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장님의 '수구초심'
발길은 세계를 누벼도 마음은 언제나 고향에
|
효성그룹 창업주 고 조홍제 회장은 생전에 고향인 경남 함안 군북면의 군북초등학교 재건 및 군북중학교 설립 등 고향의 교육 기반을 조성하는 데 힘을 쏟았다. 조 회장(왼쪽)이 군북초등학교를 둘러보고 있다.
|
관광객들로 북적대는 호암 생가(사진 맨 위), 모교인 지수초등학교를 둘러보는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가운데), 공주 유구읍에서 고향 사람들과 윷놀이를 하는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아래)
|
수원에서 진행됐던 사랑의 집짓기 행사에 참여한 최태원 SK그룹 회장
|
『 언제든 가리라. / 마지막엔 돌아가리라. /목화꽃이 고운 내 고향으로 /
아이들이 한울타리 따는 길머리론 /계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고 지나가고 /
대낮에 잔나비가 우는 산골 /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중략)
언제든 가리 /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 모밀꽃이 하이얗게 피는 곳
아이들이 한울타리 따는 길머리론 /계림사 가는 달구지가 조을고 지나가고 /
대낮에 잔나비가 우는 산골 / 등잔 밑에서/ 딸에게 편지 쓰는 어머니도 있었다. (중략)
언제든 가리 / 나중엔 고향 가 살다 죽으리 / 모밀꽃이 하이얗게 피는 곳
<노천명 시인의 '망향(望鄕)' 중에서>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비단 시나 소설 같은 문학 작품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났다 모진 고생을 이겨내고 사회적인 성공을 이룬 사람일수록,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일수록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그리움의 대상으로 승화된다.
보통 사람들은 물론이고 대기업을 일군 '회장님'들도 예외는 아니다. 신격호(87) 롯데그룹 회장은 최근 자신의 고향인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에서 친인척과 고향 사람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마을 잔치를 열었다. 지난 69년 공업용수 확보를 위해 대암댐이 건설되면서 둔기리 일대가 수몰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신 회장이 71년 옛 둔기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둔기회'를 만들어 올해로 39년째 매년 열고 있는 잔치다. 행사 참석자들은 매년 그랬듯이 롯데측에서 준비한 선물세트와 여비를 선물받았고 장기자랑과 체육대회 등도 즐겼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생전의 고향 사랑도 각별했다. 고 정 회장은 지난 98년 500마리의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거쳐 방북 길에 올랐다. 휴전선 너머 강원도 통천이 고향인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금강산 인근 고향에 투자하고 싶다고 말했으며 결국 금강산 관광 및 개성공단 사업으로 이어졌다.
고 정 회장이나 신 회장 뿐아니라 대다수 그룹 회장들은 고향에 진한 애착을 갖고 있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만큼 '금의환향'하듯 자신의 성공으로 이룬 부와 명예를 고향에도 나눠주고 싶어하는 게 공통된 심리다.
이 같은 애향심에는 국경이 없다. 외국 기업들도 고향 이름을 회사명에 적용하는 등 고향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패스트푸드 체인점 KFC(켄터키프라이드치킨)의 첫 자 K는 창업주 할랜드 샌더스의 고향인 켄터키 주를 뜻한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 회장은 자신의 고향인 시애틀에서 창업해 시애틀을 첨단 기술 도시의 대명사로 격상시켰다.
한규석 전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지난 60~70년대 급격한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고향을 떠나 생활해온 현대인들은 현실이 각박한 만큼 마음의 안식처인 고향을 어머니와 동일시하고 그리움의 대상으로 여긴다"며 "사회적으로 성공을 이룬 기업인이나 정치인의 경우 이런 애정을 바탕으로 고향에 물적, 정신적으로 기여하려는 성향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장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대기업 회장들의 남다른 애향심을 이번주 리빙앤조이가 확인해봤다. 』
● 마을잔치 열어 막걸리 한사발 '이장님 같은 회장님'
폐교 위기처한 모교 살리고 장학금 쾌척
공장 설립 등 거액 투자해 지역 발전에 큰 역할
고향은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누구에게나 가슴 속 깊이 따뜻한 울림을 준다. 명절이면 10시간이 넘게 걸려도 고향 가는 길이 즐겁기만한 귀성객들의 표정이나 철조망을 부여잡고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는 실향민의 모습에서 고향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을 엿볼 수 있다.
고향에 대한 특별한 감정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기업인들도 마찬가지로, 특히 힘겹게 회사를 설립한 창업자들에게 고향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들에게 고향은 단순히 태어나고 자라난 곳을 뛰어넘어 현재의 자리까지 오게 한 ‘정신적 자양분이자 버틸 수 있는 힘’이다. 기업 회장님들의 각별한 고향 사랑은 성공 후 고향에 적극 투자해 지역 발전에 기여하거나 장학금 또는 사회복지 시설 기부, 문화 활동 등을 통해 이익을 고향에 환원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 솥바위 전설과 창업주의 고향 사랑
경남 의령군 의령읍 정암리 남강에 있는 바위섬인 솥바위(정암)는 반쯤 물위에 드러나 있는데 수면 아래에는 솥 다리처럼 세 개의 발이 받치고 있다고 한다. 조선 말 한 도인이 이 솥바위를 중심으로 반경 20리(8㎞) 이내에서 큰 부자 3명이 난다고 예언한 후 공교롭게도 재벌 창업주 3명이 인근 마을에서 잇달아 태어나 인구에 회자됐다. 1906년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에서 태어난 효성 조홍제 회장을 시작으로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의 LG 구인회 회장(1907년 출생),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의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1910년 출생)이 주인공이다.
고 구인회 회장의 장남인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자신이 태어난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지난 45년 진주사범학교를 수료하고 첫 교편을 잡은 곳도 바로 승산마을의 모교인 지수초등학교였다. 그곳에서 2년 동안 초등학생을 가르쳤던 구 명예회장은 지난 1999년 학생 수가 줄어 모교가 통폐합될 위기에 처했을 때 안타까운 마음에 체육관과 급식소를 겸할 수 있는 다목적 건물을 후배들에게 선물해 모교 살리기에 나서기도 했다.
효성그룹의 창업주 고 조홍제 회장은 고향인 경남 함안 군북면의 군북초등학교를 재건하고 군북중학교를 설립하는 등 고향의 교육 기반 조성에 힘을 쏟았다. 조 회장의 장학 사업은 오랜 세월 남몰래 이뤄지다 나중에 알려지면서 ‘영남장학회’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아들인 조석래 회장도 “10살 때까지 낙동강과 남강이 감아도는 경관 좋은 함안에서 친구들과 밤도 줍고 고구마 서리도 하면서 냇가에서 멱감고 뛰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상하곤 한다.
고 이병철 회장은 대구에 본거지를 두었던 제일모직에 의령 사람들을 많이 고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들인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도 지난 98년 의령고등학교에 호암학습관 건립 비용을 보탰으며 지난 2007년 11월 19일에는 호암 타계 20주기를 맞아 호암 생가를 복원해 일반에 공개하기도 했다.
■ 고향 이름 딴 회사명도 많아
고향에 대한 사랑을 회사 이름으로 승화시킨 기업인들도 적지 않다.
공주의 옛 이름인 웅진은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이 자신이 일군 회사에 고향의 이름을 넣은 대표적인 사례다. 윤 회장은 본래 인천에 있던 웅진코웨이 공장을 89년에 고향인 공주시 유구읍으로 이전했으며 웅진식품 공장 역시 포천에서 고향으로 96년에 옮겨왔다. 특히 지난 2003년부터는 환경이 급격하게 악화된 유구천을 복원하기 위한 활동에 회장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윤 회장은 “유년 시절 멱감고 물고기 잡으며 놀았던 유구천을 예전으로 되돌려 놓고 싶다”는 바람을 직원들에게 종종 내비친 것으로 전해졌다. 아울러 윤 회장은 평소 지인들에게 공주 유구천에서 재배한 유기농 쌀을 선물하곤 한다.
김승호 보령제약그룹 회장은 지난 57년 종로 5가에 약국을 창업하며 이름을 ‘보령약국’이라고 지었다. 이 역시 고향에 대한 각별한 애정 때문이다. 김 회장에게 고향인 충남 보령군 웅천면은 태어난 곳인 동시에 제약인의 꿈을 갖게 해준 곳이다. 김 회장은 어린 시절 고향에서 형님이 운영하던 약방을 들락거리다 약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볼품없어 보이는 약들이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는 생각에 경외감을 품게 된 김 회장은 50년이 넘게 제약업에 종사하고 있다. 지역 인재 육성을 위해 충남대 약학대학에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지역의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보령장학회’를 통해 매년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충남 예산에 4만 4,000여평의 부지를 매입해 공장을 신설할 예정이다.
화물 운송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승산은 고 구인회 회장과 함께 LG그룹을 세운 고 허만정 회장의 12남매 중 5남인 허완구 회장이 창업했다. 승산이란 사명은 자신과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진주시 승산리를 회사명에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C&그룹의 임병석 회장도 훗날 쎄븐마운틴그룹의 모태가 되는 칠산해운이라는 회사명을 자신의 출생지인 전남 영광 칠산 바다에서 따왔을 만큼 고향과 바다에 대한 애착이 각별했다는 게 측근들의 전언이다.
■ 고향에서 벌이는 사회 복지ㆍ문화 활동
고향 사랑에서 나온 다양한 문화 및 사회 복지 활동도 눈에 띈다. 충남 천안이 고향인 김호연 빙그레 전 회장은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재단법인 김구재단을 지난해 6월 서울에서 고향인 천안으로 옮긴후 올해 백범 서거 60주기를 맞아 지난 3월부터 천안 시민을 대상으로 ‘백범 문화강좌’를 시작했다. 김구재단 관계자는 “문화강좌를 열면서도 얼마나 사람들이 올까 걱정이 많았는데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참석해 앞으로도 정례화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빙그레는 또 천안교육청과 문화인재 육성을 위한 협력 협약을 맺고 2013년까지 천안 지역 초등학교에 필요한 도서와 어학 소프트웨어 등을 제공하기로 했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고향 사랑은 워낙 유명하다. 롯데장학재단은 울산 남구 옥동교육연구단지에 240억원을 들여 과학관을 건립한 뒤 울산시교육청에 무상 기증하기로 했다. 옥동교육연구단지 내 1만 2,000㎡에 들어설 과학관은 5월중 착공에 들어가 내년 상반기 완공될 예정이다. 신 회장의 고향 사랑은 제2의 고향인 부산으로도 이어져 총 1,000억원을 들여 세계적 수준의 오페라하우스를 건립해 부산시에 기부 채납할 방침이다.
강원도 삼척군 출신인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지난 89년 강원일보, 강원여객, 평창운수 등 6개 자회사(시가 기준 총 500억원 규모)의 주식을 출연, 강원도 지역 사회 발전과 소외 계층 지원을 위해 강원사회복지재단을 설립했다. 또 지난 2002년 태풍 ‘루사’로 지역 주민들이 큰 피해를 입었을 때는 직접 사재를 털어 20억원의 수재 의연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당시 “피해를 입은 강원도 지역은 내 개인의 고향이지 동부그룹의 고향이 아니므로 내 개인 재산으로 내야 한다”면서 개인적으로 기부했다는 전언이다.
충북 괴산 출신의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로만손 대표이사 회장)은 지난 1월 중소기업들과 함께 괴산군 청천면 대티리에 있는 장애인시설을 찾아 위문품을 전달하고 장애인들을 위로하기도 했으며 앞서 지난해에는 충북대에 1억원의 장학금을 기탁하기도 했다.
■ 고향에 투자해 지역 경제 발전에 기여
수원의 작은 직물공장에서 시작된 SK에게 있어 수원은 언제나 특별한 곳이다. SK는 한국전쟁 직후인 지난 53년 수원 평동에 세워진 선경직물이 그룹의 모태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고 최종건 SK 그룹 창업 회장의 뜻을 받들어 직계 가족들의 사재 출연을 기반으로 설립된 재단법인 선경최종건회장재단은 수원지역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후원하고 있다. 또 지난 2005년 무주택 소외계층의 주거문제 해결을 위해 조성된 ‘해비타트-SK행복마을’ 역시 수원에 둥지를 틀었으며 당시 집짓기 활동에 최태원 회장도 참여했다.
충남 천안 출신의 고 김종희 한화그룹 회장은 지난 70년 여름 천안지역 4개면이 극심한 수해를 당했을 때 익명을 조건으로 거액의 재해 복구비를 지원했다. 아들인 김승연 회장은 대전시의 대덕테크노밸리 조성 사업 참여 권유를 받고 실무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김 회장은 “내 고향에서 조금 손해를 보면 어떠냐? 지역 숙원 사업이라는데 우리가 좀 도와 주자”며 강행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강원도 철원 출신인 윤세영 태영그룹 회장은 지난 99년부터 2008년 초까지 강원도민 회장을 3번이나 역임하면서 지역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SBS 회장을 겸임하고 있는 윤 회장은 강원도가 사활을 걸고 있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다각적인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태영건설은 지난 2000년부터 회사 창립 기념 선물로 철원 쌀을 수매해 전 직원에게 매년 40㎏씩 나눠주고 있다.
■ 부모님의 고향은 곧 나의 고향
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선친을 비롯해 조상들이 대대로 인천 중구 용유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런 인연 덕분인지 조 회장이 사업에 첫 발을 내딛은 곳도 인천의 한 허름한 창고였다. 조 회장은 인천에서 갈고 닦은 사업 기반을 바탕으로 66년 베트남전쟁 당시 미 군수품 수송용역계약을 체결했으며 이를 발판으로 동양화재보험(67년)과 대한항공공사(KALㆍ69년)를 차례로 인수하며 그룹의 토대를 닦았다. 지난해에는 인천 경제활성화를 위해 인천시와 대한항공이 전략적 제휴를 맺었으며 자회사인 진에어 본사를 인천으로 이전하기로 했다.
제주를 대표하는 브랜드 중 하나인 제주항공을 설립한 애경 그룹 역시 제주도와 남다른 인연이 있다. 애경그룹 창업주이자 장영신 명예회장의 남편인 고 채몽인 사장이 제주도 출신인 것. 제주도를 기반으로 하는 항공사 설립을 추진하던 제주특별자치도측은 창업주 고향이 제주도인 애경그룹에 제주항공 공동 설립을 제안했고 애경그룹이 이를 수락했다는 후문이다.
일본 최대 도시락 프랜차이즈 업체인 혼케 가마도야를 운영하는 재일동포 김홍주 회장의 일본식 이름은 가네하라홍주(金原弘周)다. 일본에서 사업을 하면서도 한국 이름을 버리지 않고 김(金)이라는 성 뒤에 ‘근원 원(原)’자를 사용하는 김 회장은 부모님의 고향인 제주도에 관심이 많았다. 김 회장은 지난 91년부터 제주도 서귀포 내 부동산을 매입해 핀크스 골프장과 포도 호텔, 최고급 리조트 단지인 비오토피아를 차례로 개장했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은 비단 시나 소설 같은 문학 작품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젊은 시절 고향을 떠났다 모진 고생을 이겨내고 사회적인 성공을 이룬 사람일수록, 높은 지위에 오른 사람일수록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향은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그리움의 대상으로 승화된다.
보통 사람들은 물론이고 대기업을 일군 '회장님'들도 예외는 아니다. 신격호(87) 롯데그룹 회장은 최근 자신의 고향인 울산시 울주군 삼동면에서 친인척과 고향 사람 1,000여명이 모인 가운데 마을 잔치를 열었다. 지난 69년 공업용수 확보를 위해 대암댐이 건설되면서 둔기리 일대가 수몰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신 회장이 71년 옛 둔기마을 주민들로 구성된 '둔기회'를 만들어 올해로 39년째 매년 열고 있는 잔치다. 행사 참석자들은 매년 그랬듯이 롯데측에서 준비한 선물세트와 여비를 선물받았고 장기자랑과 체육대회 등도 즐겼다.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 생전의 고향 사랑도 각별했다. 고 정 회장은 지난 98년 500마리의 소떼를 몰고 판문점을 거쳐 방북 길에 올랐다. 휴전선 너머 강원도 통천이 고향인 그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금강산 인근 고향에 투자하고 싶다고 말했으며 결국 금강산 관광 및 개성공단 사업으로 이어졌다.
고 정 회장이나 신 회장 뿐아니라 대다수 그룹 회장들은 고향에 진한 애착을 갖고 있다. 힘들었던 어린 시절을 보냈던 만큼 '금의환향'하듯 자신의 성공으로 이룬 부와 명예를 고향에도 나눠주고 싶어하는 게 공통된 심리다.
이 같은 애향심에는 국경이 없다. 외국 기업들도 고향 이름을 회사명에 적용하는 등 고향에 대한 특별한 감정을 숨기지 않는다. 패스트푸드 체인점 KFC(켄터키프라이드치킨)의 첫 자 K는 창업주 할랜드 샌더스의 고향인 켄터키 주를 뜻한다.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빌 게이츠 회장은 자신의 고향인 시애틀에서 창업해 시애틀을 첨단 기술 도시의 대명사로 격상시켰다.
한규석 전남대 심리학과 교수는 "지난 60~70년대 급격한 산업화 시대를 거치면서 고향을 떠나 생활해온 현대인들은 현실이 각박한 만큼 마음의 안식처인 고향을 어머니와 동일시하고 그리움의 대상으로 여긴다"며 "사회적으로 성공을 이룬 기업인이나 정치인의 경우 이런 애정을 바탕으로 고향에 물적, 정신적으로 기여하려는 성향이 강하다"고 설명했다.
자신이 태어나고 자란 고장에 대한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있는 대기업 회장들의 남다른 애향심을 이번주 리빙앤조이가 확인해봤다. 』
● 마을잔치 열어 막걸리 한사발 '이장님 같은 회장님'
폐교 위기처한 모교 살리고 장학금 쾌척
공장 설립 등 거액 투자해 지역 발전에 큰 역할
고향은 마치 어머니의 품처럼 누구에게나 가슴 속 깊이 따뜻한 울림을 준다. 명절이면 10시간이 넘게 걸려도 고향 가는 길이 즐겁기만한 귀성객들의 표정이나 철조망을 부여잡고 북녘 하늘을 바라보며 눈시울을 붉히는 실향민의 모습에서 고향에 대한 애착과 그리움을 엿볼 수 있다.
고향에 대한 특별한 감정은 사회적으로 성공한 기업인들도 마찬가지로, 특히 힘겹게 회사를 설립한 창업자들에게 고향은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이들에게 고향은 단순히 태어나고 자라난 곳을 뛰어넘어 현재의 자리까지 오게 한 ‘정신적 자양분이자 버틸 수 있는 힘’이다. 기업 회장님들의 각별한 고향 사랑은 성공 후 고향에 적극 투자해 지역 발전에 기여하거나 장학금 또는 사회복지 시설 기부, 문화 활동 등을 통해 이익을 고향에 환원하는 방식으로 나타난다.
■ 솥바위 전설과 창업주의 고향 사랑
경남 의령군 의령읍 정암리 남강에 있는 바위섬인 솥바위(정암)는 반쯤 물위에 드러나 있는데 수면 아래에는 솥 다리처럼 세 개의 발이 받치고 있다고 한다. 조선 말 한 도인이 이 솥바위를 중심으로 반경 20리(8㎞) 이내에서 큰 부자 3명이 난다고 예언한 후 공교롭게도 재벌 창업주 3명이 인근 마을에서 잇달아 태어나 인구에 회자됐다. 1906년 함안군 군북면 동촌리에서 태어난 효성 조홍제 회장을 시작으로 진주시 지수면 승산리의 LG 구인회 회장(1907년 출생), 의령군 정곡면 중교리의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회장(1910년 출생)이 주인공이다.
고 구인회 회장의 장남인 구자경 LG 명예회장은 자신이 태어난 경남 진주시 지수면 승산마을에 대한 사랑이 남달랐다. 지난 45년 진주사범학교를 수료하고 첫 교편을 잡은 곳도 바로 승산마을의 모교인 지수초등학교였다. 그곳에서 2년 동안 초등학생을 가르쳤던 구 명예회장은 지난 1999년 학생 수가 줄어 모교가 통폐합될 위기에 처했을 때 안타까운 마음에 체육관과 급식소를 겸할 수 있는 다목적 건물을 후배들에게 선물해 모교 살리기에 나서기도 했다.
효성그룹의 창업주 고 조홍제 회장은 고향인 경남 함안 군북면의 군북초등학교를 재건하고 군북중학교를 설립하는 등 고향의 교육 기반 조성에 힘을 쏟았다. 조 회장의 장학 사업은 오랜 세월 남몰래 이뤄지다 나중에 알려지면서 ‘영남장학회’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다. 아들인 조석래 회장도 “10살 때까지 낙동강과 남강이 감아도는 경관 좋은 함안에서 친구들과 밤도 줍고 고구마 서리도 하면서 냇가에서 멱감고 뛰놀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회상하곤 한다.
고 이병철 회장은 대구에 본거지를 두었던 제일모직에 의령 사람들을 많이 고용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들인 이건희 전 삼성그룹 회장도 지난 98년 의령고등학교에 호암학습관 건립 비용을 보탰으며 지난 2007년 11월 19일에는 호암 타계 20주기를 맞아 호암 생가를 복원해 일반에 공개하기도 했다.
■ 고향 이름 딴 회사명도 많아
고향에 대한 사랑을 회사 이름으로 승화시킨 기업인들도 적지 않다.
공주의 옛 이름인 웅진은 윤석금 웅진그룹 회장이 자신이 일군 회사에 고향의 이름을 넣은 대표적인 사례다. 윤 회장은 본래 인천에 있던 웅진코웨이 공장을 89년에 고향인 공주시 유구읍으로 이전했으며 웅진식품 공장 역시 포천에서 고향으로 96년에 옮겨왔다. 특히 지난 2003년부터는 환경이 급격하게 악화된 유구천을 복원하기 위한 활동에 회장이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윤 회장은 “유년 시절 멱감고 물고기 잡으며 놀았던 유구천을 예전으로 되돌려 놓고 싶다”는 바람을 직원들에게 종종 내비친 것으로 전해졌다. 아울러 윤 회장은 평소 지인들에게 공주 유구천에서 재배한 유기농 쌀을 선물하곤 한다.
김승호 보령제약그룹 회장은 지난 57년 종로 5가에 약국을 창업하며 이름을 ‘보령약국’이라고 지었다. 이 역시 고향에 대한 각별한 애정 때문이다. 김 회장에게 고향인 충남 보령군 웅천면은 태어난 곳인 동시에 제약인의 꿈을 갖게 해준 곳이다. 김 회장은 어린 시절 고향에서 형님이 운영하던 약방을 들락거리다 약에 대한 호기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볼품없어 보이는 약들이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는 생각에 경외감을 품게 된 김 회장은 50년이 넘게 제약업에 종사하고 있다. 지역 인재 육성을 위해 충남대 약학대학에 매년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으며 지역의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보령장학회’를 통해 매년 장학금을 지원하고 있다. 특히 충남 예산에 4만 4,000여평의 부지를 매입해 공장을 신설할 예정이다.
화물 운송을 주요 사업으로 하는 승산은 고 구인회 회장과 함께 LG그룹을 세운 고 허만정 회장의 12남매 중 5남인 허완구 회장이 창업했다. 승산이란 사명은 자신과 아버지의 고향인 경남 진주시 승산리를 회사명에 반영한 것이라고 한다. C&그룹의 임병석 회장도 훗날 쎄븐마운틴그룹의 모태가 되는 칠산해운이라는 회사명을 자신의 출생지인 전남 영광 칠산 바다에서 따왔을 만큼 고향과 바다에 대한 애착이 각별했다는 게 측근들의 전언이다.
■ 고향에서 벌이는 사회 복지ㆍ문화 활동
고향 사랑에서 나온 다양한 문화 및 사회 복지 활동도 눈에 띈다. 충남 천안이 고향인 김호연 빙그레 전 회장은 사재를 출연해 설립한 재단법인 김구재단을 지난해 6월 서울에서 고향인 천안으로 옮긴후 올해 백범 서거 60주기를 맞아 지난 3월부터 천안 시민을 대상으로 ‘백범 문화강좌’를 시작했다. 김구재단 관계자는 “문화강좌를 열면서도 얼마나 사람들이 올까 걱정이 많았는데 예상보다 훨씬 많은 인원이 참석해 앞으로도 정례화할 계획”이라고 설명했다. 빙그레는 또 천안교육청과 문화인재 육성을 위한 협력 협약을 맺고 2013년까지 천안 지역 초등학교에 필요한 도서와 어학 소프트웨어 등을 제공하기로 했다.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고향 사랑은 워낙 유명하다. 롯데장학재단은 울산 남구 옥동교육연구단지에 240억원을 들여 과학관을 건립한 뒤 울산시교육청에 무상 기증하기로 했다. 옥동교육연구단지 내 1만 2,000㎡에 들어설 과학관은 5월중 착공에 들어가 내년 상반기 완공될 예정이다. 신 회장의 고향 사랑은 제2의 고향인 부산으로도 이어져 총 1,000억원을 들여 세계적 수준의 오페라하우스를 건립해 부산시에 기부 채납할 방침이다.
강원도 삼척군 출신인 김준기 동부그룹 회장은 지난 89년 강원일보, 강원여객, 평창운수 등 6개 자회사(시가 기준 총 500억원 규모)의 주식을 출연, 강원도 지역 사회 발전과 소외 계층 지원을 위해 강원사회복지재단을 설립했다. 또 지난 2002년 태풍 ‘루사’로 지역 주민들이 큰 피해를 입었을 때는 직접 사재를 털어 20억원의 수재 의연금을 기부하기도 했다. 김 회장은 당시 “피해를 입은 강원도 지역은 내 개인의 고향이지 동부그룹의 고향이 아니므로 내 개인 재산으로 내야 한다”면서 개인적으로 기부했다는 전언이다.
충북 괴산 출신의 김기문 중소기업중앙회 회장(로만손 대표이사 회장)은 지난 1월 중소기업들과 함께 괴산군 청천면 대티리에 있는 장애인시설을 찾아 위문품을 전달하고 장애인들을 위로하기도 했으며 앞서 지난해에는 충북대에 1억원의 장학금을 기탁하기도 했다.
■ 고향에 투자해 지역 경제 발전에 기여
수원의 작은 직물공장에서 시작된 SK에게 있어 수원은 언제나 특별한 곳이다. SK는 한국전쟁 직후인 지난 53년 수원 평동에 세워진 선경직물이 그룹의 모태라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고 최종건 SK 그룹 창업 회장의 뜻을 받들어 직계 가족들의 사재 출연을 기반으로 설립된 재단법인 선경최종건회장재단은 수원지역 고등학교를 중심으로 후원하고 있다. 또 지난 2005년 무주택 소외계층의 주거문제 해결을 위해 조성된 ‘해비타트-SK행복마을’ 역시 수원에 둥지를 틀었으며 당시 집짓기 활동에 최태원 회장도 참여했다.
충남 천안 출신의 고 김종희 한화그룹 회장은 지난 70년 여름 천안지역 4개면이 극심한 수해를 당했을 때 익명을 조건으로 거액의 재해 복구비를 지원했다. 아들인 김승연 회장은 대전시의 대덕테크노밸리 조성 사업 참여 권유를 받고 실무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참여하기도 했다. 당시 김 회장은 “내 고향에서 조금 손해를 보면 어떠냐? 지역 숙원 사업이라는데 우리가 좀 도와 주자”며 강행 의지를 보였다고 한다.
강원도 철원 출신인 윤세영 태영그룹 회장은 지난 99년부터 2008년 초까지 강원도민 회장을 3번이나 역임하면서 지역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SBS 회장을 겸임하고 있는 윤 회장은 강원도가 사활을 걸고 있는 평창 동계올림픽 유치를 위해 다각적인 노력도 기울이고 있다. 태영건설은 지난 2000년부터 회사 창립 기념 선물로 철원 쌀을 수매해 전 직원에게 매년 40㎏씩 나눠주고 있다.
■ 부모님의 고향은 곧 나의 고향
고 조중훈 한진그룹 회장은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그의 선친을 비롯해 조상들이 대대로 인천 중구 용유동에서 살았다고 한다. 그런 인연 덕분인지 조 회장이 사업에 첫 발을 내딛은 곳도 인천의 한 허름한 창고였다. 조 회장은 인천에서 갈고 닦은 사업 기반을 바탕으로 66년 베트남전쟁 당시 미 군수품 수송용역계약을 체결했으며 이를 발판으로 동양화재보험(67년)과 대한항공공사(KALㆍ69년)를 차례로 인수하며 그룹의 토대를 닦았다. 지난해에는 인천 경제활성화를 위해 인천시와 대한항공이 전략적 제휴를 맺었으며 자회사인 진에어 본사를 인천으로 이전하기로 했다.
제주를 대표하는 브랜드 중 하나인 제주항공을 설립한 애경 그룹 역시 제주도와 남다른 인연이 있다. 애경그룹 창업주이자 장영신 명예회장의 남편인 고 채몽인 사장이 제주도 출신인 것. 제주도를 기반으로 하는 항공사 설립을 추진하던 제주특별자치도측은 창업주 고향이 제주도인 애경그룹에 제주항공 공동 설립을 제안했고 애경그룹이 이를 수락했다는 후문이다.
일본 최대 도시락 프랜차이즈 업체인 혼케 가마도야를 운영하는 재일동포 김홍주 회장의 일본식 이름은 가네하라홍주(金原弘周)다. 일본에서 사업을 하면서도 한국 이름을 버리지 않고 김(金)이라는 성 뒤에 ‘근원 원(原)’자를 사용하는 김 회장은 부모님의 고향인 제주도에 관심이 많았다. 김 회장은 지난 91년부터 제주도 서귀포 내 부동산을 매입해 핀크스 골프장과 포도 호텔, 최고급 리조트 단지인 비오토피아를 차례로 개장했다.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Living daily > 위대한 인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년 이병철은 진주시장에서 무엇을 보았나 (0) | 2010.01.23 |
---|---|
아드레날린과 합성물인 클로로포름 화합물 (0) | 2009.11.18 |
3-성(星) 삼,금,효 (성) (0) | 2009.10.08 |
중국 공산주의 혁명가 마우쩌뚱 (0) | 2009.01.08 |
대한민국를 구한 또다른 위인, 박태준 (0) | 2008.07.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