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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

나 그 네 2012. 6. 21. 17:59

전기 작가 스탠리 웨인트럽은 빅토리아 여왕에 대해 이렇게 썼다. “빅토리아 여왕은 국민의 애정, 전통에 대한 동경, 그리고 충성심 높은 중산층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더욱 강화된 의례적인 군주제를 유산으로 남겼다. 그녀는 영국 그 자체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영광

유럽사에 있어서 19세기는 영국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영국은 자칭, 타칭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라고 불렸다. 지구가 돌아 영국에는 밤이 오더라도 세상 어딘가 영국의 식민지 중 한 곳 이상은 낮이기 때문에 이런 별명이 붙었다.

 

19세기 영국은 대표적인 선진 산업 자본주의 국가이며 민주주의 국가인 동시에 제국주의국가였고 대표적으로 빈부 격차가 극심한 나라였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라는 얼핏 들어 대단해 보이는 말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만큼 약소국을 무력으로 침략하여 정치적으로 경제적으로 착취하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19세기 영국의 영광은 그 영광의 그늘 뒤에 가려진 사회하층민과 약소국의 희생 덕택에 가능한 것이었다. 빛과 어둠의 시대, 영광의 이면에 잔혹한 착취를 숨기고 있던 시대, 그 시대를 보통 사람들은 빅토리아 시대라고 부른다.


 

빅토리아 시대는 1837년부터 1901년까지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통치하던 64년의 기간을 의미한다. 19세기의 2/3에 해당하는 빅토리아 여왕의 재위기간 동안 영국은 전무후무한 역사상 가장 화려한 전성기를 누렸다. 영국 고유의 전통은 이 시기에 비로소 정돈이 되었고, 유럽 어느 나라보다 먼저 해외에 눈에 돌렸기 때문에 이즈음에 와서는 세계 곳곳에 영국 식민지를 두어 역사상 가장 넓은 땅을 확보하였다.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을 일으킨 국가답게 선구적으로 산업 자본주의를 발전시켜 세계에서 가장 많은 부를 쓸어 담았다. 그리고 오랫동안 시행착오를 겪던 의회 민주주의도 두 개의 당으로 정리되어 정착됐다. 그 이면에 무수한 사회적·정치적 문제들을 안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 영국은 누구도 따라 잡을 수 없는 세계 최고의, 최대의 그리고 최선의 국가였다.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한 시기, 영국의 군주는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그녀의 존재는 그 상징성만으로 19세기 영국의 행보에 든든한 버팀목이 되었다.

 

 

고독한 성장기를 거쳐 왕위에 오르다

빅토리아 여왕은 조지 3세의 4번째 아들 켄트공의 딸이다. 조지 3세는 많은 아들을 두었고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 켄트공이 장자도 아니었기 때문에 사실 빅토리아 여왕에게 왕위는 그다지 가까운 자리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의 삼촌들이 하나같이 제대로 된 결혼에서 적장자를 낳지 못하고 설사 낳더라고 모두 요절하는 바람에, 빅토리아는 거의 유일하다시피한 영국 왕실의 정당한 왕위계승자로 남게 되었다. 조지 4세가 정당한 계승자 없이 사망한 이후 왕위는 조지 3세의 3째 아들 윌리엄 4세가 이어받았다. 윌리엄 4세는 혼외에서 낳은 사생아들은 많았지만 정작 정당한 결혼에서 낳은 아이들은 모두 죽어 결국 읠리엄 4세 사후 영국 왕위는 빅토리아에게 돌아오게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의 아버지 켄트공은 독일 작센 코버그 잘펠트의 공주와 결혼해 빅토리아 여왕을 낳았다. 켄트공은 빅토리아 여왕이 두 살이 되던 해에 사망하고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의 손에서 자라났다. 그녀의 어머니는 경직되고 엄한 성격의 사람이었는데 딸 빅토리아 여왕에 대해서도 상당히 엄격했다고 한다. 빅토리아 여왕의 어머니는 시댁인 영국 왕실과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그녀는 딸이 장차 여왕이 되면 자신이 섭정이 되어 나라를 다스릴 생각에 빅토리아 여왕을 독점하고, 제왕학을 가르치기보다는 자신의 말에 순종적인 딸로 교육시키려 하였다. 그래서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와 어머니의 정부인 존 콘로이에 의해 고립적이고 고독한 성장기를 보냈다. 이때의 기억이 빅토리아 여왕에게는 큰 상처가 되어 훗날 그녀가 여왕이 되었을 때 빅토리아 여왕은 어머니를 멀리 하였고 존 콘로이를 해고하였다. 그녀가 어린 시절 유일하게 마음으로 신뢰한 사람은 외삼촌인 레오폴드였다. 훗날 벨기에의 국왕이 되는 레오폴드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아버지의 자리를 대신하는 사람이었고, 결국 빅토리아 여왕에게 인생의 반려자를 찾아주는 역할을 맡기도 하였다.

 

 

빅토리아 여왕과 남편 앨버트 공의 결혼식.

 

 

18세의 나이에 빅토리아가 영국의 여왕이 되었을 때 그녀는 국왕이라기보다는 작고 가냘픈 소녀에 지나지 않았다. 자신을 둘러싸고 강압하던 어머니와 존 콘로이를 제거하고 자유를 찾았지만 막상 혼자 남은 빅토리아 여왕에게 국정을 수행할 군주의 능력은 없었다. 그런 빅토리아 여왕에게 제왕의 위엄을 갖추도록 도와준 것은 당시 영국 총리였던 멜번 경이었다, 빅토리아는 이제까지 그녀를 눌러왔던 어머니에게서 벗어나 세계 최고의 국가, 영국의 여왕이 갖추어야 할 긍지와 카리스마를 왕위에 올라서야 배우게 되었다. 자유당의 전신인 휘그당수였던 멜번 경은 여왕의 개인 비서를 겸직하면서 빅토리아 여왕에게 영국의 군주가 가져야 할 덕목과 위엄을 자세히 가르쳐주었고 빅토리아 여왕은 그를 아버지처럼 잘 따랐다. 멜번 경의 도움으로 빅토리아는 여왕의 자리를 재빠르게 찾아갔지만 정치적으로는 멜번 경의 정견을 그대로 따라 다소 편협된 견해를 가지게 되었다.

 


여왕의 남편, 앨버트 공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


빅토리아 여왕은 나이 20세 때 어린 시절 따랐던 레오폴드 벨기에 국왕의 주선으로 독일 색스 코버그 고타가의 왕자 앨버트 공과 결혼했다. 앨버트 공은 그녀와 동갑으로 외사촌 간이었다. 이 결혼은 그녀에게 무척이나 성공적인 결혼이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처음에는 앨버트 공에게 그다지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그러나 앨버트 공이 가진 진중함과 사려 깊음에 빠져 그를 무척이나 사랑하게 되었다. 앨버트 공은 멜번 경이 실각 한 뒤 빅토리아 여왕을 보좌하면서 그녀에게 군주의 도를 깨닫게 하였으며 정치적으로 편협했던 시각도 넓게 확장시켜주었다.


처음에 앨버트 공의 국정참여를 탐탁지 않아했던 빅토리아 여왕도 결혼생활을 해나가면서 그의 지적이고 믿음직한 태도에 무한한 신뢰를 가지게 되었고 결국은 국무회의 때면 언제나 앨버트 공과 대동하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남편을 전폭적으로 신뢰했으며 그의 판단을 완전히 믿었다.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20년 결혼생활 동안 명목상 영국의 국왕은 빅토리아 여왕이었지만 실제적인 군주는 앨버트 공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는 왕실의 재산관리뿐만 아니라 외교문제에서도 관여하여 분쟁을 막아냈고 국제 박람회도 성공적으로 치러냈다. 앨버트 공은 처음에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영국 국민으로부터 외면을 받았지만 왕실 사람답지 않게 청교도적이고 성실한 삶의 태도는 빅토리아 여왕과 왕실에 그대로 영향을 미쳤고 도덕적이고 청빈한 왕실은 국민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앨버트 공은 빅토리아 여왕과 자녀들을 데리고 런던을 떠나 스코틀랜드의 벨모럴 성으로 자주 여행을 하였는데, 이것이 결과적으로 정치와는 어느 정도 거리를 두는 영국적 군주제를 만드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국가적 중대 사안은 여왕이 직접 관여하였으나 그 외에 정치적 문제는 수상의 소관이 되었다. 빅토리아 여왕은 부지런하고 열정적으로 일하는 앨버트 공을 사랑하였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9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이 자녀들은 모두 유럽 왕실과 정략결혼을 하였는데 그 결과 오늘날 남아있는 유럽 왕실 중 대부분이 빅토리아 여왕과 일정 정도 관련을 맺고 있다.

 

빅토리아 여왕과 앨버트 공의 만족스러운 결혼생활은 앨버트 공이 장남 에드워드를 훈계하기 위해 케임브리지에 다녀오다가 얻은 병으로 사망함으로써 21년 만에 끝이 났다. 앨버트 공을 잃은 슬픔으로 빅토리아 여왕은 에드워드 왕자(훗날 에드워드 7세)를 오랫동안 미워했다고 한다. 이후 빅토리아 여왕은 거의 40년을 홀로 살면서 평생 검은 옷을 입고 미망인을 자처하며 앨버트 공의 죽음을 애도했다. 현재 영국 왕실은 이 앨버트 공의 후손으로 에드워드 7세 때부터 색스-코버그-고타라는 성을 쓰다가 1차 세계대전 때 반독일 감정이 치솟자 독일 내 모든 직함을 버리고 윈저로 개명하였다.

 


여왕을 영광스럽게 한 수상들

빅토리아 여왕은 인복이 많은 사람이었다. 그녀의 치세 동안 그녀를 보좌하거나 함께 국정을 운영해간 사람들은 모두 훌륭한 남성들이었다. 남편 앨버트 공을 비롯하여 그녀의 재위기에 수상이었던 사람들 모두 여왕에 대해서는 충성심이 가득했고 영국과 여왕을 영광스럽게 만들기 위해 불철주야 뛰는 사람들이었다. 영국의 명수상으로 불리는 디즈레일리글래드스턴도 빅토리아 여왕을 영광스럽게 만든 남성들이다. 이 두 사람의 선의의 경쟁은 양당 체제의 의회 민주주의를 확립해 영국을 정치적으로 안정시켰다. 빅토리아 여왕은 이 두 사람의 수상 덕분에 19세기 유럽 대륙에 불어 닥친 혁명의 바람을 피해 무사히 왕의 자리를 지킬 수 있었다.

 

 

빅토리아 여왕시기 자유당을 이끌고 수상을 지낸 글래드스턴(왼쪽)과 보수당을 이끌고 수상을 지낸 디즈레일리(오른쪽). 

 

 

민중들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봉기하기 전에 국가에서 먼저 요구조건을 일부 수용하여 큰 분란을 만들지 않는 영국 정치의 기본은 이때 확립되었다. 디즈레일리와 글래드스턴이 수상으로 있는 시기 동안 영국은 공중위생과 노동조건을 개선하였고 국민교육법을 제정하였으며 선거권을 확대하였다. 빅토리아 여왕은 장중하고 엄숙하며 도덕주의자인 글래드스턴에 비해 재기발랄하고 영민한 디즈레일리를 더 좋아했다고 한다. 빅토리아와 디즈레일리는 대외정책에서 한 뜻이 되어 영국의 식민지 확대에 열을 올렸다. 빅토리아 여왕은 인도제왕의 칭호를 자신의 문장에 새겨 넣으며 대영제국의 영광을 다시 한번 확인하였다.

 


많은 것을 내주고 더 많은 것을 되돌려 받다

영국 국왕는 흔히 ‘군림하되 통치하지 않는다’고 한다. 왕이라고 하면 대체로 모든 권력을 왕 한 사람이 가지며 국정의 모든 것은 왕 뜻대로라고 생각하지만, 영국의 국왕은 그렇지 않았다. 영국 국왕은 내각에 정치의 대부분을 내어주며 왕은 군주의 위엄과 권위, 카리스마만 가진다. 국왕의 위치를 이렇게 만든 것이 바로 빅토리아 여왕이었다. 왕이 자신의 나라를 다스리지 않고 통치권의 일부 혹은 전부를 기꺼이 내주어야 하는 데는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유럽의 많은 왕들은 끝까지 자신의 권리를 붙잡고 있다가 혁명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빅토리아 여왕와 앨버트 공, 그들의 9명의 자녀들.

 

 

빅토리아 여왕은 영리했다. 그녀는 남편 앨버트 공이 살아 있을 때부터 국정의 일부를 내어놓기 시작해 1861년 남편 앨버트 공이 병사하자 버킹엄 궁전으로 물러나 일반적인 국무에서 손을 뗐다. 그녀는 자신이 내놓은 통치권의 일부를 수상과 정치인들이 백성들의 구미에 맞게 행사하는 동안 자신의 안전과 왕으로서의 권위와 권리를 인정받았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사안의 마지막 결정권은 끝까지 쥐고 있었다. 그녀는 또 남편 앨버트 공과 역대 수상들의 영민함에 기대어 자신과 왕실, 더 나아가 영국의 안정을 꾀했다. 무리한 고집을 부리지 않고 때에 따라 적재적소에서 자신의 의견을 관철시키면서도 국사 전반에서 이들 남성들의 힘을 빌렸다. 한마디로 빅토리아 여왕은 짐짓 물러 나 있는 듯하나 속내로는 그들을 조정하며 지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많은 것을 다 내어준 듯 보였지만 실상 빅토리아 여왕이 내놓은 것은 일부에 지나지 않았으며 그 대신 그녀는 전 국민의 지지와 사랑, 수상들의 전폭적인 신뢰, 그리고 영국과 영국 왕실의 안녕, 더불어 자기 자손들의 입지까지도 확고히 하였다. 19세기 영국은 한 명의 노회하고 전략적인 여인의 지혜로 인해 전성기를 누렸다. 눈앞에 보이는 권력에만 집착하지 않고 역사와 시대의 흐름에 대해 크게 판세를 그릴 줄 알았던 현명하고 양보심 많은, 그러나 왕으로서의 권위는 절대 놓쳐버리지 않았던 빅토리아 여왕의 존재로 인하여 대영제국의 전설이 완성된 것이다.

 

 

 

김정미 / 시나리오 작가, 역사 저술가
글쓴이 김정미씨는 대학원에서 역사를 전공, 역사적 사건과 인물에 관심이 많다. 역사 속 인물들의 면면에서 영화적 캐릭터를 발견하고 시나리오를 옮기는 작업을 하는 한편 역사관련 글쓰기도 병행하고 있다. [역사를 이끈 아름다운 여인들], [천추태후-잔혹하고 은밀한 왕실 불륜사], [어린이 역사 인물사전] 등의 책을 썼다.

 발행일  2010.06.09 

 

 

 

인물사 연표

유럽, 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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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50년

홍수전 태평천국 운동

1846년

김대건 한국 최초 천주교 신부,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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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리아 여왕 제 1회 만국박람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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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기 [지구전요] 저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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