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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니스트 섀클턴

나 그 네 2009. 1. 9. 13:16

어니스트 섀클턴


1909년 1월 9일, 섀클턴은 당시 남극 탐험 기록상 인류가 도달할 수 있는 최남단인 남위 88도 23분에 도달했다. 선배 탐험가 스콧의 기록을 갱신한 섀클턴은 그 자리에 알렉산드리아 여왕이 하사한 깃발을 꽂았다. 이렇게 인류 역사상 최남단을 밟았다는 표시를 남긴 섀클턴은 그곳을 ‘킹 에드워드 7세의 고원지대’라고 이름 지었다.

 

이 곳은 남극점에서 155km 떨어진 장소다. 섀클턴이 여기에서 남극점을 향해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한 것은 식량 부족 때문이었다. 턱없이 부족한 장비와 식량만으로도 그곳까지 갔으니 그 자체만으로도 대단한 기록이었다. 새클턴은 그날 밤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비록 남극점 정복은 실패했지만, 최선을 다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기존에 세웠던 사람들의 최극단 기록에서 남극은 580km나 초과했고, 북극은 120km를 초과했다. 이제 우리가 돌아가는 길에 하나님의 가호가 있기를 기도할 뿐이다. 아멘.”

스콧의 대원으로 시작한 첫 남극 탐험에서 괴혈병으로 도중하차한 섀클턴. 이날의 원을 풀기라도 하듯, 두 번째 남극 도전에서 그는 대원을 이끌고 기록을 갱신했다. 그리고 그가 간절하게 기도한 대로 전 대원이 극한 상황에서 무사히 귀환했다. 당시에는 이렇게 전 대원이 무사 귀환한 예가 없었기에 섀클턴은 이 탐험으로 국민적인 영웅이 되었으며, 국왕으로부터 ‘경’의 칭호를 받았다.

 

최초의 남극점 정복은 노르웨이의 아문센이 이루었다. 아쉽게도 섀클턴의 선배 스콧도 이 기록을 깨지 못하고 남극에서 비극적으로 운명한다. 그러자 섀클턴은 남극점 정복 대신 남극 대륙 횡단을 계획한다. 그는 27명의 대원과 함께 범선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세 번째 남극 탐험 장정을 떠난다. 인듀어런스호는 섀클턴을 지상에서 가장 강력한 탐험가, 지도자를 상징하는 아이콘으로 만들었다. 비록 대륙 횡단은 하지 못했지만, 남극 빙벽에서 634일을 견디고 전 대원이 무사히 귀환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이 세 번째 탐험을 ‘위대한 실패’, 혹은 ‘위대한 항해’이라 부르면서 지금도 그의 정신을 추모한다. 아문센과 스콧의 그늘에 가려 있던 섀클턴. 그런데 왜 우리는 그를 위대한 탐험가로 추앙하는가? 그의 일대기를 살펴보면 이유가 확실하다. 그리고 섀클턴 마니아가 되고 만다.


 

혈통 따지기 좋아하는 영국인들에게 앵글로-아이리시 혈통은 매우 특별하다. 앵글로–아이리시 혈통에서 웰링턴, 알렉산더 같은 장군부터 오스카 와일드, 조지 버나드 쇼 같은 예술가와 많은 탐험가들이 나왔기 때문이다. 섀클턴은 이 혈통을 타고난 선택받은 사람이었다. 아버지 헨리 섀클턴은 2남 8녀를 두었는데, 새클턴은 위로 누나가 하나 있는 장남이었다. 섀클턴의 아버지는 19세기 교회 장로의 모습을 한 매우 자상하고 부드러운 성품을 지녔고, 어머니는 전형적인 현모양처였다. 집안이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화목한 가정에서 전형적인 아일랜드 개구쟁이로 성장한다. 섀클턴이 태어나던 해 아일랜드는 극심한 흉년에 시달렸는데, 이를 계기로 농사를 짓던 섀클턴의 아버지는 더블린에 있는 트리니티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해 33세의 늦은 나이에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가족을 이끌고 아일랜드를 떠나 영국으로 간다.

 

섀클턴은 런던 교외에 있는 시골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책 읽기를 좋아하는 탐험가다. 그의 기록을 보면 책 읽는 장면을 묘사한 구절이 많은데, 이처럼 독서하는 습관은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섀클턴은 자라면서 의사가 되기를 원하는 아버지의 뜻에 따르지 않고 바다로 나가려 했다. 이유는 당시 학생들이 즐겨 보던 신문 <보이스 오운 페이퍼>에서 모험과 관련 있는 기사와 쥘 베른의 연재소설 ‘해저 2만 리’를 보면서 성장했기 때문이다. 신문 활자 속에 펼쳐지는 모험과 신비한 세상, 미지의 대지는 마치 섀클턴을 위해 준비된 인생 같았다. 가정 형편상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하지 못한 섀클턴은 열여섯 살에 ‘휴튼타워호’를 타면서 선원이 되었다. 이 시절에 섀클턴은 ‘구르는 돌에는 이끼가 끼지 않는다’라는 좌우명을 마음에 두고 있었다. 섀클턴은 선원으로서 거쳐야 하는 항해사 과정을 마치고 24세가 되던 1898년 4월 세상 어느 바다로든 나갈 수 있는 선장이 되었다. 젊은 나이에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으나, 선장이 되었다는 건 섀클턴에게 탐험 인생의 시발점에 불과했다. 그때부터 그의 진짜 인생이 시작되었다. 섀클턴은 항상 책을 가까이하면서 다른 선원들과는 조금 다른 생활을 했다. 도덕성도 매우 강건했다. 그는 배를 타는 선원들이 항구에 내릴 때마다 술과 여자로 탕진하는 이미지와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누나 친구인 에밀리가 나타났고, 둘은 낭만적인 사랑에 빠져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했다.

 

아문센이 남극점을 최초로 정복하기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남극대륙 탐험은 계속 이어졌다. 남극대륙을 탐험한 최초의 기록을 세운 사람은 영국인 보르치그레 빙크였다. 그는 썰매를 끌고 남위 78도 58분 지점에 도달했는데, 그 때까지 인류가 도달한 지점 중 최남단이었다. 섀클턴도 평생 네 번에 걸쳐 남극에 도전한다. 그중에서도 1914년 8월의 세 번째 남극 탐험은 ‘위대한 항해’라고 일컫어지는데, 인듀어런스호를 타고 영국을 출발해 남극 횡단 탐험에 나선 섀클턴과 대원들은 634일간 인간의 한계점에 도전했다. 이를 계기로 아문센의 남극점 정복이나 간발의 차이로 남극점 정복을 아문센에게 넘겨준 스콧의 그늘에 가려져 있던 섀클턴은 위대한 인간으로 자리매김되었다.

 

 

 

섀클턴을 포함해 인듀어런스호에 오른 27명의 대원이 634일간 영하 30℃를 오르내리는 남극의 빙벽에 갇히는 극한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살아 돌아왔을까? 인간의 한계는 도대체 어디까지인가? 또 그 상황에서 모든 대원을 이끌고 무사 귀환한 섀클턴의 리더십과 열정은 어디에서 나온 것인가? 여기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각종 최초 기록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그래서 우리는 역경을 이겨낸 인물로 위대한 탐험가 섀클턴을 기억하고, 어떤 어려움 속에도 길은 있다는 신념을 갖게 된다.
인듀어런스호가 남극으로 출범하기 1년 전인 1913년, 빌흐잘므르 스테팬슨이 이끄는 캐나다 탐험대가 칼럭호를 타고 북극 탐험에 나섰다. 이들은 탐험 도중 빙벽에 가로막혀 고립되는 상황과 맞닥뜨렸다. 극지에서는 언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1년 후 섀클턴이 겪게 될 똑같은 상황이었다. 캐나다 탐험대는 북극에 고립된 지 수개월 만에 야수와 같이 변했다. 거짓말과 속임수, 도둑질 등 극한 상황에서 인간이 보여줄 수 있은 밑바닥 정서를 그대로 드러내 11명의 대원 모두 처참한 최후를 맞이했다. 하지만 섀클턴은 27명의 대원을 이끌고 2년이 넘는 시간을 남극에서 버티면서 한 사람의 낙오자 없이 영국으로 무사히 귀환했다. 말이 2년이지, 남극 빙벽의 혹한 속에서 바다표범을 잡아먹으며 남자 27명이 지옥과 같은 생활을 견뎌낸 것이다. 대원 중에는 그 상황에서도 행복하다고 일기에 쓴 사람이 있을 정도였다. 이들에게는 희생 정신과 서로를 격려를 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섀클턴의 이야기는 장엄한 휴먼 드라마에 다름 아니다.

 

섀클턴을 비롯한 대원들은 남극 탐험 길에 일기를 남겼다. 언제 죽을지 모르는 혹한 속에서도 그들이 남긴 일기 한 토막을 읽어본다. “섀클턴은 은밀히 자신의 아침 식사용 비스킷을 내게 내밀며 먹으라고 강요했다. 그리고 내가 비스킷을 받으면 그는 저녁에도 내게 비스킷을 줄 것이다. 나는 도대체 이 세상 어느 누가 이처럼 철저하게 관용과 동정을 보여줄 수 있을까 생각해본다. 나는 죽어도 섀클턴의 그러한 마음을 잊지 못할 것이다. 수천 파운드의 돈으로도 결코 그 한 개의 비스킷을 살 수 없을 것이다.” 아주 단순한 기록이다. 영하 30℃ 이하의 추위 속에서, 거대한 빙벽 앞에서 수백억 원의 돈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비스킷 하나는 바로 생명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 일기 한 토막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남극대륙 횡단 실패라는 기록은 이러한 인간 앞에서 큰 의미가 없다.

 

 

 

인듀어런스호의 무사 귀환 이후부터 섀클턴은 하루아침에 런던의 저명인사가 되었다. 그때의 체험을 기록한 책을 내고 강연 활동 등으로 바쁜 나날을 보냈지만, 그에게 안락한 런던이라는 도시에서 적응하는 것은 눈보라 치는 혹한의 남극 탐험보다 더 어려운 일이었다. 부채에 시달리던 섀클턴은 오로지 돈을 벌기 위해 1919년 화학 비료를 생산하는 회사의 이사로 일하는 등 도시생활을 했지만 하는 일마다 실패의 연속이었다. 가정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어느 순간부터 섀클턴은 재닛과 로살린드라는 두 연인에게 위안받고 심지어 경제적인 도움까지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내 에밀리와 형식적인 부부 관계를 유지하면서 간혹 집에 들러서 가정의 포근함을 느끼는 정도였다. 에밀리는 이런 남편을 보고 차라리 남극 탐험대를 조직해서 떠나는 것이 더 낫겠다고 생각했는지 섀클턴에게 탐험대를 조직할 수 있는 구체적인 제안을 한다. 1920년 봄, 섀클턴은 다시 한번 극지방을 탐험하고 싶은 마음에 들떠 아내의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인다.

 

우여곡절 끝에 섀클턴은 퀘스트호를 타고 다시 바다로 나갔다. 그의 네 번째 남극 탐험이었다. 하지만 이 탐험에서 섀클턴은 예전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었다. 맨발로 달려온 옛 동료들을 비롯한 대원들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전설적인 리더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으며, 오히려 돈을 벌기 위한 항해라는 말까지 들을 정도였다. 모든 악조건 속에서도 할 수 있다는 열정으로 섀클턴은 다시 남극으로 향했다. 퀘스트호가 사우스조지아 섬을 출발해 남극 항해를 시작한 날 밤, 섀클턴은 갑자기 심장 발작을 일으켜 쓰러지고 말았다. 그 상황을 지켜본 매클린 대원은 이렇게 기록을 남겼다. 새클턴이 힘없는 목소리로 나에게 물었다. ‘내가 이렇게 몸이 나빠진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나는 그의 물음에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보스는 제 말에 찬성하지 않겠지만, 술을 끊어야 합니다.’ 그리고 몇 분 후, 그는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정확한 사인은 관상동맥에 지방의 일종인 아테롬이 누적되어 심장마비를 일으킨 것이다. 마흔여덟 번째 생일을 41일 남겨둔 날이었다. 새클턴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었던 의사이자 친구인 매클린에 의하면 그는 이미 남극 탐험 이전부터 지병이 있었다고 했다. 매클린은 그런 상태에서도 세 번이나 남극 탐험에 나선 섀클턴에 대해 더욱 경외감을 가지게 되었다고 술회했다.”

 

섀클턴의 유해는 아내 에밀리의 뜻에 따라 -그는 영국 생활을 무척 힘겨워했다고 한다. 그래서 아내는 생전에 그가 좋아했던 사우스조지아 섬에 무덤을 마련했다. 남편이 언제라도 바다로 나아갈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일까?- 5월 5일 노르웨이식 장례 절차로 고래잡이배 선원들의 무덤 옆에 안장되었다. 전기 작가 롤랜드 헌트포드는 방대한 저서 <섀클턴 평전> 말미에 이렇게 섀클턴을 평한다. “섀클턴은 기계에 의한 탐험 시대가 열리지 전까지 순수한 인간의 힘만으로 탐험했던 고전적 탐험 시대의 대미를 장식했다. 그의 탐험은 영국인들에게 극지방의 중요성을 깨닫게 해주었으며,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그는 또한 진정한 리더십이란 무엇인지 몸소 보여주었다. 섀클턴으로 말미암아 극지방을 탐험했던 탐험가들은 사람들로부터 영웅으로 칭송받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의 인생에는 승리가 없었다는 말도 빼놓지 않는다. 섀클턴은 언제나 한발 늦었다. 하지만 이것은 그의 신비로운 인생과 불굴의 투지에 비하면 별 것 아니다.

공인된 우리의 영웅, 아문센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섀클턴이 그처럼 보잘것없는 장비로 그와 같은 일을 해냈다는 사실에 경탄을 금할 수 없다. 만일 내가 섀클턴과 같은 상황이었다면 탐험을 포기하거나 살아 돌아오지 못했을 것이다. 섀클턴의 용기와 결단력, 그리고 대원들을 이끄는 리더십은 위대하다. 경험만 약간 더 있었더라면, 그는 남극점 정복과 남극대륙 횡단이라는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위대한 실패자 섀클턴. 그가 만든 길을 따라 탐험가들은 조금은 편안하게 그의 길을 따라가 성공과 명예를 얻었다. 그는 개척자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러한 그의 삶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마라. 살아 있는 한 절망하지 마라.’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알프레드 랜싱 지음, 뜨인돌)
‘위대한 실패’라고도 일컬어지는 섀클턴의 세 번째 남극 탐험 기록물이다.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장감이 흐르는 문학작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간은 새로운 목표에 자신을 적응시켜야 한다. 과거의 목표는 사라졌다”라고 섀클턴은 말했다. 남극점이 아문센에 의해 정복되고 나서 남극대륙 횡단이라는 목표를 갖게 된 심경을 잘 대변해주고 있다. 인듀어런스호는 이 위대한 여행의 상징이 되었다. 섀클턴을 쉽게 설명해주는 책이다. 

 

<인듀어런스>(캐롤라인 알렉산더 지음, 뜨인돌)
섀클턴의 위대한 항해 사진집이라고 해도 되겠다. 인듀어러스호의 탐험대원 헐리는 최악의 상황에서 아름다운 남극의 모습, 끔찍하게 파괴된 배, 섀클턴과 대원들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이것은 대원들과 함께 살아남았다는 평가를 받는 위대한 사진들이다. 사진 원판을 보관하기 위해 목숨을 담보로 옮겨졌기 때문이다. 이 사진을 기록한 카메라는 결국 2년간의 고립 기간 중에 포기해야만 했다. 이 두 권의 책을 보고 나면, 섀클턴에 대한 관심이 높아질 것이다. 그때 같은 출판사에서 나온 섀클턴의 자서전 <사우스>와 평전 <새클턴 평전>을 읽어볼 것. 방대한 분량의 책은 이 원고를 쓰는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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