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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페인(Thomas Paine)

나 그 네 2009. 1. 10. 15:06

 

토머스 페인


오늘날 우리에게 상식이라고 생각되는 것들이 진정한 상식이 되기까지는 선각자들의 피나는 노력과 희생이 있었다.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 ‘모든 인간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 이러한 명제는 당연히 만고불변의 진리다. 이 진리를 이른바 ‘상식(Common Sense)’으로 선포한 대표적인 선각자가 바로 토마스 페인이다.

 

1776년 1월 10일 토마스 페인의 책 <상식(Common Sense)>이 출간되자 아메리카 대륙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페인이 이 책을 통해 주장하는 바는 한마디로 말해 미국의 독립이 지극히 상식적인 진실이라는 것이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지금부터 여러 쪽에 걸쳐 나는 지극히 단순한 사실, 평범한 논의, 그리고 상식을 말하겠다.” 그러고는 군주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민주적 공화제만이 우리의 대안이라고 주장한다. 영국 정체는 군주 전제정과 귀족 전제정, 그리고 이를 얄팍하게 덮고 있는 공화정의 복합이다. 결국 특권층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인간은 평등하다는 상식에 어긋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국 왕실로부터 완벽하게 독립적인 아메리카의 새로운 정부가 들어서야 한다고 강조한다.

 

페인의 주장은 오늘의 입장에서 보면 당연한 상식이지만 당시에는 그렇지 않았다. 미국 독립의 아버지 조지 워싱턴도 1770년대 초까지는 독립에 반대했고, 벤자민 프랭클린도 마찬가지였다. 독립전쟁에 참가한 많은 아메리카인들도 페인의 주장에 상당한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았다. 그들은 군주제와 공화제를 섞은 영국의 정치가 최고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페인의 힘있는 논리에 자연스럽게 설복되어갔다. 혁명적인 주장을 ‘상식’이라고 말한 것이 참으로 절묘한 설득력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상식>은 출간한 지 3개월도 안 돼 10만 부가 팔리는 선풍적인 인기를 누렸다(브리태니커 사전에는 1년 만에 50만 부가 팔렸다고 하나, 박홍규 교수 는 이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며 1년 만에 15만 부가 팔렸다고 말한다). 1776년 7월 4일에 발표한 미국의 독립선언문은 페인의 주장을 거의 그대로 채택했다.


 

토마스 페인의 삶은 크게 세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30대 중반까지의 영국 생활, 이후 40대의 미국 독립혁명 투신, 50대의 프랑스 혁명 참여 등이 그것이다. 세계 현대사에서 가장 중요한 양대 혁명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독립과 프랑스 혁명에 한 사람이 절대적으로 기여했다는 사실이 경이롭기만 하다. 혁명이 있는 곳에 페인이 있었듯이, 그는 불의를 보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젊은 시절 서섹스 주 루이스의 세무서에서 근무할 때였다. 간접세 관리들이 공공연히 뇌물을 받는 등 비리를 저지르는 모습을 보고 페인은 <간접세 관리들의 문제>(1772)라는 글을 집필했다. 그는 이 글에서 세무관료의 부패를 척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그들의 보수를 올리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세무 당국은 발칵 뒤집혔고, 페인은 험난한 공직 생활 끝에 결국 해고당했다.


영국에서 페인은 되는 일이 없었다. 중학교만 졸업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부족한 학력으로도 타고난 명민함과 뛰어난 논리력으로 어느 곳에서나 실력을 인정받았지만 영국 생활은 불운의 연속이었다. 첫 혼인 상대인 아내와는 1년도 안 되어 사별했고, 두 번째 아내와도 일찌감치 헤어졌으며, 세무서를 나와서 벌인 사업에서도 실패했다. 절망적인 상황에서 만난 벤자민 프랭클린은 페인에게 일생일대의 귀인이었다. 프랭클린은 “아메리카는 자네 같은 끓는 피를 가진 젊은이에게는 꿈의 땅이네. 그곳은 자네 같은 개척자적인 두뇌를 요구하고 있어. 아메리카에서 행운을 찾기 바라네.” 프랭클린은 소개장을 써주었다. 꿈의 땅으로 가는 길은 험난했다. 2주 동안 배를 타고 가면서 페인은 열병에 걸려 펄펄 끓는 몸으로 꼼짝없이 누워 있었다.

 

1774년 11월 30일 페인은 드디어 꿈의 땅 신대륙 필라델피아에 도착했다. <펜실베이니아 매거진(Pennsylvania Magazine)> 기자로 일하면서 그는 익명이나 가명으로 논문과 시를 발표했다. <아메리카의 아프리카 노예제(African Slavery in America)>(1775년)는 노예무역을 비판하고 흑인에게 완전한 인권을 보장할 것을 촉구한 글로, 말미에 ‘정의와 인간애’라는 서명을 덧붙였다. 이때 페인은 이미 정의와 인권을 주장하는 혁명가로서의 복선을 깐 셈이다.

1775년 4월 19일 렉싱턴 전투가 벌어진 뒤 페인은 미국 독립의 당위성을 뼈저리게 느꼈다. 그는 이제 미국이 단지 영국 정부의 과세에 반발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 되며 독립을 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독립의 정당성과 민주적인 공화정치의 정당성을 주장한 글이 바로 1776년 1월 10일 출간되어 아메리카 대륙을 뜨겁게 달군 짧은 소책자 <상식>이었다. 페인의 책과 함께 아메리카 대륙은 걷잡을 수 없는 혁명의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1776년 7월 4일 미국은 독립을 선언했고, 미국 독립을 저지하는 영국 정부와 더욱 강력하게 대치하게 되었다.


 

 

페인은 독립전쟁에 자원해 너새네이얼 그린 장군의 부관으로 복무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집필을 계속하여 1776년 12월 19일 <미국의 위기 제1호(The American Crisis, Number Ⅰ)>를 출판했다. 이 시리즈는 1783년까지 16편이나 이어지는데, 각 글의 끝에는 ‘상식’이라는 서명이 붙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의 주장이 상식에 불과함을, 상식이기 때문에 최소한 그 정도는 반드시 지켜야 됨을 역설하고 있었다. “지금은 인간의 영혼을 시험하는 시기다”라는 의미심장한 말로 시작하는 <미국의 위기 제1호>는 조지 워싱턴이 밸리포지에 있는 모든 군인들에게 읽으라고 명할 정도로 파괴력 있는 글이었다. 이렇게 미국의 독립을 위해 온몸을 불사르기를 마다하지 않는 가운데 페인은 극심한 가난에 시달리게 되었다. 그의 저서마다 수십만 부가 팔렸지만, 그는 책값을 싸게 만들어 널리 보급하기 위해 인세를 받지 않았다. 가난을 견디기 힘들게 되자 그는 의회에 재정지원을 간청했다. 그러나 의회 내의 반대자들 때문에 묵살당했고, 대신 펜실베이니아 주에서 500파운드를, 뉴욕 주에서 뉴로셀에 있는 농장을 받았다.

  

페인은 ‘상식’이 지켜지지 않는 현실이 세계 도처에 있음을 견딜 수 없었다. 1787년 영국으로 간 페인은 에드먼드 버크가 쓴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고찰 Reflections on the Revolution in France>(1790)에 반박하여 <인권 Rights of Man>(1791. 3. 13)을 발표했다. 미국 독립을 옹호했던 버크가 프랑스 혁명에 반대하는 것을 페인은 이해할 수 없었다. 버크가 재반박하자 페인은 <인권 제2부>(1791. 2. 17)를 발표하여 맞받아쳤다. <인권> 1, 2부는 프랑스 혁명을 지원하는 사상적 기초가 되었지만, 기득권 세력에게는 눈엣가시와 같은 것이었다. 페인은 유럽 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원인을 분석하고, 가난・문맹・실업・전쟁 등에 대한 치유책을 찾고자 했다. 모든 이의 인권을 인정하기 위해서는 기득권자의 권리를 제한해야 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다. 페인은 대중교육과 빈민구제, 노인연금, 실업구제를 위한 공공사업을 실시해야 하며, 그 비용은 누진적인 소득세 징수로 충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영국 정부는 이 책의 판매를 금지하고 출판업자를 투옥했다. 반역죄로 기소된 페인에게는 체포령이 떨어졌다. 페인은 체포령이 자신에게 도착하기 전에 프랑스 국민공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프랑스로 가고 있었다. 영국에서는 궐석재판에서 반란죄로 유죄 판결을 받고 법익을 박탈당한 자로 선포되었다. 프랑스에서도 페인의 삶은 순탄치 않았다. 그는 군주제 철폐에 환호를 보냈지만, 국왕 루이 16세의 목숨은 살려주자고 주장했다. 권력을 잃은 왕은 페인에게 한 명의 인간일 뿐이었던 것이다. 로베스피에르 등 급진주의자들이 권력을 잡자 페인은 1793년 12월 28일 투옥당했고, 이듬해 11월 4일 로베스피에르의 실각과 함께 풀려났다.

 

 


좋지 않은 건강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국민공회에서 혁명의 완성에 심혈을 기울이던 페인은 1802년 9월 프랑스에서의 생활을 마치고 미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는 곧 미국을 위해 애쓴 자신의 노력은 모두 잊혀졌고, 자신은 단지 세계 최고의 이단자로 대접받고 있음을 확인했다. 새로운 기득권층이 된 이들에게 페인은 이미 불편한 존재였던 것이다. 특히 재산 소유의 불평등을 공격한 페인의 마지막 책 <토지 분배의 정의 Agrarian Justice>(1797)는 기득권층에게는 참으로 달갑지 않은 것이었다. 새로운 기득권층은 그가 출옥 전후에 쓴 <이성의 시대 Age of Reason> 1, 2부를 근거로 페인을 무신론자로 몰아세웠다.

 

페인은 술을 마시면서 가난을 잊고 씁쓸함을 달래다가, 1809년 6월 8일 뉴욕 시에서 파란만장한 생을 마쳤다. 그는 독립혁명에 큰 기여를 한 대가로 뉴욕 주정부에서 하사한 뉴로셀 농장에 묻혔는데, 10년 후 정치 저널리스트 윌리엄 코벳이 그의 유해를 영국으로 가져갔다. 코벳은 뒤늦게나마 페인의 장례식을 그의 공로에 걸맞게 치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페인의 유골마저 분실되어 그의 흔적은 오직 책으로만 남게 되었다.  

 

토마스 페인의 삶을 돌이켜보건대, 그는 한번도 평탄한 생활을 누리지 못했고, 심지어는 죽음 이후에도 평온하지 못했다. 그의 생애와 사상이 온통 혁명으로 가득 채워져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의 책 제목처럼 그의 주장은 ‘상식’이다. 상식마저 지켜지지 않는 것이 현실이었기 때문에, 페인은 부득이하게 혁명가가 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인은 뼛속까지 혁명적인 사람이었다. 그는 상식을 지키기 위한 혁명 앞에서 국적을 따지지 않았다. 박홍규 교수의 말대로 그는 단지 적국과 싸운 열렬한 독립운동가나, 왕을 무너뜨린 용감한 혁명가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특정한 적이 없었으며, 인권을 유린하는 자는 누구나 적이었다. 이제 세계의 시민들이 국가나 이념을 넘어서 이웃처럼 교류하는 시대가 되었다. 다시 한번 상기할 것은 인권은 상식이라는 것이다. <상식>이라는 책이 나온 지 250년이 다 되어가는데, 우리는 과연 상식을 지키고 있는가?

 

 

토마스 페인의 역사적인 저서 <상식, 인권> 1, 2부를 번역한 책이다. 실로 한 나라의 혁명에 관여하는 것도 쉽지 않은데, 세계 역사상 가장 중요한 전환기가 되는 두 혁명의 사상적 기초를 한 사람이 동분서주하며 세웠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토마스 페인의 저서를 우리나라에서는 쉽게 찾아보기 힘든데, 이를 안타까이 여긴 박홍규 교수가 페인의 가장 중요한 저서를 완역한 것이다. 페인은 어떠한 기득권도 인정하지 않는 혁명가였다. 그런 아나키즘적 성향이 존 애덤스(John Adams) 같은 이에게는 곱게 보이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

상식

 

토마스 페인이 역사적으로 대단히 위대한 인물임에도 크게 부각되지 않았던 것은 그가 그만큼 새로운 권력층에도 부담스러운 존재였음을 말해준다. 페인이 <상식>의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것은 우리에게 언제나 유효하다. “‘그릇된 것’에 대해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 것이 오랜 습관으로 굳어지면, 그 그릇된 것은 표면상 ‘옳은 것’처럼 보이게 된다. 이렇게 될 경우, 처음에는 관습을 지키려는 무서운 아우성이 일어난다. 그러나 소동은 곧 가라앉기 마련이다. 시간은 이성보다 더 많은 개종자를 만들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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