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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st eleven [B11 CROSSOVER] 찢겨버린 강호 유고슬라비아

나 그 네 2018. 7. 14. 17:38

(베스트 일레븐)

“정말 죄송합니다. 답변하기가 좀 그렇네요.”

2017년의 일이었다. 당시 부천 FC에 활약했던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출신 공격수 하리스에게 유고슬라비아 역사와 내전에 관해 물어보니 이렇게 답했다. 울산 현대에서 뛰었던 크로아티아 공격수 코바도 답변을 사양한다는 메시지를 전해 왔다. 그렇다고 서운함이나 야속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도리어 이해했다. 한때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 아래 축구뿐만 아니라 거의 모든 분야에서 동유럽의 대표 강국으로 전성기를 누린 적도 있었다. 하지만, 내전 때문에 그 전성기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다. 두 선수의 그 아픔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또 잊힌 강국, 유고슬라비아의 아픔은 여전히 진행 중임을 알 수 있었다.

복잡한 땅이 하나로

‘남(南: Jugo) 슬라브인의 땅(slavija)’라는 뜻을 가진 유고슬라비아의 역사는 설명하기가 상당히 복잡하다. 민족 이름만 보면 언뜻 하나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슬라브어파 언어를 쓰는 남유럽의 한 종족이라는 뜻이나, 실질적 혈통은 저마다 제각각이어서다. 더군다나 이 지역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잦은 침략을 받은 터라 종교적으로도 상당히 복잡한 곳이었다. 큰 틀에서 슬라브족이라는 인식은 갖고 있을지 모르나, 혈통과 종교가 다르다 보니 통합에 어려움을 겪었다.

이 때문에 유고슬라비아라는 국명을 가진 최초의 국가는 20세기 초가 되어서야 나타났다. 다만 이 왕국은 오래 가지 못했다. 두 차례 세계대전 여파로 왕국이 무너지고, 다시 군소 독립국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이 어수선한 정국을 유고슬라비아의 국부로 불리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가 통합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토 내의 군소 국가를 모두 통합해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을 출범시킨 것이다. 이 나라가 바로 우리가 흔히 떠올리는 ‘원조’ 유고슬라비아다.

사실 유고슬라비아는 ‘인공 국가’라는 평가를 많이 받았다. 언급했듯 각 민족 간 이질감이 존재했던 데다, 로마 가톨릭·동방정교회·이슬람이 뒤섞여 살아가는 종교적 여건 탓에 물과 기름처럼 섞이기 어려운 나라였기 때문이다. 티토는 이런 나라를 강력한 카리스마를 앞세워 하나의 국가로 통합하는 데 성공했다.

이른바 ‘형제애와 일치(Brotherhood and Unity)’ 정책으로 각 연방국의 민족주의를 억누른 것이다. 지도자의 강력한 의지 덕에 이 시기 유고슬라비아는 그간 발칸 반도에서 누구도 이루지 못했던 하나의 단일 국가로 나아갈 토대를 닦게 된다. 하나 된 유고슬라비아는 모든 면에서 발전하기 시작했다. 축구 역시 마찬가지다. 유고슬라비아는 ‘플라비(Plavi)’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유럽의 내로라하는 강호로 인정받았다. 유로와 올림픽에서 각각 두 번이나 결승 무대에 올랐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의 위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불온한 공기, 그리고 막시미르 사건

그러나 티토가 1980년 사망한 후 유고슬라비아는 균열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각 연방국 내에 잠재해 있던 민족주의가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면서 파열음이 나왔다. 설상가상으로 구소련을 비롯한 동유럽의 공산 정권이 연쇄 붕괴하면서 혼란은 더 커졌다. 동유럽 국가들은 민족별로 다시 뭉쳐 정권을 재구축하기 시작했고, 이 거대한 시대적 흐름은 아슬아슬하게 하나임을 강조하던 유고슬라비아를 뿌리부터 뒤흔들어놓았다.

각 연방국마다 ‘우리 민족만의 국가’의 기치를 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등 각 연방국의 정치 지도자들이 난립하기 시작한 것이다. 심지어 이들은 민족 국가를 만들 수만 있다면 내전과 전쟁도 불사하겠다는 위험한 발상을 갖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 각 연방국의 국민도 휩쓸려버렸고, 통합의 수단이었던 축구도 큰 상처를 받았다.

1989-1990시즌 유고슬라비아 프로축구 리그 디나모 자그레브-츠르베다 츠베즈다의 맞대결에서 벌어진 대규모 폭력 사태, 이른바 ‘막시미르 사건’이 대표적이다. 경기 1주일 전, 크로아티아에서는 ‘국부’로 칭송받는 프라뇨 투지만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민주동맹이 선거에서 승리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크로아티아 수도 자그레브에 위치한 막시미르 스타디움에서 벌어진 크로아티아 대표 클럽(디나모 자그레브)과 세르비아 대표 클럽(츠르베다 츠베즈다)의 맞대결은 더는 축구가 아니었다. 경기 전부터 폭력 사태가 빚어졌다.

그런데 경기장에 투입된 세르비아 출신 경찰들이 사태 수습을 명목으로 세르비아에서 원정 온 팬들은 보호하고, 홈팀인 자그레브 팬들을 폭력으로 진압했다. 이러한 경찰 병력의 태도는 크로아티아인의 분노를 자아내기 충분했다. 심지어 훗날 크로아티아와 AC 밀란의 레전드로 성장하게 되는 당시 디나모 자그레브의 천재 미드필더 즈보니미르 보반은 관중들과 함께 경찰들에게 발길질을 가하는 등 격하게 반응하기도 했다.

물론 이 사건은 내전이 직접적 이유가 아니다. 원인은 연방국 내 잠재해 있던 민족주의의 발현이다. 하지만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민심이 어느 정도 분열되어 있었는지를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라 상징적 의미를 지닌다. 결국,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1년 후인 1991년 독립을 선언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의 시작이다.

포탄 속에 갈갈이 찢기다

이 중 슬로베니아는 단 열흘 만에 독립했다. 이유가 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맹주국을 자처하던 국가는 세르비아였다. 세르비아는 연방에서 이탈하려는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와 양면 전쟁을 벌일 경우 큰 군사적 부담을 안아야 했다. 또한, 다른 연방국과 달리 슬로베니아는 슬로베니아인이 90% 이상 차지하는 터라 세르비아가 자국민을 지키겠다는 명분을 세우기 힘들었다. 그래서 슬로베니아는 그리 많은 피를 흘리지 않고 독립할 수 있었다.

대신 세르비아는 나머지 국가는 놓아주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크로아티아와 5년에 걸친 긴 전쟁을 펼친 이유다. 크로아티아 내전은 하나였던 유고슬라비아가 완전히 멸망했음을 알리는 상징적 사건이다. 크로아티아가 독립을 추구하자, 다른 연방국들도 덩달아 독립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런데 대세가 세르비아 편이 아니었다. 개전 1년도 안 돼 엉뚱하게도 남부의 마케도니아가 독립 선언했다. 세르비아는 워낙 치열하게 크로아티아와 전쟁하고 있던 터라 무기력하게 인정해줄 수밖에 없었다. 크로아티아도 공식적으로는 1992년 상대로부터 독립을 승인받았으니, 단 1년 만에 세 개의 연방국이 날아가 버린 것이다. 다만 크로아티아 독립 전쟁은 이후에도 3년을 더 끌었다. 이는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을 보호한다는 명분으로 세르비아가 계속 군사적 개입을 했기 때문이다.

이런 가운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1992년 독립을 선언했다. 그런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크로아티아보다 더 위험한 국가였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중심인 이곳에는 크로아티아계·보스니아계·세르비아계가 어울렸고, 종교적으로는 로마 가톨릭·동방정교회·이슬람이 뒤섞여 살았다. 세르비아는 물론 크로아티아까지 내전이 뛰어들면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유럽의 지옥이 되어버렸다. 인종 청소와 학살 등 온갖 전쟁 범죄가 난무했다. 결국, 세르비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독립도 막지 못했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1995년에 독립했다.

죽음의 내전이 연이어지자 이 시기 유고슬라비아 선수들은 서유럽·아시아 등 해외 무대로 줄줄이 빠져나갔다. 한때 국가대표팀에도 승선했던 유고슬라비아 출신 선수들, 이를테면 라데 보그다노비치·사샤 드라큘리치·라디보예 마니치 등이 K리그에 진출했던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도 실력 있는 선수만 가능했지, 대부분의 선수는 전장으로 끌려 나갔다. 수많은 젊은이가 목숨을 잃었다.

비극 속 희망이 되어준 축구

세 차례 전쟁이 끝나자 발칸의 강국으로 불렸던 유고슬라비아는 급격히 쇠퇴했다. 축구적으로 설명하자면, 1998 FIFA 프랑스 월드컵 때 출전한 신(新) 유고슬라비아는 앞서 언급했던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 내전을 치른 상대를 비롯해 혼란을 틈타 독립한 마케도니아가 모조리 떨어져 나간 후의 국가를 뜻한다. 세르비아가 지금도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어 해석하는 데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1998년 발발해 1년 6개월간 진행된 내전으로 사실상 독립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코소보도 연방에서 뛰쳐나갔다. 사실상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가 유이한 연방국이었고, 그 몬테네그로도 독일 월드컵이 벌어진 2006년 이후 결별했다. 1991년 내전 발발 후 단 15년 만에 완벽하게 연방이 해체된 것이다.

이 내전이 비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는, 단순히 어느 강성했던 국가의 불행한 몰락 정도로 마름질할 수 없기 때문이다. 유고슬라비아는 티토가 정권을 잡은 후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하나의 정체성을 쌓아갔던 국가였다. 민족적으로 혹은 종교적으로는 다를지라도 그들은 같은 공간에서 차를 마시고, 함께 일하며 더 나은 나라를 만들고자 하나로 뭉치려고 했다. 이 때문에 국제 사회에서는 냉전 시대에 제3세력을 표방했던 비동맹 연합의 맹주가 될 수 있었고, 동유럽에서 가장 잘 사는 나라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유고슬라비아 축구가 강성했던 것도 이처럼 하나가 된 나라의 힘이 발현됐기 때문일 것이다.

그랬던 나라에서 함께 웃으며 일하던 동료, 옆집 아저씨, 뒷집 청년들은 어느 날 갑자기 적이 되어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어야 했던 일이 발생한 셈이다. 그것도 민족적·종교적으로 극렬히 증오했다. 이보다 더한 비극이 있을까?

다행스럽게도 그 어두운 시기에 축구는 빛이 되어주었다. 당시 전 세계 수많은 유고슬라비아 출신 선수들이 고향의 독립 여부를 떠나 공습을 하지 말아 달라는 메시지가 담긴 셔츠 세리머니를 했다. 한 팀으로 뛰던 이들은 누구보다 통합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가치는 지금 선수들에게도 이어지고 있다. 서로 다른 여권을 가지게 됐어도, 자신이 유고슬라비아인임을 자부하는 선수들이 지금도 지구촌 그라운드를 뜨겁게 만들고 있다. 2018 FIFA 러시아 월드컵 결승에 오른 크로아티아도 그 선봉 중 하나다.

유고슬라비아 출신 K리거가 전하는 유고슬라비아 이야기

수원 삼성 FW 데얀 다미아노비치(현재 국적: 몬테네그로)

“저는 몬테네그로 국적이지만, 여전히 유고슬라비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누나는 무슬림과 결혼했고, 사촌들은 크로아티아인들이죠. 친구 중엔 보스니아 사람들도 있어요. 제 가족 중에는 가톨릭 교도도 있고, 전 정교회를 믿습니다. 다들 친합니다. 저 역시 어디 출신인지, 무슨 종교인지를 갖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아요. 내전은 이런 다양함을 정치적으로 이용한 정치인들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합니다.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됩니다. 축구적 측면에서는 자랑스럽습니다. 모든 국가가 좋은 성적을 내고 있으니까요. 앞으로도 더욱 좋은 성적을 냈으면 합니다.”

전남 드래곤즈 MF 베드란 유고비치(현재 국적: 크로아티아)

“이런 내전이 다시 일어나지 않았으면 해요. 우리는 원래 한 국가였고, 그래서 서로를 존중하고 도우며 평화롭게 살아야 하니까요. 특히 젊은 세대들은 전쟁을 경험하지 않았기에 상대방을 나쁘게 얘기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과거의 일을 잊고 계속 친구로 남아야죠. 사람이 좋으면 지금 국적은 문제가 되지 않아요. 유고슬라비아 축구에 대해서도 한마디를 하자면, 추억하기에는 매우 오랜 시간이 지나버린 것 같아요. 하지만 영광스런 시기가 있었던 건 사실이고, 그 역사는 사라지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강호였다는 걸 많은 축구 팬이 기억해주길 바랍니다.”


찢겨버린 강호 유고슬라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