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범(철종)에 대하여......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고 인조는 청나라황제에게 굴복했습니다.
인조에게는 첫째 소현세자, 둘째 봉림대군, 셋째 인평대군이 있었습니다. 그외도 좀 있지만
첫째 소현세자는 인조보다 미리 죽고 소현세자의 아들 3형제중에서 첫째, 둘째는 10살전후에 제주도에 유배되어 병들어 죽고 셋째 아들만 남아서 후손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셋째 아들의 후손들도 영조때에 이인좌의 난에 연루되어 거의 처형되었죠. 이인좌가 소현세자의 후손인 밀풍군을 왕으로 추대했기 때문입니다.
둘째인 봉림대군은 효종이 되죠. 효종은 아들이라곤 현종 뿐이었고,
현종은 외아들 숙종 뿐이었고,
숙종은 맏아들 경종은 무자식, 둘째아들 영조, 셋째는 일찍 죽고
영조는 맏아들이 일찍 죽고, 둘째 사도세자는 직접 죽이고
사도세자의 아들은 적자는 정조, 서자는 은언군, 은신군, 은전군이 있었는데
은언군은 나이로는 정조보다 많았으니 정조의 서형이죠.
정조는 맏아들이 일찍죽고, 둘째 순조가 외아들이 되고
순조는 외아들 익종이 먼저 죽고,
익종은 외아들 헌종 뿐이었고, 헌종은 무자식이라.
결국 효종대왕의 후손들이 씨가 마를 지경이 되었습니다.
사도세자의 아들중에 은신군, 은전군은 자식이 없었고,
은언군만 상계군, 풍계군, 전계군 세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상계군은 역모를 꾀한 자들이 추대한 죄로 정조때 처형되었고, 은언군도
처형되고, 풍계군은 자식이 없었습니다. 물론 양자는 들였지만,
그래서 결국 남은 사람은 전계군 뿐이었는데,
전계군은 아버지와 형들이 비명횡사하는 것을 보고 자랐고 집안은 거의 쑥대밭이
되어서 강화도에서 근근이 연명하는 처지였습니다. 전계군이란 것도 나중에 아들이
철종이 된 후에나 붙인 거고 그 전에는 왕족 대우도 받지 못했습니다ㅏ.
전계군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는데 맏아들 원경(元慶)이 또 안동김씨들에 의해서
역모죄로 처형되었습니다. 그래서 둘째인 영평군(나중에 붙인 이름)과 셋째 원범(元範)만
남게 된 것입니다. 이 둘중에 나이가 어린 원범을 순원왕후 김씨가 자신의 아들로 입적하고 왕으로 세운 것입니다.
그리고, 영평군도 무자식, 철종도 딸하나만 낳고 무자식, 딸마저도 박영효에게 시집갔다가
일찍 죽었죠.
그래서 결국, 효종-현종-숙종-경종-영조-정조-순조-헌종-철종 에 이르기까지 효종의
남자 후손은 끝내 대가 끊어졌습니다.
효종은 형인 소현세자가 죽고 세자가 되었는데 형수인 민회빈강씨가 죄없이 사형당할때 아무런 도움도 주지 않았고 소현세자의 아들들도 10살남짓한 어린나이로 제주도에서 죽어갈 때도 왕권의 경쟁자로만 생각해서 전혀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한을 품고 죽은 소현세자, 민회빈강씨, 소현세자의 어린 아들들이 저승에서나마
저주한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이어서, 철종마저 죽자 남은 사람은 철종의 둘째 형인 영평군이 유일하게 살아있었는데
이미 장성해서 권력을 잡은 안동김씨나 풍양조씨 모두 후계자로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효종의 동생인 인평대군의 6대손인 흥선대원군의 아들을 후계자로 삼은 것입니다. 물론 그전에 흥선대원군의 아버지인 남연군이 은신군의 제사를 받들고 있었기 때문에
명분상으로는 영조의 후손인 셈이었죠.
그러나, 혈통상으로는 고종과 철종사이는 16촌이나 되는 먼 친척인 셈이었습니다.
오죽하면 혈통을 중시하는 왕가에서 16촌이나 되는 친척을 후계자로 삼았겠습니까.
인평대군의 아들들도 2명이 역모죄로 처형되고 후손들은 왕족으로서 힘도 없이
죽어지내다가 6대손인 흥선대원군대에 이르러서야 겨우 재기한 것입니다.
철종은 자신의 혈족이 저지른 역모(반란죄)사건으로 연좌되어서(옛날에는 가족이 역모죄등의 아주 큰죄를 지으면 다른 가족도 같이 처벌되는 경우도 있었음) 귀양살이는 하고 있었던 상황이라서 생활에 여유가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때로는 나무를 해다팔고, 농사를 지으면서 어렵게 먹고 살아야 했던 것인대요
원래는 정부에서 죄인을 먹여살려야 하는 것이나 귀양이 너무나 장기화 되면서 정부에서도 무심하게 방치를 하다보니까...
거의 일반백성처럼 되어서 스스로 먹고 살길을 찾지 않으면은 굶어 죽을 지경까지 처하는 철종개인적으로 보아서는 왕의 먼 혈손이라고 보기도 어려운 천한처지로 추락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헌데, 이런 철종의 처지와는 무관하게 중앙정계에서 왕위승계는 아주 극단적인 난맥을 드러나기 시작해서 헌종을 끝으로 직계나 가까운 방계의 왕 혈손이... 모두 단절이 되고
꾀 먼혈족인 7촌씩이나 떨어진 혈족들만 몇 남아있는 지경에 처합니다.
그러나 철종의 형들도 7촌간이기는 하지만, 이미 양자를 가서 촌수가 없어지고...
흥선군같은 경우는 말도 않는 먼 씨족에서(혈족도 못됨)양자를 온 후의 혈손으로 7촌이
되어서 원래 흥선군을 세운다는 것은 풍향조씨의 억지였고...
정통성차원에서는 누가바도 악영향입니다.
이러고 보니 남은 혈족중에서 전왕과 가장 가까운 사람은 후에 철종인 원범이 되어서 당연히 그가 왕이 되어야 했던 것이고 안동김씨측에서는(순원왕후) 원칙대로 즉위를 거행한 것입니다.
(철종개인은 죄인이 아니고, 죄인이라도 죄인었다는 것은 왕이 되는대 영향이 없으며 이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라서 테러단체지도자가 정치지도자는 물론 평화상을 받기도 함)
왕조시대의 정통성이라는 것은 혈연으로 죄우된다는 것은 개인적인 생각이 아니라 학자들의 생각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정통성이 멀어져서 그런 판국에 더 먼 혈손을 왕으로 세운다는 것은 국가적으로 더욱 암담한 현실을 초래하는 것이고 백번을 양보한다고 해도, 흥선군이라는 인물은 걸인 행세나 하고 다니던 사람이라서 왕으로서의 권위를 세울수가 없는 사람이었고요(사람들이 거지잡인을(흥선군) 왕으로 따를 이유가 없음=철종과는 성격이 다름)
정치라는 것은 자신이 세계최고로 유능해도 사람들이 따라주지 않으면은 아이를 왕으로 세우는 것만 못한 것입니다.
(정치가 되려면 통치자도 물론 유능하고 천부적인 재질까지 있다면 더 할것이 없겠지만
시대가 그를 따라주지 아니하고, 사람들이 따라주지 아니하면은 아무짝에 쓸모가 없어서 클린턴처럼 무능한 사람보다 많이 처지게 되는 것임)
개인적으로는 없는 핏줄을 만들수도 없고, 아무나 데려다가 혈손이라고 우길수도 없는 것이니... 순원왕후가 당시의 상황에서는 최선의 판단을 했다고 자부하며...
철종까지는 조선의 혈통이 이어진 것으로 보아야 하고... 관련학자도 그런적이 있읍니다
문제는 철종의 형이(남은 가족) 양자를 가는 바람에 살아 있는대도 철종의 형이(방계는 그나마 가까운 것임) 왕자리를 이어받지를 못해서...
사실상 조선왕조의 정통성은 철종으로 막을 내리고.... 혈통상은 왕족이 아닌 조상이 양자로 들어오는 바람에 말로만 혈족이된 왕이 즉위하게 되고, 이로인해 왕조의 명을 단축하는 시초가됩니다.(신라나 고려도 말미의 왕은 다 엄청나게 먼 혈손이 왕으로 즉위 했음)
차라리 철종의 말대로... 철종이 살아 있을 때, 철종의 직계양자를 들이는 것이 필요했으나
안동김씨 정권은, 또 다른 세력의 등장을 우려하는 것 때문에 더욱 열악한 위치에 처해지게 된 것인대요
결국 이것은 안동김씨 세력의 판단착오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당시의 정황으로서는 어쩔수가 없는 것이 아니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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