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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차의 원산지 서쌍판납을 찾아서

나 그 네 2013. 1. 9. 18:19

보이차의 원산지 <br />
서쌍판납을 찾아서

제갈공명이 차를 따고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는 곳

전편에서 이미 살펴봤듯이 임창시는 차나무의 원산지로서 가장 유력한 지역 중 하나이다. 그 근거 중 하나가 임창에 거주하던 복인이 주나라 무왕에게 차를 진상했다는 역사적 기록이다. 하지만 서쌍판납(西双版纳)의 고(古) 6대 차산1) 사람들은 당시 임창시에 비해 서쌍판납의 차가 훨씬 활발히 유통되고 있었기 때문에, 무왕에게 진상한 차가 임창시의 찻잎이 아닌 서쌍판납의 찻잎이라고 한다.

신 6대 차산의 하나인 포랑산에서 차를 따는 포랑족의 할머니. 대나무를 태워 치아에 검게 칠했다. 포랑족의 여자들은 치아가 검을수록 미인이라고 여긴다. 그래서 여자는 대나무를 태운 숯으로 이를 검게 물들이는 풍습이 있고, 남자는 팔에 문신을 하는 전통이 있다.

서쌍판납의 차는 동한(東漢 , BC 202~AD 220)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야생 차나무를 재배하고 이용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한나라 때 제갈공명(諸葛孔明, 181~234)이 차를 따고 만드는 법을 가르쳤다는 전설이 가장 대표적이다. 공명에 의해 차를 만드는 법을 배우게 된 서쌍판납 사람들은 공명을 차의 조상으로 숭배하며 매년 그의 생일날 ‘차조회(茶祖會)’라는 집회를 가지고 있다. 그곳이 바로 서쌍판납의 고6대 차산이다. 고 6대 차산은 송나라 때 차산지로서 이름을 알리고, 청대에 이르러서는 황실에 공납하는 차로 지정되었으며, 더불어 복원창호(福元昌號) 동경호(同慶號) 등 호자급(號字級) 보이차2)가 전성시대를 이루었다. 이 차들은 현재에 차 한편에 수천만원에서 억대를 호가하는 골동차로 대접받으며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다. 이 골동차의 원료를 채집하던 곳이 바로 육대 차산이다. 따라서 고 6대 차산은 청나라의 보이공차(普洱貢茶: 황제에게 공납되던 보이차) 지역으로 최초로 선정됐던 곳이자, 보이차의 발원지였다. 또한 이 지역을 중심으로 차가 국내외로 퍼져나가며 서쌍판납은 차를 운반하는 길, 차마고도(茶馬古道)의 시발점에 속하게 된다.

이처럼 유구한 역사의 중심에 선 고 6대 차산은 차의 원산지이면서 보이차의 살아 숨쉬는 문화가 집중된 곳이다. 이곳 혁등산(革登山)에는 살아있다면 수령이 약4000년 정도가 되었을 차왕수가 있었다고 한다. 이 차왕수에 대한 기록은 청나라의 많는 역사서에서도 살펴볼 수 있지만 현재 고사하여 안타까움을 안겨줄 뿐이다. 만약 이 나무가 살아있다면 다른 어떤 지역의 차왕수보다 가장 오래된 차나무로, 서쌍판납이 차나무의 원산지라는 주장에 한층 힘을 실어줄 수 있었을 것이다.

오랜 역사의 고 6대 차산

서쌍판납의 6대 차산이 차나무의 원산지라고 말하는 근거 중 하나를 청대의 [보이부지(普洱府志, 권9)]라는 책에서 찾을 수 있다. [보이부지]에 따르면 “상주 시기에 ‘산리(産里)’라는 곳이 있었다.”. 산리는 지금의 서쌍판납을 말한다. 이 책에서는 ‘산리’에서 왕궁에 지방특산물을 진상하였다고 기재하고 있다. 상주 시기의 주나라 무왕에게 ‘차’를 진상했다는기록이 있는데, 그 차가 바로 산리의 관할구였던 고 6대 다산에서 가져간 차였을 것이라고 이곳 원주민들은 말한다. [전해우형지(滇海虞衡志)]라는 책에는 “청대 보이부에 소속이었던 6대 차산은 1. 유락, 2. 혁등, 3. 의방, 4. 망지, 5. 만전, 6. 만살이다. 주변 800리에 입산하여 차를 따는 사람이 수십만에 이른다.”고 기록되어 있다.

제갈공명, 차나무를 선사하고 문명을 전달한 위대한 지도자

고대의 상주 시기 6대 차산에서 차나무를 재배하고 이용한 대표적인 민족은 합니족, 애니인, 기낙족 등이었다. [보이부지]에서 소개한 6대 차산에서 차를 전통적으로 만드는 민족은 ‘흑와니(黑窝泥)’와 ‘삼촬모(三撮毛)’라고 기재하고 있다. ‘흑와니’는 지금의 합니족(哈伲族)이며 애니인으로, 합니족에서 파생한 애니인이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의 서쌍판납주 6대 차산에 속하는 맹랍현 상명향의 ‘신발채’라는 곳이 있다. 옛 이름이 ‘아카채’라고 하는데, 애니인들이 이 지역에서 대를 이으며 거주하여 애니인을 ‘아카’라고도 한다. 즉 애니족은 고 6대 차산에 살면서 차를 따고 판매하며 살아온 민족이다. ‘삼촬모’는 기낙족의 선조로 한 웅큼의 머리를 왼쪽, 오른쪽, 중간으로 나누어 세 곳에 묶고 다녔기 때문에 삼촬모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그들은 청대 이전부터 6대 차산에서 이미 차를 심고, 채집하고, 파는 것을 업으로 삼았던 민족으로 그들의 생활 속에 이미 깊게 뿌리내린 차 생활을 통하여 유구한 차문화를 엿볼 수 있다.

반장산의 합니족 소녀. 서쌍판납의 합니족들은 차나무를 가장 먼저 이용해 보이차를 생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직도 이곳의 소수민족들은 손으로 직접 채엽하고 있다. 채엽한 찻잎을 나르는 소년.

서쌍판납은 합니족 애니족 기낙족에 의해 차나무를 가장 먼저 이용한 보이차 최초의 생산지역이라 할 수 있다. 1780년 전 촉나라의 제갈공명은 낙후된 남쪽지역을 돕는다는 명목하에 출사표를 내걸고 남쪽지역 정벌에 나선다. 무후(제갈공명)가 차나무를 남겼다는 ‘무후유종(武侯遗种)’에 대한 기록은 [보이부지]에서 살펴볼 수 있다. 이는 1700여 년 전 시작된 보이차 재배에 대한 최초의 전설이다. 단췌(檀萃)의 [전해우형지]에도 ‘차산에는 다왕수(茶王樹)가 있고 다섯 산의 것보다도 유독 크다. 본래는 무후가 종자를 가져와 선사한 것인데, 지금까지 이곳 사람들은 제사 지내고 있다’고 기재하였다. 이 지역 소수민족들은 공명이 차나무를 심었다는 것을 설화가 아닌 기정 사실로 받아들인다. 공명의 사신들은 공명의 명을 받들어 촉나라의 발달된 농사법, 가축사육법 및 의약품 등을 전수한다. 당시 6대 차산은 인적은 드물고 맹수무리가 들끓는 매우 위험한 지역으로, 맹수들에 의한 곡식의 피해가 매우 심하였다. 하지만 차나무는 맛이 쓰고 떫어 맹수들의 공격을 피해갈 수 있는 유일한 농작물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사신에게 보고받은 공명은 땅이 없는 가난한 사람들을 의방, 망지, 혁등 지역에 이주하게 한다. 그 후 한족 등 외지인들이 이 땅에 유입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의 주 농작물인 차를 생산해 낼 수 있는 고차림은 토착민들이 대부분 소유하고 있었고, 이에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이 차산을 빼앗기 위해 원주민들을 괴롭혔다.

언젠가는 이러한 일도 있었다. 혁등에 살던 한족이 상명향 부근의 습공고진에 살던 토착민의 차산을 빼앗을 목적으로 철저히 계획된 사기도박을 제안한다. 팔팔 끓는 기름솥 안에 ‘은자’를 넣어 놓고 서로 건져내는 방법이었는데, 이러한 방법에 익숙한 한족과는 당연히 상대가 될 수 없었던 습공 사람이 패하게된다. 사기도박이라는 것을 알게 된 화가 난 습공 사람들은 차산에 불을 질러 보복하였다. 이것이 습공지역의 유명한 구전, ‘불태워진 다원’의 유래이다. 이 사건의 발생 직후, 원주민들은 유혈충돌을 불사하며 외지인들을 몰아내는 데 합심한다. 이 사건을 보고받은 제갈공명은 해결책으로 불에 탄 다원을 원래의 주인인 습공 사람에게 돌려주게 하고, 망지 ,혁등 등의 외지인들에게는 차 묘목을 주며 다른 곳에 옮겨 심도록 했다. 그렇게 해서 쌍방의 화해가 이루어지고 외지인들도 여기서 떠나지 않고 살 수 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한족과 토착민은 서로 통혼(通婚)을 하고 동화되어 살아간다. 망지, 혁등의 옛 조상들은 이러한 공명의 남무이월(南撫夷越: 남방의 소수민족을 도움)의 정책에 감명을 받아, 산 정상에 진흙으로 빛은 커다란 공명상을 세우고 그 자손들로 하여금 공명의 탄생일인 매년 음력 7월 23일, 그가 심은 차왕수에서 첫 번째 딴 춘차를 공명에게 제사 지내게 했다. 바로 이곳이 오늘날의 ‘차조회’ 유적지로 삼는 자리이다.

망지의 해발 1722m에 자리한 공명산(孔明山). 제갈공명은 이곳에 차나무와 문명을 선사해주고, 토착민과 한족을 융합시킨 위대한 지도자로 현재까지도 공경을 받고 있다.

공명의 상에 참배한지 여러 해가 지난 어느 날, 밤새도록 폭풍우가 치고 산이 흔들리면서 지진이 일어났다. 공명의 진흙 초상은 순식간에 무너지고 형체가 없는 진흑덩어리가 되어 버렸다. 그리고 이곳 동굴의 암석이 무너지면서 산은 누워있는 사람의 형상을 띄게 되었는데, 사람들은 이 산이 공명의 진흙 초상이 변해 화신이 되었다고 여기었다. 망지의 해발 1722m에 자리한 이 산 이름은 그 후부터 공명산(孔明山)이라 불리운다. 전설과 자연현상의 만남이 절묘하다. 공명을 기리는 ‘차조회’ 활동은 1930년대말, 6대 차산이 쇠락할때까지 계속 이어졌고, 현재까지 이 지역 사람들에게 제갈공명은 차나무를 선사해주고 재배법과 문명을 전해준 은인이며, 토착민과 한족을 화해시킨 위대한 지도자로 그에 대한 신앙심은 여전히 대단하다.

유락산에는 현재도 삼촬모의 후예인 기낙족이 많이 살고 있다. 유락산의 기낙족은 삼국시대에 제갈공명이 남방을 정벌할 때 따라온 병사들로, 길 가던 도중 졸다가 무리에서 떨어져 운남의 6대 차산에 남겨진 병사들의 후예라고 생각한다. 낙오된 병사들은 이후 공명이 남기고 간 차종자(茶籽)를 유락산에 심고 가꾸면서 살아갔다. 기낙족의 량반차(凉拌茶)와 죽통차(竹筒茶)는 특히 유명하다. 기낙족이 거주하는 죽루(竹樓)는 공명이 쓰고 다니던 ‘모자’ 모양을 하고 있는데, 기낙족이 제갈공명을 향해 얼마나 지심귀명례(至心歸命禮: 지극한 마음으로 섬김) 하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이다. 어쩌면 기낙족은 정말로 공명을 따르던 병사들의 후손인지도 모를 일이다.

4000년 된 차나무가 현존했던 혁등 차산

혁등산(革登山)은 맹랍현(勐腊县) 상명향(象明乡)의 서쪽에 자리하고, 고 6대 차산인 기낙산, 망지차산과 인접해 있다. 이곳 혁등산에는 차왕수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많다. “혁등산엔 차왕수가 있는데 홀로 높고 커서 다른 나무와 비교할 수 없다. 이곳의 원주민들은 찻잎을 채집할 때 먼저 술과 음식을 준비하고 예를 다하여 제사를 지낸다”고 완복(阮福)의 [보이다기]에는 기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차왕수’는 현재 고사하여 그 흔적만 찿아볼 수 있을 뿐이다. 만약 나무가 살아있다면 남아있는 뿌리 부분을 근거로 추정해 볼 때, 천가채 야생차수 1호나 임창의 방마대설산 1호 차나무와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크다고 한다. 이 나무는 이곳 원주민들이 원산지 논쟁에서 쟁점으로 부각시킬 만큼 중요한 차왕수였다.

청대의 마지막 의방토사(倚邦土司)를 지낸 조중익(曹仲益)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의방차산의 역사 전설 회고록]이라는 책을 남겼다. 그 책의 기록에 의하면 상명향 아카채의 한 노인이 혁등 차산에서 차왕수를 직접 보았다고 했다. 또 [맹랍현지(勐腊县志)]에는 청가경년간(1796~1820년) 혁등 팔각수채 부근에 차왕수가 있는데 한 계절 동안 봄차 약 1담을 땄다고 기록하였다. 1담을 50kg으로 환산하면 요즘 보이차 125편을 만들 수 있는 찻잎을 채엽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사실이라면 아주 거대한 차나무라 할 수 있겠다. 청대에 이미 이 차나무의 이름은 ‘차왕수’로 불렸다.

민국 초기 어느 날, 이 지역에 큰 비가 오고 천둥번개가 쳐서 차왕수의 가지가 부러지고 쪼개져 며칠 밤 동안 불에 탔다고 한다. 불에 타들어간 나무 밑둥은 개미가 파먹고 썩어서 현재는 움푹 패인 구멍만 남아 있다. 1930년대에 당시 10여 세의 소년 이소노(李小老), 진노삼(陈老三) 등이 혁등산에서 이 차왕수를 발견했다. 하도 커서 팔을 벌려 그 길이를 재 보았는데, 직경이 3배 넓이였다고 한다. 민국 초기 고사할 때, 의방 토사이던 조중익이 1963년 측량한 결과 그 직경이 한쪽은 2.8m 또 다른 한쪽은 약 3.2m이고, 차나무 밑둥의 평균 직경이 3m라고 한다. 이것은 진노삼이 어릴적 팔을 벌려 측정해본 길이와 거의 맞아 떨어진다.

신 6대 차산 포랑산 줄기 하송에 있는 파달산 1700년 된 차왕수의 생전 모습. 최근 그곳 주민이 전해온 소식에 따르면 2012년 9월 26일 파달지구에 불어닥친 비바람으로 이 거대한 차왕수가 쓰러져 수명을 다했다고 한다. 2012년 4월 촬영한 이 사진이 안타깝게도 차왕수의 마지막 모습이었던 셈이다.

역사적 기록과 현재 남아있는 차왕수의 흔적으로 볼 때, 죽을 때 차나무 수령이 적어도 3000~4000년 쯤은 되었을 것이라고 이곳 사람들은 추정한다. 특히 그 시대 6대 차산과 같이 숲이 울창하여 일조량이 적은 지역에서 차나무의 성장 속도는 매우 느렸을 것이고, 이러한 환경에서 이만한 크기를 갖기 위해서는 수령이 최소 4000년 이상이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진노삼이 어른들에게 전해들은 바로는 이 차왕수가 살았을 때 차나무가 여러번 도끼질을 당하고 잘려져, 나무 몸통은 굵었지만 차나무의 키는 그리 높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가지와 잎만은 무성하여 차를 따는데 어렵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노인은 옛일을 회상하면서 어릴 적 보았다는 이 차왕수는 청대의 문헌에 나올 정도로 유명하여 주변 마을에까지 소문이 자자했다고 한다. 잘려지기 전, 차왕수의 키가 너무도 커서 해가 동쪽에서 뜰 때는 그 그림자가 망지산과 산너머 유락까지 드리웠고, 서산에 해가 질 때는 햇빛을 담은 그림자가 만척에 달했다니 이 차왕수의 위용을 짐작하게 해준다. 이 차왕수의 존재를 질투한 외지 사람이 “이렇게 차나무가 커서 마을을 그림자로 드리우는 광경은 불길한 징조”라고 조장하고 다녔다고 한다. 그리고 사람들을 선동하여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차왕수를 반토막으로 잘라냈다는 일화도 있다. 1970년대에 상해사람이 이 나무의 한 부분을 베어서 넓이 40cm, 길이 80cm의 주방용 도마를 만들어 가져갔다고도 한다. 지금 이 차왕수 뿌리의 자손이 그 주변에 직경 약 10cm의 가지로 자라나고 있다.

잘려진 차왕수로는 혁등산의 차나무 역사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하지만 혁등산의 차왕수가 훼손당하지 않고 살아 있다면 보이시 진원현에 있는 천가채 차왕수보다 훨씬 오래된 나무로 판명되었을 것이고, 중국차의 시조수(始祖樹)는 바로 제갈공명이 씨를 뿌린 고 6대 차산에 있게 되며, 혁등산의 차왕수는 모든 차나무의 조상이 될 수 있을 것이다.

황가에 차를 공납하던 망지 차산은 언제부터 직접적 통치구역이 되었나?

청나라 때 고 6대 차산의 집산지였던 망지 차산은 혁등산 서남 방면에 위치하고 있다. 6대 차산을 연구하는 사람의 말에 의하면 일찍이 상주 시대에 망지에는 애니인, 와족, 랍호족과 기낙족 등이 거주하며 차를 심고 길렀다고 한다. 당송 시대를 거치며 이곳에서는 이미 차를 사고파는 시장이 형성되었다. 망지에서 가장 번화했던 곳인 우곤당가(지금의 안락)는 예부터 생필품 물물시장이 형성될 정도로 매우 번화했던 거리였고, 고차수가 풍부한 이곳에서 차는 빠질 수 없는 거래 품목이었다. 청 강희년 초에 망지 차산의 차림은 이미 2만묘를 형성하고 거주인구도 만명에 다다를 정도로 발전하여 우곤당가는 6대 차산의 중요한 차엽 집산(集散) 기지가 된다.

'공송진심북계'라고 쓰인 작은 비석. 이곳에서 채취한 찻잎으로 최상급 차를 만들어 나라에 공물로 바쳤음을 알 수 있다.

어느날 나는 우곤당가를 배회하다가 이곳에 오래 뿌리내리고 살아가는 한족과 함께 우곤당 뒤쪽의 차산을 답사하게 되었다. 이곳은 청대 황가에 차를 만들어 바치는 공차구역이었다고 한다. 숲이 우거진 산을 걷노라니 수령은 그리 오래되어 보이지 않는 고차수들이 즐비했다. 그 사이로 하나의 작은 비석이 나타났다. 그 비석에는 ‘공송진심북계(公送陳芯北界)’라고 쓰여져 있었다. 함께 한 한족에 의하면 이 글자의 뜻은 ‘북계(北界)에서 채취한 찻잎을 ‘심(芯)’차로 만들어 진씨(陳氏) 가(家)에서 나라에 바친다’라는 뜻이라고 하였다. 여기서 ‘심(芯)’의 뜻은 웃자란 찻잎이나 옆에 난 2엽이나 3엽이 아닌 심지처럼 가느다랗게 갓 올라온 가장 어린 새싹을 말한다. 새싹은 아직 찻잎이 펼쳐지지 않은 꽃봉오리 모양의 ‘단아(單芽)’인데, 그 중에서도 가장 작은 잎인 ‘심(芯)’만을 따서 정성스럽게 만들어 황제에게 바친다는 뜻이라고 한다. 이 지역에서 나는 차는 진씨(陳氏) 일가의 차밭으로 황실의 공납용이라는 표석이기도 하다. 이 비석을 통해 망지 차산의 최상급 어린잎이 황실전용차로 제공되었으며, 망지고차수 찻잎의 우수성을 일찍이 알아차리고 황제에게 공납했을 만큼 그 찻잎이 우수하였음을 알 수 있었다.

가느다랗게 갓 올라온 찻잎의 어린 새싹. 이를 ‘단아(單芽)’라고 한다. 이 작은 단아만을 따서 정성스럽게 차를 만들어 황제에게 바쳤다고 하니, 그 차맛이 자못 궁금할 뿐이다.

망지 차산에는 소엽종 교목형 차나무가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찻물색은 깊은 감귤색(橙黄色)을 나타내고 쓰고 떫은 맛이 느껴지면서 바로 단맛이 되돌아온다. 그리고 양볼 사이에서 생침이 끊임없이 돌아나온다. 예부터 한족, 강서성 상인들은 이러한 차맛의 망지 찻잎을 구매하기 위해 소수민족 가옥에 거주하기도 하였으며, 이에 각처에서 찾아온 차상인들이 우곤당가에 모여들어 봄찻잎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1728년, 그들 중 하나인 강서성 한족 상인이, 우곤당가의 족장이던 마포붕(麻布朋)의 집에 기거하다 그의 아내와 사통하게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어느날 마포붕이 현장을 목격하고는 즉시 그 두 사람의 목을 베어 우곤당가의 큰 나무, 대청수(大青树)에 머리를 메달게 된다. 망지토사 도정언이 이 사건을 묵인하자 청나라 조정에서는 이를 빌미삼아 군대를 차산에 급파하고 대항하는 소수민족들을 무차별로 토벌하고 방화했다. 이 전쟁 기간 동안에 마포붕과 도정언이 참수되고 소수민족들 대부분이 이주하였으며 망지 차산과 마을도 모두 불에 타 폐허가 되고 말았다. 망지 차산에서 일어난 이 사건을 ‘겁상할민(劫商害民)’이라고 한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는 지방 호족세력이 운남을 다스리던 토사 제도를 없애고 청나라 정부가 직접 관리를 파견하여 다스리는 개토귀류(改土歸流) 정책을 실시하였으며, 이때부터 운남은 청 정부의 직접적 통치를 받는 관할지역에 속하게 되었다.

골동보이차의 고향 이무차구

이무차구는 이무정산, 만살차산 만랍차산의 3산을 모두 포함한다. 망지 차산의 겁상할민 사건 이후 이무고진은 변경에서 차 무역 중심지로 발돋움하여 보이차 문화를 대표하는 곳으로 성장하게 된다. 청나라 도광년간에는 유락, 망지, 혁등 3개 지역 차 생산량을 넘어서 이무차의 생산량이 월등히 많아진다.

운남은 실생활에서 차나무를 이용한 수천 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고, 그 소산 가운데 하나가 바로 골동보이차와 노차(老茶)보이차이다. 통상 골동보이차는 보관년도가 60여 년 이상 경과한 차를 말하고, 노차(老茶)는 세월이 흐르며 천천히 후발효되어 익은 차를 말한다. 그래서 오래 묵은 보이차를 ‘진년(陳年)차’라고도 부른다. 골동보이차는 그 이름처럼 오래될수록 맛과 향이 깊어지고 가치는 더욱 상승하게 된다. 오래된 차만이 가질 수 있는 진운(陳韻)과 장향(樟香)은 골동보이차의 대표적인 특성이다. 그리고 갈홍빛 찻물과 오랜 세월을 담은 두터운 맛은 사람들의 마음을 단숨에 사로 잡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 골동차의 고향이 바로 옛 이무라고 한다.

이무에는 1730년대부터 차를 만드는 상점들이 줄지어 생겨났다. 사진은 ‘황제의 차’로 불린 복원창호의 모습이다. 최근 이 곳은 새로운 모습으로 수리하여 보이차의 성지로 재조성되고 있다.

1730년대를 기점으로 일명 호급차라고 불리는 차를 만드는 상점들이 이무의 옛 거리를 중심으로 생기기 시작한다. 동창호의 주인 황비무는 보이차의 내표(차 안에 포함되어 있는 속지)를 창안한 사람으로, 베트남에서 데려온 후처와 차 마시는 풍경을 돌에 새겨놓기도 하였다. 이를 비롯한 이무의 차에 관한 모든 유물이 보이차 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그리고 이무의 번성했던 옛거리 ‘이무노가’에는 동창호를 비롯한 송빙호, 동흥호, 복원창호 등 청대부터 차를 만들던 유명한 집들이 아직도 보존되어 살아있는 보이차 박물관을 방불케 한다. 동창호의 집은 현재 4가구가 세들어 살고, 조금 내려오면 청대의 보이차를 담당하던 세관이 전혀 수리되지 않은 채 구옥으로 남아있다. ‘황후의 차’라고 불리우는 옛 동경호는 그 자리가 현재 이무의 야채 시장으로 바뀌었고, 황제가 공이 있는 사람에게 하사하는 서공천조라는 편액을 받았던 차순호가 있으며, 그 옆에는 ‘황제의 차’라는 칭호를 받던 복원창호가있다. 복원창호는 현재 한 기업에서 300억원을 들여 수리하여, 보이차의 성지로 재조성되고 있다. 이외에도 헤아릴 수 없는 차사의 유적들이 아직도 고색창연(古色蒼然:예스러운 풍치나 모습이 그윽함)하게 이무를 지키고 있다. 이 청대의 유명 차상호들이 1700년대 중반부터 이무에 세워지면서 이 지역에서 본격적으로 차를 따고 제작하게 된다. 청조 이후에 이무는 육대 차산 중에서 가장 번성한 차마고도로 차엽가공 및 차의 집산 중심지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 육대 다산 중 최고의 재배 면적과 생산량을 자랑한다. 청 가경년에서 도광년간에 이무 차산은 7만담의 차를 매년 생산했다. 이를 운반하는 노새와 말의 행렬이 끊이지 않았고, 이곳을 통해 보이-하관-여강-강장(티베트 방향)지역이나, 인도, 네팔까지도 운송되어 갔다.

고대의 무역통로, 차마고도의 오랜 역사

고대의 무역통로인 젠촨 사등가의 차마고도. 사진에 보이는 다리는 500년이나 된 것이다. 서쌍판납 이무진의 보이차는 240km의 차마고도를 거쳐 사모까지 도착한 후 다시 차마고도인 이곳을 거쳐 티베트까지 운송되었다고 한다.

운남의 차엽과 약재, 소금 등을 말에 싣고 운남, 사천과 티베트 사이를 왕래하던 고대의 무역통로를 일러서 차마고도(茶馬古道)라고 한다. 이무는 6대 차산 중 첫 번째로 꼽히는 차산이고, 대엽종찻잎을 비롯한 중,소엽종 차나무도 함게 자라나고 있다. 그 맛이 뛰어나 황제에게 바치는 공차뿐만 아니라, 티베트로 왕성하게 수출하면서 이무차의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 차를 운반할 도로가 자연스럽게 필요해지면서 이무를 기점으로 하여 2~3m의 넓이로 만든 청석판(青石板) 길을 만든다. 이무고진(易武古镇)에 깔린 청석판이라는 돌은 차마고도의 시발점이다. 이무의 골목길에서 시작되어 만살(漫撒)-의방(倚邦)-맹왕(勐旺)-사모(思茅)까지 이어지는 청석판 차마고도는 장장 240km에 다다른다. 매년 차 따는 계절이 돌아오면 차를 수매하러 오는 수만명의 사람들이 사람들이 이 길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6대 차산 속에는 차마고도가 생기기 이전에 당대부터 소금과 은을 실어나르던 염마고도(鹽馬古道)와 은마고도(銀馬古道)라는 도로가 있었다. 상명향 부근의 습공 망지산 등에서 염정(鹽井: 소금광산)과 은광을 발견하고 채굴사업을 시작한 것이 1300년 전이고, 이것을 실어나르던 길이 염마고도와 은마고도였던 것이다. 실제로 이곳에는 은을 캐던 은광동(銀鑛洞)이 현재까지 남아있으며 망지 차산 가까운 곳에는 은광양자(銀鑛粱子)라는 지역이 있었고, 의방산 부근에는 은동아구(銀洞丫口)라는 곳이 있었다. 당대에 이 지역들은 모두 광산에서 은을 실어나르던 은마고도가 깔려있었던 곳으로, 이러한 길을 통하여 각지에서 몰려든 사람들에 의해 옛 망지 우곤당가에도 차를 사고팔던 유명한 시장을 형성할수 있지 않았을까 짐작한다. 염마고도, 은마고도의 일부는 후일, 고육대차산 상명향을 중심으로 차마고도가 놓이는 연장선상이 된다.

세월이 흐를수록 깊고 풍부한 맛, 이무차

락수동에서 원주민이 보관한 20여년 된 고차수 보이차.

잘 가공된 이무차산의 보이차는 특별한 맛을 자랑한다. 특히 오래 묵힐수록 점점 그 맛과 향이 좋아진다.

이무의 대표적인 차산 락수동의 산 언덕에 서보면 산의 좌우상하를 수많은 차산이 둘러싸고 있음을 볼수 있다. 일본에서 사용하는 고개라는 뜻을 가진 ‘상峠’이라는 글자에 딱 들어맞는 모습이다. 바로 이 산상(山峠)에서 위쪽으로 마흑채가 보이고 마흑채 위쪽으로 산이 부채살처럼 펼쳐져 있으며, 왼쪽으로는 정가채가, 오른쪽으로는 (이어지는 광활한 산들은 50평방킬로미터의 원시국유림 안에) 괄풍채가 있다. 마흑채 아래로는 락수동, 만수촌, 삼구전, 무로채하, 환전이 이어지고 이무 시내에 도착하기 전에 고산채가 있다. 그밖에도 송수림, 이무진, 삼합사, 이삐, 진가요자등 차산이 있다. 이모든 차산들은 현재 차나무 품질이 좋기로 유명한 이무의 차산들이다. 그리고 이무에서 33km 떨어진 방향에 있는 양가채, 만랍촌, 만살촌, 장가만촌, 정가채, 정가채 옆으로 이어지는 냉수하, 차왕수채 괄풍채 등은 최근 이무의 떠오르는 차산들 중에 하나이다.

청대에 이용하던 차마고도는 이 차산들 사이로 대부분 깔려있다. 청대에 이무정산에서 생산됐던 차는 전성기에 9천담이나 되었다 고한다. 항일전쟁을 거쳐 인민공화국이 설립된 이후인 1952년엔 생산량이 거의 소멸되어 400담으로 줄어들며 6대 차산의 골동차 전성시대는 막을 내리게 된다. 현재 이무 차산의 총 면적은 280만 평이고 이 고수차다원에서 채취한 춘차 생산량은 80여 톤 가량 된다. 이무는 해발낙차가 매우 심한 산등성이에 고차수가 심겨져 있다. 십리마다 기온차가 심하게 나타나는 입체형 기후로, 10m 이상 큰 교목성 나무가 많아 차나무에 그늘을 형성하고 기생식물이 풍부하여 차의 생장환경에 가장 이상적인 곳이다. 이무 괄풍채 부근의 아두산에는 천년고차수가 있고 차왕수채, 동경하 등에는 10m가 넘는 차나무가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차산들이 1978년 이후 인간이 이용하기 편리하도록 재배되면서 잘려지고 지금은 키가 작아진 나무들이 많다. 야생성이 강한 차나무를 순화시키고 재배하여 인간에게 적합한 차로 활용한 곳이 바로 고 6대 차산차이며 그중 이무차구의 차가 가장 출중했다.

실제로 이무의 차맛은 특별하다. 이무 고차수의 차는 매우 순정하고 차의 기운이 충만하다. 이무차를 정성들여 살청-유념-햇빛 건조하여 잘 가공된 차는 고삽미(苦澁味)가 강하지 않고 생침이 올라오며 회감이 길게 가는 특성이있다. 처음엔 고삽미가 약해 별 특성이 없는 듯 하다가 뒤로 갈수록 두터운 맛을 연출하는데, 가만히 살펴보면 감칠맛 뒤로 대엽차가 가지는 쓰고 떫은 성분이 서서히 고개를 내민다. 우려낸 찻잎의 색은 신선하고 탕색은 금황색이거나, 좀더 진한 등황색을 나타낸다. 이무차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포랑산 줄기에서 생산되는 반장차는 차를 만든 당해년에는 쓴맛이 비교적 많지만 년도가 증가할수록 쓴맛이 줄어들고 단맛과 향기는 더 증가된다. 반장차의 단맛은 사탕수수에서 추출한 자당(蔗糖)의 단맛과 매우 비슷하다. 반면 이무차의 단맛은 비교적 깔끔한 고급각설탕(氷糖: 얼음설탕)의 단맛을 연출한다. 이무차는 오래 묵힐수록 생차일 때보다 점점 맛과 향이 좋아진다는 월진월향(越陳越香)의 특성을 나타낸다. 장향, 연꽃향 등 세월이 흐르며 완만하게 발효한 오래된 진년차의 특별한 차맛은 이곳에서 골동차라는 문화의 꽃을 피우게 했고, 오늘날 수량이 줄면 줄수록 가치가 올라가는 내구재 상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한 잔의 차와 내 뜻 아는 벗 있다면 외롭지 않네

망지 차산의 차나무에서 심지같은 여린 차싹이 돋아난 모습

이무 지역에서 최근 뭇 세인들에게 주목받고 있는 곳은 괄풍채 차산이다. 괄풍채 고차수는 약 50평방 킬로미터의 원시 삼림 가운데에 분포하고 있다. 하늘을 뚫을 듯한 높이 20~30m의 거목이 자라나는 원시국유림 사이로 아직 사람들에게 잘리지 않은 대차수가 자라고 있다. 이런 차들을 황산(荒山)차라고도 한다. 70~80°로 가파른 깍아지른 듯한 산비탈 때문에 활시위를 당긴 듯한 형태의 몸 동작을 하고 산을 올라가야 한다. 이곳에서 봄에 나오는 고차수의 생산량은 2톤 정도이다. 괄풍채의 차왕수채, 차평, 백사하, 흑수산은 괄풍채 원료의 대부분을 차지한다. 이 밖에 아두산, 냉수하, 동경하, 금장하 등의 산지에서도 차가 생산된다. 그중, 괄풍채 마을에서 고차수가 있는 차왕수까지는 요족의 걸음으로도 8시간 이상 걸리며 일반인은 12시간 이상 걸린다. 그래서 이 마을의 요족은 차 따는 계절이 돌아오면 간단한 가재도구와 차를 볶는 무쇠솥 등을 차산에 두고 그곳에 거주하며 차를 만든다. 도시인들은 독충과 야생벌레들로부터 안전하지 않아 차산으로의 진입이 쉽지 않다. 괄풍채에서 3km 정도를 가면 라오스 풍사리성(丰沙里省)이 나온다. 2009년에 와서야 이무 마흑에서 괄풍채까지 30km 가량의 길이 뚫렸지만 여전히 길이 자주 끊기고 낙석이 수시로 굴러떨어져 비가 오면 진입이 어려운 곳이다. 하지만 이 빗줄기 속에 얼굴을 내민 영양분이 풍부할 것 같은 붉은 자주빛 홍토흙들은 이 지대의 우수한 차나무 환경을 대변해 주어 빗속을 뚫고 한번 만져보고 싶게 한다.

괄풍채차의 향기는 매우 깊고 진한데, 꽃향과 밀향이 섞여있고, 그 향기가 오래 지속된다. 맛은 당도가 높아 달고 감칠맛과 함께 시원하면서 고삽미가 강하지 않아 그 입맛이 부드럽고 매끈하다. 괄풍채의 찻잎은 다른 차산의 찻잎들과 비교해볼 때 더 무겁다. 3월 중순부터 딸 수 있는 대지차와는 달리 4월초가 넘어가야 비로소 차 싹이 트는 것이 괄풍채 지역의 고차수다. 국유림의 토양 안에는 5cm 이상의 부실질을 함유하고 있어 이 영양분을 듬뿍 머금고 자라난 찻잎들은 두텁고 화학성분이 풍부해 괄풍채만의 독특한 맛과 향을 형성한다.

이상으로 서쌍판납에 자리한 고 6대 차산의 원산지로서의 면모와 보이차 문화에 대한 족적을 따라가 보았다. 6차산은 상주 시기 토착민들이 이미 차를 심고 길렀으며, 공명이 차나무를 6차산에 전수한 이래 지금까지도 차를 마시며 이야기한다. “차좌끽다(且坐喫茶)” “자, 여러분, 함께 둘러 않아 차나 한잔 합시다.”라는 의미다. “한 잔의 차와 내 뜻 아는 벗 있다면 하늘 끝에 있어도 외롭지 않네”라는 내가 아는 어느 차객이 한 말을 떠올리며 이 글을 맺는다.

제가 드리는 이 물이 문득
감로의 차(茶)로 변하여 지이다.
당신에게 드리는 이 마음이오니
여린 사람의 바람을 받으소서.            - 석지현(시인)
글/사진
오영순
중국과 대만 등지의 차산을 120회 이상 다니면서 사진을 찍고 차를 연구하며 인사동에서 차 전문점을 운영하고 있다. 생생한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보이차에 대해 강의하고 있으며, 원광대학교 예다학 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발행2012.10.23.

주석

1고(古) 6대 차산
고(古) 6대 차산서쌍판납을 가로지르는 란창강을 중심으로 강내의 고(古) 6대 차산이 있고 강외의 신(新) 6대 차산이 있다. 강 내의 차산은 혁등(革登), 의방(倚邦), 망지(莽枝), 만전(蛮砖), 만사(漫撒(이무(易武))), 유락(攸乐, 현재의 基诺) 등으로 고 6대 차산이라고 한다. 강 외의 6대 차산은 신 6대 차산으로서 남나산(南糯), 남교(南峤), 맹송(勐宋), 경매(景迈), 포랑(布朗), 파달(巴达)을 말한다.
2호자급(號字級) 보이차
호자급(號字級) 보이차 청대에 시작되어 1950년 이전까지 6대 차산에서 만들어진 골동보이차는 차를 만들던 상점 이름인 동경호, 동창호, 경창호 등의 이름을 따 호자급 보이차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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