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천왕봉에 가 본지 오래됐기도 했지만,
엊그제 가보았다 하더라도 관심이 없다면 보이지 않았을 이야기...
지리산 정상은 천왕봉(상봉), 중봉, 하봉이 있으며, 특히 상봉을 일월대라고도 하며, 일관대라고도 한다.
말그대로 해와 달을 바라보는 대라는 뜻으로 작명한 것 같은데,,,,
사람들은 천왕봉 정상에서 해와 달을 보려든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고개를 돌려 주변을 보고 그것을 남겼다.
천왕봉 정상 풍경을 모아본다, 움막도 있었고, 매장도 있었고, 등등....
출처는 모두 지리산의 큰 마당인 지리99에서이다.
바위 위에는 “일월대(日月臺)”라고 세 글자가 새겨져 있다.
전후로 유람하러 온 사람들의 이름이 많이 쓰여져 있다.
혹은 부자가 이름을 함께 적었으며 심지어는 사대(四代)가 이름을 나란히 쓴 것도 있다.
족보와 같다고 할 수 있으니 이것은 일 벌이기를 좋아함이 지나치다.
두류산유록(頭流山遊錄) 김택술, 1934년
산세가 이곳에서 왔는데 이것이 천왕봉(天王峯)이다.
꼭대기에 올라가니 모두 암석이 반석이 되어 있었으니 일월대(日月臺)이다.
바위 앞에는 산령사(山靈祠)*[성모사당을 일컬음]가 있는데 나뭇조각으로 덮여 있다.
바위 표면에 새겨진 이름은 몇 백명인 지 모르겠는데 혹은 마멸되고 혹은 선명하였다.
바위 사이에는 가옥 하나가 있는데 수십 명을 수용할 수 있는데 진주(晉州)의 강위수(姜渭秀)가 세운 것이라고 한다.*[일제강점기에 세워졌다는 천왕봉산장을 일컬음]
마침내 옷을 풀어헤치고 그 가운데에 행장을 풀고서 저녁을 먹을 생각을 하였다.
대저 산의 수목들이 모두 찬 기운이 항상 일찍 오기 때문에 겨우 한 자 정도였으니 몇 백번의 풍상을 겪은 것이 마땅하구나.
한 사람이 따라 왔는데 바로 칠불암(七佛菴)의 승려이다. 몇 자 정도의 아래에 있는 샘의 원천을 가리켰다.
1937년, 김학수 <유방장산기행>
** 강위수에 관해서는
현재 함양군수 민인호 씨는 빈껍데기의 명승고적이나마 보존하려고 보승회(保勝會)를 조직하고 지리산을 세계에 소개하기 위하여 지리산지(智異山誌)를 모아서 편집하는 중이요,
같은 군의 유지 강위수씨는 유산하는 사람들의 편리를 도모코자 산 위에 망해정(望海亭)을 건축하고,
박로익 및 영원사 승려 일동은 제석당(帝釋堂)을 건축하였으며, 이
진우 및 벽송사 승려 일동은 마암당(馬岩堂)을 건축하여(두 곳은 모두 중봉) 올해 양춘가절에 개산식을 행하려 한다.
이를 본산의 행복이라 할지…….
개벽지에서는 같은 기사에서..
그러나 우리 조선인은 이 지리산을 옛날부터 신선의 고장으로만 알고, 보고(寶庫)인 줄은 알지 못하였다.
깊고 깊은 청학동 안에서 청풍명월을 음롱(吟弄)하며, 보라색연기 아름다운 노을을 호흡하는 사이에
지리산의 전부가 이미 일본인의 수중에 들어갔다.
즉 다이쇼(大正) 원년(=1912년)에 소위 큐수대학 및 교토대학의 연습림으로 총독부에서 80개년의 장기로 무상임대를 하고 말았다.
라고 탄식하고 있습니다.
진실로 정확한 진단이라고 아니할 수 없습니다.
음롱하고 풍월하고 찬탄하는 문화가 관성적으로 내려왔습니다. 상기도 이런 정조가 많은 이들의 가슴속에 살아 있습니다.
잠시 뒤에 대차(大且)에 사는 정치성(鄭致誠)이 어린 학생들 몇몇을 이끌고 상봉(上峰)에서 내려오는 것을 만났는데,
그 가운데 일곱 살 먹은 아이가 있어 의젓하게 잘 따라다니니, 모두 쓰다듬어주며 아끼는 마음이 끝이 없었다.
밤이 드니 종소리와 샘물소리가 뒤섞여 들려오고, 아래 세상을 내려다보니 안개와 구름이 아득하여 세속을 멀리 벗어난 느낌이 들었다.
잠도 편안하고, 꿈도 맑았다.
새벽에 승려 한 사람이 예불을 하였는데, 주위 사람들이 모두 잠이 깨어 일어나서 문을 열었다.
동쪽을 바라보니 새벽빛이 그물이나 담처럼 둘러쳐져 있고, 계명성(啓明星 : 금성)은 이미 한 자쯤 솟아 있었다.
대이가 동쪽 가에 있는 봉우리에 화톳불을 피웠으며, 내가 자계어르신을 모시고 이불을 안아들고 따랐다.
1905년에 이미 법계사 코스는 상당히 개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새벽에 승려한 사람이 예불을 하였다...는 것도 맑은 천왕봉에서 맞는 찬 바람같습니다.
누가 이기나 보자고 한참을 돌고 돌아 앞으로 앞으로 줄기차게 다가서니, 문득 귀에 익은 「야호」소리가 안개를 뚫고 와 닿는다.
상상봉이 바로 거기란 말이냐. 어느새 짙은 안개가 걷히더니, 바위만의 앙상한 정상이 마침내 얼굴을 들어내고 말았다.
이제 모두가 끝이 나려나 부다. 등정(登頂)과 더불어 기나긴 산상(山上)의 역정(歷程)과 그리고 고난과 행복이.
정상은 나무커녕은 풀조차 드물고, 바위와 돌맹이 만으로 살풍경하기 짝이 없다.
마산산악회의 표고를 표시한 표말이 싱싱하게 꽂혀 있고,
정상 조금 아래 공지(空地)엔 큰 텐트가 쳐 있는데, 그것이 바로 우리가 궁금히 여겨오던 매점이다.
그 상혼(商魂)이 장해서다.
1,915m 위의 이 매점은 아마 우리나라 최고(最高)의 상점이리라.
여기 치외법권의 주인공은 혈기왕성해 보이는 경상도 출신의 중노인(中老人), 장사치고는 멋쟁이 장사라 하겠다.
우리는 돌을 주어 모아 「케른」을 세우고, 거기에 서명한 명단을 집어 넣는다.
그리고 나서 기념촬영 한 장. 제주(祭酒)처럼 그 주변에 한 잔 술을 뿌리고, 간단히 다과를 나누었다.
천왕봉 위에 해도 이미 저물었다. 청명한 조망도 이제 어둠 속에 감추이고, 바람은 점점 차워온다.
일행은 준비하였던 외투를 꺼내입고 군데군데 자기의 천막을 친다.
정상에 산막을 지어둔 것도 있기는 하나 운치도 이만 못하려니와,그 산막 속에는 불을 피우고 우리들을 따라온 인부들이 거기서 지낼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3~4인씩이 작대(作隊)하여 군데군데 자리를 잡고 천막을 치는 것이다.
장작불을 지핀다. 화염은 하늘로 피어오른다.
소 곰국으로 몸을 덥히긴 하였으나 늦가을같이 점점 낮아져가는 기온에 그냥으로는 추위를 견디기가 어렵다.
그러나 나는 이 장엄한 산상의 어두워가는 저녁을 실컷 즐기려고 떨리는 몸을 그대로 암각(岩角) 위에서 세워 아득한 하늘 끝을 멀리 바라보며, 아직은 천막 속으로 들어가고 싶지 아니하다.
장터목이라는 단어는 1937년 산행기에 등장한다.
9시20분, 잔돌을 떠나 여전히 눈에 미끄러지고 땀에 멱 감으며 고산(高山) 풍치가 늠름한 고목(枯木)이 많은 가운데를 지나,
'장두맥이'(재)에 이르니, 오전 11시였다.
조금 더 오르니 얼음과 바위 사이에서 맑은 샘이 졸졸 흐른다. 눈으로 몸을 식히려던 우리는 미칠 듯이 반가웠다.
그 옆에는 허물어진 빈 터만이 남아 있다.
이로부터는 비탈이 대단하다. 더구나 모두가 빙판이 되어 있다. 미끄러지고 자빠지며 거목이 창창한 심림(深林)을 벗어나니 길은 소봉(小峰)의 북쪽 기슭을 돈다. 눈은 길이 넘치도록 쌓여 있다. 기며, 뭉기며 소봉을 돌아드니 자연의 화강암으로 된 통천문(通天門)이 눈 속에 묻혀 있다. 천왕봉에 통하는 문이다.
우리는 이 문을 지나, 오전 12시 정각! 저 천왕봉을 완전히 정복하였다.
그 순간 우리는 흐르는 땀도 억제할 수 없이, 있는 목소리를 다하여 “만세!”를 연달아 불렀다.
양정(養正)의 힘있는 교가(校歌)로 지리산상의 넓은 허공을 울리었다.
해발 1천9백15미터! 그 얼마나 높은 산인가! 우리가 그 얼마나 두려워하던 산인가! 우리의 숙망(宿望)은 오늘(22일)로써 유감없이 성취되고 말았다.
시간은 어느덧 오후 1시! 우리는 섭섭하게도 천왕봉을 이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평리에서 환희에 넘치는 하룻밤을 새우고, 23일 도보로 산청읍(약 14킬로미터)에 나오니,
흐렸던 하늘에서는 무지한 빗방울이 탄환과 같이 떨어진다.
오후 1시30분, 자동차로 진주에 이르니 비는 점점 더 쏟아질 뿐이다.
잠깐 진주의 이야기나 듣고, 오후 4시반 차로 진주를 떠나 부산에 하차하니 오후 9시25분이었다.
1937년 <최기덕>님 (양정산악부)의 [지리산 등반기-2]
상봉에 오르기 10분전부터 구름은 비로 변해 버렸고 게다가 폭풍마저 휘몰아치는 통에 <br />비새는 토막집에서 밤새껏 옷을 적시고 말았다.<br /><br />해발 1900미터의 정상에는 60세 가까운 남자 한사람이 두개의 토막집을 마련해놓고 있었는데 <br />10여일 전까지는 천막을 쳐놓고 있었다는 것이다.<br />앞으로 닷새만 걸려서 일하면 비가 새지 않도록 완전히 집을 꾸밀 수 있다고 말하면서 그는 <br />몹시 미안한 표정이었다.<br /><br />
<font face="굴림체">다행히 길 안내역으로 동반되는 무장경비원 4명의 기고만장(氣高萬丈)한 모습이 우리 일행을 저으기 안도의 숨길로 이끌었다.</font>
아침이슬에 흠뻑 젖고 생길을 갈아서 몇 고비나 바위섶을 오르고 내렸던지 세석평전에 닿은 것은 오후 한 시였다.
소개소각(疎開燒却)을 당한 몇 채의 집터에는 잡초 속에 사기 질그릇의 부서진 조각만이 눈에 띌 뿐
인가(人家)의 지난 날 자취란 거의 찾아볼 길이 없다....
오후 네 시 장판재(일명 장타매기)에 이르렀다.
여기서부터 천왕봉 하(下), 중(中), 상봉(上峰)의 본봉 줄기로, 곧게 올라만 가면 하봉을 거쳐 상봉에 도달하고, 그 옆에 중봉이 슬며시 뒷받침을 하고 있다.
장판재에서 절터까지 가서 일행은 해 전에 천왕봉을 돌아올 예정으로 짐을 벗어 풀 속에 놓고 가뿐한 몸으로 길을 나섰다.
하봉까지 가는 길은 전나무, 잣나무의 아름드리 고목이 원시림 그대로 하늘이 보이지 않게 들어섰고, 가람나무, 자작나무들이 관목 사이에 끼어 일대 수해(樹海)를 이루고 있다. 바위 틈바귀를 지나 암석 사이에 걸쳐놓은 외나무다리를 기어올라 잠시 숨을 돌리고 최후의 정력을 다하여 지리 영봉 중의 최고봉인 1915미터의 천왕봉 정상에 닿은 것은 오후 5시 반 정각이었다.
1955년 <全光鏞>님의 [지리산 등반기]
1월15일
눈은 계속 나리는데 포터(인부)는 억만금을 준다해도 못가겠다고 한다.
1월 17일
7시에 기상.10시 출발.능선을 타고 바위를 돌아 절벽을 타고 잡목사이를 빠져 "세석평전"에 도착 한 것이 3시50분.
도중에 세사람이 절벽에 굴러 떨어졌던 일을 생각하니 아찔 해 온다.
어느 대학생의 피서용 집이라는 아담한 두칸 집에다가 주인의 허락도 없이 짐을 풀었다.
18일
구름 한점없이 하늘이 맑다.
고드름 나무와 석자넘는 눈밭을 지나 장기정(場基頂)(장터목을 말하는 듯)에 도착 한 것이 4시.
눈을 다지고 그위에 2개의 천막을 쳤다.
1월 19일.
드디어 등정의 날이 왔다.
아침 8시 .2개의 마지막 천막을 뒤로하고 4명의 대원들은 뛰다시피 천황봉을 향했다.
3시간만에 소망의 봉우리 헤발 1915m 천황봉 정상에 올랐다.
오전 11시 10분 4명은 정상에다가 경북학생산악연맹기를 꽂아 두고 애국가와 산악의 노래를 불렀다.
1968년 방송국 근무자들의 지리산 산행기
벽계암(碧溪菴)은 상봉에서 4분의 1쯤 되는 곳에 있는 고찰인데, 이미 폐허가 되었다. 그전에는 이 산에 오르는 자들이 의지할 만한 곳이 없었다. 그래서 상봉에 오르는 도구를 마련하는 데 매우 많은 인력을 동원하였다.
그런데 한번 이 암자가 창건된 뒤로는 상봉에 오르기가 편리해졌다.
이 암자는 청송(靑松) 정운필(鄭雲弼)이 창건한 것이다.
천왕봉(天王峰) 정상에는 일관대(日觀臺)가 있는데, 비바람에 가려서 올려다 볼 수 없었다.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그 위는 매우 추워서 초목이 자라지 않습니다. 혹 8월에도 서리와 눈이 날립니다. 바위의 벽에 의지해 담장을 쌓아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는 곳으로 삼았습니다....
해가 서해로 질 적에는 마치 돌을 물속에 던지는 것 같아, 잠깐 사이에 빛이 없어져 해가 지는 모습을 다 볼 수 없습니다.
해 그림자가 없어지면 천지가 어두워져 지척을 분간할 수 없습니다. 이 일관대에서 미처 돌아오지 못해 종종 계곡으로 굴러 떨어져 죽는 자도 많습니다.”라고 하였다.
대개 지리산은 남쪽 지방 영남과 호남의 일곱 고을 사이에 웅거하고 있다. 서쪽으로 반야봉(般若峰)으로부터 뻗은 산맥이 우뚝 솟구쳐 천왕봉이 되었다. 천왕봉 위에 일관대가 있다. 동쪽으로 뻗어내려 진주의 덕산(德山)이 되었고, 남쪽으로 뻗어내려 세석평전(細石坪田)이 되었다.
1903년, 안익제 <두류록>
천왕봉은 상중하의 3대(臺)가 있고,음사(滛祠=淫祠 *내력이 불분명한 귀신을 섬기는 사당)가 있는데 그 신을 성모(聖母)라고 하며 승려의 무리들이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이라고 하는 것을 점필재가 그 망령됨을 밝혔다. 매년 봄 가을 재앙을 물리치고 복을 비는 자들이 운집하여 무당들이 깃발을 들고 뛰고 굴리며 소리지르는 데 하루에 드는 비용이 백냥 천냥이다.
진양 천령의 두 고을에서 관리를 파견하여 매달 건량과 구리그릇을 거두어들여 관청의 비용으로 충당한다.
이만부이만부(李萬敷 1664~1732) <지리고사(智異古事)>
성모묘에 이르렀다. 3칸 판자집이었다. 성모석상이라고 하는 것의 목에는 금이 가 있었다. 태조께서 인월에서 크게 승리하던 해에 왜구들이 이 봉우리에 올라 칼로 찍고 갔으므로 뒷사람이 붙여 이어 놓았다. 또 석가의 어머니 마야부인이라고 하였다.
일찍이 이승휴의《제왕운기》를 읽어보니, ‘성모가 선사에게 명하였다’고 하고는 주석에 이르기를, ‘지금 지리산의 천왕은 바로 고려 태조의 어머니 위숙왕후를 가리킨다.’고 하였다. 이는 고려 사람들이 선도성모에 관한 이야기를 익히 듣고서 자기 임금의 계통을 신성화시키기 위하여 이런 말을 만들어낸 것인데, 이승휴는 그 말을 믿고 《제왕운기》에 기록한 것이다.
날이 또 어두워지자 음랭한 바람이 마구 불어오고 안개가 모여들어 의관이 모두 축축해졌다. 사당 안에서 서로를 베개삼아 누웠는데 한기가 뼈에 스며 다시 두꺼운 솜옷을 껴입었다.
경진일, 종자(從者)들을 향적사에 먼저 보내 음식을 준비하게 하였다. 몹시 미끄러운 돌길로 몇 里쯤 내려가니 쇠난간길(鐵鎖路)이 있었는데 매우 위험하였다. 바위구멍을 통과해 나와 향적사로 들어갔는데, 향적사에는 중이 없어진 지가 벌써 2년이나 되었다. 문 앞의 반석으로 나아가 바라보니, 살천이 구불구불 길게 이어져 있고, 여러 산과 바다의 섬들은 혹은 완전히 드러나기도 하고 혹은 반쯤 드러나기도 하였다.
신사일, 새벽에 해가 떠오르니 노을빛 채색이 영롱하게 빛났다. 마침내 새벽밥을 재촉하여 먹고 지름길로 석문을 거쳐 성모묘에 들어갔다. 이 때 날이 막 개서 사방은 구름 한 점 없었다.
이규경李圭景 1788∼1863 <지리산변증설(智異山辨證說)>"오주연문장전산고"중에서
쌍계사 동구에서 칠불암 앞까지 밤나무가 시냇가 길을 따라 하늘을 찌를 듯이 솟아 해를 가리고 있는데 몇 만 본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큰 것은 간혹 서너 아름이나 되고, 높이는 몇 십 장이나 되는지 알 수 없다.
벌레가 상하게 했거나 좀먹은 흔적이 하나도 없으니 이상한 일이다.
수목이 자라기 알맞는 땅이 있어서 그러한가, 아니면 산신령이 사랑하고 아끼는 바가 되어서 그러한가? 알 수 없다
권호명 權顥明 1778-1849) <쌍계사 · 칠불암 구경>
80년대 법계사 불사의 사연입니다.
형제와 사촌 3명의 대학생이 지리산 등반(칠선계곡 - 천왕봉- 중산리) 중 개천문 부근에서 조난으로 그 중 1명은 사망하고 2명은 구조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부모님이 자식들의 복전으로 거액의 불사를 함으로써 오늘 날 법계사가 존재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출처] 지리산 천왕봉의 풍경들...|작성자 dar_s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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