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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역사와 지리

나 그 네 2015. 7. 31. 18:31

영국의 역사와 지리 세계의 시간이 시작되는 영국 (1)

1 솔즈베리 - 13세기 중엽에 지은 솔즈베리대성당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북쪽 15km에 위치한 솔즈베리 평원에는 거석 기념물인 스톤헨지가 있다.
2 요크 – 로마 시대에 주요 군사 기지이자 행정 중심지였다.
3 마켓 보즈워스 – 30년에 걸친 장미전쟁의 마지막 전투가 일어난 도시. 1485년 보즈워스 전투에서 랭커스터 가문이 요크 가문을 격파하면서 장미 전쟁은 막을 내렸다.
4 노르망디 - 프랑스 북서부 영국 해협에 면한 지방.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1세가 노르만 왕조를 세웠다.

섬나라인 영국에는 예전에 천사들(Angels)이 살았다. 진짜 천사가 아니라 앵글 족(Angles)이 살았다는 뜻이다. 오늘날 영국의 그레이트브리튼 섬인 ‘브리타니아’에 게르만 민족인 앵글 족과 색슨 족이 정착했는데, 앵글 족이 중심 세력이었다. 그래서 이 섬은 ‘앵글 족의 땅(Angleland)’이라고 불렸다.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지금은 앵글랜드(Angleland)를 엥글랜드(England)라고 쓰고 ‘잉글랜드’라고 읽는다. 지금도 잉글랜드 사람을 ‘앵글로·색슨 족’이라고 부른다.

이 섬에는 잉글랜드 외에도 웨일스와 스코틀랜드가 있다. 섬 전체는 ‘그레이트브리튼(Great Britain)’이라고 부른다. 그레이트브리튼 옆에는 섬이 하나 더 있는데, 이 섬의 이름은 ‘아일랜드(Ireland)’다. 섬 동북부에 있는 북아일랜드는 영국에 속한다.

오늘의 영국은 역사의 결과물이다. 무릇 그렇지 않은 게 없겠지만 영국은 과거와의 연결 고리가 더욱 강하다. 영국의 공식 명칭 ‘그레이트브리튼과 북아일랜드의 연합 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에서도 복잡한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

입헌군주국 영국은 여전히 역사의 흐름 속에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역사적 배경을 모르면 영국의 인문 지리적 성격에 대해서도 알기 힘들다. 먼저 영국에 최초로 정착한 민족부터 만나 보자.

스톤헨지의 비밀을 캐다

선사 시대의 거석 기념물인 스톤헨지. 인공적으로 깎은 돌들이 계획적인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출처: (CC) Travail personnel @ wikimedia commons>

런던에서 서남쪽으로 130km 떨어진 월트셔 주의 도시 솔즈베리에서 북쪽으로 15km 정도 가면 영국 최초의 이주민들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스톤헨지가 웅대한 모습을 드러낸다. 하지만 이주민들이 누구인지, 왜 스톤헨지를 만들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다.

2008년 영국 본머스 대학 고고학 연구팀은 “방사성 탄소에 의한 연대 측정법에 근거해 스톤헨지가 기원전 2300년쯤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라고 발표했다. 2014년에는 영국 버밍엄 대학교 연구팀이 스톤헨지 주변에서 17개의 구조물과 수십 기()의 무덤을 발견했는데, 무덤의 일부가 별의 위치를 형상화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고조선의 건국 연대는 기원전 2333년이고, 1994년에 북한이 주장한 바에 따르면 기원전 2993년이다. 그리고 영국 전역에서 한반도의 고인돌과 비슷한 형태의 고인돌이 발견되었고, 일부 고인돌 덮개돌에는 별자리가 새겨져 있다. 한편 전 세계 고인돌의 절반 정도는 한반도에 분포되어 있다.

이를 근거로 일각에서는 스톤헨지가 한반도의 고인돌과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동아일보사에서 출간한 [고조선 사라진 역사]에는 2003년에 발견된 스톤헨지 주변 무덤에 묻힌 유골의 주인공들이 아시아 계열이라는 연구 결과가 소개되어 있다. 일부 학계에서는 한반도에서 고인돌이 만들어지기 시작해 유럽으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고인돌과 청동기 문명이 고조선 지역에서 유럽으로 확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보는 것이다.

사실 여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고고학은 늘 바뀌어온 학문이다. 다만 세상은 분리된 게 아니라 하나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세계 지리도 마찬가지다. 대륙판의 이동, 침식과 압력, 대기 대순환, 지구촌 동식물과 사람들, 이 모든 것을 따로 떼놓고 설명한다는 게 가능할 성싶지 않다.

영국의 시인이자 성직자 존 던.

런던 출신 시인이자 성직자인 존 던(John Donne, 1572~1631)은 세계 지리를, 아니 세상의 본질을 [누구를 위해 종을 울리나]에서 명징하게 표현했다.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전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다.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진다.
모래톱이 씻겨 가도 마찬가지다.
그대의 친구나 영지()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다.
누구의 죽음이라도 나를 감소시킨다.
나는 인류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해 종이 울리는지를 알려고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

켈트 족과 앵글로 · 색슨 족의 결투

기원전 4세기경 켈트 족 일부가 로마 인에게 쫓겨 갈리아(현재의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서부, 라인 강 서쪽의 독일을 포함하는 지방)에서 영국으로 건너와 선주민을 밀어내고 정착했다. 기원전 1세기 로마의 장군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갈리아 지방의 켈트 족을 정벌하였고, 이후 로마군은 잉글랜드까지 진출해 약 350년 동안 섬을 지배했다. 잉글랜드 북부의 요크는 로마 시대에 북쪽 변경의 방위 거점이었다. 당시 로마 인은 그레이트브리튼 섬을 ‘브리타니아’, 그곳에 사는 켈트 족을 ‘브리튼 족’이라고 불렀다.

4세기 말경 훈 족의 침입을 받은 게르만 족이 대이동을 시작하면서 게르만 족의 일파인 앵글로․색슨 족이 대륙에서 브리타니아로 건너갔다. 이 여파로 5세기경 로마군은 영국에서 철수했고 켈트 족은 스코틀랜드·웨일스·아일랜드·유럽 대륙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19세기 중반 수많은 아일랜드 인들이 신대륙을 향해 위험을 무릅쓰고 고향을 떠났다.

대륙으로 쫓겨 간 켈트 족은 ‘작은 브리튼’을 의미하는 프랑스의 브르타뉴에 정착했다.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는 앵글로․색슨 족과 1,000년 넘게 전쟁을 벌였지만 결국 영국에 합병되고 말았다.

아일랜드는 섬이라는 특성상 켈트 족의 원형이 유럽에서 가장 잘 유지되고 있는 나라다. 아일랜드의 민족주의자들은 유대인이 시온주의를 내세우는 것처럼 켈트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아일랜드에는 가톨릭교도들이 살고 있지만 영국령에 속하는 북아일랜드에는 영국에서 건너온 성공회 교도들이 거주하고 있어 두 세력 간에 갈등이 끊이지 않고 있다.

19세기 중반에는 아일랜드에 대기근이 발생해 많은 사람들이 신대륙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때 농부 패트릭 케네디도 신대륙으로 건너갔고, 그의 후손 J. F 케네디는 켈트 족인 아일랜드 계 최초로 미국의 대통령이 되었다. 켈트 족의 신화 ‘아서 왕 이야기’에 나오는 아서 왕도 6세기경 앵글로․색슨 족과의 싸움을 여러 차례 승리로 이끈 켈트 족이다.

왜 영국과 프랑스는 앙숙이 되었나

7세기경 앵글로․색슨 족은 런던 부근에 7왕국을 건설했으나, 1066년 프랑스 땅에 있던 노르망디 공국의 윌리엄 1세가 도버 해협을 건너가 앵글로․색슨 왕조를 무너뜨리고 노르만 왕조를 세웠다. 노르망디 공국은 노르만 족의 지도자 롤로가 프랑스를 압박하여 샤를 3세로부터 받아낸 봉토(센 강 하류 지역)에 세운 공국이었다.

이렇게 해서 영국에는 선주민, 켈트 족, 라틴 족 로마 인, 앵글로․색슨 족, 노르만 족 등 다양한 민족이 서로 섞이게 됐다. 영국에서 노르만 왕조가 시작된 후 그들의 본거지인 노르망디는 영국의 지배를 받다가 1259년 파리 조약에 의해 프랑스 왕국에 정식으로 귀속되었다.

오를레앙 포위전에서 전투를 지휘하는 잔 다르크.

1328년 프랑스 왕 샤를 4세가 후계자 없이 죽자 당시 잉글랜드 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는 자신의 어머니가 샤를 4세의 누이라는 점을 내세워 자신이 프랑스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우여곡절 끝에 샤를 4세의 사촌인 필리프 드 발루아가 왕위에 오르게 되었다.

왕위 계승권 분쟁이 단초가 되어 양국은 기나긴 백년 전쟁(1337~1453년)을 치렀다. 에드워드 3세가 337 박수를 치며 전쟁을 독려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전쟁이 시작된 연도를 기억하기 쉬울 것이다. 처음에는 영국이 유리했으나, 영국 내에서 왕권을 둘러싸고 혼란이 일어난 틈을 타 프랑스의 샤를 7세가 영토를 거의 회복했다. 바로 이때 프랑스의 영웅 잔 다르크가 활약했다.

백년 전쟁 직후 영국에서는 붉은 장미를 문장()으로 삼은 랭커스터 가문과 흰 장미를 문장으로 삼은 요크 가문 사이에 왕위 쟁탈전이 본격화되었다. 랭커스터 가의 헨리 7세가 마켓 보즈위스에서 요크 가를 물리침으로써 장미전쟁(1455∼1485)을 종식시켰고, 이어서 요크 가의 엘리자베스를 왕비로 맞아들여 튜더 왕조를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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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림 전쟁 중 러시아 요새를 향해 대포를 쏘는 영국군.

영국의 간호사 나이팅게일. 크림 전쟁 당시 야전병원장으로 활약했다.

영국과 프랑스는 오랫동안 앙숙으로 지냈으나 러시아의 남진 정책을 견제하기 위해 1853년 크림 전쟁에서 함께 오스만 제국을 지원했다. 전투보다 전염병이 더 기승을 부렸던 이 전쟁에서는 영국의 나이팅게일이 활약했다. 편의상 백의의 천사 나이팅게일이 하얀 크림을 ‘오셨다(853)’라고 기억해두자.

왜 월드컵에는 영국 국가 대표 팀이 없을까

미국 국기에는 별(, Star)과 희고 빨간 줄(, Stripe)이 들어가 있어 국기를 성조기(, Stars and Stripes)라고 부른다. 태양이 그려져 있는 일본 국기는 일장기()라고 한다. 또 프랑스 국기에는 자유, 평등, 박애를 의미하는 파란색, 하얀색, 붉은색이 들어 있어 삼색기()라고 한다. 우리나라 국기에는 태극 문양이 있어 태극기()라고 한다. 그렇다면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Union Jack)은 어떤 모양을 하고 있을까?

영국의 국기, 유니언 잭.

영국 국기에는 결합 문자처럼 십자가 세 개가 한데 어우러진 문양이 그려져 있다. 그중 하나는 잉글랜드의 수호성인() 성 조지의 십자가이고, 다른 하나는 스코틀랜드의 수호성인 성 앤드류의 십자가이고, 나머지 하나는 아일랜드의 수호성인 성 패트릭의 십자가이다.

유니언 잭의 탄생 과정.

1606년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가 통합되면서 두 나라의 국기를 합친 최초의 유니언 잭이 탄생했다. 당시 웨일스는 이미 잉글랜드에 통합되어 있었기 때문에 웨일스의 국기는 빠져 있다. 1801년에는 아일랜드도 통합되면서 아일랜드의 국기까지 더해 총 3개의 국기를 합친 유니언 잭이 완성되었다. 이것이 바로 현재 영국 국기인 유니언 잭이다. ‘잭’은 사람 이름이 아니라 뱃머리에 세우는 ‘국적을 나타내는 깃발’을 의미한다. 따라서 유니언 잭은 ‘통합된 나라’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2014년을 기준으로 과거 영국의 자치령이었거나 식민지였던 영국 연방(Commonwealth of Nations)은 53개국이다.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등 다수의 국가들이 영국 국왕을 국가 원수로 모시고 있다. 하지만 영국 연방 구성국의 대부분이 공화국이 되면서 정치․경제적 연결 고리는 느슨해졌다.

월드컵 대회에서 우리나라의 붉은 악마는 태극기를, 미국인은 성조기를, 일본인은 일장기를 흔들었다. 하지만 유니언 잭은 아무리 눈을 크게 떠도 보이지 않았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연방이 각각 따로 출전했기 때문이다.

축구 스타 데이비드 베컴과 라이언 긱스는 각각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국가 대표로 활약했다. 두 선수는 영국이라는 한 나라에 살면서도 다른 팀으로 출전한 것이다. 1888년부터 시작된 영국 연방의 프로 리그가 유럽 전체 리그를 압도할 정도로 맹활약하였다. 그 덕분에 국제 축구 연맹은 영국의 4개 연방국을 모두 개별 회원국으로 받아들였고, 두 선수는 다른 유니폼을 입고 필드를 뛰었던 것이다.

습한 편서풍이 영국 신사를 탄생시키다

안개가 짙게 낀 런던. <출처: (CC) mattbuck @ wikimedia commons>

영국의 역사와 국가 구성이 복잡한 것처럼 영국의 날씨도 변화무쌍하다. 화창하게 햇볕이 드는가 하면 갑자기 비가 내리거나 짙은 안개가 깔리기도 한다. 그래서 어쩌다 화창한 아침을 맞이하면 사람들이 기쁜 마음에 “굿 모닝(Good Morning).”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굿 모닝’이 아침 인사말이 된 것은 영국의 궂은 날씨 때문이다.

영국 기후가 변덕스러운 것은 편서풍과 관련이 있다. 영국에는 일 년 내내 습윤한 편서풍이 불어오기 때문에 한여름에도 기온이 크게 올라가지 않고 연중 비가 고르게 내린다.

습한 공기는 마른 공기에 비해 온도 변화가 적으므로 연교차도 적다. 그래서 여름에는 상대적으로 서늘하고 겨울에는 상대적으로 따뜻하다. 이런 기후는 영국, 프랑스 등 남․북위 40~60°사이에 위치한 대륙 서안에 발달하기 때문에 서안 해양성 기후라고 부른다.

서안 해양성 기후는 남․북위 30~40°의 지중해성 기후 바로 위쪽에 나타난다. 여름에 아열대 고압대가 올라오더라도 습한 편서풍의 영향을 받아 일 년 내내 고르게 비가 온다.

날씨가 서늘하고 자주 비가 오기 때문에 영국에서 신사가 되려면 우산, 모자, 버버리 코트를 갖춰야 한다. 영국 신사는 매너 때문에 탄생한 게 아니라 날씨 때문에 탄생한 것이다.

런던은 안개에 젖어

대기 오염으로 인해 발생한 스모그가 덮친 런던. 넬슨 기념비가 뿌옇게 보인다. <출처: (CC) N T Stobbs @ wikimedia commons>

파리가 패션의 도시라면 런던은 안개의 도시이다. 그런데 런던의 안개가 항상 낭만적인 것은 아니다. 1952년 겨울의 어느 날, 런던의 기온이 급격히 떨어졌다. 하늘은 구름으로 가려졌고, 안개는 대지를 자욱하게 뒤덮었다. 구름과 안개가 햇빛을 차단하여 낮에도 앞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게다가 습도가 80%를 넘을 정도로 매우 습했다.

당시 영국은 석탄을 연료로 사용했는데, 석탄을 태우면서 배출된 연기가 대기 중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안개와 함께 지면에 머물렀던 것이다. 연기와 짙은 안개가 합쳐져 스모그가 형성됐고, 이로 인해 1만 2,000여 명의 런던 시민이 호흡 장애와 질식 등으로 목숨을 잃기까지 했다.

런던에는 왜 안개가 자주 끼는 것일까? 바로 영국의 먼 바다를 흐르는 해류 때문이다. 난류인 멕시코 만류와 한류인 북극 해류는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있는 도버 해협에서 정면으로 마주치는데, 멕시코 만류로 만들어진 따뜻하고 습한 공기가 북극 해류에 의해 차가워지면서 짙은 안개가 발생한다. 이 안개가 갈 곳을 잃고 결국에는 런던 하늘을 뒤덮고 마는 것이다.

런던 스모그 사건 이후 영국은 1956년에 대기정화법을 통과시켜 대기 상태를 개선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고, 그 결과 안개 속의 오염 물질이 조금씩 사라지기 시작했다. 혹시 안개 속 오염 물질이 사라지면서 런던 골목의 회색 안개 속을 거닐던 명탐정 셜록 홈스도 안개처럼 사라진 것은 아닐까?

멕시코 만류, 황금 어장도 만들다

멕시코 만류가 영국에 안개만 가져다주는 것은 아니다. 항해 시간과 어장 형성에도 영향을 미친다.

미국의 정치가이자 과학자인 벤저민 프랭클린은 런던을 방문했을 때, ‘왜 영국에서 미국으로 우편을 보내는 시간이 고래잡이배가 미국에서 영국으로 가는 시간보다 2주나 더 걸릴까?’라는 의문을 품었다. 프랭클린은 미국 선박들의 항해 일지를 조사했다. 그 결과 북대서양을 횡단하며 미국에서 영국으로 흐르는 멕시코 만류가 원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멕시코 만류의 흐름. <출처: (CC) RedAndr @ wikimedia commons>

카리브 해의 더운물은 북쪽으로 올라가 플로리다 해협을 빠져나온 후 다시 북쪽으로 흐른다. 이때 흘러가는 바닷물의 양은 전 세계 강물 양의 25배나 된다. 이 멕시코 만류는 남쪽으로 내려오는 래브라도 해류와 만나 북서 대서양 어장을 이룬다.

대구와 청어가 많이 잡히는 북서 대서양 어장(뉴펀들랜드 주변 해역)은 북서 태평양 어장, 북동 대서양 어장(북해 수역), 북동 태평양 어장(알래스카)과 함께 세계 4대 어장에 속한다.

‘아메리칸 브렉퍼스트’의 원조, 영국

서안 해양성 기후의 영향으로 영국에는 일조량이 적고 기온도 낮아 농작물을 재배하기가 쉽지 않다. 그래서인지 영국 음식은 다른 유럽 국가들의 음식에 비해 맛이 없다는 평을 듣는다.

영국의 요리가 저평가 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18세기 산업 혁명으로 시간이 부족해진 도시 노동자들이 간편한 음식을 찾으면서 전통적인 요리 방법이 사라지게 됐고, 세계 대전을 두 차례 겪으면서 요리가 더욱 간소화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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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아침, 아메리칸 브렉퍼스트.

유럽 대륙의 아침, 콘티넨털 브렉퍼스트. <출처: (CC) Rama @ wikimedia commons>

영국인은 아침을 많이 먹고 점심을 간단하게 먹는 편이다. 영국의 아침 메뉴는 계란, 베이컨, 소시지, 삶은 콩, 익힌 토마토, 과일, 케이크, 커피, 주스 등으로 이뤄져 있다. 영국은 날씨가 좋지 않아 사람들이 일찍 자리에 들고 이른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하다 보니 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하루를 시작한다.

작가 서머싯 몸은 영국에서 잘 먹는 유일한 방법으로 ‘아침을 하루 세 번 먹는 것’이라는 우스갯소리를 했다. 영국의 풍성한 아침은 18세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아메리칸 브렉퍼스트’가 되었다.

이에 반해 프랑스․이탈리아 등 유럽 대륙은 날씨가 좋아 사람들이 밤늦게까지 와인과 요리를 즐긴다. 늦잠을 자는 경우가 많아 아침을 비교적 늦게 먹는데, 커피․시리얼․주스․토스트 정도로 가볍게 때운다. 이를 ‘콘티넨털 브렉퍼스트‘라고 한다. 부실한 아침은 점심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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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대표 요리, 피시 앤드 칩스. <출처: (CC) RobinMiller @ wikimedia commons>

18세기 영국에서 시작되어 오늘날 전 세계인이 즐기는 샌드위치.

영국인은 샌드위치와 ‘피시 앤드 칩스(Fish and Chips)’를 즐겨 먹는다. 길게 썬 감자튀김을 영국에서는 ‘칩스’라고 부르는데, 미국에서는 ‘프렌치프라이’라고 부른다. 샌드위치는 18세기 샌드위치 백작이 카드놀이를 하면서 먹으려고 만든 음식이다. 훗날 샌드위치는 영국인뿐 아니라 미국인의 일상적인 메뉴가 됐다.

영국인은 차도 즐겨 마신다.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가 차 재배지여서 다양한 차가 영국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다. 격식을 갖춘 영국인은 마치 식사를 하듯이 오전과 오후 시간을 정해 놓고 차를 마실 정도다.

영국인이 차를 즐기게 된 것은 결국 식민지였던 인도의 날씨 덕분이다. 인도의 아삼 지방은 남서 계절풍의 영향으로 강수량이 많고 배수가 양호해 세계 최대의 홍차 생산지가 되었다. 우리가 홍차를 마실 때 지금쯤 아삼 지방에서는 비가 내리고 있을지 모른다. 또한 영국의 아침 식사는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국의 아침 식사에 영향을 주었다. 이렇듯 음식 문화조차 대륙을 넘나든다.

영국의 스톤헨지가 영국만의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현해탄의 물이 도버 해협의 물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없다. 육지, 바다, 기후, 역사, 음식 어느 하나 연관되지 않은 게 없고 나에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것도 없다. 세상 모든 것은 결국엔 서로 물고 물려 있다.

존 던이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다.”라고 말한 게 너무 앞서 나간 생각은 아닐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생각하는 것이 가능한 동안’ 대륙의 한 조각을 잠시 빌려 쓰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런 후 우리는 대륙으로, 대양으로 돌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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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    영국의 역사와 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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