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베이징올림픽을 한 달 앞두고 국가대표팀 코치로 돌아왔다. 이번 대회에 복식 대신 새로운 세부 종목으로 채택된 남자 단체전 준결승에서 중국에 0-3으로 졌지만 동메달 결정전에서 오스트리아를 3-1로 꺾고 귀중한 메달을 조국에 안겼다. 올림픽이 끝난 뒤 유남규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김택수, 현정화 등 지난날의 수퍼스타인 후배들과 머리를 맞댔다. 그리고 두 달 뒤 탁구 슈퍼리그가 탄생했다. 슈퍼리그는 탁구의 프로화를 위한 준비 단계다. 유남규는 마이크를 잡고 해설을 맡았다. “배구가 프로화되면서 살아났다. 탁구도 프로리그가 생겨야 한다. 2004년 아테네올림픽이 끝난 뒤 탁구 인기가 올라갔을 때 바로 대회를 열었어야 했는데 좀 늦었다. 탁구의 인기를 끌어올리는 게 내 목표다.”
부산 영선초등학교 시절 유남규는 소문난 장난꾸러기였다. 교장선생님이 얼굴을 알 정도였다. 어릴 때부터 뛰노는 걸 좋아해 축구, 태권도, 복싱 등 운동을 많이 했다. 유남규는 우연한 계기로 탁구채를 잡게 됐다. “학교에 축구부가 있었는데 3학년 때 없어지고 탁구부가 생겼다. 체육관에 가서 탁구를 하고 싶다고 손을 들었는데 곧바로 운동을 포기할까 봐 집에 가라고 했다. 그때는 탁구가 좋았다기보다 어떤 운동이든 하고 싶었다. 1년 뒤에 부모님 도장까지 받아 가며 탁구부에 들어갔다.”
유남규는 탁구부원 30여 명 가운데 유일한 왼손잡이였고 곧 재능을 드러냈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했지만 1년 먼저 들어간 친구들을 다 이겼다. 그때까지만 해도 탁구는 유남규에게 ‘놀이’ 정도였다. 그러나 한 번의 탁구 경기 구경이 소년의 인생을 바꿔 놓았다. “5학년 때 부산에서 열린 국가대표 선발전에 견학을 갔다. 경기보다는 국가대표 선수들 가슴에 달린 태극기에 눈이 갔다. 나도 유니폼에 태극마크를 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부터 목표 의식을 갖고 훈련했다.” 이루고자 하는 꿈이 있으면 행동부터 달라지는 법. 유남규는 수업이 끝나도 집에 가지 않았다. 해가 저물 무렵 혼자 영도산 공원에 가서 2시간 동안 달렸다. 재능에 노력을 더한 유남규는 하루가 다르게 실력이 늘었다. 부산남중 재학 시절인 1982년 청소년대표가 돼 서울로 올라왔고 이듬해 아시아청소년탁구선수권대회에 나가 중국 선수를 누르고 우승했다.
1984년 광성공고 1학년 때 그토록 바라던 태극마크를 달았다. 그리고 파키스탄에서 열린 아시아탁구선수권대회에 출전했다. 첫 상대는 북한 선수였다. “당시 스포츠에서 남북대결은 총성 없는 전쟁이었다. 선배들은 지면 따가운 눈총을 받을까봐 출전하길 꺼렸다. 내가 나가겠다고 했다.” 그러나 태극마크를 달고 뛴 국가대표 첫 경기에서 쓴맛을 봤다. 충격을 받았고 슬럼프에 빠졌다. 유남규는 이 경기를 절대 잊지 못한다고 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1986년 아시아경기대회 8강전도 정말 기억에 남는다고.
유남규는 단식 8강전에서 당시 세계챔피언인 중국의 장자량과 맞붙었다. 세계랭킹 50위와 1위의 대결. 세트스코어 2-2에서 5세트 10-18까지 몰렸다. ‘패배’라는 두 글자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유남규는 더 강해졌다. 기울었던 경기를 듀스까지 끌고 갔고 22-20으로 기적적인 역전승을 따 냈다. 결승에서는 중국의 후이준을 3-0으로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중국과 5시간20분에 걸친 명승부가 펼쳐진 단체전에서도 우승하며 2관왕에 올랐다. 대회 MVP는 덤이었다. 유남규는 말했다. “그 대회가 있어 지금의 유남규가 탄생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대회가 열렸기에 금메달을 따자는 생각뿐이었다. 세계랭킹 1위인 중국 선수를 이기고 우승해 서울아시아경기대회가 서울올림픽보다 더 기억에 남는다.” 대회가 끝난 뒤 전국은 탁구 열풍에 휩싸였다. 학생들은 야구 방망이와 축구공을 팽개치고 탁구장으로 달려갔고, 직장인들은 점심시간이나 퇴근 후 탁구를 즐겼다.
탁구는 1988년 서울올림픽부터 정식 종목으로 채택됐다. 대표팀은 올림픽을 앞두고 600일 합숙에 들어갔다. 유남규는 달력을 한 장씩 떼 내면서 탁구공과 씨름했다. 오전 6시에 일어나 오후 8시30분까지 빡빡한 훈련 일정이 이어졌다. 밥 먹는 시간 빼고는 탁구만 쳤다. 너무 힘들어 3~4일에 한번씩 펑펑 울기도 했다. 하지만 유남규는 과정에 모자란 게 없어야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 굳게 믿었다. “새벽 5시20분에 혼자 일어나 뛰고 들어왔다. 자는 척 하다 6시에 일어났다. 밤에도 그랬다. 저녁 8시30분에 훈련이 끝나도 밤 10시까지 땀을 흘리고 잤다. 모래주머니를 차고 뛰는 걸 숨기려고 일부러 긴 운동복을 입기도 했다.” 올림픽 금메달이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남들보다 한 발 더 움직였다.
남자단식 우승 후보는 중국의 장자량과 스웨덴의 얀 오베 발트너, 그리고 유남규였다. 그러나 결승 상대는 한국의 김기택이었다. 유남규는 10번 붙으면 9번 이길 정도로 김기택에 강했다. 그러나 1년 전 13-5로 앞서다 세트를 내주고 역전패한 경험이 있어 긴장했다. “김기택 선배가 올라 올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분석을 제대로 못해 당황스러웠다.” 김기택은 핌플 러버를 쓰는 전진 속공형이었다. 빠른 박자의 탁구를 했다. ‘여우’라 불릴 정도로 경기 운영 능력이 뛰어났다. 경기의 주도권을 내주면 휘말릴 수 있었다. 유남규는 1세트를 먼저 내줬다. “땀을 닦으면서 ‘지금 뭐하고 있냐, 정신 차려 유남규’ 하면서 스스로 꼬집고 때렸다.” 유남규는 자신이 먼저 공격하기로 마음먹었다. 2구, 3구에 드라이브를 걸었다. 한 점을 딸 때마다 우승을 한 것처럼 포효했다. 유남규는 김기택을 세트 스코어 3-1로 물리치고 올림픽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 올림픽 사상 첫 구기종목 금메달이기도 했다.
유남규의 별명은 ‘꾀돌이’였다. 영리하고 노련한 탁구를 했다. 탁구에서 두뇌 플레이란 무엇인지 궁금했다. 유남규는 서울올림픽 결승전을 예로 들었다. “4세트 22-21로 앞선 상황에서 땀을 닦으러 갔다. 일부러 간 거다. 김기택 선배의 서브였는데 흐름을 끊으려고. 다시 경기가 시작됐을 때 서브가 길고 높게 오리라고 예상했다. 나는 상대의 포핸드 쪽으로 드라이브를 걸려고 계획했다.” 김기택의 마지막 서브는 길었고 유남규는 바로 드라이브를 날렸다. 김기택은 겨우 받았지만 공은 테이블 밖으로 떨어졌다. 이 모든 과정을 미리 계산하고 생각했다.
“탁구는 상대를 속이는 스포츠다. 힘으로 하는 게 아니라 눈빛을 보고 마음을 읽어야 한다. 그러면 상대가 어디로 칠 지 알 수 있다. 상대가 서너 수 앞을 봤다면 저는 네다섯 수를 꿰뚫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생각대로 친다’ ‘김택수는 유남규 머리에 당한다’는 말이 나온 것 같다.” 긴 설명을 들었지만 머릿속에 선명한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다. 다시 설명해 달라고 하자 유남규는 펜을 달라고 하더니 종이에 탁구대를 그렸다. 그리고 공의 움직임을 선으로 나타냈다. “상대가 보낼 수 있는 공의 방향은 정해져 있다. 내가 짧게 서브를 넣으면 오른쪽으로 공이 온다. 왼쪽으로 주면 공격을 당하니까. 다시 깊게 보내면 같은 쪽으로 온다. 이때 비켜서서 포핸드 드라이브를 때리는 거다.” 뛰어난 운동 능력이 있었기에 두뇌 플레이는 더욱 빛을 발했다. 유남규는 탁구대표팀에서 역기를 가장 잘 들었고 100m를 11초6초에 끊었다. 탁구대 앞에서 재빨리 움직여 포핸드 드라이브 기회를 많이 잡을 수 있었다.
올림픽이 끝난 뒤 유남규는 주춤했다. 허리, 어깨 부상이 찾아왔고 소속팀 동아생명과 갈등도 있었다. 탁구에 회의를 느껴 1년 동안 거의 탁구채를 잡지 않았다. 이 무렵 치고 올라온 선수가 김택수였다. 김택수는 1990년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 단체전 금메달의 주역이었다. 유남규와 김택수는 따로 또 같이 한국 탁구를 짊어졌다. 단식에서는 선의의 경쟁을 펼쳤고 환상의 복식조를 이뤄 세계무대에서 이름을 날렸다. 두 선수는 19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 남자 복식에서 동메달을 땄다.
왼손과 오른손 펜홀드 드라이브 전형의 맞대결은 녹색 테이블을 뜨겁게 달궜다. 자연스럽게 라이벌 구도가 만들어졌다. 그러나 김택수에게 유남규의 그늘은 크고 짙었다. 두 선수의 복식조는 언제나 ‘김택수-유남규 조’가 아닌 ‘유남규-김택수 조’로 불렸다. 유남규는 김택수를 라이벌로 생각한 적이 없다고 했다. 그저 잘 따르는 친동생처럼 여겼다. “재미있는 경기를 펼칠 수 있는 선수가 택수밖에 없었다. 택수는 실업팀에 입단한 뒤 7-8년 동안 나를 이기지 못했다. 1990년대 중반 몸 상태가 안 좋아지고 택수가 치고 올라오면서 라이벌 관계라는 말이 나오기 시작한 거다.” 둘은 현재 같은 길을 걷고 있다. 국가대표팀과 실업팀 지도자를 거쳤고 지난 9월 나란히 대한탁구협회 이사가 됐다. 탁구 발전을 위해 노력하는 동반자다.
1997년 IMF 국제 금융 위기로 소속팀 동아증권이 해체됐다. 유남규는 무적 선수로 1998년 방콕아시아경기대회에 출전했다. 명예롭게 은퇴하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 대표팀 이상국 감독과 안재형 코치는 출전 선수 명단에서 유남규를 뺐다. 유남규는 대회 도중 귀국했다. 그리고 이듬해 5월 전국종별탁구선수권대회를 끝으로 은퇴했다. 유남규는 곧바로 지도자로 변신했다. 2000년 제주삼다수(현 농심삼다수)가 창단했고 플레잉 코치로 신생팀에 힘을 보탰다. 급여는 적었지만 탁구가 좋았고 후배들을 키우고 싶었다. 2002년에는 국가대표팀을 맡아 부산아시아경기대회에서 남자복식 금메달을 일궈 냈다. “ 당시 국가대표팀 강문수 감독님은 빈틈이 없는 분이셨다. 코치가 훈련을 서서 지켜봤다. 시어머니 역을 내가 맡았다. 그때 감독과 선수 양 쪽의 마음을 맞춰 주고 이해하는 법을 조금 깨달았다. 코치 수업을 제대로 받았다.” 지도자는 직접 뛰지 않지만 경기를 보면 피가 마른다. 조바심도 난다.
선수는 육체적으로, 지도자는 정신적으로 힘들다지만 깊이 들어가면 똑같다. 승리에 대한 스트레스는 선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다. “가르친 대로 따라오지 못했을 때 실망이 컸다. 눈높이를 선수에 맞춰야 했다. (유)승민이는 자존심을 건드려야 잘하고 (오)상은이는 칭찬하고 격려해야 힘을 낸다. 내 색깔을 없애고 선수들과 대화를 많이 나누려고 노력했다.” 유남규는 전력이 썩 좋지 않은 농심삼다수를 남자 실업팀 가운데 최고의 자리에 올려놨다. 2005년 전국대회 4관왕, 2006년 왕중왕전 초대 챔피언 등 전국대회에서만 7번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았다. 약팀이 유남규의 지도 아래 강팀으로 탈바꿈했다. 지도력을 인정받았다. “훈련에 들어가기 전 따라오지 못할 것 같으면 지금 말하라고 했다. 숨도 못 쉴 정도로 몰아붙였다.” 유남규는 그냥 몰아붙인 게 아니었다. 먼저 선수들에게 약속을 했다. 2년만 믿고 따라온다면 최고의 선수가 될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줬다. 유남규는 이정우라는 이름을 꺼냈다. 003년에 입단한 이정우는 1년 반 만에 유승민, 오상은, 주세혁을 모두 이겼다. 선수와 코치가 모두 맹훈련한 결과였다. 훈련만 한 건 아니었다. 경기가 끝나면 선수들과 같이 술 마시고 놀았다. “지도자는 선수들의 심리를 잘 파악해 따라오게끔 해야 한다. 그게 믿음의 탁구다. 팀 전력이 약했지만 계속 우승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유남규는 선수 시절 상대방의 마음을 읽는 탁구로 이름을 날렸다. 지도자가 돼서도 선수들의 마음을 잘 이해했다. 선수들은 그를 따라왔다. 성적도 따라왔다.
선수는 운동만 열심히 하면 된다. 하지만 지도자는 다르다. 좋은 성적이 전부가 아니다. 유남규는 2004년 아테네올림픽을 앞두고 국가대표팀 코치 자리에서 물러났다. 천영석 당시 대한탁구협회 회장과 제주삼다수 이재화 감독의 갈등이 불씨가 됐다. 유남규는 당시 제주삼다수 코치였다. 다른 사람들의 다툼 때문에 물러나야 한다는 게 화가 났고 억울했다. 김택수가 지휘봉을 이어받았고 유승민은 올림픽 남자단식 챔피언에 올랐다. “(유)승민이가 금메달을 따고 (김)택수와 껴안는 걸 봤을 때는 서운했다. ‘(유)승민이를 2년 동안 가르친 건 나였는데’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지도자로서 금메달을 못 딴 게 못내 아쉬웠다. 한국에 돌아온 유승민은 유남규에게 “고맙습니다” 라는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유남규는 그때 기분이 좀 풀렸다.
2007년에는 복잡한 이해관계에 얽혀 안 좋은 일이 겹쳤다. 10월에는 소속팀 제주삼다수 이재화 총감독과의 갈등으로 감독에서 물러났고 12월 중순에는 대한탁구협회의 독선적인 운영에 진저리가 나 대표팀 코치직도 놓아 버렸다. 유남규는 담담하게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뒤 참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줬으면 준 걸로 끝내야지 바라면 안 된다. 자신을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내 생각이 옳아도 바로 드러내지 않고 다른 사람 의견을 들어 보게 됐다.” 유남규는 2008년 6월 협회 내분이 정리된 뒤 다시 대표팀을 맡았다. 중국에 밀려 금메달은 못 땄지만 남자 단체전에서 소중한 동메달을 땄다. “한 달 전에 대표팀에 합류해 가르친 건 없다. 정신적인 면을 다잡는 데 집중했다. (윤)재영이에게 매달렸다. (윤)재영이가 복식에서 못하면 좋은 성적을 내기 힘들었다. 모두 잘 따라 줘 동메달을 딸 수 있었다.”
베이징올림픽에서 중국 탁구의 벽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바꿔 말하면 한국 탁구의 위기다. 유남규는 중국에서 해답을 찾았다. 2000년대 초반 중국의 국가대표급 선수들은 돈을 벌기 위해 줄줄이 유럽리그로 진출했다. 당시 중국 선수의 연봉은 2000만~5000만 원에 불과했다. 중국은 자국 선수의 유출을 막기 위해 프로리그를 만들었다. CCTV에서 생중계를 했다.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가 됐다. 유럽 선수들이 중국에서 뛰고 있다. 유승민, 오상은 등 국가대표 선수들도 중국리그에서 경기했다. 잘할수록 더 많은 돈을 받으니 중국 탁구의 경쟁력은 한층 더 올라갔다. 베이징올림픽 남자단식 금메달리스트 마린은 일년에 4~5억 원씩 번다. 중국에서 탁구는 축구를 제치고 최고 인기 스포츠가 됐다.
유남규는 한국에도 빨리 프로리그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하루아침에 되는 일은 아니다. 순간 유남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협회 관계자들과 감독들이 대립하면 프로화는 불가능하다. 프로리그로 가는 걸 꺼리는 분들이 꽤 있다. 자리 보전이 힘드니까.” 방송은 전면적인 협조를 약속했다. 70만 생활체육인들도 든든한 후원자다. “왕하오 같은 중국 국가대표선수를 임대로 데려와 뛰게 하면 분명 화제가 될 거다. 한국 탁구의 실력도 빠르게 향상되고 탁구 저변도 넓어질 거다. 선수들도 실력만큼 대우받게 돼 더 운동에 몰입할 수 있다.” 유남규는 더 큰 꿈을 품고 있었다. 유남규는 현재 올림픽 메달리스트 클럽 회장을 맡고 있다. 봉사 활동을 하고 후배들을 돕는다. 운동선수들에 대한 지원과 대우는 열악하다.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의 연금은 한 달에 100만 원이다. 20년 전과 변함없다. 문화관광부에 ‘체육’이란 두 글자를 넣어 문화체육관광부로 이름을 바꾸는 게 매우 힘들었다. 국가대표선수들은 국민에게 기쁨과 감동을 주고 국가에 기여한다.
그러나 운동선수들은 그만큼의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다. 유남규는 체육 부문의 제도와 환경 개선에 앞장 서서 목소리를 내려 한다. “운동선수들은 어렸을 때부터 복종만 해 자신의 생각을 떳떳하게 밝히지 못한다. 할 말이 있으면 해야 된다. 모든 종목의 선후배들과 머리를 맞대고 더 나은 환경을 만들기 위한 방안을 고민하고 있다. 체육계에 봉사하는 게 마지막 목표다.” 유남규는 갑자기 2개월 된 딸 생각이 난다고 했다. 마흔이 다 된 2007년 윤영실 씨와 결혼했고 2008년 10월 아버지가 됐다. 자존심 하나로 살아온 유남규도 결혼한 뒤 많이 변했다. 애교도 부리고 다 져 준다. 그래야 편하단다. 20년 동안 2.7g의 공과 씨름하며 땀을 흘려서인지, 아니면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사람에 치인 탓인지 유남규는 예전보다 많이 수척해 보였다. 하지만 눈은 여전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꾀돌이’ 유남규는 선수 시절만큼 진지하고 치열하게 머리를 쓰고 있다. 탁구를 칠 때는 이기기 위해 머리를 썼다. 지금은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위해 고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