旅行/지리산 이야기

지리산) 1960년대 천왕봉 등반시 어디에서 잤나...

나 그 네 2017. 10. 2. 14:21

여름날님이 소개해준 경남 진양의 유생인 하종락(1895-1969)이 1964년 여름 지리산을 찾고 남긴 "두류산동유록"

노정기를 통해 숙소 문제를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살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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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날짜 1964년 6월 15일 (총인원 15명)

​산행코스: 진주 -(버스)-곡점(거림골과 중산리 갈림길, 1박) - 중산리 -칼바위 - 법계사 - 천왕봉

​ㅁ 15일

진주 출발 -(버스)-곡점 : 1957년 성산 선생의 '천왕봉 초등 산행기'에 의하면, 진주-덕산 버스는 하루 1회였다.

                                   그 뒤 곡점까지 연장되었으며, 하종락에 의하면 1일 2회 버스가 운행

ㅁ 곡점에서 1박: 숙소라고 했는데, 지인의 집으로 보인다.(짐꾼은 2명)

ㅁ​ 16일.

곡점에서 쌀을 구입후 출발, 중산리에서 지인의 집 부엌에서 점심 취사. 법계사 도착 2박(2박 장소는 법계사로 보인다.)

()씨 성()의 늙은 여승이 (6.25) 전쟁 뒤에 이곳으로 와서 불에 타 폐허가 된 자리를 치우고 나서

처음 몸을 의지할 막사를 지었으며, 또 별도로 막사 한 채를 지어 오가는 사람들에게 편리를 제공하였다.

그리고 정당(正堂:법당을 말한다.) 터에 법전(法殿:법당을 말한다.)을 높이 우뚝하게 건립하였지만,

재력이 부족한 관계로 미처 기와로 지붕을 덮지 못하여 또 비바람에 썩고 훼손되었으니....

  

또한 당시에 있던 일로 말하면, 우리 일행이 실망한 것은 이보다 더 큰 일이 있었으니, 명부(明夫)가 일찍이 말하기를,

법계사에 이르면 그 늙은 여승의 주선으로 하루 정도 머무를 수 있고, 거처하는 곳도 몹시 허술하거나 좁지는 않다고 하였었지만,

지금 와서 보니 그의 말과 반대였다.

그러므로 여러 사람들이 비록 겉으로 말을 하지 않았지만 속으로는 실로 민망하게 여겼다.

당시 막사(초막)의 모습을 보시려면

ㅁ 17일.

정오가 채 되기전 출발. 천왕샘에는 바가지도 있었다. 그 이유는 천왕봉 정상에서 영업하는 이가 있기 때문이다.???

 

​상봉(上峯)의 목 부분에 샘이 있고 바가지가 떠 있었는데 매우 기이하게 여기며 말하기를,

샘도 있고 바가지도 있으니 여기서 조금 쉬는 게 좋겠다.”라고 하였다.

 때마침 법계사의 늙은 여승이 뒤따라 도착하였다. 또 절에서 부리는 모든 소년들이 일행이 하루 묵으며 먹을 쌀과 그릇을 메고 와서 역시 함께 쉬었다

중호(重浩)와 진명(晋明)이 이번 여행을 위해 보릿가루와 설탕을 미리 마련하였는데, 이 짐 속에 있었기 때문에,

그 자루를 풀어 늙은 여승으로 하여금 보릿가루와 설탕을 섞어 타게 하여 저마다 한 그릇씩 마셨으며, 늙은 여승도 또한 마셨다.

늙은 여승이 이번에 따라온 것은 우리 일행이 하룻밤 묵을 때 먹을 음식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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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샘에 있는 바가지는 상봉(上峰)에서 지금 영업하는 이가, 그 위에 물이 없기 때문에 이 물을 길어갈 때 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하룻밤 묵을 동안 쓸 물을 공급하기가 곤란함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었다.

​정상도착, 정상 풍경은 이렇다.

바위의 남쪽 면에는 일월대(日月臺)’란 세 글자가 새겨져 있는데, 함양(咸陽)의 정() 아무개가 새긴 것이라고 하였으니 햇수가 아직 오래된 것은 아니었다.

<주지(州誌)>에는 성모사(聖母祠)가 천왕봉 꼭대기에 있다.”고 실려 있지만, 살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천왕봉 서쪽 밑 평평한 곳에 산을 파고서 한쪽에 담을 두르고 양철(洋鐵)로 지붕을 덮은 것이 있어,

이에 대해 물어보니 미륵석불(彌勒石佛)’이라고 하였다. 

​정상에서 어디에서 어떻게 잤을까?

  일찍이 듣기를, 예전에 우리 고을에 살던 강위수(姜渭秀)가 상봉(上峯) 근처에 몇 칸의 집을 지어, 노닐며 구경하는 편의시설을 갖추었다고 하였으나 지금은 남은 흔적조차 없다.  

 

 

   다시 김씨(金氏) ()을 가진 사람이 이어서 집 한 채를 지어 머물러 묵을 수 있게 편의를 제공하였다.

   그 집의 형태는 땅을 파 온돌을 깊게 하고 돌로 그 벽을 쌓아 방을 만들었는데, 길이는 2자쯤 되고 넓이는 8,9 자쯤 되며, 방 중앙을 높게 하여 긴 나무로 대들보를 삼고, 문은 그 높은 곳을 따라 통하도록 하였으며, 나무판자로 가리고 다시 서까래를 대들보에 걸고 낮추어 처마를 만들었다.

또한 나무껍질로 서까래를 가로질러 덮고, 또 못쓰는 가마니와 근래의 잡다한 종이들을 이리저리 덮었으며, 화로(火爐) 같기도 하고 말[] 같기도 한 돌들을 바둑판처럼 줄어지 세워 집을 온전하게 하였다. 그 집이 완벽하고 견고하기가 이와 같은데, 이와 같이 하지 않으면 비바람이 몰아치는 특이한 이곳에서 어찌 오랫동안 보전될 수 있겠는가?

 

   해가 지려고 할 때쯤 천왕봉에 올라보니, 추위가 사람을 핍박하여 옷을 바꿔 입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다.

이에 내복을 입었지만 조금도 무더운 기운이 없었으니, 진실로 이전에 전해들은 말들이 거짓말이 아니었다.

 

   어느덧 금세 해가 지고 추위가 심해져 조망(眺望)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숙소로 들어갔다. 여행의 고달픔을 어찌 모두 열거할 수 있겠는가?

오직 사언(士彦)만이 가장 따뜻한 곳에 누워 밤새 잤으므로 평온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무더위가 한창인 때인데도 여러 사람들이 따뜻한 곳에 둘러 모였으니, 추위가 사람을 몰아가는 것이 이와 같은가?

추위 때문에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일제히 일어났다. 모두가 해돋이 보는 것을 두번째 일[일어나는 것이 첫번째 일이고, 그 다음이 해돋이를 보는 일이라는 뜻으로 쓴 듯하다.]로 삼아, 머물러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가 조반(早飯아침 끼니를 먹기 전에 간단하게 먹는 음식)을 먹고 하산(下山)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향도(嚮導)가 조개동(朝開洞)으로 노정(路程)을잡았기 때문에, 늙은 여승에게 밥 짓기를 어제와 같이 하라고 일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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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ㅁ 18일

초막에서 일어나 누가 해준 어떤 음식을 먹었는가.

추위 때문에 날이 채 밝기도 전에 일제히 일어났다.

모두가 해돋이 보는 것을 두번째 일[일어나는 것이 첫번째 일이고, 그 다음이 해돋이를 보는 일이라는 뜻으로 쓴 듯하다.]로 삼아,

머물러 동이 트기를 기다렸다가 조반(早飯아침 끼니를 먹기 전에 간단하게 먹는 음식)을 먹고 하산(下山)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향도(嚮導)가 조개동(朝開洞)으로 노정(路程)을잡았기 때문에, 늙은 여승에게 밥 짓기를 어제와 같이 하라고 일렀다..(1시간여 해돋이 구경후)..

 

      

   식사(食事)가 너무 일렀기 때문인지, 숙소에 돌아오자 늙은 여승이 음식을 올리는데 단지 흰밥과 된장뿐이었다.

비록 나이 젊은 사람의 입이라 하더라도 오히려 밥을 넘길 수가 없는데,

하물며 늙은 사람의 입임에랴! 이와 같이 먹기를 다섯 차례나 하였으니, 일행들이 안팎으로 받은 고통을 어찌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지금은 출입제한지역인 조개동 계곡을 택한다.

      초막(草幕)이 두 채 있있는데 길손을 접대할 음식물이 없었으므로 탄식할 만하고도 탄식할 만하였다. 

    

    지팡이를 끌며 천천히 걸어서 조현촌(鳥峴村)에 이르니, 해는 서쪽으로 기울었다.

명부가 일행을 인도하여 한 인가(人家)로 들어갔는데 그와 같은 집안 사람이라고 하였다.

일행을 나무 그늘 밑에 앉아 있도록 하였는데, 곁에 샘이 있으므로 진명이 또 자루를 푼 다음 미숫가루를 꺼내,

그 집에서 그릇을 빌려 물에 타 마시게 하여 굶주림을 면할 수 있었다.

   얼마 있다가 주인집에서 찐 마령서(馬鈴薯 : 감자)를 대접하니, 말할 수 없이 기쁘고 감격스러워 반드시 다 먹기만을 기약할 뿐이었다 

그릇을 빌렸다니, 천왕봉 올라 갈 때 그릇이 없었음을 알겠다. 유평에서 내려오면 대원사가 있으니 그곳이 잠자리가 될터인데...

 

 

대원사(大源寺)에 도착하였다. 이 절은 경인(庚寅)년의 난리[6.25를 말한다.]에 훼손된 지 오래되었으나 아직 복구되지 못하였다.

내가 몇 년 전에 대원사에 왔을 때에는 바야흐로 절을 창건하고 있는 중이었는데, 대웅전은 겨우 기와로 지붕을 덮었으며, 그 밖에 승려들이 거처하는 집은 세운 지 몇 해가 되었지만 기둥과 들보와 서까래가 비바람에 퇴색되었고, 살고 있는 승려도 오직 여승뿐이었기 때문에 유평(油坪) () 아무개의 집에서 묵었었다.

  지금 와서 보니, 절의 누각은 한결 새로워져 옛날에 비해 손색이 없었지만,

객실을 아직 갖추지 못하여 유람객들을 받들 수가 없기 때문에, 이번 여행에서도 다시 하룻밤 묵을 방을 빌리지 못하게 되었으니, 개탄스러운 일이다.

 

   유평의 권우용(權宇容)을 찾아가 머물러 묵었는데,

권우용은 단성(丹城) 사람으로 사람됨이 주도면밀하고 조심스럽고 민첩한데, 속세의 일을 겪느라 지금은 늙고 쇠약해져서 산수(山水)에서 초췌하게 살고 있다.

   미루어 짐작건대, 조선 이래로 유생들은 산에 들었을 때, 절에서 기숙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산중에 유일한 비바람막이인 사찰은 6,70년대를 넘어 80년대에도 등산객을 재워주고 먹여주었다.

ㅁ 다음날에는

유평의 권우용이 대원사 아래로 5리쯤 내려오다가

" 5리 남짓 갔을 때, 권우용이 일행을 이끌어 서늘하고 그늘진 곳에 앉아 있도록 하고나서,

외상으로 술을 사 술잔을 돌리며 말하기를, “조금 전에 어르신께서 지나가실 때, 의당 베푸는 예()가 있어야 함을 몰랐던 것이 아니었는데,

일부러 여기까지 온 것은 술이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라고 한 다음, 잔을 가득 채워 권하고 나서 작별하였다.​"라는 지금으로서는 듣기 어려운 말을 한다 

이하에서는 산청 덕산 근처에서 벗들을 만나 교유를 하는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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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1. 6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지리산은 진주에서만 해도 멀고도 멀었다.

2. 먹을꺼리 등은 현장에서 구할 수 있었다.

​2. 잠자리는 사찰이 우선 대상이었고, 천왕봉 정상에서는 '영업'하는 이의 돌집에서 잘 수 있었다.

   식사는 법계사의 노비구니와 불목하니들이 쌀과 그릇 등을 이고지고 와서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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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산은 하늘처럼 높고 여러 가지 나무들은 울창하고 빽빽하게 없는 곳이 없어서...."

"좌우측으로는 늘어서 펼쳐진 골짜기에 울창한 수풀과 푸른 잣나무가 눈 앞에 가득 펼쳐져 있는데 그 끝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라는 표현이 계속된다.

6.25때 빨치산 토벌한다고 토벌대가 무지막지하게 천왕봉 주변의 숲에 깡그리 불을 지르지 않은 걸로 확인된다.​

*참고: 성산씨등은 1953년 지리산 천왕봉에 처음으로 올랐다. 당시만 해도 빨치산이 지리산에 남아있어 토벌이 심하던 때라 주민들의 오해가 심했다.
           성산씨는 “밤중에 중산리로 해서 천왕봉에 올라 제석봉까지 갔지만 공비토벌을 위해 고사목 지대에 불을 지른 것을 보고는 기

          분이 이상해 왔던 길로 되돌아 내려왔다.”고 회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