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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탐험가 프레야 스타크

나 그 네 2009. 1. 12. 20:23

프레야 스타크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의 각축장이었던 중동 지역을 여행한 영국 여성 프레야 스타크. 그녀는 왕립아시아협회 버튼메달(1933년), 왕립지리학회 창립메달(1942년), 왕립중앙아시아학회 퍼시 사이크스 기념메달(1951년) 등을 받았고, 1972년 대영제국의 데임(여성 작위)이 되었다.

 

 

스타크는 유럽인의 발자국이 극히 드문 지역, 설령 가보려 해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지역을 여행했다. 그리고 많은 저서를 통해 유럽인들에게 중동의 현실, 문화, 사람, 습속 등을 알렸다. 그녀는 그런 자신의 일상을 이탈리아에 살고 있는 어머니 플로라에게 자주 편지로 알렸다. 1938년 1월 12일에는 자신이 생각한 ‘여행가가 갖추어야 할 일곱 가지 항목’을 편지에 적어 어머니에게 보냈다. 

 


1. 자신의 기준과 맞지 않는 기준을 인정하고,

    자신의 가치관과 다른 가치관이 있다는 것을 인식할 것.
2. 우둔한 사람과 부적절한 도구를

    화 내지 않고 이용하는 법을 배울 것.
3. 육체적 불쾌감을 신경 쓰지 않고 견딜 것.
4. 언제 어디서라도 휴식을 취하거나 영양을 섭취할 것.
5. 자연뿐 아니라 인간의 특성도 사랑할 것.
6. 편견을 버리고 주의 깊게 관찰하며 하나하나 트집 잡지 말 것.
7. 하루의 시작처럼 차분한 마음으로 하루를 끝낼 것.

 

오지 여행가로 이름을 날린 우리나라의 한비야 씨라면 위의 항목을 보고 무릎을 치며 찬동하지 않을까 싶다. 여행에 임하는 태도에 관해 스타크는 이런 말도 남겼다. “여행을 잘하려면 불편일랑 깡그리 무시하고 여행지에서의 경험에 자신을 완전히 맡겨야 합니다. 여행지 환경과 혼연일체가 되어야 하며, 일어나는 일들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런 방식과 태도를 통해서만이 우리는 여행지의 일부가 될 수 있고, 무언가 의미 있는 걸 얻을 수 있습니다.” 삶의 궁극적 목적이 결국 행복에 있다고 본다면, 범상치 않은 여행가 프레야 스타크가 생각하고 느낀 행복은 어떤 것이었을까? “세상에서 가장 즐거운 기분, 그것은 이역의 낯선 마을에서 아침에 홀로 깨어날 때다.” 한곳에 정주하지 않는 노마드의 삶을 살았던 그녀다운 체험적 행복론이다. 그녀는 “신념과 행동이 다르면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고도 말했으니, 신념과 행동이 일치된 사람만이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행복론이다.

 

정들면 고향이라 했던가. 스타크에게 딱 어울리는 말이다. 파리에서 태어나 이탈리아와 영국에서 자라고 노년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여행한 그녀에게 고향이란 정든 곳, 바로 그곳이었다. 그녀의 변할 수 없는 고향, 즉 부모는 어떤 사람들이었을까? 내성적인 아버지 로버트 스타크는 비교적 부유한 가정 출신의 화가였고 어머니 플로라 스타크는 그림과 피아노에 능한, 예술가 기질이 강한 여성이었다(로버트 스타크와 플로라 스타크는 사촌 간이었다). 이 가운데 여행가로서의 스타크에게 어린 시절 영향을 미친 쪽은 아버지였다. 로버트 스타크는 어린 딸의 손을 잡고 야외를 답사하며 지리적 감수성, 자연 친화감, 예민한 관찰력 등을 심어주었다. 그는 나중에 캐나다에서 원예업을 했다. 반면 어머니 플로라는 훤칠한 키(153센티미터의 스타크보다 머리 하나만큼 더 컸다)와 시원시원한 용모에 분방하고 사교적인 성격으로, 자녀들을 다소 방임하는 스타일이었다. 키가 작고 내성적이며 세심하고 꽃 가꾸는 것을 좋아하는 남편 로버트와 헤어지게 된 것도 이런 성격 차이가 원인이었다.

 

프레야 스타크는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에 정규 학교 교육을 받은 적이 없다. 그녀의 교육은 늘 부모와 가정교사의 몫이었고, 실제로는 서양 고전과 문학 작품을 읽는 독서가 지적 교육의 전부였다. 자주 아파서 집에 틀어박혀 있어야 할 때도 그녀는 읽고 또 읽었다. 어른이 돼서 오지 탐험을 나서게 된 계기도 아홉 살 생일에 선물 받은 <천일야화>때문인데, 이 때부터 그녀는 동방에 대한 관심과 꿈을 키우게 됐으니 ‘꿈은 이루어진다’는 말을 예증한 셈이다. 스타크는 열 살 무렵부터 영어는 물론 이탈리아어, 독일어, 프랑스어를 구사할 줄 알았고, 나중에 라틴어도 독학으로 익혀 능숙하게 구사했다. “나는 언어를 사랑했고, 여행을 사랑했다. 어린 시절부터 자주 옮겨 다니며 사는 동안 나는 늘 말을 배우고 있다는 느낌을 지니고 있었다.” 그녀의 여행기가 문학적으로 높은 평가를 받는 근본적인 이유도 언어에 대한 각별한 의욕과 재능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12년 열아홉 살 때는 런던대학 베드퍼드 칼리지에 입학했지만 2년 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서 학업을 중단했고, 간호 교육을 받은 뒤 이탈리아 전선의 의무대에서 일했다. 이후 1927년 런던동방학원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 과정을 수학한 것이 그녀가 받은 정규 교육의 마지막이었다. 프레야는 학자의 머리로 ‘인식하는’ 여행보다는 순전히 여행가의 감수성으로 ‘느끼고 경험하는’ 여행에 충실했다.

 

 

스타크는 결코 무턱대고 충동적으로 여행을 떠나는 스타일이 아니었다. 늘 배우는 자세로 임했는데, 예컨대 중요한 역사서는 물론 고대 작가들의 지리서, 여행서를 샅샅이 읽었고 여행지의 종교와 문화에 관한 책은 빼놓지 않았다. 고대 문자도 철저히 공부했는데, 여행 도중 비문에 새겨진 글을 접할 때를 대비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현대의 지도와 고대의 지명 및 자료를 대조하면서 여행 경로를 세심하게 작성했다. 아랍어와 페르시아어를 집중적으로 익히고 재정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될 즈음 1926년 9월23일, 중동 여행의 꿈을 실행에 옮기려던 차에 동생 베라가 패혈증에 걸려 세상을 떠났다. 베라와는 각별한 자매사이로 부모를 따라 자주 옮겨다녔기 때문에 서로에게 유일한 놀이상대였다. 동생의 죽음은 스타크의 삶에 내내 고통으로 남지만, 그녀는 수동적으로 운명을 받아들이기만 했던 동생의 삶을 일종의 반면교사(反面敎師)로 삼았다. 용납하기 힘든 운명에 굴복하지 않고 남이 시키는 대로 살지 않으리라 굳게 결의를 다진 것이다.

1928년 3월 스타크는 시리아의 다마스쿠스로 떠나 적응기를 가진 뒤 5월 초 친구 베네티아와 함께 당나귀를 타고 프랑스 지배하에 있는 시리아의 제벨 드루즈 산악 지역을 여행했다. 스타크는 여행을 떠나면서 “거친 세상으로 여행을 막 떠나려고 할 때처럼 흥분된 순간은 없다.” 라고 말했다. 그곳은 당시 드루즈인들이 프랑스 통치에 저항하고 있었기 때문에 외국인 출입이 철저히 제한된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첩보 활동 혐의로 프랑스 헌병에 체포됐지만, 특유의 말주변과 솔직한 태도로 혐의에서 벗어나 오히려 프랑스군 정보 장교와 함께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다.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에서 스타크는 말한다. “가엾은 군인들은 우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어려워하고 있습니다.”

 

스타크는 드루즈 지역을 여행하면서 자신감을 얻었고 요령도 터득했다. 온갖 나쁜 소문이 도는 폐쇄된 종족들도 실제로 방문해보면 호기심과 인정, 친절로 대해준다는 것, 아랍인들의 자유에 대한 동경과 바람이 매우 강하다는 것, 노새나 나귀 몰이꾼 한두 사람을 데리고 몇 가지 소지품만 준비해서 최대한 간편하게 여행하는 게 매우 편하다는 것 등. 그녀의 이 첫 여행 경험은 1928년 11월 <콘힐>이라는 잡지에 발표됐다. 중동 전문가이자 여행 작가 프레야 스타크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스타크는 1929년 초 많이 노쇠해진 아버지(당시 75세)를 만나러 캐나다를 방문한 뒤 런던에서 중동 역사를 공부하고, 10월 말 이라크 바그다드에 도착했다. 고대의 잔인한 암살자 광신도 집단 아사신파의 본거지를 탐방하는 게 목적이었다. 암살을 뜻하는 영어 단어 ‘assassination’의 어원이기도 한 아사신파는 12~13세기에 아바스 왕조 전복과 이슬람 주류파인 수니파 징벌을 목적으로 암살 활동을 전개했다. 스타크는 1930년 4월 바그다드를 출발해 엘부르즈 산맥의 메마른 계곡과 절벽을 올라 아사신파의 성채에 도착했다. 아사신파의 유적지는 이미 다른 탐험가들이 다녀간 적이 있지만, 스타크는 위치와 특징, 규모 등을 자세히 관찰하고 정확하게 측량했다. 아사신파에 관한 이야기가 유럽에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바로 스타크를 통해서였다. 뿐만 아니라 그녀는 지도에 표시돼 있지 않던 마을 두 곳과 6개의 산을 새로 그려 넣었고, 기존 지도의 많은 오류를 바로잡았다. 스타크가 여행가이자 탐험가로서 본격적으로 명성을 얻게 된 것도 바로 이 여행 덕분이었다.

 

‘인디애나 존스’풍의 이야기가 나올 법한 여행도 있었다. 1932년 9월 스타크는 루리스탄으로 향했다. 그곳의 어느 동굴에서 금 장신구, 신상, 단검, 동전 등이 들어 있는 궤짝 20개가 발견됐다는, 귀가 솔깃해지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여행에서 스타크는 보물 동굴을 찾지는 못했고 페르시아 경찰에 붙잡혔다가 겨우 탈출했다. 그래도 소득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다. 여행 중에 지형을 관찰하고 측량하여 지도를 수정, 보완할 수 있었다. 1933년 마흔 살이 되던 해 이러한 위험천만한 여행 끝에 이탈리아로 돌아갈 즈음 스타크는 저명인사가 되어 있었고, 이후로는 저서 집필과 기고 수입만으로도 여행과 중동 체류 비용을 조달할 수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는 아덴, 바그다드, 카이로 등지에서 영국 정보국을 위해 일했다. 아랍의 여러 세력이 연합군 편에 동조하거나 최소한 중립을 지키도록 만드는 임무를 수행한 것이다. 이 점에서 스타크는 ‘아라비아의 로렌스’ 비슷한 구실을 한 셈이다. 그녀는 인맥을 동원해 자유형제단이라는 조직을 만들어 연합국 측에 우호적인 현지인들을 바탕으로 보다 많은 인사를 포섭하고, 주축국 이탈리아와 독일의 선전 활동에도 대응하면서 연합국의 입장을 선전했다. 그러니까 자유형제단은 일종의 선전 공작 조직이었던 셈이다.

 

 

스타크는 1947년 54세 때 오랜 친구로 지내던 외교관 스튜어트 페론(당시 46세) 결혼했다. 하지만 페론은 자신이 동성애자임을 고백했다. 이후 두 사람은 멀리 떨어져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돕는 사이가 됐다. 그러나 이혼하지는 않았다. 여행가로 나선 초기부터 스타크 주변에는 우정과 사랑 사이 어느 지점쯤 되는 관계의 영국군 장교나 외교관 남성이 제법 있었다. 그러나 첫사랑의 쓰린 기억 때문이었을까?

 

 

스타크는 이탈리아에서 간호사로 일하던 스물세 살 때, 의사이자 교수였던 당시 서른여덟 살의 키리노 루아타와 사랑에 빠져 약혼했었다. 그렇지만 루아타가 예전에 열렬히 사랑했던 음악가 여성이 미국에서 돌아오면서 파혼을 당하고 말았다. 이후 스타크는 일종의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린 듯하다.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다는 사실에는 결코 아무런 유감이 없지만, 미인으로 태어나지 못한 것이 늘 실망스러웠다”라고 말한 그녀는 남성들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 미인은 아니었지만, 특유의 개성과 언변으로 주위 사람들을 매료시키는 여성, 그러니까 미모와는 다른 의미의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그녀는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결혼한 사람들은 사는 게 더 편하기는 하겠지. 하지만 미혼으로 사는 걸 맥 빠지게 만드는 열등감을 떨쳐버리기만 한다면, 우리가 더 풍성하게 누려야 할 것이 바로 인생이라 생각해. 그렇게 생각하지 않니?…… 비록 개인적으로야 결혼하고 싶기는 하지만.”

 

그녀가 진정 사랑한 대상은 결국 여행 그 자체였던 것 같다. 93세 때도 비록 예전의 모험 가득한 여행은 아니었지만 스페인 여행을 준비하며 설레는 마음을 주위 사람들에게 고백했던 그녀다. 84세 때 스타크는 영국 BBC의 후원을 받아 뗏목을 타고 시리아 북부에서부터 유프라테스 강을 따라 내려가는 탐험에 나섰다. 여러 지역을 방문하며 ‘떠내려가던’ 도중 강물에 휩싸여 뒤집힐 위기를 맞기도 했고, 실제로 물에 빠지기도 했다. 한 세기를 살고 1993년 세상을 떠난 프레야 스타크. 그녀의 도전적인 삶은 다음과 같은 말에 잘 요약돼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뭔가를 성취한 다음에는 마치 축음기가 망가질 때까지 같은 음악을 돌리고 또 돌리듯 성취한 것을 써먹고 또 써먹는다. 과거의 것일랑 잊는 것이야말로 보다 나은 미래를 만드는 원천이다.”

 

 

정열의 방랑자동방을 꿈꾸며세상에 못 갈 곳은 없다

제인 플레처 제니스의 <정열의 방랑자 프레야 스타크>(달과소)는 현재 우리나라에 나와 있는 프레야 스타크에 관한 유일한 단행본이다. 저자는 스타크에 관한 거의 모든 기록을 섭렵한 것은 물론, 스타크와 교류했던 생존 인물들의 증언도 청취했다. 스타크의 외적 활동을 자세하게 소개했으며 그녀의 내면에 대해서도 깊이 있게 서술하고 있다. 적지 않은 분량이지만 비교적 수월하게 읽을 수 있다.

바버라 호지슨의 <동방을 꿈꾸며>(말글빛냄)는 1717년 서양 여성 최초로 터키를 여행한 메리 워틀러 몬테규 부인 이후 1930년까지,


 

오스만 제국의 영역을 여행한 서양 여성들에 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구체적인 여행 방식에 관한 서술이 특징이며, 프레야 스타크는 길지 않은 분량으로 소개되어 있다. 역시 바버라 호지슨의 <세상에 못 갈 곳은 없다>(북하우스)는 17~19세기 서양 여성 여행자들의 이야기를 여행지별로 나누어 들려준다. 그 지역은 사실상 육대주에 모두 분포돼 있다. 이 책을 읽어보면 그 시절 그렇게 도전하는 여성이 많았다니, 하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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