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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그문트 프로이트- 정신분석학자 , 심리학자

나 그 네 2012. 6. 11. 18:12

1939.9  나치의 박해를 피해 영국으로 망명하고 83세를 일기로 사망하다

 

 

 

지기스문트 슐로모 프로이트는 1856년 5월 6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모라비아의 작은 도시 프라이베르크에서 태어났다. 유대계 사업가인 그의 아버지는 40세 때 20세의 여성과 재혼해 7명의 자녀를 두었는데, 그중 맏이가 바로 ‘지기’였다. 얼마 후 프로이트 일가는 빈으로 이주했으며, 당시 다섯 살이었던 ‘지기’는 훗날 나치의 탄압으로 망명을 떠날 때까지 무려 70년 넘게 이 도시에 살았다. 비록 인종차별이 있긴 했지만 빈의 유대인은 다른 유럽 여러 지역에 비해서는 현지인과 잘 융화되어서, 당시 그곳의 의사나 변호사 같은 전문직 가운데 절반가량이 유대인이었다.

 

프로이트의 생애: 무명의 생리학자에서 정신분석의 창시자로

 

1873년, 빈 의과대학에 입학한 지기스문트(Sigismund)는 이때부터 이름을 지그문트(Sigmund)로 바꾼다. 생리학을 전공한 프로이트는 어류와 갑각류 등의 신경계 구조를 연구해 1881년에 학위를 받았다. 1882년에 그는 훗날 아내가 되는 마르타 베르나이스를 만나 약혼하고, 안정된 생활을 위해 연구직을 포기하고 빈 종합병원에 들어가 몇 년 동안 일한다. 최대한 빨리 성공해야 한다는 부담을 느낀 프로이트는 그 당시 각광받던 새로운 마취제 코카인의 효력을 연구하는 일에 뛰어드는데, 이때 코카인의 중독성을 과소평가한 것은 그의 일생일대 실책으로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1885년, 프로이트는 장학금을 받아 프랑스 파리로 유학을 떠나고, 5개월 동안 저명한 의사 장 마르탱 샤르코(1825-1893)의 강의를 듣는다. 샤르코는 여성의 히스테리를 비롯한 발작증 치료에서 최면술을 이용해 큰 효과를 보았다. 프로이트는 샤르코의 치료법을 적극적으로 수용함으로써, 이후 반세기 동안 자신의 화두가 될 인간의 심신 관계에 관한 문제를 본격적으로 파고든다. 1886년에 빈으로 돌아온 프로이트는 종합병원을 그만두고 신경질환 전문의로 개업하는 한편, 약혼 4년 만에 마르타와 결혼해서 첫 아이를 얻는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만약 프로이트가 결혼 때문에 병원을 개업하지 않았다면 정신분석학은 결코 탄생하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역시 신경질환 전문의였던 요제프 브로이어(1842-1925)와의 만남은 프로이트의 연구에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해 주었다. 브로이어는 훗날 임상보고서의 주인공으로 유명해진 안나 O.를 비롯한 여러 히스테리 환자를 치료한 경험을 바탕으로 그 문제에 중요한 힌트를 제공했다. 두 사람은 <히스테리 연구>(1895)라는 공저를 내놓았지만, 성(性)을 히스테리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한 프로이트와 그렇지 않다고 본 브로이어 간에는 불화가 빚어진다. 브로이어와 결별한 프로이트는 이비인후과 의사인 빌헬름 플리스(1858-1928)의 도움으로 이른바 과학적 심리학의 이론을 구상한다. 그리고 1896년에 이르러 자신의 방법을 ‘정신분석’으로 명명한다.

 

1909년 미국 방문 당시 기념촬영. 프로이트(앞줄 왼쪽),융(앞줄 오른쪽),어니스트 존스(뒷줄 가운데)의 모습이 보인다

 

1896년, 아버지의 사망을 계기로 스스로에 대한 정신분석을 시도한 프로이트는 연구 영역을 더욱 넓혀 나간다. 이후에 간행된 <꿈의 해석>(1899), <일상생활의 정신병리학>(1901), <성욕에 관한 세 편의 에세이>(1905) 등의 저서는 정신질환자가 아닌 일반인의 심리 분석을 통해 인간 무의식의 근본 구조를 규명하려는 시도였다. 그런 한편으로 프로이트는 자신의 연구에 공감하는 전문가들과 함께 1902년에 수요 심리학회를 창설하고, 1908년에 이르러 빈 정신분석학회로 개명한다. 알프레트 아들러(1870-1937)나 칼 융(1875-1961)과 같은 촉망 받는 정신의학자들이 프로이트의 주위에 몰려든 것도 바로 이때였다.

 

1910-20년대에는 세계 각지에 정신분석학회가 설립되면서 프로이트의 명성도 높아졌지만, 아들러와 융을 비롯한 차세대 정신의학자들은 프로이트의 의견에 반대해 연이어 결별을 선언했다. 이 시기 동안 프로이트는 꾸준히 저술을 내놓으며 정신분석의 개념을 보다 명료히 하는 데에 주력한다. <쾌락 원칙을 넘어서>(1920)는 삶의 본능(에로스)과 죽음의 본능(타나토스)이라는 유명한 개념을 제안했고, <자아와 그것>(1923)은 이른바 에고(자아)-이드(그것)-슈퍼에고(초자아)의 3박자 도식을 제안했다. <환상의 미래>(1927)와 <문명과 불만>(1929)은 그의 이론을 종교와 문명 등의 더 넓은 주제에 적용하려 한 사례다.

 

1933년, 독일에서 히틀러가 권력을 장악하자 유대계인 프로이트의 저서도 공격의 대상이 되어 공개 화형에 처해진다. 주위에서는 망명을 권했지만 프로이트는 줄곧 이런 제안을 거절하고 빈에 남아 있었다. 이미 그는 심신이 지쳐 있었다. 1923년에 구강암 선고를 받고 여러 번에 걸쳐 수술을 했지만, 1937년에 암이 재발해서 통증으로 고생했던 것이다. 1938년에 오스트리아가 독일에 합병되자 나치 돌격대가 프로이트의 집에 쳐들어와 가택 수색을 실시하는 일이 벌어진다. 마침내 프로이트도 망명에 동의했고, 여러 사람의 주선 끝에 파리를 거쳐 영국 런던에 도착했다. 그러나 얼마 뒤인 1939년 9월 23일,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끝내 건강을 회복하지 못하고 망명지인 런던에서 눈을 감았다.

 

 

프로이트의 사상: 무의식의 발견과 그 작동 방식에 관한 연구

 

프로이트의 가장 큰 업적은 뭐니뭐니해도 ‘무의식’의 발견이다. 애초에 프로이트는 히스테리 연구를 통해서 심리적 원인이 신체적 질환으로 나타날 수 있음을 알아냈다. 이때 히스테리의 원인이란 보통 어린 시절의 충격적 경험(트라우마)인데, 대개는 성(性)과 연관된 내밀한 것들이었다. 히스테리 환자는 일찍이 머릿속에 각인되었다가 억압을 통해 무의식으로 가라앉아 버린 이 원인을 의사의 도움으로 기억해내고 인지함으로써, 즉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통해 증상이 치유되곤 했다. 이것이 프로이트가 처음으로 인간의 무의식에 접근하게 된 계기였다. 무의식의 작동 방식을 연구하던 프로이트는 이것이 단순히 정신질환 환자의 경우뿐만 아니라 일반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는 점을 눈치 챘다. 나아가 히스테리 환자의 치료 과정에서 최면술, 압박술, 자유연상 등의 여러 가지 방법을 시도해 보는 과정을 통해, 인간의 꿈이나 실언 등의 무의식적 행위가 어떤 억압된 것의 표출이라는 점을 눈치 채게 되었다. 이른바 에고(자아)-이드(그것)-슈퍼에고(초자아)의 3박자 도식은 무의식의 작동 방식에 대한 프로이트의 최종적인 설명이다.

 

나아가 그는 성적 충동(리비도)이 유아부터 성인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간의 중요한 본능 가운데 하나라고 주장했으며, 이러한 삶의 본능(에로스)과 반대되는 죽음의 본능(타나토스)의 존재를 설정했다. 프로이트의 이론은 흔히 만사를 성(性)으로 설명하려 든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이는 특히 인간의 발달 과정에 관한 설명에서 두드러졌다. 프로이트는 유아기와 유년기에 벌어진 사건이 사람의 평생을 좌우한다고 주장하며, 발달 단계에 따라 구강기(입으로부터 성적 쾌감을 얻는 시기)와 항문기(항문으로부터 성적 쾌감을 얻는 시기)와 남근기(남성의 성기에 관심을 갖는 시기) 등을 구분했다. 나아가 남자아이의 경우에는 어머니에게 성적 욕망을 느끼고 아버지에게 거세 공포를 느끼는 이른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의 시기가 있으며, 여자아이의 경우에는 ‘남근 선망’을 느낀다고 주장했다. 후자의 주장은 프로이트 활동 당시의 남성중심주의를 반영한 발언으로 평가되며, 종종 페미니즘 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는 원인이기도 하다.

 

 

프로이트에 대한 평가: 혁명적 이론인가 사이비 과학인가?

 

프로이트의 업적이란 그야말로 ‘혁명적’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그 덕분에 인간은 자신의 내면을 보다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계기를 얻을 수 있었다. 우리의 내면에는 ‘자아’라는 단단하고 확고한 실체 대신 차마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이 있다는 사실을 프로이트는 처음으로 폭로했던 것이다. 인간의 시야를 더 넓혀주었다는 점에서 프로이트의 업적은 다윈과 아인슈타인이 가져온 사상적 혁명에 비견할 만하다. 19세기 말에 그의 학설은 대단한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주장에서 성(性)에 대한 언급이 종종 나왔기 때문이다. 물론 그 이전의 정신의학자 중에서도 성(性)의 중요성을 인식한 사람은 많았지만, 그 문제를 공개적으로 논의한 것은 프로이트가 사실상 처음이었다.

 

1925년 오스트리아 빈의 진료실에서 애완견과 함께 한 프로이트

 

성(性)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프로이트의 사상이 초기에 냉대를 받은 원인인 한편으로, 프로이트가 세상만사를 그쪽으로 해석하려 한다는 가장 큰 오해를 불러일으킨 요인이었다. 물론 프로이트는 성(性)으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들지는 않았고, 그것이 당시의 통념 이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음을 처음으로 직시했을 뿐이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성(性) 이론은 ‘양성’(兩性)이 아니라 ‘남성’(男性)만을 대상으로 삼은 것이 한계라는 비판만큼은 일리가 있다. 페미니즘 진영의 주장에 따르면, 프로이트 본인이 남성이기 때문에 남성을 주로 놓고, 여성을 종으로 놓아 가령 남근선망 같은 잘못된 추측들을 내놓았다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정신분석이 사이비 과학에 불과하다는 비판도 나왔다. 프로이트의 이론이 외양과는 달리 과학적 요구조건을 만족시키지는 못하며, 막상 프로이트 본인이 치료한 환자 중에서도 완치 여부가 불확실한 경우가 많았을 정도로 그 효과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어렵기 때문이다. 자신을 향한 비판이 나올 경우, 그 ‘무의식적 동기’를 파헤침으로써 어떠한 공격조차도 무력화시켰던 프로이트의 몇 가지 선례 역시 정신분석의 객관성에 대한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나아가 프로이트가 이른바 정신분석학회를 설립하고 추종자들을 끌어 모으면서, 자신의 학설과는 반대되는 주장을 펼치려 시도한 일부 인사들을 냉정히 제거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의 학설 역시 일종의 종교적 교리가 아니냐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이처럼 오늘날의 시각에서는 여러 가지 한계를 지닌 것도 사실이지만, 프로이트의 이론은 여전히 강력한 매력을 지니고 있다. 여전히 불가해한 대상으로 남아있는 인간의 무의식이란 대상을 향한 프로이트의 통찰은 한 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상당한 설득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에 대한 수많은 비판과 해석, 그리고 재비판과 재해석이야말로 어쩌면 그의 이론이 지닌 탁월성을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자신의 이론을 향한 수많은 사람들의 시선과 비난을 의식한 듯, 프로이트는 말년에 아인슈타인에게 이런 내용의 편지를 쓴 적이 있다. “물리학을 모르는 사람이라면 감히 선생님의 주장에 대해 가타부타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반면 심리학을 모르는 사람조차도 제 주장에 관해서는 가타부타 말이 많은 것이 현실입니다. 그러니 아인슈타인 선생님께서는 정말 복 받으신 분입니다.”

 

 

프로이트의 주변 인물들


그의 막내딸 안나 프로이트(1895-1982)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서 정신분석학자가 되었으며 특히 아동 심리학의 권위자가 되었다. 아버지의 말년에 간호와 비서 노릇을 도맡았으며, 아버지의 사후에 사실상의 유언집행인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한때 그의 편이었으나 훗날 불화로 인해 등을 돌린 사람 중에서는 특히 알프레트 아들러(1870-1937)와 칼 융(1875-1961)이 유명하다. 아들러는 1911년에, 융은 1914년에 프로이트와 결별했으며 이후 각자의 독자적인 심리학 이론을 구축하며 일가를 이루었다. 두 사람 모두 프로이트가 성(性)을 지나치게 강조한 점을 불만스럽게 생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리학자 알베르트 아인슈타인(1879-1955)은 1933년에 프로이트에게 보내는 공개서한을 통해 세계 평화에 관한 이야기를 나눈 바 있다. 아인슈타인 역시 프로이트와 마찬가지로 유대계였으며, 나치의 탄압을 피해 훗날 미국으로 망명했다. 나아가 두 사람 모두 무신론자와 평화주의자였다.

 

 

필자가 추천하는 덧붙여 읽으면 좋은 책

 

프로이트의 전기로는 그의 추종자였던 정신분석가 어니스트 존스의 것과 유럽 지성사 전문가인 피터 게이의 것이 유명하지만, 아쉽게도 우리나라에는 아직 번역되지 않았으며 그에 버금갈 만한 본격적인 전기도 찾아보기 힘든 실정이다. 아쉬운 대로 그의 삶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수 있는 책으로는 시공 디스커버리 총서 중 하나인 피에르 바뱅의 <프로이트: 20세기의 해몽가>(1995)와 옥스퍼드 위대한 과학자 시리즈 중 하나인 마가렛 머켄하우프트의 <정신분석과 프로이트>(김문영 옮김, 바다출판사, 2002)가 있다.

 

20세기의 해몽가정신분석과 프로이트프로이트, 그의 생애와 사상

마르트 로베르의 <정신분석혁명: 프로이트의 삶과 저작>(이재형 옮김, 문예출판사, 2000)과 그 개정판인 <프로이트, 그의 생애와 사상>(2007)은 프로이트의 주요 저술 및 관련 자료에서 선별한 여러 인용문을 통해서 그의 사상을 좀 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 데 유용한 저서다. 다만 사상에 비해 생애에 관한 서술 부분이 지나치게 간략하게 서술되었다는 점은 아쉽다. 고흐와 미켈란젤로 등의 전기 소설로 유명한 어빙 스톤의 <프로이트>(전3권, 설영환 옮김, 오늘, 1993)도 전기 소설이긴 하지만 아쉬운 대로 도움이 된다.

 

우리나라에서는 C. S. 홀의 <프로이트 심리학 입문>이 상당히 오래 전부터 유일무이한 개론서 역할을 해 왔다. 리처드 오스본의 <만화로 보는 프로이트>(정영목 옮김, 청미래, 1996)와 하룻밤의 지식여행 시리즈 중 하나인 리차드 아피냐네시의 <프로이트>(박지숙 옮김, 김영사, 2002)는 만화 형식을 취한 교양서라고 해서 얕볼 수 없을 정도의 알찬 내용을 제공한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듯이, 프로이트를 이해하기 위한 가장 좋은 자료는 바로 프로이트 본인의 저서다. <프로이트 전집>(열린책들)은 1997년에 20권으로 초판 간행되었다가, 2003년에 15권으로 재편집되어 간행되었으며, 2005년에 <정신분석의 탄생>과 <끝이 있는 분석과 끝이 없는 분석>이라는 초기 저작집 2권이 추가되었다. <우리의 마음은 남쪽을 향한다>(천미수 옮김, 웅진북스, 2003)는 1895년부터 1923년까지 프로이트가 여행 중에 보낸 서간 모음집이다. 장 라플랑슈 외 공저 <정신분석학 사전>(임진수 옮김, 열린책들, 2005)은 프로이트의 저서에 등장하는 여러 가지 개념어들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어서 도움이 된다.

 

 

 

박중서 / 출판번역가, 장서가
박중서 씨는 '약소국 그랜드 펜윅'시리즈인 <뉴욕 침공기, <월스트리트 공략기>를 비롯해, <해바라기>, <셰익스피어&컴퍼니>, <끝없는 탐구:칼 포퍼 자서전>등을 번역했다. 집안 가득 책을 쌓고 살며, 새 책을 기획하는 일을 한다.

 

발행일  2009.09.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