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orld Geography/World Geography

크로아티아

나 그 네 2015. 7. 31. 18:01

크로아티아 자연과 인간이 함께 빚은 ‘진정한 천국’

1 자그레브 - 크로아티아의 수도이자 최대 도시. 반 옐라치치 광장을 중심으로 광장 북쪽 언덕의 구시가와 남쪽의 신시가에 볼거리가 모여 있다.
2 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 - 크로아티아 최초의 국립공원. 16개의 호수가 크고 작은 90여 개의 폭포들과 연결되어 절경을 이룬다. 1979년 세계 자연 유산에 등재되었다.
3 스플리트 - 아드리아 해 연안에 자리 잡고 있는 휴양 도시. 로마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이곳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궁전을 세웠다.
4 두브로브니크 - ‘아드리아 해의 숨겨진 지상낙원’으로 불리는 해안 도시. 중세 도시의 아름다운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시간이 정지한 것 같은 아드리아 해의 숨은 보석 크로아티아. 이지러진 초승달 같은 생김새 그대로 아련한 아름다움을 곳곳에 품고 있다. 슬로베니아와 함께 하면 용의 입처럼 보이기도 한다.

북서쪽에 슬로베니아, 북동쪽에 헝가리, 동쪽에 세르비아, 남쪽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있고, 서남쪽에 아드리아 해가 있다. 크로아티아 남부에는 달마티아 해안이 아드리아 해에 길게 이어져 있고, 디나르알프스 산맥이 달마티아 해안을 따라 뻗어있으며, 동부에는 도나우 평야가 펼쳐져 있다.

남부 해안은 전형적인 지중해성 기후를 보이고 북부 내륙은 대륙성 기후의 특징을 보인다. 면적은 56,594㎢로 한반도의 4분의 1 크기이고 인구는 2012년 기준으로 약 449만 명에 불과하다. 그중 약 70만 명이 수도 자그레브에 거주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의 아름다움은 그냥 주어지지 않았다. 자연이 빚어낸 천혜의 아름다움이다. 그렇기에 인간이 다듬어 만든 인공조차 자연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 바다·산·평야가 인간과 서로 어우러져 아름답게 빚어진 이 작은 나라가 세계인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하지만 초승달 미인 크로아티아가 탄생하기까지는 수많은 역사의 고비가 있었다. 유고슬라비아에 속했던 크로아티아의 역사만큼 복잡하고 정리하기 힘든 지역도 드물 것이다.

동유럽 자유화를 촉발한 슬라브 족 다민족 국가

크로아티아의 토착민은 일리리아(Illyria) 족이다. 기원전 3세기 해안 지방에서는 로마와, 내륙 지방에서는 켈트 족과 교류하던 일리리아 족은 로마 제국에게 영토를 잃었다. 4세기 초에 고트 족, 5세기에 훈 족의 침입을 받았고 7세기경에는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슬라브계가 대대적으로 유입되었다. 이로써 슬라브 족 다민족 국가의 원형이 형성됐다. 7~9세기에는 프랑크 왕국과 동로마 제국의 지배하에 있다가 925년에 토미슬라브(Tomislav) 공이 통일된 크로아티아 왕국을 최초로 수립했다.

1102년에는 동로마 제국의 위협에서 벗어나기 위해 헝가리 왕을 통치자로 하는 헝가리-크로아티아 국가를 성립하였다. 크로아티아는 1918년까지 헝가리와 합병해 있었지만 법적으로는 독립 왕국의 지위를 유지했다. 1526년 헝가리가 오스만 제국에 패배하면서 1699년까지 크로아티아 대부분의 지역이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1868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세워진 후에는 헝가리의 자치주로 편입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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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년 당시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영토. 현재의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코소보, 마케도니아 등이 포함되어 있다. <출처: (CC) NordNordWest @ wikimedia commons>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전 대통령 요시프 티토.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노력했다.

1918년 제1차 세계 대전이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패배로 끝나자 미국 대통령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따라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Kingdom of Serbs, Croats and Slovenes)’이 결성됐다. 1929년에는 국명을 ‘유고슬라비아 왕국(Kingdom of Yugoslavia)’으로 바꾸었다. ‘유고(Yugo)’는 슬라브 어로 남쪽을 뜻하므로 ‘유고슬라비아’는 ‘남슬라브 민족의 땅’이란 의미를 지닌다.

크로아티아인 아버지와 슬로베니아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난 요시프 티토(Josip Broz Tito, 1892~1980)가 1944년 소련의 붉은 군대의 지원을 받아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를 점령하였고 이듬해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공화국(약칭 유고 연방)’을 세웠다. 1980년 티토 대통령이 사망하자 동유럽에 자유화 운동이 전개되어 1991년 연방에 속해 있던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가 분리 독립을 선언했다.

두 국가의 연방 이탈을 원치 않던 세르비아는 세르비아 인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슬로베니아를 침공했다. 하지만 인구의 80% 이상이 슬로베니아 인으로 구성되어 있어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은 10일간의 전투 끝에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사실상 인정하고 철수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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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당시 전투로 인한 파편이 거리에 널브러져 있다. <출처: (CC) Peter Denton @ wikimedia commons>

1992년 독립 선포로 내전이 일어난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정부 청사가 불타고 있다. <출처: (CC) Mikhail Evstafiev @ wikimedia commons>

크로아티아에서는 국내의 세르비아 인들과 정부군 간에 내전이 발발했다. 이에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이 수습을 명분으로 내전에 개입하였으나 1995년 국제연합(UN)의 중재로 내전이 종식되었고 크로아티아는 신유고 연방과 관계 정상화 협정을 맺었다.

두 나라의 독립에 자극을 받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도 1992년 국민 투표를 실시해 독립을 선포하고 수차례의 내전을 거쳐 독립 국가를 수립했다. 민족·언어·종교에서 큰 차이가 없는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유고 연방에 그대로 남아 신유고 연방인 세르비아-몬테네그로를 결성해 구유고 연방의 명맥을 유지하다가 2006년 각각 독립하였다. 구유고 연방은 오늘날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세르비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몬테네그로, 마케도니아 등 여섯 나라로 나누어져 있다.

발칸 반도는 서로 다른 언어와 종교가 뒤섞여 분쟁이 끊이지 않았기 때문에 ‘유럽의 화약고’로 불린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아 가톨릭 문화권에 속한다. 세르비아는 그리스 정교회 문화권에 속하고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는 그리스 정교와 이슬람교가 섞여 있다. 알바니아는 이슬람 문화권에 속한다.

어떤 목적을 위해 지리적 환경의 산물에 불과한 종교를 인간 앞에 둘 때 늘 비극은 싹텄다. 종교는 그러지 말라 하는데, 인간은 부질없음에 매달린다.

‘폴란드’라는 이름을 들으면 음악이, ‘오스트리아’라는 이름을 들으면 비엔나 롤이 떠오른다. ‘헝가리’라는 이름을 들으면 아름답고 푸른 도나우 강이 생각나고, ‘루마니아’라는 이름을 들으면 집시가 생각나며, ‘불가리아’라는 이름을 들으면 요구르트가 생각난다. ‘체코슬로바키아’라는 이름을 들으면 사기와 유리가 떠오른다.

그런데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을 들으면 별로 떠오르는 게 없다. 하지만 다양한 언어와 종교를 지녔던 유고슬라비아는 ‘슬라브 족의 모자이크’라고 불렸다는 것을 기억해 두자. 그중 숱한 신의 시험을 거친 크로아티아는 ‘신의 정원’이라고 불릴 만하다.

시인 마토스는 자그레브의 어디를 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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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아티아의 시인 안툰 구스타브 마토스. 평화로운 시로 당시 억압받던 크로아티아에 대한 사랑을 표현했다.

자그레브의 시가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 위의 마토스 동상. 이곳은 마토스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장소다. <제공: 리베르스쿨 출판사>

크로아티아 현대 문학의 거장 안툰 구스타브 마토스(Antun Gustav Matoš, 1873~1914)가 언덕길에 앉아 수도 자그레브의 시가지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 앞에서 소설가 은희경이 깍듯이 인사를 하고 김수영의 [사랑]을 읽었다.

어둠 속에서도 불빛 속에서도 변치 않는
사랑을 배웠다 너로 해서.
……

마토스는 [외로운 사랑](글쓴이 )을 앓았다. 사랑도 경지에 이르면 도()가 되는 것일까. 벤치에 앉은 마토스는 한국에서 온 이방인에게 자신의 시를 낭송하는 듯했다.

이미 한밤중, 불빛조차 가물거리네요.
검은 벨벳 위로 어둠이 무겁게 내리네요.
그대의 고운 머릿결을 떠올리니
내 이마엔 주름이 그려지네요.
멀어진 사랑, 언제, 언제나 돌아오려나.

그대는 떠났소, 어디에 있나요.
그대는 죽은 듯이 떠났소.
그대와의 거리는 죽음의 슬픈 힘.
열정으로 심장이 저미어
불확실로 영혼마저 두려워
오늘 밤 나 죽으면
내 사랑 따라 가리라.

사랑은 행복이 아닙니다! 그대가 그랬지요.
사랑은 상처, 타오르는 상처.
사랑은 아프다, 아프다, 삶이 그러하듯이.
사랑하는 자, 저주받고, 저주받았느니.

그대는 틀렸어요. 사랑은 고통스런 격정.
하지만 돌처럼 홀로 있을 때만 힘들답니다.

크로아티아의 토바르니크에서 태어난 마토스는 자그레브에서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를 보냈다. 마토스가 살아 있을 당시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일부였다. 마토스는 징병된 지 1년 만에 군에서 탈영해 세르비아로 도주한 뒤 파리, 제네바 등지에 머무르면서 자그레브를 몰래 찾곤 했다. 13년의 해외 생활 끝에 사면을 받은 마토스는 꿈에 그리던 자그레브에 돌아왔지만 6년 후 식도암으로 사망했다. 마토스의 ‘그대’는 한용운의 ‘님’이기도 하다.

자그레브를 사랑한 마토스 동상 옆에 앉아 얼굴을 어루만지면 어떨까. 사람들은 간절함을 갈구하는 무언가를 만지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정서에 기댄다.

크로아티아의 수도 자그레브는 동과 서로 향하는 여행자들의 기착지로서 동서양의 가교 역할을 해왔다. 그래서인지 곳곳에서 역사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오랜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기라도 하듯 자그레브는 구도심과 상업지구, 신도시로 나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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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그레브 대성당. 성당 앞 광장에는 황금빛 성모 마리아상이 우뚝 솟아 있다. <제공: 리베르스쿨 출판사>

사람들이 가장 많이 모이는 반 옐라치치 광장(Ban Jelacic Square)에서 언덕을 오르면 자그레브 대성당(Zagreb Cathedrale)이 성스러운 모습을 드러낸다. 전망대 역할을 하는 쌍둥이 첨탑은 1242년 타타르족의 침입과 1880년 지진으로 손상된 것을 복원하였으므로 높이가 다르다. 북쪽 탑이 105m, 남쪽 탑이 104m이다.

첨탑 위의 하늘에서 고요하게 평온함이 내린다. 10여 개의 보물급 유물이 있어 ‘크로아티아의 보물’이라 불리는 자그레브 대성당이 성심을 자아냈는지 이곳을 방문한 한국의 여배우 김자옥은 절로 눈물을 흘렸다. 남에게 보여주는 연기를 잊고 인간 본연의 모습을 접하게 되었던 것일까.

타일로 지붕을 엮은 성 마르크 성당(St. Mark Church), 애절한 사연을 담은 실연 박물관(Museum of Broken Relationships) 등 유적지와 풍물이 언덕 위의 구시가지를 아기자기하게 수놓고 있다. 사람들이 결혼식을 올리는 성당 가까이에 실연 박물관이 자리하고 있는 것이 아이러니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헤어짐을 추억하는 실연 박물관에는 ‘기억을 지우는 지우개’가 있다. 기억을 지우면 아픔도 지워질까.

자그레브 골목의 어느 넥타이 가게. 창문에 걸려있는 큰 넥타이가 눈길을 끈다. <제공: 리베르스쿨 출판사>

성당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을 지나다 보면 넥타이 가게가 눈에 띈다. 넥타이는 크로아티아 용병이 목에 매던 스카프를 본 루이 14세와 프랑스 귀족들이 흉내를 내 착용하기 시작하면서 유행했다. 대체로 이 시점을 넥타이의 시작으로 보고 있다. 넥타이는 프랑스어로 ‘크라바트(Cravat)’라고 하는데, 이는 ‘크로아트(Croat, 크로아티아 사람)’에서 유래되었다. 크로아티아의 스카프가 나의 목을 조이는 데도 한몫을 했으니 세상 일이 서로 관련되지 않는 게 없다는 생각에 미치게 된다.

작은 도시라도 스토리가 깃들면 위대해진다. 인공적 개발 못지않게 스토리 개발도 중요하다. 우리도 소설가라도 동원해서 거리마다 스토리를 끌어내야 하지 않을까. 우리에게도 만질 수도 없는 죽은 동상이 아니라 마토스처럼 살아서 우리 옆에 있는 동상이 필요하다.

서울 사대문 안은 한나절이면 돌아다닐 수 있듯이 자그레브도 한나절이면 충분하다. 하지만 부지런히 돌아다녀도 사대문 안 구석구석을 살펴보지 못하는 것처럼 자그레브의 오묘한 얼굴을 한나절 만에 본다는 것은 가능할 성 싶지 않다. [메밀 꽃 필 무렵]을 속독으로 읽으면 어찌 메밀꽃 냄새를 맡을 수 있겠는가.

마토스는 자그레브를 평생 그리워했다. 죽어서도 동상이 되어 언덕 위에서 자그레브 시가지를 내려다본다. 일정을 핑계 삼아 떠나야 하는 나그네의 발길을 탓할 수밖에 없다.

천상의 자연 플리트비체를 만나다

자그레브에서 버스로 2시간 반 정도 가면 천상의 자연 플리트비체에 닿을 수 있다. 인간 세상에는 없을 것 같은 물길이 이어지는가 하면 에메랄드 호수가 나타나고, 어느새 폭포가 눈부신 물방울을 무차별로 뿜어 내린다. 그 속에 들어서면 아름다운 지구별에 있다는 것을 비로소 느끼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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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리트비체 호수 국립공원. 맑은 에메랄드빛 호수가 발길을 잡는다. 호수가 선명한 에메랄드빛을 띠는 것은 물속의 석회성분이 태양빛을 굴절시키며 반사하기 때문이다. 수심에 따라 그 빛깔도 달라진다. <제공: 리베르스쿨 출판사>

신비한 요정의 땅, 이름마저 예쁜 ‘얕은 물’ 플리트비체(Plitvice). 석회암과 백악이 수천 년 세월에 걸쳐 층층이 자연 댐을 만든 것도 모자라 녹색, 푸른색, 청록색 등 신비로운 물감까지 뿌려놓았다. 그것도 속을 훤히 내보이는 투명한 물감을. ‘초록빛 바닷물에 두 손을 담그면 파란 하늘빛 물이 되지요 어여쁜 초록빛 손이 되지요.’라는 가사의 동요가 그야말로 어울리는 곳이 바로 플리트비체다.

요정의 나라 플리트비체에 가까이 가기 위해 산을 넘고 내를 건너는 인고의 시간을 가질 필요는 없다.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플리트비체는 아름다운 전신을 보여주며 유혹한다. 들어서면 설수록 천변만화하니 몸을 가눌 수 없다. 길은 이어질 듯 끊어지고, 보여줄 듯 감추니 그 다음 장면이 궁금해서 참을 길이 없다.

수중의 물고기와 수초까지 투명하게 보이는 플리트비체의 호수. <제공: 리베르스쿨 출판사>

또 다른 세상 플리트비체에서는 마치 투명한 요정이 언제라도 튀어나올 것 같다. 밑바닥까지 속속들이 자신을 드러내는 호수와 그 속의 고목이 수초를 머금고 서로를 희롱한다. 요정이 물의 노래를 부르며 에메랄드빛으로 가려주려 하나, 찰랑거림마저 시시각각 심술쟁이 빛이 분해하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청정 플리트비체, 그 속에서 인간들은 잠시나마 탁한 눈을 씻어낸다.

밀카 테르니나 폭포. <제공: 리베르스쿨 출판사>

옆으로 고개를 돌리면 작은 폭포가 미친 듯이 다가와 이리저리 물을 뿜고, 고개를 들면 높은 폭포가 내려다보며 천상의 물길을 지상으로 이어준다. 안개처럼 흩뿌리는 폭포에서는 물을 맞고 싶은 충동에 휩싸이지만, 이내 마음을 가라앉혀주기라도 하듯 키 작은 폭포가 앙증맞게 몸을 흔들어댄다.

이 폭포는 바로 크로아티아 출신의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의 이름을 딴 ‘밀카 테르니나’ 폭포다. 명지휘자 토스카니니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아티스트’라는 찬사를 받은 밀카 테르니나(Milka Ternina, 1863~1941)는 플리트비체 국립공원 조성과 보호에 큰 역할을 하였고, 그녀의 활동 덕분에 공원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다.

잠시 숨을 돌릴 새도 없이 갈대 습지가 나타나 한없이 우수에 젖게 한다. 이어서 저지대에서 고지대로 가는 도중에 배가 다니는 유일한 호수인 코작(Kozjak)이 나타난다.

크로아티아 최대의 국립공원 플리트비체는 16개의 호수와 크고 작은 90여 개의 폭포, 갈색 곰을 비롯한 다양한 동식물 등의 가치를 인정받아 1979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이자 자연 유산으로 지정되었다.

플리트비체에서는 이파리 사이로 비집고 들어오는 빛이 물속에서 물감을 이리저리 풀어낸다. 빛·소리·향기·촉감이 하나가 되는 곳, 시간과 공간, 현실과 상상의 구분조차 무색해지는 곳, 그래서 이 모든 것조차 잊게 되는 곳, 그곳에서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이라는 말이 어쩌면 맞는 말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플리트비체에서는 샘과 돌은 물론 안개와 노을까지 하나가 된다. 안개가 내리면 어떠하며, 노을이 지면 또 어떠하리. 그 속에서 이미 호수는 폭포로 이어지고 연못은 물줄기가 되어 샘을 만들고 있는 것을.

보석을 두고 발길을 돌리는 마음이 가볍지는 않다. 하지만 마음속에는 도둑질한 보석을 담았다. 한 번씩 눈을 감으면 플리트비체가 다시금 눈에 아른거리며 가슴까지 싸하게 내려온다. 이게 천석고황인가. 기산에 은거한 당()의 전유암()은 고종이 찾아오자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이 고질병처럼 깊음을 ‘천석고황 연하고질( )’이라고 말하지 않았던가.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잠든 황제의 도시 스플리트

팍스 로마나로 불리는 오현제 시대(96~180)시대에 이어 로마 제국의 여러 속주에서 군인들이 들고일어나 50년간 26명의 황제가 등장했다 사라졌다. 284년 고대 로마를 통치하던 누메리아누스 황제가 페르시아 원정에서 돌아오던 중 새아버지에게 암살당하자, 부하 군단이 경호 대장이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Gaius Aurelius Valerius Diocletianus, 245~316)를 황제로 추대했다. 이로써 로마의 속주 달마티아의 천민 출신 군인이었던 디오클레티아누스가 군인 황제 시대(235~284)의 혼란을 끝내고 황제가 되었다.

그는 로마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난 것은 영토가 너무 넓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293년 로마 제국을 두 개의 제국으로 나누어 정제와 부제가 통치하도록 했다. 이와 같은 4분 통치제, 즉 사두정치가 시작된 이후 반란이 크게 줄었다.

스플리트에 위치한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출처: (CC) Ballota @ wikimedia commons>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스플리트에서 여생을 보내기 위해 295년부터 개인 궁전을 짓기 시작했다. 10년이 지난 305년에 갈레리우스를 동방의 정제로, 콘스탄티우스 클로루스를 서방의 정제로 임명하고 은퇴를 선언했다. 스스로 제위를 물려준 유일한 황제인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은퇴 후 고립된 황궁에서 채소를 키우며 만년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쾌적한 지중해성 기후, 눈부시게 아름다운 달마티아 해안, 이탈리아와 마주하고 있는 지리적 위치를 황제가 그냥 지나쳤을 리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넓은 도로가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을 동서남북 4구역으로 나누는데, 궁전 안에는 약 9,000명이 거주했다고 한다. 궁전 안에 복원된 200여 건물은 상점이나 카페로 활용되고 있다. 건축물에는 스플리트 주변 섬에서 구한 석회암과 그리스와 이탈리아에서 수입한 대리석을 사용했다. 심지어 이집트의 스핑크스까지 가지고 와서 궁전을 꾸몄다.

13, 14세기에 상업이 번창하면서 집중적으로 건물이 들어서자 궁전 서쪽 벽 바깥으로 구시가지가 미로처럼 퍼져나갔다. ‘성 돔니우스 대성당’의 종탑(60m)에 오르면 궁전과 빨간 지붕의 구시가지가 손에 잡힐 듯 내려다보인다. ‘스플리트의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과 역사 건축물’은 1979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성 돔니우스 대성당. <출처: (CC) Airin @ wikimedia commons>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제국의 안정과 개혁에 힘썼지만 로마 제국에서 가장 심하게 기독교를 박해한 황제로 유명하다. 기독교 측의 자료에 따르면 2년 동안 3천 명이 넘는 기독교 신자들이 순교했다고 한다. 이후 400년이 지난 7세기에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 내에 있는 황제의 영묘는 기독교 대성당으로 바뀌었고, 황제에 의해 죽임을 당한 성 돔니우스에게 바쳐졌다. 하지만 성 돔니우스 대성당에 대한 이야기는 여전히 미스터리다. 황제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는 천민 출신에서 황제로 올랐지만 사후 자신이 죽인 돔니우스에게 무덤 자리를 내줬다. 무릇 삶은 아이러니로 점철된다.

세상을 품으려면 두브로브니크로 가라

성벽에서 내려다 본 두브로브니크. <제공: 하나투어>

성채 도시 두브로브니크는 크로아티아 본토와 단절된 채 아드리아 해에 신기루처럼 떠 있다. 두브로브니크로 가려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거쳐야 한다. 두브로브니크로 가는 길을 막고 있는 2km의 해안 도시 네움 덕분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는 내륙국의 신세에서 벗어나게 된 셈이다.

‘아드리아 해의 진주’로 불리는 두브로브니크에는 7세기에 도시가 형성되었다. 발칸과 이탈리아를 잇는 해상무역으로 부를 축적한 이 도시 국가는 아드리아 해안에서는 유일하게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경쟁하였다.

두브로브니크는 두 마디의 명언을 남겼다. 기억해둘 만하다.

“세상의 돈을 모두 준다 해도 자유를 팔 수는 없다.” 구시가지에 있는 성 요한 요새(St. John’s Fortress) 입구에 새겨져 있는 문구다. 자유를 추구해서 그런지 이곳에는 왕이 없고 귀족, 시민, 기술자의 세 신분만 있었다.

“사적인 일은 잊고 오직 공사에만 철저하자.” 렉터 궁전(The Rector’s Palace) 총령 집무실에 있는 문구다. 14세기부터 선출된 총령의 임기는 1개월이다. 보수도 없다. 독재를 하려야 할 수도 없다. 재임 기간에는 궁 밖으로 나올 수도 없다. 오로지 국가를 위해 봉사하라는 의미다. 짐작하기 어려울 정도로 부유한 자유 복지 국가였던 두브로브니크. 오늘에도 되살릴 대목이 분명 있을 것이다.

두 번의 대지진과 수많은 외세의 침략이 이어지면서 도시 상당 부분이 파괴되었다. 17세기 두 번째 지진이 발생하기 전 플라차 대로 주변에는 화려한 건물이 즐비했다고 한다. 지금의 건물들은 지진 이후 복원한 것들이다. 필레 문에서 루자 광장까지 이어진 300m의 플라차 대로는 하루에도 여러 번 오가게 될 수밖에 없는 중앙로다. 끝에서 끝까지 걷는 데 10분도 채 걸리지 않는다.

짙푸른 아드리아 해, 중세의 붉은 고성, 그 붉고 푸른 마음을 닮은 사람들, 이 모든 것이 어우러져 하나의 그림이 되었다. 이 성채 도시에 반한 영국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 1856~ 1950)는 이렇게까지 말했다.

“지상에 진정한 천국이 있다면 바로 두브로브니크다.”

서문인 필레 문에서 동문인 플로체 문으로 향하는 성벽 투어에 나서면 2시간 내내 아드리아 해와 함께 할 수 있다. 성벽에 올라 해변의 시가지를 내려다보면 천상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는 기분이 든다. 아기자기한 골목길, 주홍색 지붕, 푸른 해변까지 한눈에 들어오면 마치 세상의 모든 아름다움을 한번에 안은 듯한 행복감에 젖지 않을 수 없다. 성벽 위를 걷다보면 바다에 떠 있는 거대한 배인 두브로브니크 호가 구름 따라 서서히 움직이는 것 같다.

유네스코는 바다 위에서 스스로 진주가 된 두브로브니크 구시가 전역을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진정 해변이 그립다면 지중해를 떠나 ‘아드리아 해의 진주’ 두브로브니크로 가야 한다.

마토스는 멀어진 사랑에 비탄했다. ‘멀어진 사랑, 언제, 언제나 돌아오려나.’ 마토스는 크로아티아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행자는 익숙해지면 떠나야 한다. 다만 죽기 전에는 꼭 가봐야 할 곳, 크로아티아를 가슴에 담고서. 마토스에게 얘기해주고 싶다. 회자정리 거자필반( )이다.

 

츨 처 : 크로아티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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