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구한 사람 3명을 뽑으라고 하면 난 우장춘 박사와 박태준, 그리고 정주영을 뽑겠다.
근데 정주영 선생의 얘기는 (심지어) 드라마로도 만들어 졌으니, 이 블로그에서는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박태준 선생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우장춘 박사에 대한 이야기는 아래 링크에 있다. http://kr.blog.yahoo.com/fastidio4/1248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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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대 이후 태생들은 아마 잘 모를게다. 대한민국이 굶주림에서 헤어난지 얼마되지 않은 국가라는 사실.
일제의 만행과 한국전쟁으로 얼마나 나라에 쑥대밭이 됐는지 직접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은 짐작조차 할수도 없다. 당시 한국민들 최악의 고통은 바로 굶는 거였다. 이 글을 읽는 대다수의 사람들은 굶는다는게 얼마나 이가 갈릴 정도로 비참하고 괴로운 일인지 잘 모를게다. (물론 나도 모른다.)
우리가 현재 "굶는다는거"를 먼옛날, 먼나라 이야기로 여기게 된 건 몇몇 영웅들과 戰前세대 한국인들의 위대한 집념 때문이다.
그 영웅 중의 한명은 바로 박태준 선생. (이후 존칭 생략)
1927년 생. 다들 알다시피, 박태준은 5 16 군사 쿠데타 당시의 박정희의 동지였다. 육사에서 교사와 제자의 관계로 만나 이후 5.16 군사 쿠데타에 참여한다.
당시 박태준은 박정희로부터 "실패할 경우 자신의 가족을 돌봐 달라"는 부탁을 받을 정도로 박정희와 끈적끈적한 보스-참모 관계였다. 쿠데타 성공 후 박태준은 박정희 정권의 "경제 심복"이 돼 국가 경제 건설에 나선다.
1965년 박정희 대통령은 미국 피츠버그 공업단지를 시찰한 후 공업화의 근간이 될 제철소를 구상, 이 프로젝트를 박태준에게 맡긴다.
철은 공업화를 위한 초석이었다. 농기계를 만들려 해도, 철길을 깔려 해도, 공장을 건설하려 해도, 심지어 땅을 파려고 해도 철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포스코 그 광고 있잖우. "소리 없이 세상을 움직여" 그게 과장이 아니란 거다. 철이 없으면 세상은 움직이지 않는 거다. 무엇보다 한국은 자국에서 철이 생산되지 않으면 헐벗고 굶주린 농업 후진국의 단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엔 제철소를 건립할 자본도 기술도 없었다. 게다가 제철소를 건립하라고 도와주는 나라도 없었다.
쿠데타 후 "혁명 공약"을 읊고 있는 박정희. 박정희는 쿠데타 뒤에 "임자, 내가 쿠데타를 잘못한 모양이야. 도둑맞은 초가집을 점거한 꼴이잖아."라는 말을 할 정도로 당시 한국은 농업으로 간신히 연명해먹고 살던 비참한 나라였다.
흙을 모아 제철소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이었던지라 박정희 정부는 처음엔 미국, 독일, 영국, 이탈리아로 구성된 국제 제철 차관단(KISA: Korea International Steel Associates)에게 손을 벌린다.
그러나 KISA는 한국에게 굴욕만 강요했다. KISA는 다른 개발도상국에 먼저 세워진 제철소를 시찰하고, 기술자들은 모두 자신들의 프로그램에 의해 교육 받아야 하고 어쩌고 저쩌고... 말 그대로 식민주의식 기술 이전을 주장했다.
한국을 지들 식민지 취급하던 이 지저분한 서양 자본주의자들은 이래라저래라 어쩌고저쩌고 돈을 빌려 줄까말까 얘기만 늘어 놓다가, IBRD로부터 "한국 제철소는 경제성이 없을 것... 차라리 브라질에 투자해야..."라는 보고서를 받자 아예 등 돌리고 지원을 전면 철회했다.
1966년 제철소 건립을 위한 "전초 기지" 롬멜 하우스를 나서는 박정희(제일 앞 우측)와 측근들. 당시 박태준은 KIST만 믿고 포항 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고 사원 주택단지까지 지어 놓았다. KIST의 "배신" 덕에 한마디로 '낙동강 오리알'이 된 셈. 여기서 박정희는 박태준 앞에서 "이거 남의 집 다 헐어 놓고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라는 푸념을 던질 정도로 상황은 암담했다.
다급해진 박정희와 박태준. 이들이 기댈 수 있는 곳은 이제 일본 뿐이었다. 박태준은 박정희가 김종필을 앞세워 끌어온 "대일 청구권" 자금, 즉 식민지 지배 보상비를 제철소 건립에 사용기로 결정한다. 그리고 제철소 건립에 필요한 기술을 얻기 위해 일본의 철강 회사 경영진들을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설득, 결국엔 기술 협력 약조까지 받아낸다.
박태준은 자본의 출처 때문에 제철 사업 성공에 엄청난 중압감을 느꼈다. 그는 제철소를 "(일제에 희생당한) 선조들 피의 대가"라며 무서운 집념으로 사업을 몰아붙였다.
그는 제철소 건립 개시 당시 직원 모두를 모아 놓고 다음의 유명한 말을 남긴다.
"우리 조상의 혈세로 짓는 제철소입니다. 실패하면 조상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 목숨 걸고 일해야 합니다. 실패란 있을 수 없습니다. 실패하면 우리 모두 우향우 해서 영일만 바다에 빠져 죽어야 합니다. 기필코 제철소를 성공시켜 나라와 조상의 은혜에 보답합시다."
아기다리고기다리던 포항제철 건립식 당시 박정희와 박태준. 박정희는 박태준에게 강력한 지원을 해 주었다. 포항 제철은 초기부터 정치계로부터 온갖 인사 청탁과 납품 로비에 시달렸는데 이런 애로 사항을 접한 박정희는 직접 "종이 마패"를 만들어 박태준의 사업에 일체의 정치 사회적 간섭도 허용하지 않는다는 전권 위임 약조를 해 주었다.
박태준은 공장 건립을 위한 시멘트를 확보하기 위해 전국의 동원 가능한 레미콘 차량을 모두 끌어 모았고, 추석 휴가를 모두 반납했으며, 직원들과 함께 24만개의 볼트를 일일이 점검하고 다니기도 했다.
실수를 하거나 정신 상태가 풀어진 직원들에게 가차없이 그 자리에서 폭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공사 현장에서 박태준에게 얻어 맞아 피멍이 든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공사 현장에서 곧바로 해고돼 집으로 돌아간 사람도 부지기 수였다. 심지어 기술 이전을 해주러 온 일본인도 시원치 않으면 바로 욕 먹이고 집으로 돌려 보낼 정도였다.
그는 잘못을 저지른 직원들에게 "민족 반역자"라는 폭언도 서슴지 않았다. 포항제철을 건립하는 박태준의 머리 속은 "선조들의 피"에 대한 강박관념으로 가득했다.
박정희의 절대적 지지 아래 박태준 특유의 치밀한 "군대식" 경영은 효과를 발휘했다. 제철소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지어졌으면서도 부실이란 털끝만큼도 존재하지 않았다. 1969년 착공에 들어간 뒤 약 3년 반 만인 1973년 포항제철소 1기에서 첫번째 쇳물이 터져 나왔고, 이후 포항 제철은 기적 같은 성장을 거듭한다.
포항제철에서 첫 쇳물이 쏟아져 나왔을 때. 모두들 이 장면을 기억해야 한다. 바로 이 순간이 대한민국이 농업 후진국에서 선진 공업국으로 발돋움하는 전환점, 대한민국이 최단시간 내에 굶주림에서 해방된 위대한 순간이었다.
포항제철은 조업 시작 6개월 만에 1200만 달러의 흑자를 기록했으며(당시 정부와 해외 관계자들은 모두 3년 간은 적자를 면치 못할 것이라 예상했다), 1980년대 철강 생산량은 1200만 톤을 넘어선다.
그 잘난 IBRD가 1968년 한국 대신 제철소 융자를 주었던 브라질은 같은 기간 철강 생산량이 400만 톤에 불과했다.
이후 정권이 수 차례 바뀐 뒤에도 포항제철은 기적적인 성장을 거듭, 세계 최대 규모의 철강회사로 우뚝 선다. (1998년 기준 세계 조강생산량 1위) 포항제철의 성공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 철강 생산량 5위, 조선 1위, 자동차 5위의 산업 대국으로 부상하는 밑거름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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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장춘 박사 얘기 때도 그랬지만, 아직도 서양 자본주의자들이 한국을 구원했다고 믿는 분들은 정신 좀 차리셔야 한다. 서양 애들은 원래 그렇고 그런 넘들이었고 우린 서양 애들 덕본 게 X도 없다. (간접적으로 보면 엄청난 피해만 본 거지.)
우장춘에서 박태준, 그리고 정주영과 이병철... 한국은 순전히 한국인의 힘만으로 전쟁의 참혹함과 굶주림에서 기적적으로 생존한 유일무이한 국가다.
독일이랑 일본도 그랬지 않냐고? 독일 일본이 2차 대전 후에 운 좋게도 미국의 '병참 기지' 역할을 맡지 않았다면 오늘날 이렇게 발전할 수 있었을까? 한국전쟁이 없었다면 일본이 한국보다 잘 살 수 있었을거라 생각하는가?
무엇보다 나는, 이제 60대에 들어서 일선에서 은퇴하시는 대한민국의 모든 노인분들에게 감사드린다.
지금은 다들 잘 모르지만, 역사는 대한민국을 굶주림과 낙후의 치욕에서 구원한 이분들의 위대한 업적을 영원히 기억할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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