학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고 평가된다.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볼프강 파울리(오른쪽)는 기계 옆에만 가도 고장을 일으키는 ‘파울리 효과’의 주인공으로도 유명하다. 파울리는 융보다 25세 연하였지만 오랫동안 절친한 사이로 지냈으며, 특히 융의 ‘동시성 이론’에 관심을 갖고 공동 연구를 하기도 했다. <출처: commons.wikimedia.org>

 

 

융의 이론에 대한 평가

융의 이론은 임상적인 차원에서 출발했다. 정신분열증 환자를 치료하는 과정에서 그는 단어 연상을 통해 콤플렉스의 존재를 확인했고, 무의식의 영역이 기존에 알려진 것보다도 더 넓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계속된 탐구를 통해 그는 무의식의 영역에 있는 여러 가지 요소들(그림자, 아니마/아니무스, 원형, 개인무의식, 집단무의식, 자기)을 하나씩 접하면서 그 성격을 파악해 나갔다. 비록 물리적 증거까지는 없었지만 융은 광범위한 독서를 통해서, 그리고 비정통적인 접근까지 불사해 가면서 그 존재를 규명했다.

 

그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융은 항상 프로이트의 광휘에 적잖이 가려진 느낌을 준다. 물론 활동 시기나 업적이나 명성에서 프로이트가 더 먼저인 것은 사실이며, 한때 융이 프로이트 학파에 소속되었다가 독립함으로써 사제관계라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때문이기도 하다. 앞서 설명한 것처럼 융은 프로이트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신예 학자로 명성을 얻고 있었기 때문에, 융을 프로이트를 계승한 2인자로 치부하는 것은 부당한 일이다. 그러나 적어도 양쪽에 대한 비교가 사상적 특색을 드러내는 데 유용하긴 하다.

 

프로이트가 무의식이라는 세계로 들어가는 입구를 제공했다면, 융은 무의식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양화했다는 의의를 지닌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억압에 의해 이루어진 부정적인 요소로 간주한 반면, 융은 개인뿐만이 아니라 집단의 무의식이라는 또 다른 세계를 가정함으로써 무의식이 오히려 독자적으로 존재하며 창조적인 기능을 발휘한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프로이트가 무의식의 해방을 도모했다면, 융은 무의식과의 화해를 의도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융의 이론이 처음부터 끝까지 각광을 받은 것은 아니었으며, 그는 말년에 이르러서도 자신의 사상이 “도처에서 뛰어넘을 수 없는 벽”에 부딪쳤다고 한탄하곤 했다. “나는 나의 저술에 대해서 어떤 뜨거운 공감을 기대한 적이 없다 (...) 나는 누구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것을 말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특히 연구 초기에는 완전히 외톨이가 된 느낌을 자주 받았다. 나는 사람들이 싫어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왜냐하면 의식세계에 대한 보상을 받아들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범성욕주의로 비난을 받았듯이, 융의 이론도 비과학적이라고 비난을 받았다. 특히 신화와 종교는 물론이고 영지주의, 연금술, 만다라, 도교, 주역, UFO에 대해 연구한 글은 워낙 모호하고 불투명해서 갖가지 해석과 오해를 불러냈다. 프로이트의 이론에 비하자면 융의 이론은 뚜렷한 체계나 개념을 잡기가 힘들다고 평가된다. 정신의학자 앤터니 스토는 프로이트에 비해 “융이 이처럼 도외시된 것은 그가 자신의 사상을 쉬운 용어로 잘 표현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나는 체계적인 이론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있는 사실을 기술하고, 토론할 가치가 있다고 생각되는 견해를 제시할 뿐입니다.” 융은 자기 이론이 (프로이트의 경우처럼) 도그마로 변질되지 않게끔 포괄적 이론을 의도적으로 멀리하고 개별 사례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만을 도모했다. “나는 자주 나의 정신치료법이나 분석방법에 관해 질문을 받는다 (...) 치료법은 각각의 사례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그의 이론이 개인적 경험을 넘어 보편적 이론이 되는 데에는 실패했다고도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융의 이론에 담겨 있는 가능성에 주목한 사람들도 많았다. 물리학자 볼프강 파울리는 융과 함께 ‘동시성’ 이론을 연구했고, 종교학자 미르체아 엘리아데조지프 캠벨은 융의 이론을 종교와 신화 연구에 적용하여 대중화시켰다. 정신과의 임상 치료에서부터 예술 작품에 이르기까지, 융의 이론은 오늘날까지도 자주 논의되고 또 설득력을 얻고 있다. 어느 누구보다도 인간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 본 인물인 “그는 세월이 갈수록 점점 더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고”(로렌스 반 데어 포스트) 있는 것이다.

 

 

 

참고문헌 : 칼 구스타프 융, <기본 저작집>, 전9권, 2001-2008; <회상, 꿈, 그리고 사상>, 1989; <사람과 상징>, 1995; <기억, 꿈, 사상>, 2007; 이부영, <분석심리학>, 1978; 에드워드 암스트롱 베넷, <한 권으로 읽는 융>, 1997; 게르하르트 베어, <카를 융: 생애와 학문>, 1998; 이부영, <그림자>, 1999; 게르하르트 베어, <융>, 1999; 앤터니 스토, <융>, 1999; A. 새뮤얼 (외), <융 분석비평사전>, 2000; 매기 하이드 (외), <융>, 2002; 데이비드 테이시, , 2008; 디어드리 베어, <융>, 2008.

 

 

 

박중서 / 출판기획자, 번역가
글쓴이 박중서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 시리즈인 [뉴욕 침공기]와 [월스트리트 공략기] 등 수 십권의 책을 우리 말로 옮긴 번역가다. 1만권이 넘는 책을 소장했으며, 독서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불굴의 용기] [끝없는 탐구] 등 인물 논픽션을 번역했으며 외국 인물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발행일 
2011.09.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