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한 국 인

영화감독 박찬욱

나 그 네 2009. 1. 9. 12:56

 

영화인 박찬욱

 


“자기 자신에게 깊게 충실하다 보면, 의식적인 노력을 하지 않아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사실 상업영화의 문법이라는 게 거기서 거기죠. 장르영화를 찍다 보면 관습이라는 게 있고, 또 시대의 유행이라는 것도 있고요. 그러다 보면 다른 영화와 비슷해지고, 자기 자신을 잃게 돼요. 그럴 때 적절한 균형을 추구하는 게 어려운 거죠.” 그가 타인의 영화에 대한 ‘참조’를 통해 자신의 세계를 쌓았을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긴 세월 동안 그를 따라다녔던 ‘영화광’ 이미지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영화가 시작되는 지점은 (당연히!) 자기 자신이다. 올해 개봉을 앞두고 있는 <박쥐>도 마찬가지다.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했고, 그 성장 배경에서 출발한 영화죠. <박쥐>는 뱀파이어 영화를 만들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영화가 아니라, 사제가 등장하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서 시작한 영화예요.”

 

여기서 그의 유년기와 청소년기에서 중요했던 요소를 하나 더 추가한다면, 그것은 ‘미술적 취향’이었다. “미술에 친숙한 환경이었죠. 건축을 전공하신 아버지는 미술에도 관심이 많았어요. 외할아버지도 서화 컬렉션이 있으실 정도였죠. 어린 시절부터 그런 걸 보고 자랐고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어요. 자연스레 미술 쪽으로 진로를 잡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동생이 너무 잘하는 거예요.(웃음) 그래서 ‘나는 이쪽은 아니다’라고 생각한 면도 없지 않아요.” 그리고 미술에 대한 관심과 함께, 문학과 인문학에 대한 꾸준한 축적도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다.

 

그로테스크하고 초현실적인 그림들에 끌렸던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취향에 대해 조금씩 인식했고, 고등학교 때 ‘영화감독’이라는 직업을 막연하게나마 떠올렸다. 하지만 선뜻 영화과를 지원하진 못했다. “영화감독은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죠. 리더십도 강하고 정열적이고 터프한 사람이나 하는 직업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저는 소극적이고 내성적이라, 그릇이 안 된다고 본 거죠.” 자신이 “공부하는 사람”이 될 거라고 생각했던 그는 대학에서 ‘철학’을 전공으로 택했다. 그의 관심사는 ‘미학’이었지만 학과 커리큘럼과는 조금 거리가 있었다. 이후 그는 사진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자연스레 영화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가 다니던 대학엔 영화과가 없었지만, 도서관엔 영화 관련 원서들이 꽤 많은 편이었다. 한글로 된 영화 책이 거의 없던 시절 그는 원서를 통해 영화에 관한 지식을 쌓았다. 책 뒤에 꽂혀 있는 도서 카드엔 앞서 빌려간 사람들의 학과와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영화에 관심을 가진 학생들을 알게 되고, 모여서 영화도 보았다. 그리고 (비록 완성되진 않았지만) 단편영화를 찍기도 했다. 이 시기에 만난 앨프레드 히치콕의 <현기증>(58)은, 영화감독이 되겠다는 결심을 굳히게 한 작품. 대학 졸업 후 그는 충무로로 향한다.

 

그가 연출부 생활을 시작한 1980년대 말의 충무로는, 전근대적 제작 방식이 지배하고 있었다. ‘영화 청년’들에겐 견디기 힘든 시절. 그는 두세 편의 영화를 거친 후 잠시 현장을 떠났다. 이후 영화사 기획실에서 일하면서 잠시 세월을 보낸다. 이때 그에게 다시 현장으로 돌아갈 기회가 온다. 1990년대 초는 가전제품 관련 대기업들이 소프트웨어 확보를 위해 영화산업에 진출하던 시기였고, 그 중 한 곳이 그에게 1억 원 안팎의 제작비로 영화 제작을 제안했다. 박찬욱 감독이 스물아홉살 때 찍어 서른 살 때 개봉한 영화 <달은…해가 꾸는 꿈>(92). “일찍 데뷔한다고 좋은 게 아니라는 증거 같은 영화? (웃음). 준비가 덜 됐는데 다 됐다고 생각하고 데뷔작을 찍었어요.” 그때 그 영화를 만들지 않았다면, 그의 데뷔작은 <복수는 나의 것>이나 그와 비슷한 방향의 영화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달은… 해가 꾸는 꿈>으로 감독이 되었고, 흥행과 비평 양면에서 큰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인상적이었던 건 젊은 영화인들의 격려였다. “이현승, 김성수, 여균동 감독은 당시엔 아는 사이가 아니었는데 찾아와 격려를 해주었죠. 저예산이지만 나름 스타일 있게 영화를 찍었다면서.”

 


작은 격려와 두 번째 작품 사이엔 5년의 공백이 있었고 그는 평론가로 활동한다. 어느 인터뷰에서 농담처럼 이야기했듯 그는, 평론가로 데뷔해 영화감독이 된 것이 아니라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후 평론가가 된 ‘희귀한 케이스’였다. 각종 매체에 영화평을 기고하던 그는 이 시기 ‘B 무비’ 취향을 강하게 드러냈고, 1993년 즈음에 만난 이훈 감독은 박찬욱 감독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마스카라>(95)로 데뷔한 이훈 감독은 1995년에 화재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그의 나이, 서른세 살이었다.) “원래 B 무비를 좋아했지만, 그 친구를 만나면서 더 좋아하게 됐죠. 이훈 감독에겐 미국 유학 시절에 구한 수많은 영화들이 있었어요. 듣도 보도 못한 영화들이었는데, 그의 감식안은 정말 놀라웠죠. 영화뿐만 아니라 음악도요. 평론가들도 깜짝 놀랄 수준이었으니까요. 그 친구는 그냥 자기가 좋아서 영화를 추천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면 모두 다 영화사적으로 평가하는 컬트 걸작들이었어요. 이훈과 만나면서 상당히 많은 변화를 겪었죠.” 곽재용 감독, 이무영 감독, 윤태용 감독, 조영욱 음악감독, 이재순 프로듀서, 오동진 기자 등은 당시 함께 어울리던 지인들이었다.

 

수많은 영화를 보고 수많은 글을 썼던 5년. 영화로 만들고 싶은 이야기는 계속 떠오르고, 자신도 있었던 시기. 하지만 그의 필모그래피는 전진하지 못했다. “프로젝트 하나가 엎어질 즈음이면, 다른 제의가 들어오는 거예요. 그래서 6개월 정도 진행하다 보면 또 엎어지고. 그러면 다른 영화사에서 또 전화가 와요. 계속 아슬아슬하게 끌려 다닌 셈이죠. 그 사이에 1~2개월만 공백이 있었어도, 영화를 그만두거나 유학을 갔을지도 몰라요.” 그런데 정말 우연처럼, 끊임없이 ‘미완의 프로젝트’는 이어졌다. “충무로의 모든 사람들이 짜고서 나를 골탕 먹이는 거라는 피해 망상이 생길 정도였죠. (웃음)” 이 시기 프로젝트 중 하나는 록 밴드의 이야기인 <야간 비행>. 영화화되진 못했지만, 당시 연출부였던 류승완 감독과 만나는 계기가 된다.

 

 

절치부심의 시간 끝에 그는 두 번째 영화 <삼인조>(97)를 만들 기회를 잡게 된다. 한 번 실패를 겪은 후였기에, 박찬욱 감독에게 가장 중요한 건 ‘대중’이었고, 그런 압박감은 영화에 반영되었다. “나의 판단 착오가 그 영화를 어정쩡하게 만든 건 아닐까 싶어요. 이도 저도 아닌 영화를 만든 거죠. 이무영 감독과 함께 쓸 때만 해도, 거친 질감에 무지막지하게 달려가는 영화였어요. 처음엔 그런 영화를 꿈꾸었고 눈치 안 보고 만들려고 했는데, 영화를 찍다 보니 잊게 된 거죠.”

 

 

세 번째 영화인 <JSA>까지는 3년의 시간이 더 필요했지만, 그에겐 이상한 자신감이 있었다. “계속 시나리오를 썼지만, 딱히 관심을 보이는 영화사는 없었어요. 그런데 세 번째 영화를 만들면 꽤 잘 만들 것 같은 자신감이 있었어요. 무슨 근거인지는 모르지만 ‘이제 좀 알 것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래서 악착같이 버텼죠.” 이때 <JSA>가 그에게 다가왔고, 이 영화의 놀라운 흥행은 이후, 어쩌면 그의 데뷔작일 수도 있었을 <복수는 나의 것>으로 이어진다.

 

처음부터 이른바 ‘복수 3부작’을 구상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복수는 나의 것>으로 시작된 3부작을 통해, 박찬욱 감독은 자신의 인장을 뚜렷이 새기게 되었다. <올드보이>로 국제적인 평가를 받으며 그는 좀 더 ‘글로벌’한 예술가가 되었고, <친절한 금자씨>로 3부작을 마무리하며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통해 새로운 시도를 했다. 우리가 잘 안다고 생각했던 배우와 스타들은 그의 영화를 통해 ‘새로운 즐거움’을 관객에게 선사했고, 감독의 독특한 비주얼과 폭력에 대한 날 선 묘사는 낯설음과 충격을 안겨주기도 했다.

 

“긴 시간 동안 영화를 못 만들면서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게, 돌이켜보면 조금 신기하긴 해요. 나름 자신이 있어서 그랬겠죠. (다른 사람이 만든 영화를 보면서) 나 같으면 더 잘 만들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어요. 기회만 오면 세상을 놀라게 할 거라는. 결국은 근거 없는 망상이라는 게 드러나기도 했어요. 하지만 그런 게 있어야 버틸 수 있었어요.” 힘든 상황에 처한 예술가가 스스로를 지키고 살아남기 위해 가져야 했던, 자신에 대한 믿음. “그런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남들 욕도 좀 하고, 내가 더 낫다고 오만도 좀 떨고……특히 젊은이들은 그래도 돼요. (웃음)” <올드보이>의 칸 영화제 수상을 계기로, 그의 영화는 전세계의 관객들과 만나게 되었고 베니스(친절한 금자씨)와 베를린(싸이보그지만 괜찮아)도 그에게 초청장을 보내왔다. 하지만 그는 국제영화제에서 상을 받는다는 건 상당 부분 ‘운’이라고 했다. 그리고 시상식보다는 시사회의 감동이 더 컸다고 이야기한다.


 

“상영이 끝나고 나오는 기립박수가 의례적이긴 해요. 하지만 그들의 표정을 살펴보았을 때 관객들이 진심으로 내 영화를 좋아한다는 게 느껴지면 감격스럽죠. 서양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아서 좋은 게 아니라, 전세계에서 온 관객들이 한 감독에게 순수하게 경의를 표해주는 마음이 감격적인 거예요.” 여기서 이후 3부작과 <싸이보그지만 괜찮아>를 만들면서, 그에게 일어난 변화 중 하나를 꼽는다면 그건 ‘여성성’이다. <올드보이>를 만든 후부터 그는 남성적인 영화를 만드는 데 조금은 지쳤다.

 


“딸이 조금씩 커가면서 그런가? 어느 순간 여성들과 있는 게 좋아지더라고요. 나이 들면서 남자들이 하는 이야기들을 유심히 관찰해 보면, 참 유치하고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고. (웃음) 그런데 여성들과의 대화는 재미있고 섬세해요. 그런 맥락에서 <친절한 금자씨>라는 영화도 하게 된 것 같고, 여성 스태프들도 저를 언니 대하듯 하고…(웃음). <박쥐>도 예전 영화에 비해 훨씬 더 여성적인 영화라고 느끼게 될 거예요.”

 

그는 한 인터뷰에서 “자신의 묘비명을 스스로 쓴다면?”이라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는 69편의 장편영화와 35편의 단편영화를 연출하고 48편의 영화에 각본을 제공했다. 영화감독 치고는 비교적 덜 이기적이었던 자, 여기 잠들다.” 예나 지금이나 많은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이상’은 변함 없지만, 현실은 조금 버겁다. <박쥐>를 끝낸 지금, 그는 차기 작에 대한 어떤 플랜도 없는 상황이다. “적어도 50편은 찍고 싶었는데 틀린 거 같아요. 1년에 한 편도 못 찍고 있으니……제 취향과 잘 맞는 작가가 있어서, A라는 영화를 끝내면 B라는 영화의 시나리오를 끝내 놓았으면 좋겠어요. A 영화의 포스트프로덕션과 B 영화의 프리프로덕션이 맞물리는 시스템이죠. 다작을 하고 싶으면, 오래 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웃음) 그런데 오래 산다고 그게 되는 건 또 아니죠. 흥행이 유지되어야 계속 영화를 찍을 수 있는 거니까. 적어도 50편은 찍고 싶었는데……” 2008년, 그는 연출자 대신 제작자로서 필모그래피를 늘렸다. <친절한 금자씨> 연출부 출신인 이경미 감독의 <미쓰 홍당무>는 그의 제작사 모호필름의 작품. “연출하지 않고 제작만 맡은 건 처음이었죠. 엄마나 아빠가 된 것 같은 기분? 좋은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서, 돈을 많이 벌어오지 못하는 부모가 된 기분이기도 했죠. 그래서 안쓰러웠는데, 아이가 공부도 잘하고 상도 타온 거죠. 그래서 더 뿌듯하기도 하고.”

 

올해 <박쥐>를 내놓고 또 새로운 작품을 찾아가야 하는 박찬욱 감독에게 ‘관객’은 아마 영원한 화두일 것이다. 그에게 영화는 “감독의 고민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매체”이기 때문이다. 더불어, 대중의 호응은 ‘차기작’을 만들 발판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어떤 컨셉트가 있으면 적당한 선에서 끝내면 안 된다. 어디까지인지 모르지만, 낭떠러지에 설 때까지 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편으론 관객의 취향을 알 수 없다. “제 취향이 관객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그 기준에 맞추면 많은 사람이 좋아할 거라고 생각하고 영화를 만들 때도 있어요. 그런데 전혀 달랐다는 게 드러나면 가끔씩은 혼란을 느낄 때도 있죠.”

 



그의 제작사 이름은 ‘모호필름’이다. 박찬욱 감독은 예술 작품이란 뚜렷하고 선명하고 분명하기보다는 알쏭달쏭하고 알 듯 말 듯하면서도 다면적이라고 생각한다. 그의 차기작은 구체적으로 정해지진 않았지만 “주장하고 강요하기보다는, 뭔가 흐릿하고 모호한 영화”가 될 것이다. 그 점만은 확실하다. 덧붙이자면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던지는 영화”가 될 것이다. 만약 그런 영화를 만들 수 없다면 현재 오가고 있는 할리우드 작업도 큰 의미가 없을 것이다. “직접 영어로 시나리오를 쓸 수는 없을 것 같고, 좋은 시나리오를 고르고 있는데 아직은 없어요. 없으면 안 할 거예요. (웃음). 몇 억 달러짜리 영화를 하는 것도 아닌 이상, 편집권도 요구한 상태고요. 보다 많은 사람들이 제 영화를 즐겼으면 해서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만들고 싶은 건데, 상황에 따라선 영어로 된 영화를 영영 안 찍을 수도 있어요.” 그에게 영화 이외의 꿈이 있다면 연극을 연출해보는 것이다. 최민식 같은 대배우의 무대를 보고 나면, 그 꿈은 조금 더 자극받는다.

 

“당장 하려는 건 아니고요. 막상 하려면 겁나는 일이기도 해요. 더 공부한 후에 나이 들어 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그리고 연출도 좋지만, 희곡을 쓰는 것에도 매력을 느껴요. 희곡은 시나리오와 다르게 문학의 영역에 있고, 계속 다른 사람에 의해 해석되고 연출되니까요.” 언젠가는 그가 선사할, 모호하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무대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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