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한 국 인

미술가 최정화

나 그 네 2009. 1. 9. 12:52

 

미술가 최정화

 

 

 


 

 

 

 

최정화는 현재 가장 많은 수의 비엔날레와 해외 전시로부터 ‘러브 콜’을 받는 한국의 대표적 작가다. 그러나 정작 그는 자신의 직함을 두고 좀 다르게 설명한다. “나, 작가 아니에요. 디자이너가 더 맞을 걸요? 아니면 건축가도 가능하겠군요.” 그렇게 많은 전시에 참여하는 사람이 스스로 작가가 아니라는 통에 의아해 하니, 눈치 빠른 그가 얼른 말을 이었다. “내가 만든 말인데, AAA라고. Always Almost Artist라는 뜻이에요. 이 말이 저한테 ‘딱’ 인 것 같아요.” 번역해보면 ‘항상 거의 예술가’ 정도 되나? 나, AAA예요?

 

최정화는 일찍이 신인 시절 중앙미술대전에서 두 번이나 상을 탔고, 최근에도 일민미술상과 올해의 예술상까지 수상한 작가다. 이만큼 ‘완벽한’ 경력을 두고도 ‘거의’ 작가라고 말하는 최정화는, 미술이 가장 재미없는 분야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전시장 안에 있는 미술 작품들은 참 고루해요. 그 보다도 종로 낙원상가나 동대문아파트, 아니면 성남 모란시장에 가보세요. 그 자체가 ‘아트’죠.” 다른 나라에 가서도 마찬가지다. 작품 설치를 마친 후 시내 관광을 나서도 미술관은 가지 않는다. “미술관은 잘 안가요. 오히려 장식미술관이나 자연사박물관 같은 데면 몰라도요. 아, 대신 유명한 건축물은 챙겨보는 편입니다. 공간은 그곳에 직접 가서 느껴봐야 알거든요. 진짜 ‘쎈’ 곳은 세계대전 이후에 남아 있는 유럽 쪽의 벙커나 폐허, 공동묘지 같은 덴데.” 사실 그가 ‘직업병’처럼 챙겨가는 곳은 따로 있다. “현지의 재래시장이나 벼룩시장은 꼭 찾아갑니다. 작업에 쓰이는 재료 중 상당수를 그런 데서 얻기도 하구요. (주렁주렁 살림살이를 달고 있는 홈리스 차림의 인형을 꺼내 보이며) 이거 한번 보세요. 칠레에서 산 건데, 이 모습이 바로 미래의 최정화에요.”


 

 

실제로 그는 작가 말고도 직함이 많다. 최정화는 현대무용가 안은미의 무대 디자이너, <성냥팔이 소녀의 재림>이나 <복수는 나의 것> 등 영화 미술감독으로도 활약한 바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지난 20년 동안 맡고 있는 가슴시각개발연구소의 소장이라는 직함이 가장 확실한 듯하다. 그런데 시각개발연구소는 무엇을 하는 곳일까? “명함, 잡지, 도록에서 영화, 인테리어, 건축, 무대, 공공미술까지 ‘보이는 모든 것’을 디자인합니다.” 그렇다면, 자칫 야하게 들리기도 하는 ‘가슴’이라는 이름은? “제게 중요한 원칙은 ‘가슴’, 즉 마인드입니다. 단지 기술이 아닌, 가슴을 깨우는 통찰력이 보이는 시각물을 만들어내자는 겁니다.”

 


최정화가 1989년 창립한 가슴시각개발연구소는 개성 넘치는 스타일로 이미 업계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선점했다. 최정화 혹은 가슴시각개발연구소에서 인테리어를 맡았던 곳으로는 인사동의 쌈지길·한국국제아트페어의 VIP 라운지·인사미술공간·서울문화재단·오룸갤러리 같은 문화예술 관련 기관은 물론, 에스콰이어 소르젠떼·보티첼리·쌈지스포츠 같은 패션 매장부터 홍대의 올로올로·종로의 오존·대학로의 살빠 같은 술집까지 다양하다. 가슴시각개발연구소는 최근 주식회사 가슴으로 발전, ‘사세 확장’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젊은 시절, 디자인 회사 A4파트너스에서 만나 지금껏 친구이자 동업자로 지내온 최미경이 주식회사의 대표를 맡았다. 사옥도 서울산업대 내 서울테크노파크로 이전했다. 훨씬 넓어져 그 동안 ‘넝마주이’ 최정화가 모아온 세계의 진기하고 기묘한 물건들이 제 자리를 잡을 수 있다. 1995년부터 쓰였던 서울 종로구 낙원아파트 1514호는 이제 미팅룸으로 쓰이고 있다. 2009년 사업 일정도 빡빡하게 차 있다. 광주디자인비엔날레, 명륜동 서울여대 리노베이션, 통의동 통통통 프로젝트 등으로 그 규모 또한 만만찮다.

 

최근 진행됐던 프로젝트 중에서 가장 큰 규모를 꼽으라면 2008년 가을에 열렸던 서울디자인올림픽일 것이다.<천만시민 한마음 프로젝트-모이자 모으자!>라는 제목으로 전국에서 세제통, 생수병 등 폐 플라스틱 생활제 1,712,462개를 모았다. 이 엄청난 양의 작품 재료는 488대의 트럭에 실려 와 3,638명의 인력이 동원되어 잠실 올림픽 주경기장 외벽 전체를 둘렀다.

 

다소 황당무계해 보이는 이 프로젝트를 두고 관람객들의 반응은 가지각색이었다. 작가는 ‘신기하고 재밌다’는 호평부터 ‘거대한 쓰레기’라는 혹평까지 모두 수용하는 듯하다. 그는 담담하게 말했다. “그거야 보는 사람 맘이죠. 제작 과정부터 사후 평가까지 이 프로젝트의 일부니까요.” 그가 지금처럼 관객의 반응을 ‘쿨’하게 받아들이기까지는 많은 일이 있었다. 대표적인 예로는 2007년 경남 창원시청 외벽을 오색 천으로 감싼 작품을 두고 ‘무당집’ 같다는 민원이 들어와 철거를 당했던 일이다. 생생한 삶 속으로 파고드는 작품, 보다 많은 사람들이 감상할 수 있는 작품. 모든 작가들의 꿈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공공성’을 띠는 작품, 소위 ‘공공 미술’이라고 불리는 조형물은 예상치 못했던 논란과 오해에 휩싸일 수 있다.

 

종로1가 사거리 밀레니엄타워(구 화신백화점 자리) 뒤편에 최정화의 대표적 공공미술 작품이 있다. 바로 <세기의 선물>이다. 국보 2호 원각사지 10층 석탑을 플라스틱으로 본떠내어 금색 칠을 해놓은 것이다. 물론 가짜지만, 문화재 보호 차원에서 유리 벽으로 쌓인 채 탑골 공원에 쓸쓸히 서 있는 진짜 석탑보다 훨씬 생명력이 있어 보인다. 무엇이 진짜이고 무엇이 가짜인가. 또한 최정화와 최미경이 만든 가구 브랜드 ‘룸 스케이프’에서 제작한 가짜 루이비통 모노그램 소파를 보라. 무엇이 작품이고 무엇이 상품인가.

 

 

최정화는 이렇게 진짜와 가짜, 작품과 상품 그리고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흩뜨리고, 교란시키고 또 그 간극을 즐긴다. 그는 “날조에 날림을 더하면 완성”이라면서, 자신의 삶과 예술의 키워드로 “생생, 싱싱, 빠글빠글, 짬뽕, 빨리빨리, 엉터리, 색색, 부실, 와글와글”이라고 정리했다. 폐 현수막, 생활용품, 바가지, 이태리 때 밀이 타올, 트로피, 비닐, 쿠킹 호일 등을 재료로 삼는 최정화의 작품을 두고, 흔히 사람들은 ‘키치’라고 부른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미술관보다 재래시장을 가장 좋아하는 그에게는 명품 브랜드나 청담동이 ‘키치’고 ‘싸구려’다.

 

이러한 그의 예술 철학이 가장 극명하게 드러났던 전시는 2006년 일민예술상을 수상하면서 일민미술관에서 개최했던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전이다. 최정화의 초기작부터 최근작까지 골고루 선보이는 수상기념 개인전이 열릴 것이라는 예상을 깨고, 이번에는 큐레이터로 나서 그룹전을 기획했다. 일민미술관이 소장한 몇 억 원짜리 유명작품부터 몇 만 원짜리 이발소그림, 몇 천 원짜리 장난감을 뒤섞여 배치시켰다. “미국 현대미술가 댄 플라빈의 3억짜리 형광등 설치 작품과 전파사에서 파는 그냥 3000원짜리 형광등의 차이는? 사실상 없어요. 2 99,997,000원이라는 가격 차이는 그저 룰(Rule)과 제도에서 비롯됐을 뿐이죠. 미술요? 이게 짜고 치는 고스톱이라니까요.” 또한 폐교에서 훔쳐온 이승복 동상, 어느 수집가의 식물 표본 등을 전시장에 갖다 놓았고, 심지어 소쿠리와 옷 등은 즉석에서 판매했다. 다시 말해, <믿거나 말거나 박물관>전은 최정화의 짬뽕미학을 적나라하게 펼친 장터이자, 기존의 룰을 맘껏 비아냥거린 ‘데뷔 20주년 쇼’였던 것이다.

 

 

이렇게 삐딱한 기질을 타고난 최정화에게는 또 다른 모습이 있다. 군인 아버지를 둔 탓으로 어린 시절부터 몸에 밴 군기 때문에 그는 지금도 아침 6시에서 7시에는 일어나, 산책을 즐기며 책도 책상에 바른 자세로 앉아서만 읽는다. 근면 성실하게 사는 모습은 공무원 같기도 하고, 핸드폰과 인터넷을 사용하지 않는 모습은 고집스런 예술가 같기도 하다. 친구 사이기도 한 평론가 이영준의 표현을 빌자면 최정화는 ‘여럿이자 하나’인 사람으로, 매우 복잡하고 혼성적인 정체성의 소유자다.

 

최정화가 작가로 데뷔한 시기는 1986년과 1987년 중앙미술대전에서 각각 장려상과 대상을 탔던 때로 봐야 할 것이다. “대상을 수상하면 작품을 매입해주고 부상으로 유럽여행을 보내준다 길래 출품했어요. 상을 타기 위해 일부러 심사위원 구미에 맞는 신표현주의 회화 작품을 그려냈죠.” 이 영악한 청년 작가는 결국 목표대로 대상을 거머쥐고 유럽행 티켓을 끊었다. “그런데 막상 유럽에 가보니 재미 없더라구요. 거대한 미술관 안에 온통 과거들만 갇혀 있을 뿐, 현재와 미래가 빠진 거에요.” 중앙미술대전 이후 본격적으로 작가 활동을 할 수 있었지만, “그림으로 사람들을 속이기가 너무 쉬워서 그림은 집어치웠다”는 최정화는 인테리어 디자인 회사에 입사했다. 일하면서 홍익대 동기인 작가 고낙범, 이불, 홍성민 등과 함께 ‘뮤지엄’이란 그룹을 결성했다. 최정화는 자신이 유럽에서 보고 온 죽어 있는 뮤지엄이 아닌, 잡것과 날것들이 살아 숨 쉬는 뮤지엄을 지향하며 <선데이 서울> <쇼쇼쇼> 등의 재기 발랄한 전시 활동을 이어갔다.

 

최정화의 작품은 특히 해외에서 인기가 높다. 1년 중 거의 반은 전시 때문에 해외에서 체류한다. 1월 말, 런던에 있는 한국문화원 내 갤러리에서 열릴 ‘전광석화(電光石火)’라는 제목의 개인전의 작품 준비는 대략 끝난 눈치다. 또한 3월, 일본 토와다미술관에서도 대규모 개인전이 열린다. 심지어 일본에서는 중학교 일본 미술교과서에도 이름이 올라 있을 정도로 지명도가 높다. 며칠 전 다녀온 베이징의 갤러리 Pekin Fine Arts에서는 중국에서 구한 여러 명의 울트라맨을 ‘엎드려 뻗쳐’ 시킨 작품이 큰 호응을 받았다고. 남이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가져와 배열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모방해서 짝퉁을 만드는 게 전부인 최정화의 작업이 왜 이렇게 인기일까? 2005년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의 커미셔너였던 김선정은 1990년대 한국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했던 두 작가로 박이소와 최정화를 꼽으면서 말했다.

 



“최정화는 한국의 근대화가 만들어내 온 대량생산과 소비를 과잉 집착과 과잉 소비라는 키워드로 해석하여 특유의 한국적 팝을 만들어냈다. 예컨대 빠른 개발에 따른 구조의 유약성과 무너짐을 ‘쌓기’를 통해 보여준다”고 설명했다. 또한 평론가 임근준의 말은 이렇다. “아뿔사, 이 이의 작업은 서구적 아방가르드로는 해석이 되지 않는 일종의 불교 미술이로구나.” 임근준은 최정화의 작업 방식을 일종의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 수행으로 간주하며 그를 불교적 예술가로 정의한다. 그러나 정작 작가는 어떤 명확한 의도나 시나리오를 가지고 작업에 임하는 것 같아 보이진 않는다. “미술은 취미처럼 늘 즐기는 거지, ‘해야겠다’ 해서 되는 게 아니랍니다.” 그래도 여전히 ‘해야겠다’ 하는 후배 작가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지 않겠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잠시 말을 멎더니 기자에게 친히 소주와 맥주를 한잔 섞어 건넸다. “잘 놀자, 응? 술 많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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