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세 계 인 물

빌헬름 2세

나 그 네 2012. 6. 21. 18:05

제1차 세계대전이 한창이던 1916년 가을, 독일 황제 빌헬름 2세는 이탈리아를 방문하고 돌아온 폰 뷜로 특사를 접견했다. 이탈리아 황태후인 마르게리타는 빌헬름이 옛날에 사랑했던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이번 전쟁을 두고 뭐라고 하던가?” 황제가 물었다. 폰 뷜로는 대답했다. “이 전쟁의 결과 전 세계에서 황제들이 사라지고 공화정이 이루어지며, 사회주의가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빌헬름 2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그녀가 그렇게 생각이 없는 줄은 몰랐군. 설마 그럴 리가 있는가?” 그럴 리가 있었다.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는 정확히 그런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가 황제로 불릴 날도, 독일 제2제국의 수명도 겨우 2년이 남아 있었다.

 


외줄 위에 얹힌 제국

그처럼 놀라운 안목을 가졌던 이탈리아 황태후는 본래 독일 왕가의 피를 이었다. 빌헬름 2세 자신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외손자로서, 세계대전 당시 적국인 영국의 조지 5세는 외사촌, 역시 적국인 러시아의 니콜라이 2세는 그의 외종매부였다. 이처럼 유럽의 왕실은 서로 복잡한 혼맥으로 얽혀 있었고, 과거에는 이로 인해 주로 왕위 계승을 놓고 전쟁이 벌어지곤 했다. 하지만 국민국가 시대에 접어들면서, 그보다는 영토 문제, 식민지 문제, 그리고 민족주의 문제가 국제분쟁의 주원인이 된다.

 

그런 점에서, 왕조 시대에 주민의 성향과는 관계없이 왕실의 혼인관계와 상속관계로 땅을 주고받으며 얼기설기 지도가 형성된 유럽은, 항상 전쟁의 위험을 품고 있었다. 이탈리아는 오스트리아의 피우메를 차지하고 싶어했고, 여러 슬라브계 지역들도 오스트리아로부터의 독립을 원했다. 폴란드는 러시아와 독일을 상대로 독립투쟁을 그치지 않았다. 여기에 지정학적인 요충지들도 분쟁의 불씨를 품었다.


 

알자스로렌 지방은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다르다넬스 해협은 터키와 러시아 사이에서 끊임없이 문제가 되었으며, 영국은 벨기에의 중립 유지를 특별히 중시했다. 더욱이 해외식민지 쟁탈전까지 벌어지면서, 19세기의 유럽은 겉으로는 번영과 평화에 취해 있었지만, 항상 세계대전의 가능성을 내재하고 있었다.

 

이렇게 복잡한 유럽의 상황을 최대 한도로 이용하여 19세기 후반에 탄생한 것이 독일제국이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민족을 하나의 나라로”라는 민족주의적 염원을 프로이센의 효율적인 군사력, 유럽 열강들 사이의 뒤얽힌 이해관계와 결합하여, 프로이센이 독일을 통일하고 제국을 선언하게끔 했다. 그 뒤에도 그는 여러 가지의 세력과 이해관계를 교묘히 조정하며 제국을 안정시켜갔다. 국내적으로는 구시대적인 토지 귀족들과 신흥 부르주아들이 황제 아래 타협하고 제휴하도록 했으며, 대외적으로는 영국,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러시아 등 서로 입장이 제각각인 나라들이 각자의 이익을 위해 독일과 손잡고 프랑스를 따돌리도록 했다.

 

1890년경의 빌헬름 2세
<출처 : Scewing at en.wikipedia.org>


그러나 아무리 천재적인 곡예사도 무한정 외줄타기를 해낼 수는 없다. 19세기 말이 되자 독일은 프랑스와의 지속적인 적대관계라는 부담뿐 아니라 농업보호 문제로 러시아와 갈등을 빚기 시작했고, 영국과는 식민지 문제로 부딪혔다. 게다가 “전제적 제국도 아니고 참다운 입헌군주국도 아닌” 독일제국의 정치적 불안도 갈수록 커져갔다. 헌법상 최고권력은 각 지역 대표들이 모인 제국의회(상원)에 있었지만 실권은 프로이센 출신인 황실과 제국재상(비스마르크)에게 있었고, 황제와 비스마르크 사이의 역학관계도 불분명했다.

 

국민의 직접 선거로 구성되는 연방의회(하원)는 예산승인권 외에는 정부에 영향을 미칠 수 없었는데, 따라서 연방의회 내의 여러 정당들도 유명무실했다. 그러나 독일이 사회경제적으로 발전함에 따라 사회 각계의 이해관계 대립이 점점 뚜렷해졌고, 이에 따라 정당을 중심으로 진정한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움직임 역시 계속 커졌다. 비스마르크는 ‘사회주의 탄압법’으로 그 중심에 서 있던 사회주의자들을 억누르며 갈등을 봉합하려 했지만 한계가 드러나고 있었다.

 

이런 한계를 보면서, 그리고 개인적인 야심과 비스마르크에 대한 혐오감까지 더하여, 이 제국의 건설자에게서 지휘봉을 빼앗은 사람이 바로 빌헬름 2세였다. 그는 과연 더 훌륭한 지휘자가 될 수 있을 것인가? 

 

 

빌헬름, 독일호의 당직장교가 되다


빌헬름 2세는 프리드리히 빌헬름 왕자(뒤의 프리드리히 3세)의 아들로 1859년 1월 27일에 포츠담에서 태어났다. 태어날 때 그는 둔위, 즉 다리가 먼저 나오는 자세로 태어났으며, 이때 팔이 부러진 후유증으로 평생 왼팔이 오른팔보다 짧은 채로 살게 되었다고 한다. 그를 찍은 모든 사진은 이 사실을 교묘하게 감추고 있다. 이런 신체적 결함과 상반된 훈육(할아버지인 빌헬름 1세는 그를 전형적인 프로이센 귀족답게 키우려 했으나, 영국 왕실 출신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영국 신사’를 목표로 가르쳤다) 때문인지, 소년 빌헬름은 머리는 비상하지만 심술궂고, 참을성이 없으며, 과대망상에 빠지는 경향이 있는,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였다.

 

본 대학을 나온 그는 20대가 되면서 군대에 들어갔으며, 군대 분위기에 만족해했다. 하지만 그 계통에서 충분한 경력을 쌓기도 전에 막중한 책임을 맡게 되었으니, 1888년에 빌헬름 1세가 죽고, 이어 아버지인 프리드리히가 다시 황제 즉위 99일 만에 암으로 숨짐으로써, 29세의 나이로 독일제국 황제가 되었던 것이다. 젊은 황제는 제국을 보다 입헌민주적인 체제로 바꾸려 했던 아버지처럼 진보적이지는 않았으나, 황제와 제국재상 사이의 모호한 역학관계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하여 탄광 파업 문제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비스마르크를 추궁했고, 결국 1890년 3월에 ‘사임’의 형식을 빌려 그를 내쫓아 버렸다. 이제 제국을 자유롭게 통치할 수 있게 되었다고 여긴 빌헬름은 기쁨에 넘쳐 “짐은 이제 이 국가라는 군함의 당직장교다! 항로는 그대로, 전속 전진!”이라고 외쳤다고 한다.

 


자꾸만 적을 만드는 대외정책


하지만 비스마르크만한 수완이 부족했던 그는 국내의 이익집단들의 요구와 민주화 열망에 제대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을 적절히 엮은 균형 위에 올라서 있던 제국의 황권은 갈수록 흔들렸으며, 빌헬름 2세는 결국 토지 귀족, 산업 부르주아, 사회주의자, 그리고 군부 등의 수시로 바뀌는 세력구도 속에서 확고한 지배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정치인으로서는 이런 난처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그리고 개인으로서는 자신의 과대망상을 충족시키기 위해, 빌헬름 2세는 공격적인 대외정책에 의존했다. 그것은 비스마르크가 독일을 이끌던 시절에 비하면 너무도 다른 대외정책이었으며, 결코 “항로는 그대로, 전속 전진”일 수 없었다.

 

먼저 비스마르크가 공을 들였던 러시아와의 우호관계를 평가절하하고, 1890년에 만료되는 러시아와의 보장조약을 갱신하지 않는 한편 러시아 농산물에 특별히 고율 관세를 매기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자 불안을 느낀 러시아는 1891년에 프랑스와 동맹을 맺는다. 독일의 숙적인 프랑스와 러시아가 양쪽에서 독일과 대립하는 상황을 초래한 것이다. 이는 빌헬름 2세 자신과 비스마르크를 이어 재상이 된 카프리비의 친영국적인 자세와도 관련이 있었다. 그래서 1890년에는 북해의 헬골란트를 받는 대신 아프리카의 요충지인 잔지바르를 영국에 양보하기도 했다.

 

 

순양함에 승선한 빌헬름 2세(가운데) <출처 : German Federal Archive>

 

 

하지만 그런 친영적 외교정책은 1894년에 카프리비를 해임하고 티르피츠 제독의 “독일 해군 증강계획”을 승인하면서 어긋나기 시작했다. 본래 영국은 유럽 대륙에서 나폴레옹 제국과 같은 강대국이 출현하는 것을 저지한다는 전략을 계속 견지해 왔다. 비스마르크는 바로 그 점을 파고들어, “프랑스를 견제하기 위해 독일이 통일되어야 한다. 독일은 해군력이 전혀 없다시피 한 나라이니 영국의 이익과 충돌하지 않는다”는 논리로 영국을 설득시켜 통일 과정을 방해하지 않도록 했었다. 그러나 이제 빌헬름 2세는 해군력을 증강하겠다고 했으며, 독일의 급속한 산업생산력 증가세를 볼 때 이는 영국에 이만저만한 위협이 아닐 수 없었다. 점차 두 나라의 관계는 서먹해져 갔다. 그는 1901년 영국으로 가서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 빅토리아 여왕의 시신을 끌어안으며 깊은 애도를 표시했다. 하지만 그때 이미 영국은 독일을 자신들의 가장 큰 경쟁국 중 하나로 견제하고 있었다.

 

빌헬름 2세가 가장 눈독을 들였던 해외 영토는 동유럽에서 중동에 이르는 지역이었다. 그는 1897년에 투르크를 방문하여 그 나라의 낙후된 기간산업을 근대화하는 데 도움을 아끼지 않겠다고 약속했다. 유명한 “바그다드 철도” 건설 계획도 이때 나왔는데, 베를린(Berlin)에서 시작해 비잔티움(Byzantium, 이스탄불), 바그다드(Baghdad)를 잇는 이 철도야말로 빌헬름 2세의 “3B 정책”을 표상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다르다넬스 해협 통행권을 중요시하던 러시아의 정책과 정면충돌했을 뿐 아니라, 케이프타운(Capetown), 카이로(Cairo), 캘커타(Calcutta)를 잇는 영국의 3C정책, 즉 아프리카와 인도 식민지의 연계성을 보존한다는 정책과도 부딪칠 수밖에 없었다. 1905년에는 모로코 사건이 있었다. 모로코를 보호국화하려는 프랑스에 맞서 빌헬름 2세가 느닷없이 모로코를 방문하여 “모로코 독립을 지지한다”고 선언한 것이다. 1906년과 1911년에도 같은 일이 반복되었는데, 영국이 프랑스를 강력히 지원함에 따라 독일은 약간의 보상만 챙긴 채 물러나야 했다. 사실 영국은 앞선 1904년에 프랑스와 협상을 맺고 있었다. 다시 1907년에는 러시아와도 협상을 맺었고, 이는 모두 군사동맹이라기보다 상호간에 세력 범위를 타협하는 내용이었으나, 결과적으로 러시아-프랑스 동맹과도 맞물려 ‘3국협상’으로 독일을 포위 압박하는 구도가 되었다.

 

빌헬름 2세는 극동에도 세력을 뻗쳤다. 1900년에는 다른 서구 열강과 함께 북경을 공략하고 (이때 빌헬름 2세는 출정하는 병사들 앞에서 “약 650년 전 몽골인들에게 겪은 치욕을 갚아줘라”고 연설했다고 한다), 앞서 1895년에는 러시아·프랑스와 함께 청일전쟁에서 이긴 일본을 압박하여 삼국간섭을 행한 대가로 청나라에게서 산둥 반도를 조차 받았다. 그는 일본에 맞서 한국에도 개입하려 했던 듯하다. 극동에서의 독일의 활동은, 중동이나 아프리카에 비하면 다른 강대국과의 충돌의 여지는 적었지만, 나중에 일본이 독일에 맞서 세계대전에 개입하는 계기 중 하나를 마련했다.

 

   

세계대전의 문을 열다


이렇게 비스마르크 체제에서 독일에게 우호적이었던 영국과 러시아가 프랑스 편으로 돌아서 버리고, 독일은 오스트리아, 이탈리아와의 3국동맹, 그리고 투르크 정도만을 믿을 수 있게 되었다. (그나마 이탈리아는 1902년에 프랑스와 비밀협정을 맺고, 영국, 프랑스와의 전쟁 시에는 가담하지 않는다는 전제로 3국동맹에 머물기로 함으로써 사실상 전선을 이탈했다.)

 

 

힌덴부르크, 빌헬름 2세, 루덴도르프(좌로부터)
<출처 : BrokenSphere at en.wikipedia.org>

 

 

소수민족 문제를 안고 있던 오스트리아와의 밀착은 결국 독일이 그다지 바라지 않았던 전쟁에 끌려들어가게끔 했다. 1914년 6월 28일에 오스트리아의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처가 사라예보에서 암살된 것이다.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세르비아에게 보복할 것이며 이를 지지해 달라는 친서를 보냈고, 빌헬름 2세는 “적극 지지한다”는 회신을 보냈다. 그리고 예정대로 발트해 유람을 나갔다. 그는 이것이 오스트리아의 응징작전으로 단기간에 끝나버릴 분쟁으로만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세르비아에게 안전보장을 해주었던 러시아는 개입을 선언했고, 프랑스도 러시아와의 동맹에 따라 개입할 뜻을 밝혔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깨달은 베를린에서는 대책회의가 열렸으나, 황제가 이미 오스트리아 적극 지지 의사를 밝혀 버린 데다 유람 중인 황제와 연락이 닿지 않아 어쩔 수가 없었다. 영국도 전쟁은 피하고 싶은 나머지, 세르비아에게 오스트리아에 대해 사과하고 배상에 응하도록 압박했다. 그러나 주전론에 불타고 있던 오스트리아가 일체의 협상을 거부함으로써 7월 24일, 마침내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

 

자신의 경솔한 대응이 가져온 결과를 뒤늦게 깨달은 빌헬름 2세는 후회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그는 1905년에 세워진 ‘슐리펜 계획’에 따라 전쟁을 수행하도록 했다. 서부와 동부에서 동시에 적을 상대할 때를 대비해 세워진 이 계획에 따르면 먼저 서부전선에 전력을 집중하여 프랑스를 쓰러트리고, 다음에는 동부의 러시아를 공격한다. 그러나 이는 두 가지 문제점을 갖고 있었다. 벨기에 영토에 진입함으로써 영국의 참전 의지를 북돋았다는 점, 그리고 서부전선에서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막대한 물량 소비와 장기 교착 상태가 빚어졌다는 점이었다.

 

6주 만에 프랑스를 쓰러트리려던 계획은 우스갯소리처럼 되고, 서부전선에서는 1918년에 전쟁이 끝나기까지 거의 전선의 변동이 없이 밀고 밀리는 공방전이 되풀이되었다. 물론 상상할 수 없는 사상자들을 내면서 말이다. 다행히 동부전선에서는 독일의 전운이 좋아서 수적으로 우세한 러시아군을 밀어붙였으나, 이에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른 힌덴부르크루덴도르프는 일종의 군부독재와 같은 체제를 구축해서 빌헬름 2세를 껍데기뿐인 황제로 만들어버렸다. 바다에서는 빌헬름이 그토록 공을 들인 독일 함대가 불리함을 이유로 거의 바다로 나가지 않고 항구만 지켰으며, 주로 잠수함을 동원해 적의 보급을 공략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미국인 128명이 탑승한 영국 여객선 루시타니아호가 격침되면서, 미국마저 전쟁에 뛰어들게 되었다.

 

 

퇴위, 망명, 죽음


1918년 여름에는 패전의 기미가 뚜렷해졌고, 동맹국 불가리아까지 항복했다. 독일 군부도 항복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했고, 그 전제조건 중 하나로 빌헬름 2세가 퇴위해야 한다고 보았다. 10월 28일의 킬 군항 반란을 필두로 독일 전역에서 반정부 시위와 폭동이 벌어지자 퇴위 요구는 더욱 절박해졌다. 빌헬름 2세는 끝까지 “독일황제로서는 퇴위, 프로이센 왕으로서는 재위”하겠다고 주장했으나, 새 내각은 11월 9일에 “황제와 왕위를 비롯한 모든 공직에서 퇴위한다”는 발표를 멋대로 해버렸다. 절망한 빌헬름은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제2제정은 어이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망명 중의 빌헬름(왼쪽), 빌헬름이 만년을 보낸 네덜란드의 도른 성(오른쪽). <출처 : German Federal Archive>

 

 

네덜란드의 한적한 성(처음에는 아메론겐, 나중에는 도른성)에서 빌헬름은 조용한 망명자로서 24년의 남은 인생을 보냈다. 1921년에 아우구스테 황후가 죽자, 그와 펜팔을 하던 로이스 공녀 헤르미네의 아들을 매개로 헤르미네와 재혼했다. 베르사유 조약 227조는 빌헬름을 전범으로 규정하고 재판에 회부할 것을 명시했으나, 네덜란드에서 그의 신병 인도를 끝까지 거절함으로써 그 조항은 실현되지 못했다. 1941년 6월 4일, 그는 폐색전증으로 사망했다. 향년 83세. 히틀러는 그의 유해를 독일로 가져와서 국장을 치르려 했으나, 네덜란드는 그 요구도 거부했다. “군주제가 복원되기 전까지는 독일로 돌아가지 않겠다”는 빌헬름의 유지를 받든다는 이유였다.

 

독일제국은 세계에 자랑할 만한 것들을 많이 갖추고 있었다. 미국에 버금가는 놀라운 경제 성장과 산업생산력 증대를 보여주었을 뿐 아니라, 디젤, 체펠린, 보슈, 호프만 같은 발명가들이 기술문명의 발달에 큰 몫을 했다. 노벨상의 삼분의 일을 독일인들이 휩쓸었고, 마르크스나 막스 베버, 프로이트, 몸젠 같은 대학자들이며 토마스 만, 하우프트만 같은 문호들도 나왔다. 그야말로 세계문명의 발전을 독일이 선도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러나 빌헬름 2세는 그런 영광에 만족하지 못했으며, 다른 종류의 영광을 원했다. 그래서 그는 이 나라의 성공적이고 완전한 근대화의 걸림돌이 되었고, 수많은 국민의 목숨을 스러지게 했다. 그는 빅토리아 여왕의 ‘신사적인 제국주의’, 프로이센의 군국주의, 비스마르크의 안보동맹체제의 “못난 자식”이었다.

 

 

 

함규진
함규진 / 역사저술가
글쓴이 함규진은 여러 방면의 지적 흐름에 관심이 많다. 정치학을 전공하여 대학에서 강의를 하는 한편, 주로 역사와 관련된 책을 여러 권 썼고, 인물이나 사상에 대한 번역서도 많이 냈다. 동양과 서양, 전통과 현대, 보수와 진보 등 서로 대립되는 듯한 입장 사이에 길을 내고 함께 살아갈 집을 짓는 것이 꿈이다.

발행일  2010.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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