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년도 제 31차 산행]
1. 일자: 2009. 07. 25~ 26 (1박 2일)
2. 날씨: 첫날 비, 둘째 날 흐림. 이틀 내내 가시거리 불량
3. 대상: 소년대(영랑대)와 독바위(甕巖) / 경남 산청군 삼장면 소재
4. 코스: 치밭목-하봉-새봉-새재 (도상15㎞, 13시간 40분 소요)
윗새재마을(15:20)-무재치기폭포-치밭목산장(18:20~09:40/박)-하봉(11:15~12:05)-소년대(12:15~13:50/점심)-말봉(15:00~15:20)-청이당고개(16:00~16:20)-산청독바위(17:00~17:30)-새봉(18:00~18:15)-새재(19:20)-윗새재마을(20:20)
5. 후기
지리산의 장엄은 천왕봉의 높이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넓이와 깊이에서 나온다. 전북의 남원, 전남의 구례, 경남의 함양, 산청, 하동 등 3도 5군이 머리를 맞댄 곳으로 그 면적이 자그마치 485㎢에 달한다. 지리산 연봉이 이루어낸 계곡의 깊이를 우리는 가늠치도 못한다.
산은 지리산이다. 지리산을 좋아하는 분은 채색 장식화보다도 수묵 담채화를 좋아할 것이다. 그런 분이라면 예쁜 분원사기보다도 금사리가마의 둥근 달항아리를 더 좋아할 것이다. 그런 분이라면 바그너나 모짜르트보다도 바흐를 좋아할 것이다. 그런 분이라면 톨스토이의 소설을 책상에 앉아 줄을 치며 읽을 것이다. 하나의 안목은 다른 안목에도 통한다. 산은 지리산이다.
지인들과 1박 2일 일정으로 지리산을 찾았다. 지난달 말 추성에서 두류능선 말봉(?)에 올라 국골로 내려온 뒤 딱 한 달 만이다. 매월 두 번 정도 지리에 든다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다. 이번에는 그 반대편인 대원사 쪽에서 들어갔다. 이틀간 일정이지만 하루 산행코스에 불과했다. 산중 야영을 겸한 원점산행을 생각했는데 장마철 오락가락 하는 비 때문에 야영은 접고 산장을 이용했다. 늘 한적하고 예약이 불필요한 치밭목산장이 적격이다. 따라서 치밭목을 경유하는 코스로 국한하였으며, 첫날은 치밭목이 종점이므로 하루 산행코스라고 말한 것이다.
오전 8시쯤 부산을 떠나면 늦어도 오후 2시 전에는 치밭목에 도착할 것이다. 그 때부터 하는 일은 뻔하다. 바로 잔 돌리는 일. 혼자도 아니고 게다가 비까지 온다고 하니 도저히 불감당이다. 해서 저녁 때쯤 산장에 도착하기로 하고 그 사이 문익점 선생의 목화 시배지와 폐사된 단속사지, 남명 선생의 산천재와 묘소, 덕천서원 등을 탐방하는 것으로 첫날 일정을 잡았다.
첫날.
8시 20분, 집결지인 회사 정문을 떠나 수정산과 백양산 두 개의 터널을 잇따라 빠져 나와 낙동강을 건너는데 차창엔 빗방울이 맺히기 시작한다. 건너편 김해 신어산과 장척산 일대는 짙은 구름이 몰려있고 낙동강은 황토색이다. 그야말로 장마철 풍경 그대로다. 잠시 후 남해고속도로로 갈아탄다. 휴가철 주말인데도 도로는 막힘이 없다. 김해들녘을 지날 무렵 일행에게 탐방할 유적지와 산행코스에 대한 이틀간의 일정을 설명하기 시작하여 의령∙군북IC에 다다랐을 때 끝마친다.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한 탓이다.
고속도로를 벗어나자 국도변의 서정적인 풍경이 눈 앞에 펼쳐진다. 지리산을 들 때 의령-단성 간 도로를 자주 이용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성에 들어서자 비로소 장날임을 알았다. 이곳에도 여느 고장과 마찬가지로 5일장이 선다. 5와 0으로 끝나는 날이다. 4와 9는 덕산장날이다. 장터의 역동성이 예전만 못한 듯하다. 양조장 앞에 차를 세운다. 주인장은 배달을 나갔는지 문이 굳게 닫혀있다. 일행은 장터구경 가고 나는 주인장 오기를 기다린다. 단성막걸리로 남명 선생 묘소에 잔을 드리기 위해서다. 반 시간여 기다린 끝에 막걸리 4통을 손에 넣고 할인혜택도 받았다. 기다린 덕분이다.
양조장을 나와 덕산방면으로 500m쯤 차를 몰면 사거리가 나온다. 우측은 단성IC 진입로이며, 직진하여 500m 가량 더 가면 삼우당 문익점 선생을 모신 사당과 목화 시배지가 오른편에 있다. 고려시대 중국에서 돌아오는 길에 목화씨를 붓 뚜껑에 넣어왔다는 일화는 익히 아는 사실이다. 선생의 화상 앞에서 목례를 올리고 꽃이 만발한 목화밭을 둘러본다. 그리고 막걸리 한 통을 비우고 나서 단속사지로 떠난다.
고갯마루를 넘어 다리 하나를 건너면 제법 너른 들이 나오고 오른편에 묵은 동네가 보인다. 건축학도들의 필수 답사처라는 남사마을이다. 전통적인 양반가옥이 요호부민의 저택에 이르러 어떻게 과장되고 변형되었는가를 살필 수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근세에는 법조인이 끊이지 않고 꾸준하게 배출되는 마을이기도 하다.
여기서 지리산 쪽으로 조금 가다 보면 오른편에 다리(호암교) 하나가 걸려있다. 웅석봉에서 발원한 물이 이 다리 밑을 흐르는데 청계, 운리, 계당, 용두, 입석, 그리고 남사를 지나 경호강에 몸을 섞는다. 이 다리에서 6㎞정도 들어가면 단속사지가 나온다. 용두에서 계당으로 올라서는 고개를 용두고개라고 하는데, 그 고갯마루에서 왼쪽 계곡변 암석지대에 최치원이 썼다는 광제암문(廣濟嵒門)이란 각자가 음각돼 있다.
1489년(성종20) 4월 14일부터 4월 28일까지의 보름 동안 김일손(1464~1498)이 정여창 등과 함께 천왕봉을 등정하고 쓴 <두류기행록>에 단속사지와 광제암문에 관한 내용은 이렇다.
『단성에서 서쪽으로 15리를 가서 꼬불꼬불한 길을 지나니, 넓은 들판이 나왔다. 맑고 시원한 냇물이 벌판 서쪽으로 흘러 들었다. 암벽을 따라 북쪽으로3~4리를 가니 계곡의 입구가 있었다. 계곡에 들어서니 바위를 깎은 면에 ‘廣濟嵒門 ‘이란 네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글자의 획이 힘차고 예스러웠다. 세상에서는 최고운(崔孤雲)의 친필이라고 전한다. 5리쯤 가자 대나무 울타리를 한 띠집과 피어 오르는 연기와 뽕나무 밭이 보였다. 시내 하나를 건너1리를 가니 감나무가 겹겹이 둘러있고, 산에는 모두 밤나무뿐이었다. 장경판각(藏經板閣)이 있는데 높다란 담장으로 빙 둘러져 있었다. 담장에서 서쪽으로 백 보를 올라가니 숲 속에 절이 있고, ‘智異山斷俗寺’(지리산단속사)란 현판이 붙어 있었다.
<중략>
행랑을 따라 돌아서 건물 아래로 내려가50보를 나아가니 누각이 있었는데 매우 빼어나고 예스러웠다. 누각에서 앞뜰을 내려다보니 매화나무 두 그루가 있는데 ‘정당매’(政堂梅)라고 전한다. 강문경공의 조부 통정공이 젊은 시절 이 절에서 독서할 적에 손수 매화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뒤에 급제하여 벼슬이 정당문학에 이르자, 이 이름을 얻게 되었다.
<중략>
절간이 황폐하여 승려가 거처하지 않는 방이 수백 칸이나 되었다. 동쪽 행랑에는 석불500구가 있는데, 하나하나 둘러보니 그 모양이 각기 달라 그 기이함을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 단속사지 삼층석탑(쌍탑) 중 서탑.
* 정당매. 남사의 원정매, 산천재의 남명매와 더불어 산청삼매로 불린다.
이로 미루어볼 때 단속사가 언제 폐사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엄청 큰 절이었던 것만은 분명하다. 용두고개에서 계곡으로 내려가 암벽에 새겨진 ‘廣濟嵒門’ 네 글자를 확인하고 운리 단속사 터로 향한다. 청계로 올라가기 직전 왼쪽으로 부서진 당간지주와 한 쌍의 삼층석탑(보물72, 73호)이 보인다. 바로 여기가 단속사지다. 쌍탑 뒤편으로 몇 채의 농가가 있고, 앞 느티나무 아래는 평상이 노였는데 그 위로 천막이 둘렸고, 좌측 탑의 기단에는 아이들이 올라가 놀고 있다. 탑 뒤의 농가 쪽으로 가서 정당매와 정당매각을 돌아보고 울창한 왕죽이 빼곡히 들어앉은 대밭은 뒤로한다.
다시 쌍탑으로 나와 느티나무 밑 평상에서 점심상을 차리고 막걸리 한 잔 하면서 쌍탑을 찬찬히 바라본다. 유홍준의 표현을 빌리면 “아담한 크기에 정연한 비례감각으로 더없이 상큼하고 아담하다. 지붕돌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리며 흘러 내리다가 귀끝을 가볍게 올린 자태가 여간 맵시 있는 것이 아니다. 작아도 야무지게 만들어낸 이 솜씨는 결코 석가탑의 매너리즘이 아니라 그것의 계승이라고 해야 옳다. 지리산 이 깊은 산골짝에 와서 이렇게 어여쁜 탑을 본다는 것은 커다란 안복(眼福)이다.”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점심을 먹고 마을 어르신과 잠시 동안 환담을 나누다 단속사지를 떠난다. 다시 용두고개로 나와 용두교를 건너 표밭재(불령)을 넘는다. 이 고개는 어릴 적 큰집에 갔다가 외가에 들리러 갈 때 넘었던 고개로 지금은 산뜻한 2차선 포장도로다. 백운동계곡이 덕천강에 합해지는 태소마을 앞에서 덕산방면 국도로 갈아탄다. 여기서 덕산까진 4㎞ 남짓. 차창 밖으로 흐르는 덕천강을 바라보니 비로소 지리산에 들었다는 실감이 난다.
거림이나 중산리나 대원사를 통해 천왕봉에 오르려면 반드시 덕산을 거쳐야 한다. 덕산은 지리산으로 들어가는 마지막 큰 마을이다. 장터가 있고 시천면 소재지이기도 한 이곳에 남명 조식(1501~72)의 서재였던 산천재(山天齋), 남명의 묘소, 남명을 모신 덕천서원이 있다. 다음은 남명 선생에 대해 책 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남명 선생은 퇴계 이황과 동갑으로 당대 도학(道學)의 쌍벽이었다. 누구의 학문이 더 깊고, 누구의 인품이 더 고고했는가를 따지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다. 지금 우리가 남명 선생을 기리는 것은 진정한 처사이기 때문이다. 옛말에, 왕비를 배출한 집안보다도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이 낫고,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보다도 문묘 배향자를 낳은 집안이 낫고, 문묘 배향자를 배출한 집안보다도 처사를 배출한 집안이 낫다고 했다. 그런 처사였다.
남명은 1501년 경상우도 합천 삼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문과에 장원급제하자 서울로 올라가 살았다. 그는 과거공부보다도 전통유학과 제자백과, 노장사상을 두루 섭렵하면서 학문의 폭을 넓혔다. 그런 중 기묘사화로 인해 작은아버지인 조언경이 조광조일파로 몰려 죽고, 아버지도 파직되고 이내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내려와버렸다. 그리고 처가인 김해 탄동으로 옮겨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이리하여 30대 후반에는 “경상좌도에 퇴계가 있고 우도에 남명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고 한다.
남명의 학식이 높아지자 회재 이언적 등 여러 사람들이 그를 왕에게 추천하여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회갑을 맞아 번잡한 김해를 떠나 지리산 천왕봉 아래 덕산에 자리잡고 산천재를 짓고서 오직 학문과 제자양성에 전념하였다. 덕산복거(德山卜居)와 불출사는 결코 죽림칠현 같은 은일자의 모습도 아니고 공자의 제자 안회 같은 고고함의 경지도 아니었다. 그는 결코 세상을 외면해버린 은둔자가 아니었다. 다만 시세가 탁족이나 하고 있음이 낫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
덕산에 복거한지 5년이 되었을 때 다시 판관이란 벼슬이 내려지고 조정에서 불렀다. 문정왕후가 명종을 섭정하고 있을 때였다. 이에 남명은 한양으로 올라가 사정전에서 임금을 만나 치란(治亂)에 관한 의견과 학문의 도리를 표하고는 “임금이 성년이 되었으니 친정을 해야지 아녀자에게 맡겨서는 안됩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덕산으로 돌아왔다. 문정왕후를 아녀자라고 한 것은 훗날 문젯거리로 되었다. 그는 이처럼 강직하고 도전적인 면까지 있었다. 산천재에서 곽재우, 김우홍, 최영경, 정구, 정인홍 같은 뛰어난 인물을 배출하고72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영정에는 처사라고 적혀있다. 훗날 율곡 선생은 “근래의 선비 중 끝까지 지조를 지키고 천길 낭떠러지 같은 기상으로 세상을 내려다본 이로는 남명만한 분이 없다”고 했다.
산천재와 새로 조성된 남명문화원을 돌아보면서 선생의 뜻을 새겨본다. 산천재 뒷동산에 모셔져 있는 묘소참배는 비 때문에 취소하고, 덕천서원 또한 시간관계로 다음을 기약한다. 덕천서원은 양단수, 즉 대원사 물과 중산리 물이 합해지는 곳 바로 위에 있다.
* 산천재.
나는 1982년 산천재에서 이틀 밤을 묵으면서 묘소에 참배했었고 덕천서원은 그 후에 들린 적이 있었다. 단속사지와 목화 시배지는 그 전에 종형들과 다녀온 바 있다. 그러나 광제암문이란 각자는 이번에 처음 확인했는데 할아버지가 직접 써 놓았다는 각자는 확인하지 못했다. 부모님의 고향은 각각 용두와 태소마을이다. 두 분 모두 동부 지리산 웅석봉 자락에서 태어나신 것이다.
오후 3시쯤 들머리인 윗새재마을에 도착하자 빗방울이 제법 굵어진다. 출렁다리 밑으로 몸집을 불린 물이 힘차게 흘러간다. 야트막한 산마루 두어 개를 감돌자 제법 넉넉한 계곡이 나오는데 비둘기봉에서 발원한 신밭골의 주 골짝이다. 계곡을 건너 너덜지대를 지나면서 서서히 오르막이 시작된다. 치밭목능선을 넘어 산죽을 빠져나오니 장당골 상류인 삼거리다. 대원사-치밭목-천왕봉의 족보 있는 길에 들어선 것이다. 배낭을 내리고 간식을 먹는다.
장당골은 지리산의 광대함과 비극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깊은 골짜기다. 때문에 피란과 비극의 역사 현장이 된 것이다. 1862년 산청일대 농민항쟁과 그에 이은 동학혁명에 실패한 사람들이 화전을 일구며 살았다. 일제강점기에는 의병의 은신처로, 6·25사변 때는 빨치산의 은거지가 되기도 했다. 1963년 11월 마지막 빨치산인 이홍이(사살)와 정순덕(여·총상입고 생포)이 잡힌 곳도 장당골 인근인 내원골이다.
여기서 무재치기폭포는 700m 위에 있다. 계류소리를 들으며 쉬엄쉬엄 올라간다. 물소리가 제법 크게 들리는 곳에 걸린 목교를 건너 오른쪽 묵은 길을 따라 올라가 무제치기폭포에 도착한다. 이 폭포는 지리산에서 보기 드문 폭포다. 3단의 물줄기가 바위에 부딪치면서 만들어진 물안개가 맑은 날 아침이면 무지개가 잘 걸린다고 한다. 그래서 이름도 무제치기, 즉 무지개 치기 폭포라는 것이다. 이름에서 자연의 신묘함이 그대로 묻어난다. 수량은 예상보다 덜하지만 그래도3단 폭 위에서 떨어지는 물줄기가 장관이다. 폭포 바로 밑까지 다가가 튕기는 물보라에 몸을 맡겼다가 돌아선다.
* 무제치기폭포.
이정표가 선 곳에서 나무계단이 이어진다. 이 계단을 올라서서 오른쪽으로 30m 지점에 무제치기폭포를 내려다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아래서와는 달리 보는 맛이 색다르다. “숲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느낌이 든다”는 사람도 있다. 한편 추락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전망대에서 폭포를 감상하고 오름짓을 이어간다. 물길을 지나 비탈에 들어설 무렵 왼편으로 나리꽃 무리가 반긴다. 정비된 나무계단을 올라서니 치밭목산장이다. 윗새재 마을을 출발한지 3시간만이다.
산장에 들어선다. 민 선생은 출타 중이었고 처음 보는 사람이 관리를 맡고 있었다. 무뚝뚝한 인상이라 신경이 쓰였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차츰 나아진다. 취사장엔 만원이다. 저녁 먹을 일도 걱정이다. 산중에 비가오니 이래저래 불편하다. 두 시간이 지나서야 겨우 한 모퉁이를 차지한다. 얼마나 잔이 돌았을까 밖에서 누가 별이 떴다고 한다. 자연스레 야외 테이블로 옮긴다. 그리고 옆집에서 지원받은 보드카로 절정의 분위기가 이어진다. 두어 번 별똥별이 떨어진 하늘에는 무수한 별들로 가득하다.
다음날.
눈 뜨니 밖이 훤하다. 옆자리에 누었던 두 젊은이는 이미 떠나고 없다. 4시에 출발한다고 했으니 지금쯤 상봉에 올랐을 것이다. 그들은 부산 모 대학교 산악부 출신이라고 했는데 차분하고 조용했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내가 배울 점이 있었다. 무탈한 산행을 바라면서 못다한 작별을 대신한다. 저녁에 해둔 밥이 그대로 남아 있어 된장국만 끓여 아침을 해결하고 산장을 나서니 벌써10시가 다돼간다.
관리인과 작별하고 샘터로 향하는 내 마음이 편치 않다. 써레봉 거쳐 중봉과 천왕봉 찍고 하봉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곧장 하봉으로 내달릴지를 결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얼핏 일행들 눈치를 보니 한 명이 전자를 원하는 듯하고 내가 합세하면 2대2로 팽팽한 접전이 예상된다. 해서 일행이 결정하는 대로 따르겠다고 꽁무니를 빼자 당연히 후자가 채택된다. 따라서 천왕봉은 상상으로 올라본다.
“새벽에 일어나 추로주(秋露酒)를 한두 잔 마셨다. 따라온 사람들이 또 ‘동방이 이미 밝아 옵니다’ 라고 하여, 나는 여러 사람들과 동쪽 바위 위에 올라가서 해가 뜨기를 기다렸다. 검은 구름과 붉은 구름이 동쪽 하늘가에 드리웠는데, 어제 저녁 해가 질 때의 모양과 같았다. 해가 솟아오를수록 구름 기운은 점차 흩어졌다. 온 하늘 아래는 찬란한 빛이 밝게 퍼져, 마치 임금이 임어할 때 등불이 찬란하고 궁궐이 삼엄하며, 오색구름이 영롱하고 온갖 관리들이 옹립해 호위하며, 아랫사람들이 제자리에 서 있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감히 거만하지 않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하는 것과 같았다. 멀리 보이는 물은 섬진강 하류와 두원곶 이남의 대양인 듯하고, 산은 계립령 이남의 동쪽으로는 팔공산과 서쪽으로는 무등산에 이르기까지 모두 한눈에 들어왔다. 점필재(佔畢齋)의 유람록에 상세히 기록해 놓았으므로 여기서는 군더더기 말을 하지 않겠다.
이 봉우리의 동남쪽으로 긴 골짜기가 1백여 리쯤 뻗은 곳에 ‘덕산’이라는 고을과 ‘덕천’이라는 내가 있는데, 남명 조식 선생이 터를 잡고 사셨던 곳이다. 선생의 묘와 사당이 모두 그곳에 있다. 사당이 있는 서원의 현판은 ‘덕천’인데 지금의 임금께서 하사한 것이다. 천길이나 되는 봉우리 위에서 또 천길 봉우리를 바라보는 격이다.” 이것은 1610년(광해2) 9월 2일~9월 8일 박여랑(1554~1611)이 합천군수 지족당 박명부, 고대 정경운 등과 함께 지리산을 유람하고 쓴 <두류산 일록>에 나와 있는 내용이다.
어느새 하봉 헬기장 아래 샘터에 도착한다. 차가운 샘물로 목을 축이고 각자 물통에 가득 담는다. 이 물로 청이당고개까지 버텨야 하고 점심밥도 지어야 한다. 안부에는 동자꽃 등 여름 꽃들이 널렸다. 이제부터 웅석봉으로 이어진 동부능선이자 태극능선 길이다. 하봉 바위에 앉아 한참 동안 쉬다가 일어난다. 소년대로 가는데 왼쪽 사면 풀 속에 곰취가 군데군데 섞여 있다. 한 일행이 미리 봐 둔 것인데 자연학습을 하고 간다. 밧줄을 잡고 소년대에 올랐다. 잠시 조망이 트이면서 초암능선 상층부 암릉이 보였다가 이내 운무 속으로 사라진다.
1611년(광해3) 봄, 남원부사 유몽인(1559~1623)이 지리산을 유람하고 쓴 <유두류산록>에 소년대가 나온다. “앞으로 나아가 소년대에 올랐다. 천왕봉을 우러러보니 구름 속에 높이 솟아 있었다. 이곳에는 잡초나 잡목이 없고 푸른 잣나무만 연이어 나 있는데, 눈보라와 비바람에 시달려 앙상한 줄기만 남은 고사목이 10분의 2~3은 되었다. 멀리서 바라보면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한 노인의 머리 같으니 다 솎아낼 수 없을 듯하다. ‘소년’이라고 이름이 붙은 것을 보면, 혹 영랑의 무리를 일컬은 듯하다. 그러나 내 생각으로는, 천왕봉은 장로(長老)이고 이 봉우리는 장로를 받들고 있는 소년처럼 생겼기 때문에 ‘소년대’라 붙인 것 같다. 아래로 내려다 보니 수많은 봉우리와 골짜기가 주름처럼 펼쳐져 있었다. 이곳에서도 오히려 이러한데, 하물며 제일봉에 올라 바라봄에랴.”
유몽인의 표현을 빌리자면, “새벽에 길을 떠나 옹암(독바위)을 지나 청이당에 들어갔다. 숲을 뚫고 돌무더기를 가로질러 영랑대에 이르렀다. 그늘진 골짜기를 굽어보니 어두컴컴하였다. 정신이 멍하고 현기증이 나서 나무를 잡고 기대섰다. 놀란 마음에 눈이 휘둥그래져 굽어볼 수가 없었다.” 소년대가 바로 영랑대이다.
* 소년대.
영랑은 화랑의 우두머리로 신라시대 사람이다. 3천명의 무리를 거느리고 산과 바닷가를 마음껏 유람하였으며, 우리나라 이름난 강산에 이름을 남기지 않은 곳이 없다고 한다.
소년대를 나와 5분쯤 능선을 타다가 점심상을 차렸다. 돼지찌개를 조리해 먹었다. 술이 떨어져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는 일. “산에서 쌀과 술을 교환하면 술이 손해”란 말이 실감난다. 오늘 먹을 막걸리까지 어제 밤에 다 비웠는데, 무엇이든 아끼는 습관을 길러야겠다.
점심상을 물리고 일어선다. 산길은 완만하게 떨어지다가 한 봉우리를 올려 친 뒤 다시 부드러운 내림이 이어진다. 국골사거리에 도착하자 휴식하고 있던 네댓 명의 사람들이 반갑게 맞아준다. 그들은 국골 상류에서 좌골을 타려다 잘못 들었다는 고생담을 늘어 놓는데 지난달 내가 내려갔던 지계곡을 치고 올라 온 듯하다. 우리가 배낭을 내려놓고 말봉으로 향하자 그들도 두류능선으로 하산한다며 뒤를 따른다.
지리산 동부능선을 한눈에 볼 수 있는 말봉(1,618m)에도 역시 조망은 없다. 비가 내리지 않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다. 말봉에서 그들이 먼저 일어서고 우리는 조금 더 있다가 국골사거리로 되돌아간다. 이제부터 유몽인이 올라왔던 그 길로 청이당고개와 독바위를 거쳐 새봉(1315m)까지 가야 한다. 유몽인은 용유담에서 두류암, 상내봉을 거쳐 새봉으로 온 듯하다. 새봉에서 우리는 상내봉 방향이 아닌 웅석봉 쪽으로 길을 잡아야 한다.
청이당고개(쑥밭재)에서 배낭을 내린 후, 청이당 터를 지나 계곡으로 가서 목을 축이고 물통을 채우고 머리도 담근다. 계곡은 고개에서 1분도 채 안 되는 거리다. “청이당에 도착하였는데, 판자로 지은 집이었다. 네 사람이 당 앞의 시냇가 바위를 차지하고 앉아 조금 쉬었다.”1472년(성종3) 8월, 김종직이 함양으로 고을살이를 나와 있던 중 유극기, 조태허 등과 지리산을 등정하고 남긴 <유두류록>에 있는 내용이다.
부드럽고 귀엽던 산죽이 얼마간 이어지다 조금은 성가신 조릿대로 변한다. 독바위 조금 못 미친 곳에서 조릿대를 피해 오른편 바위에 올라서니 몸집이 굵은 독사가 똬리를 틀고 앉아 몸을 말리고 있다. 나를 보고도 피하기는커녕 내 눈치만 살핀다. 오히려 내가 겁이 났다. 발을 두어 번 구르며 ‘이 놈’ 하고 고함을 치자 그때서야 슬슬 움직이기 시작한다. 스틱이 배낭에 있어 어찌해보지도 못하고 내가 물러선다. 귀하신 몸이 휴식하는데 방해를 한 셈이다.
산머루가 달린 곳에 이르자 상단이 족두리처럼 생긴 독바위가 눈에 들어온다. 거대한 항아리 같다. 그래서 붙은 이름이다. 조금 더 가서 뒤쪽 암벽에 걸린 로프를 잡고 올랐다. 이 바위가 무제치기폭포, 소년대와 더불어 이번 산행의 하이라이트다. 독바위에 올라 앉아 지나온 능선을 바라보니 왼편은 운무 속에 잠겼고 바른편 추성동 방면은 터였다. 운무가 용솟음치며 솟아오르는데 능선을 넘지 못하고 도로 감기는 것이 마치 하늘이 요술을 부리는 듯하다. 두류능선이 벗겨지면서 지난번 찾지 못했던 향운대도 가늠되고 오똑한 말봉도 모습을 드러낸다. 발치 아래엔 넓고 긴 슬랩이 끝이 안 보인다. 오늘 산행은 접고 여기서 하룻밤 유하고 싶은 생각이 굴뚝 같다.
독바위에서 새봉을 거쳐 새재에 이르기까지의 3㎞ 남짓한 구간에는 서너 군데의 바위지대와 조릿대가 있었고, 물을 머금은 바위벼랑을 내려갈 때는 매우 조심했다. 새봉은 산청군 금서면 오봉마을에서 보면 한 마리 새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다. 새재에서 윗새재마을까지 내려가는 계곡 길에도 조릿대와 키 큰 풀이 많았으나 대체로 완만하고 부드러웠다.
* 독바위.
나는 작년에 최석기 외 4명이 번역한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을 읽었는데 마침 이번 산행에 김종직, 김일손, 남효온, 박여랑, 유몽인 등 5, 6백 년 전의 옛 사람들이 걸었던 구간이 들어 있어 의미를 더했다. 끝.
* 참고 자료: <다큐멘터리 르포 지리산> 김경렬, <선인들의 지리산 유람록> 최석기 외,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 산행 사진
▽ 산행 궤적
'旅行 > 지리산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1950년대 지리산 산행기(이영도 시조시인) (0) | 2017.10.02 |
---|---|
[스크랩] 지리산 상세지도모음 (0) | 2016.11.29 |
빨치산 별을 본 사람들 (0) | 2016.06.30 |
[스크랩] 지리산 유감 (0) | 2015.09.01 |
[스크랩]지리산 이야기 - 둘. (산죽. 황금능선. 구곡산. 무재치기 폭포. 장당골. ) (0) | 2015.08.3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