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朝鮮時代) 역대 임금의 묘호(廟號)
'조(祖)'와 '종(宗)'의 구분 기준과 그 배경
본디 임금이 승하(昇遐)하면, 창업을 한 왕에게는 묘호(廟號)로서 '∼조(祖)'를, 수성을 한 왕에게는 '∼종(宗)' 자(字) 붙여 승하한 임금의 위패(位牌)를 종묘(宗廟)에 봉안(奉安)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공(功)이 있는 왕에겐 '∼조(祖)'를 붙이고 덕(德)이 있는 왕에겐 '∼종(宗)'을 붙인다 하였는데, 이를 이른바 '조공종덕(祖功宗德)'이라고 합니다.
이 말의 어원(語源)은 한(漢)나라 무제(武帝) 때 사람 사마천(司馬遷)이 지은《사기(史記)-효문본기(孝文本紀)》에서 문제(文帝) 임금(B.C.203-157)에 의하여 "임금 중에서 공적이 있는 자는 '祖'라고 하고, 덕망이 있는 자는 '宗'을 붙여 사용한다(祖功宗德)"고 한 것에서 비롯하였습니다.
우리 나라의 조선왕조(朝鮮王朝) 또한 태조(太祖) 원년(元年)에 이성계(李成桂)의 사대조(四代祖) 존호(尊號)를 종묘(宗廟)에 봉안(奉安)할 때, 묘호(廟號)를 정하는 원칙을 세웠으니,《태조실록(太祖實錄)》원년(元年) 11월 6일자(日字)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재(登載)되어 있습니다.
"공(功)이 있는 이는 조(祖)로 하고, 덕(德)이 있는 이는 종(宗)으로 하니, 효(孝)는 부모(父母)를 높이는 것보다 큰 것이 없으며, 시호(諡號)로써 이름을 바꾸게 하니 예의는 마땅히 왕으로 추존(追尊)함을 먼저 해야 될 것이옵니다."
이 말과 함께 이태조(李太祖)는 자신의 직계 조상 사대(四代)를 높여 '목조(穆祖)-익조(翼祖)-도조(度祖)-환조(桓祖)'로 각각 추존(追尊)하였고, 이 때 세운 원칙은 조선왕조(朝鮮王朝) 역대 임금의 묘호를 정할 때마다 하나의 규범(規範)이 되었지만, 오늘의 잣대로 볼 때 이 규범을 후대 왕들이 철두철미(徹頭徹尾)하게 제대로 적용하여 선왕(先王)의 묘호(廟號)를 정했다고는 보여지지 않습니다.
이 묘호 제정 규범을 100% 맞게 적용한 것은 아니지만, (창업한 임금은 아닐지라도) 대체적으로 나라를 중흥시켰거나 큰 국란을 극복하였거나 혹은 반정(反正)을 통해 왕위에 오른 경우 및 선왕(先王)의 적장자(嫡長子) 세자(世子)가 아닌 방계(傍系)의 왕자(王子)나 왕손(王孫)이 계승해 왕실의 새로운 계통을 세웠을 경우에, 세조(世祖)-선조(宣祖)-인조(仁祖)-영조(英祖) 등의 사례(事例)처럼 '∼조(祖)'를 사후(死後) 묘호(廟號)로 사용하였습니다.
방계(傍系)가 왕실의 새로운 계통을 세운 것은 어느 면에서는 종묘(宗廟) 사직(社稷)을 공고(鞏固)하게 한 셈이므로, 이를 후대의 사가(史家)들의 냉정한 평가와는 달리 왕실에서는 하나의 큰 공(功)으로 높이 평가해 '조공종덕(祖功宗德)'의 규범을 적용시켜 묘호(廟號)를 정한 것입니다.
그러나 조선왕조 역대 임금의 사후(死後) 평가에 의해 추서(追敍)되는 이 '∼조(祖)'와 '∼종(宗)'의 묘호(廟號) 구분 기준이 실제로는 후대(後代)에 이를수록 그렇게 엄격하게 지켜지거나 일관성 있게 적용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태조(太祖) 이성계 이후 '∼조(祖)'라는 묘호(廟號)를 처음으로 받은 세조(世祖) 임금의 경우, 이분이 승하하여 종묘(宗廟)에 위패(位牌)로 모셔질 때, 그가 형왕(兄王)인 문종(文宗)을 계승한 적장자(嫡長子)인 조카 단종[端宗 :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 당한 폐주(廢主) 임금]을 대신하여 새로운 왕실 계통을 세운 것으로 보고, 그의 계승자(繼承者)인 아들 예종(睿宗)이 세조(世祖)라는 묘호(廟號)를 부왕(父王)에게 바쳤습니다.
연산군(燕山君)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 당한 단종(端宗)에 이어 조선왕실에서 두 번 째로 폐주(廢主)가 된 임금이라, 종묘에 그의 위패가 봉안될 수 없었으므로 당연히 묘호(廟號)가 있을 수 없었고, 그를 이어 왕이 된 중종(中宗)은 연산주(燕山主)를 대신한 부왕(父王) 성종(成宗)의 계승자로 자처(自處)했기 때문에 새 왕실 계통을 이은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승계(承繼)로 간주하여, 사후(死後)에 중종(中宗)으로 불려지게 된 것입니다.
선조(宣祖)의 경우는 그가 선왕(先王)인 명종(明宗)의 아들도 아니었고, 중종(中宗)의 서자(庶子)인 덕흥군(德興君)의 제삼자(第三子) '이균(李鈞)'의 이름으로 태어나 평범한 종친(宗親)의 신분으로만 지내다가, 평소 그의 인품(人品)이나 자질(資質)에서 왕재(王才)가 있음을 눈 여겨 두었던 명종(明宗)이 마침 후사(後嗣)가 없이 승하할 때 유교(遺敎)를 통해 덕흥군(德興君)의 셋째아들인 '이균(李鈞)'으로 하여금 대통(大統)을 잇게 하라 하여 왕위에 오른 분으로서, 명백히 왕실의 계통을 방계(傍系)에서 새로 내세운 셈이라, 처음 묘호는 선종(宣宗)이었지만 국란(國亂) 극복의 공(功)에 대한 사후 평가와 더불어 묘호에 대한 재론(再論)이 일어나 '선조(宣祖)'라는 묘호(廟號)를 받았습니다. 그의 생부(生父)인 덕흥군(德興君)은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으로 추서(追敍)되었으며, 조선 왕실 최초의 대원군 소생 임금이 된 분이 바로 선조(宣祖) 임금입니다.
후궁(後宮) 소생이지만 왕위에 올랐던 광해군(光海君)은 노산군(魯山君) 단종(端宗)과 연산군(燕山君)에 이어 세 번째로 무력(武力)에 의해 왕위에서 축출(逐出)된 임금이라 연산주(燕山主)처럼 종묘에 모셔지지 못한 조선왕조 마지막 폐주(廢主)가 되었습니다.
단종(端宗)은 적통(嫡統) 임금이었지만 계유정난(癸酉靖難)에 의해 정권을 잃고 숙부에게 양위(讓位)하여 일시적으로 상왕(上王)이 되었으나, 사육신(死六臣)의 반정(反正) 시도가 실패하는 바람에 노산군으로 강등(降等)되어 멀리 강원도 영월지방으로 유배(流配)되었다가 목숨을 잃어, 사실상 쿠테타(coup d'Etat)로 서서히 실권(失權)을 당해 결국 왕위에서 물러난 왕이었으며, 종묘에도 모셔지지 못했지만 실덕(失德)하여 폐주(廢主)가 된 임금은 아닌, 어디까지나 양위(讓位)를 하고 물러난 임금이었으므로, 훗날 숙종(肅宗) 때에 복권(復權)이 되어 '단종(端宗)'이라는 묘호(廟號)를 뒤늦게 받아 종묘에 모셔지게 되었습니다만, 이와는 달리 쿠테타에 의해 즉각(卽刻) 왕위(王位)를 잃은 연산군(燕山君)과 광해군(光海君)은 방탕(放蕩)과 패륜(悖倫)의 임금이었기 때문에 끝내 사후(死後) 명예회복을 못한 임금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지금까지 그 흔한 역대 임금의 후궁 소생 왕자와 왕손 및 공신(功臣)에게나 부여하는 군호(君號)로 격하된 채 초라하게 우리 나라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을 뿐입니다.
선왕(先王)의 적장자(嫡長子)가 아닌 수많은 왕손(王孫) 중 일원(一員)에 지나지 않았던 인조(仁祖)는 반정(反正)을 일으켜 숙부(叔父)인 광해주(光海主)를 축출하고 왕실의 새로운 계통을 세워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사후(死後)에 처음에는 '열종(烈宗)'이란 묘호를 받았으나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종묘사직을 바로 세운 공(功)과 병자호란의 국난을 극복하여 사직을 안정시킨 공으로 '조종공덕(祖功宗德)'의 논리에 의해 '인조(仁祖)'로 개명(改名)하여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광해군을 축출한 인조반정(仁祖反正)의 당위성(當爲性)에 대한 의문(疑問)도 있고, 병자호란(丙子胡亂)의 국치(國恥)를 자초(自招)한 임금으로 후대(後代)의 사가(史家)들의 평가를 받기도 한 왕이 바로 인조(仁祖)였지만, 그의 아들 효종(孝宗) 임금과 당시 조정(朝廷)의 신하들 입장에서는 인조(仁祖)가 중흥주(中興主)로서의 공(功)을 세운 거룩한 임금으로 비쳐졌던 모양입니다.
영조(英祖)의 경우는 숙종(肅宗)의 후궁 숙빈(淑嬪) 최씨(崔氏)소생이었으나 선왕(先王)이자 형왕(兄王)인 경종(景宗)이 후사가 없어 그의 왕위를 계승하였으며, 조선 역대 임금 중 재위기간이 가장 길었고 임진왜란 이후 가위(可謂) 르네상스적(的)인 중흥(中興)의 기틀을 마련한 임금이라, 사후(死後)에 처음엔 '영종(英宗)'이란 묘호(廟號)로 불렸지만 나중에 '조공종덕(祖功宗德)'의 규범을 적용하여 '영조(英祖)'라는 묘호를 다시 받게 되었습니다.
영조의 손자(孫子)이자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었던 정조(正祖)는 선왕의 적장자 신분이 아닌, 그것도 자기 생부(生父)가 조부(祖父) 영조(英祖)의 노여움을 사서 뒤주에 갇혀 죽은 이후 일찍이 사도세자(思悼世子)보다 먼저 요절(夭折)한 효장세자[孝章世子 : 추존(追尊) 임금인 진종(眞宗)]의 후사(後嗣)가 되는 형식으로 조부왕(祖父王)의 어명(御命)에 의해 세손(世孫)이 된 이후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서류상(書類上) 정상적 왕위 계승이 아닌 새로운 승계 형식에 의해 즉위한 셈이 되었고, 세종(世宗) 이래(以來) 영조(英祖)에 이어 조선왕조 최대의 문예부흥(文藝復興)을 이룩한 치세(治世)를 보여 준 임금이라, 사후에 처음엔 정종(正宗)으로 추서(追敍)되었지만, 다시 '∼종(宗)'이 아닌 '∼조(祖)' 즉 정조(正祖)로 종묘(宗廟)에 모셔지게 되었습니다.
정조 임금의 둘째 아들이자 후궁(後宮) '현목수빈(顯穆綏嬪) 박씨(朴氏)' 소생인 순조(純祖)는 이복형(異腹兄)인 문효세자(文孝世子)가 죽은 지 얼마 안 되어 부왕(父王) 정조(正祖)가 급서(急逝)하지 11세의 유충(幼沖)한 보령(寶齡)으로 왕위에 오른 임금입니다. 순조는 승하(昇遐) 후 처음에는 순종(純宗)으로 추서(追敍)되었으나, 나중에 '순조(純祖)'로 고쳐 종묘에 모셔졌습니다.
'영조(英祖)-정조(正祖)-순조(純祖)' 임금이 본디 '영종(英宗)-정종(正宗)-순종(純宗)'이었다가 묘호가 바뀌게 된 것은 해당 임금에 대한 평가(評價)가 달라진 것도 원인이겠지만, 그 분들의 치세(治世) 앞뒤로 실제 임금 위(位)에는 오르지 못하고 죽은 임금, 즉 추존(追尊) 임금의 묘호(廟號)와 위패(位牌)가 종묘(宗廟)에 열성조(列聖祖)와 함께 봉안(奉安)되었기 때문에 묘호(廟號)가 바뀐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영조(英祖)-진종[眞宗 : 孝章世子]-장조[莊祖 : 思悼世子]-정조(正祖)-순조(純祖)-익종[翼宗 : 孝明世子]-헌종(憲宗)
어쨌거나 조선왕조의 묘호 조종(祖宗)에 대한 구분 기준은 '조공종덕(祖功宗德)'이었으며, 실제 적용 과정에서는 창업주(創業主) 이외에 방계(傍系)의 왕자(王子)나 왕손(王孫)이 계승해 왕실의 새로운 계통을 세웠을 경우에 '조(祖)'를, 그 외(外)에는 '종(宗)'을 붙였는데, 후대에 이르러서는 규범 적용이 제대로 안 되었다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대표적인 경우가 헌종(憲宗) 사후에 방계(傍系) 왕손(王孫) 신분으로서 보위(寶位)에 오른 전계대원군(全溪大院君)의 소생 강화도령 철종(哲宗)과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의 아들인 고종(高宗)입니다.
선왕의 직계(直系) 후손이 아닌 방계(傍系)로서 새로운 계보(系譜)를 연 세조(世祖)나 선조(宣祖) 및 인조(仁祖)의 경우를 본다면 철종(哲宗)과 고종(高宗)에게는 '∼조(祖)'를 붙였어야 하는데, '∼종(宗)'이 되었으며, 특히 고종(高宗)의 경우는 조선왕실(朝鮮王室)의 격(格)을 높여 최초로 대한제국(大韓帝國)의 황제(皇帝)의 위에 오른 분인데도 '∼종(宗)'이 되어야 했으니 말입니다.
고종황제의 아드님이신 순종(純宗)황제는 그 묘호가 제23대 임금 순조(純祖)의 처음 묘호(廟號)로 사용했던 것 '순종(純宗)'을 다시 추서(追敍)하여 그 느낌이 여간 찜찜한 것이 아닙니다.
고종황제와 순종황제 두 분은 모두 일제(日帝) 치하(治下)에서 황제가 아닌 이태왕(李太王)과 이왕(李王)의 신분으로 격하(格下)되어 망국(亡國)의 한(恨)을 품고 승하(昇遐)하였기 때문에, 음(陰)으로 양(陽)으로 일제(日帝)의 압박에 의해 한 분은 고종(高宗)이 되고, 그 아드님은 조상(祖上)께 일시적으로나마 추서(追敍)하였던 순종(純宗)이란 묘호(廟號)를 치욕적으로 다시 받게 된 것이 아닌가 여겨집니다.
결론적으로 말해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조종(祖宗)의 구분 기준은 《태조실록(太祖實錄)》원년(元年) 11월 6일자(日字) 기록에 의거(依據)한 '조공종덕(祖功宗德)'이 관례(慣例)였는데, 후대(後代)의 자의적(恣意的)인 평가와 적용으로 인해, 오늘날까지도 그 구분 기준에 대한 이설(異說)이 분분(紛紛)할 만큼 일관성(一貫性)을 유지하지 못 한 것으로 보아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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