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atural science /화 학

한국의 차(茶)

나 그 네 2013. 1. 9. 18:24

차(茶)는 커피나 코코아, 콜라 등의 음료를 능가하는 세계에서 가장 소비량이 많은 기호음료이다. 중국에서 시작되어 전 세계적으로 퍼진 차는 우리 역사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세계사를 바꾼 차

차는 차나무의 새 잎과 연한 줄기를 채취해서 증기로 찌거나 햇볕에 말리는 등의 과정을 거친 후, 더운 물에 우리거나 타서 마시는 음료이다. 차나무는 중국종(種)과 아셈종(種)이 있는데, 차나무가 자라기 위해서는 연평균 기온 13도 이상, 강우량은 연평균 1,400mm이상이어야 하므로 한국의 경우는 남부지방에서 재배가 가능하다.

차를 재배하는 다원(茶園)의 풍경. 기록에 따르면 828년(흥덕왕 3년)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차 종자를 가져다 왕명으로 지리산에 심었다고 한다. 지리산 일대는 기후 및 재배조건이 차 재배에 적합하여 현재까지도 차나무 재배가 활발하다.

차나무의 원산지인 중국 남부의 사천성, 운남성, 귀주성 등지에서 시작된 차 마시는 풍습은 매우 오래되었다. 처음에 차는 약으로 마셨으나, 한(BC 202〜AD 220)나라 시기에 궁중과 귀족 사회에 음료로서 널리 퍼졌다. 차 문화는 차의 생육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위진남북조(221〜589) 시대의 음료 풍습은 남차북락(南茶北酪), 즉 차 마시기는 화남지방에서 유행하였을 뿐 유목민이 장악한 화북지역에서는 유제품을 먹었다.

양현지(楊衒之)가 547년경에 편찬한 [낙양가람기(洛陽伽藍記)]에는 이와 관련된 기록이 있다.

“남제 출신의 왕숙(王肅)은 북위에 투항했는데, 처음에는 양고기 및 유제품(乳酪)을 먹지 않고 늘 붕어국을 먹고 차를 마셨다. 수년 후 왕숙이 효문제(471〜499)가 여는 조정 연회에 참가해 양고기를 많이 먹고 유락죽을 마시니 효문제가 이상히 여겨 4가지 음식 가운데 어떤 것이 으뜸이냐고 물었다. 왕숙은 차(茗)가 가장 쓸모가 없어 단지 유제품의 노비로 어울린다고 대답했고 효문제는 크게 웃었다. 이후 북위에서는 차를 두고 낙노(酪奴)라 불렀다.”

북위에서는 이후 차를 마시는 사람들을 비난하고 희롱하였고, 조정 연회에서 차를 준비해도 모두 수치스럽게 여기며 마시지 않았다.

하지만 당나라 시대에 기후가 온난해져서 차 생산이 늘고, 숙종(756〜762)이 금주령을 반포하자 술 대용으로 차를 마시면서 차 마시는 풍습이 중국 전역에 유행하게 된다. 승려, 도사, 문인이 중심이 되어 차 문화가 성행하기 시작했는데, 특히 차의 성인으로 추앙받는 육우(陸羽, 733〜804)는 [다경(茶經)]이란 세계 최초의 차 전문서를 만들었다. 이후 차를 마시는 것은 단순히 음료를 마시는 것이 아니라, 격식을 갖춘 하나의 예법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차를 마시려면 도자기가 필요하다. 송나라가 도자기를 대규모로 생산하여 외국에 수출할 수 있었던 것은, 차가 주변 나라에 널리 전파되었기 때문이다. 유럽은 중국으로부터 대량으로 차를 수입해간 고객이었고, 동시에 도자기도 대량으로 수입했다. 이후 유럽인들은 만성적인 적자를 만회하고자 도자기를 직접 생산했고, 중국의 차나무를 인도, 실론으로 가져와 심어 그 지역의 생태 환경을 크게 바꾸어 버렸다. 영국이 청나라를 상대로 아편전쟁(1840〜1842)을 일으킨 것이나, 1773년 미국 독립운동의 도화선이 된 보스턴 차 사건은 모두 차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이처럼 차는 세계사를 바꾼 엄청난 물건이었다.

차의 도입 시기

우리 역사상 언제부터 차를 마시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다. 차나무의 한반도 자생설, 가야 허황후의 차 도입설, 고구려 초기 구다국(句茶國)의 차 생산 주장 등이 있으나, 신빙성이 부족하다. 차 도입에 관한 가장 유명한 기록은 [삼국사기]의 다음 기록이다.

“(828년) 신라 흥덕왕 3년에 신라 사신 김대렴이 당나라에서 차의 종자를 가져와 지리산에 심게 하였다. 차는 신라 27대 선덕여왕 때(632〜647)부터 있었지만, 이때에 이르러 성하였다.”

차나무의 재배는 828년이 시작일 수는 있지만, 이 보다 앞서 신라에서 차를 마신 기록들이 보인다. 신문왕(681〜692)에게 설총(薛聰)이 지어 바친 [화왕계(花王戒)]라는 이야기에는 ‘차와 술로서 정신을 맑게 해야 한다.’라는 내용이 있다. 이 당시에 차가 정신을 맑게 하는 용도로서 왕의 일상적인 음료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경덕왕(742〜765)때 활약한 향가의 대표적 작가인 충담사(忠談師)는 3월 3일과 9월 9일에 남산 삼화령에 모신 미륵세존에게 차 공양을 올리다가, 경덕왕을 만나 차와 향가 한수를 지어 바치기도 했다. 신라에서는 늦어도 7세기에는 차를 마셨을 것이 분명하다.

신라보다 앞선 백제의 차 문화

그런데 최근 신라보다 앞서 백제에서 차를 마셨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차 생산이 가장 많은 지역은 백제가 자리했던 전라도 지역이다. 백제는 차나무를 재배하기 좋은 지리적 여건을 갖추었고, 차문화가 발달한 중국 화남지역의 나라들과 교역이 많았다. 게다가 백제지역에서는 고구려, 신라와 달리 중국제 자기(瓷器)가 많이 출토되고 있다. 그 가운데 주전자(注子)와 주발(碗)은 차를 마시는 용기로 볼 수 있다. 당시 차는 찻잎을 분말로 간 다음 쌀가루로 쑨 풀과 섞어 덩어리차(차병:茶餠)를 만들어 말린 후, 차를 마실 때에 이것을 찧고 빻고 뜨거운 물을 부어 국으로 만든 후 파, 생강, 소금 등을 타서 먹었다. 이때 필요한 것이 차를 빻는 돌절구인데, 풍납토성과 몽천토성 등에서 발견된 바 있다. 또한 차를 담아두는 주전자, 특히 닭머리 모양이 장식된 도자기 주전자(鷄首壺注子)는 백제의 수도뿐 아니라 지방 수장의 무덤에서도 출토되고 있다.

닭머리 모양이 장식된 주전자. 충남 공주 수촌리에서 출토된 높이 23cm 크기의 자기 주전자로, 중국에서 수입한 물건이다. 5세기 무렵의 것으로 추정되며, 차를 마시기 위해서 사용한 것이다.

풍납토성에서 출토된 돌절구. 차를 빻기 위해서는 돌절구가 필요했다. 백제는 일찍부터 차를 마셨던 나라였다.

이러한 증거들은 백제 시대에 차 마시기가 유행했음을 알려주는 것이다. 백제에서는 이미 3〜4세기에 차를 마시는 문화가 도입되어, 왕실과 중앙 귀족은 물론 지방의 수장들도 차를 즐겼다.

고구려에서도 차를 마셨을까?

백제 사람들이 차를 마셨다면, 고구려에서는 어떠했을까? 고구려 지역은 백제에 비해 기후가 추워 차를 재배할 수 없는 곳이다. 또한 고구려는 백제와 달리 차 문화가 발달하지 않은 북조의 나라들과 교류가 많았다. 따라서 기후와 지리, 대외관계의 여건상 차 문화가 발전하기 어려웠다. [책부원귀(冊府元龜)]의 기록에 따르면 645년 백암성(白巖城)이 당나라군에게 함락되자, 백암성의 어른들과 스님(僧尼)들이 승리한 당태종에게 이락(夷酪- 유제품의 일종)을 바쳤다고 한다.

중국의 불교에서는 차 공양을 수행의 방법으로 여겨 스님들이 차를 즐겨 마셨다. 하지만 차 문화는 스님들이 퍼뜨린 것이 아니라, 기존의 차 문화를 불교가 수용한 것이다. 4〜6세기 북중국에서도 차 문화가 덜 발달된 만큼, 북중국의 불교를 받아들인 고구려에서 스님들에게 차를 공양하는 풍습이 당장 생겼다고 볼 수는 없다.

400년 무렵에 만들어진 무용총(舞踊塚)의 널방 북벽에는 무덤 주인공이 스님 두 분을 접대하는 장면이 보인다. 이 그림을 차와 과자를 대접하는 장면으로 보려는 이들도 있지만, 차에 어울리는 과자는 7세기 당나라 시대에 와서야 등장한다. 고구려가 중국과 교류하면서 차를 알기는 했겠지만, 백제와 달리 차 문화가 발전하지는 못했다. 고구려 지역에서 중국 자기의 출토가 적은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차 문화의 전성기, 고려

발해의 경우 당나라와 많은 교류가 있었던 만큼 차를 수입해서 왕실과 귀족이 마셨을 가능성은 있지만, 차를 재배한 기록은 없다. 7세기 이후 기온이 따뜻해지면서 두만강 북쪽의 노성(盧城)지역에서 발해인들이 벼를 재배하기도 했지만, 차를 재배하지는 못했다. 발해는 위도(緯度)가 높아 차나무를 재배하고 이를 수확해 차 문화를 즐기기에 적합한 나라가 아니었다.

차 문화가 전성기를 맞이한 것은 고려시대였다. 고려시대 연등회 행사 때에는 왕이 태자 이하 신하들에게 차를 하사하였고, 신하들은 차를 내린 왕의 은혜에 감사하는 뜻으로 차를 마시고 인사를 했다. 성종(成宗) 9년(990년)에는 임금이 5품 이상 신하에게 차 10상자, 9품 이상 신하에게는 5상자 등을 하사한 바 있다. 또 왕이 총애하는 신하들이 죽었을 때 차를 하사하기도 했는데, 995년 최량(崔亮)이 죽자, 왕이 쌀 300섬, 보리 200석과 함께 뇌원차(腦原茶) 1,000상자를 부의(賻儀)하기도 했다. 상례에 이렇게 엄청난 차를 준 것은, 상례를 치르면서 손님을 대할 때 많은 차가 필요할 만큼 당시 차 문화가 성했기 때문이다.

송나라 사람 서긍(徐兢)이 1123년 고려를 방문하고 쓴 [고려도경(高麗圖經)]에는 고려 사람들은 차 마시기를 좋아하는데, 송나라의 납차(臘茶), 용봉사단차(龍鳳賜團茶)를 귀하게 여겨 송나라 상인에게 많이 구입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사신에게 차를 대접할 때에 사신이 다 마시면 기뻐하고, 그렇지 않으면 자기를 깔본다고 여겨 불쾌히 여기기 때문에 억지로라도 차를 다 마셨다고 한다.

차는 외교상에서도 중요 예물로 사용되어, 고려는 거란, 금, 원나라에 차를 보내기도 했다. 또한 외국사신을 영접하는 예빈시(禮賓寺)에서 가장 주요한 것은 차를 내는 일이었다. 고려에서는 ‘다방내시(茶房內侍)’ 제도를 마련해 차에 대한 제반 일을 맡게도 했다. 1159년 의종(毅宗)이 현화사를 방문했을 때 스님들이 차를 마시는 정자(茶亭)을 설치해 임금께 차를 바치기도 했다. 사찰에서는 차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다촌(茶村)을 두기도 하고, 차에 필요한 그릇과 기와를 직접 구워 사용하기도 했다.


다양한 종류의 차. 고려시대에는 왕실, 귀족, 사원을 중심으로 차를 마시는 문화가 유행하였고, 이러한 풍속은 고려청자의 발달에 영향을 끼치기도 하였다.
<출처: getty images Korea>

사찰만이 아니라 정부에서도 차 생산을 집중 관리했는데, [세종실록지리지]에는 고려시대에 차를 전문적으로 생산하는 장인집단들의 행정 구역인 ‘다소(茶所)’가 21개소나 기록되어 있다. 장인들에 의해 차가 전문적으로 생산되었던 만큼, 차의 종류도 다양해졌다. 또한 차 마실 때 필요한 각종 다구(茶具)와 다기(茶器)의 제작이 왕성해져 자기(瓷器)문화도 크게 발전하게 되었다.

차를 파는 다점이 있었다

요즘 거리에는 커피 전문점이 우후죽순으로 늘고 있지만, 고려시대에는 차를 파는 다점(茶店)이 많았다. 왕실과 사원을 중심으로 유행한 차 문화는 민간으로도 널리 퍼져 일반 백성들도 돈이나 물건으로 차를 사거나 마실 수 있었다. 차의 생산이 많아지면서, 차가 대중화되었던 것이다.

996년 성종이 철전(鐵錢- 금속화폐)을 만들어 보급하자, 1002년에 한언공(韓彦恭, 940〜1004)은 상소를 올려 화폐 유통이 국익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그러자 목종(穆宗, 997〜1009)은 “다점, 주점(酒店), 식미점(食味店- 고려시대의 상점) 등의 점포에서 전과 같이 화폐로 교역하는 외에는 일반 백성의 교역에는 베와 쌀을 사용하게 하라.”고 지시했다.

고려시대에 다점은 주점과 더불어 일반 백성들이 작은 돈을 갖고 가서 흔하게 이용하는 곳이었다. 고려의 길에는 관리 등이 쉬어갈 수 있는 역원(驛院)이 있었는데, 이 가운데 차가 유명한 원을 다원이라고 했다. 다원에서는 기녀가 차를 달여 내오기도 했으니, 국영 다방이었던 셈이다.


차례는 차를 올리는 의식

매년 설날이나 추석에는 조상님께 아침 일찍 제사를 지내는 차례를 지낸다. 본래 차례(茶禮)는 뜻 그대로 차를 신이나 조상님께 올리는 의식이었다. 신라 충담사의 경우 미륵부처님께 차를 올리는 공양을 했다. 차는 궁중음식으로도 각광을 받아, 국가 의식에서는 차를 올려는 진차의식(進茶儀式)이 따랐다. 진차의식은 술과 과일을 임금에게 올리기 전에 임금이 먼저 차를 청하면 신하가 차를 올리는 것이다. 고려시대 연등회, 팔관회 등에서 진차의식이 행해졌고, 사신이 왔을 때, 왕자의 책봉이나 공주를 시집보낼 때 등의 의식에도 차례가 행해졌다.

차 소비의 감소

차례에 차를 대신해 술을 올리게 된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 차의 생산량이 크게 줄어 가격이 비싸졌기 때문이었다. 조선이 불교를 배척한 탓에 사찰의 재정형편이 나빠지면서, 사원 주변에 있던 많은 차밭이 관리가 안 되어 차의 생산이 줄어들었다. 또 1480~1750년까지 기온이 크게 떨어진 소빙기를 맞이해 차 생산이 잘 되지 않기도 했다. 전북의 고부(정읍시), 고창, 무장(고창군) 등은 조선시대 차 산지 가운데 가장 북쪽인데, 17~19세기 중반까지 약 200년간 차 생산을 볼 수 없었다. 차나무는 기온이 -13 이하로 떨어지면 추위 피해(寒害)를 입게 된다. 따라서 기후가 추워지면 작황이 크게 줄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청나라에 공물로 보내는 차의 수량이 늘면서, 이를 충족시키기 위해 차에 대한 세금은 늘어났다. 그러자 백성들은 과중한 세금을 내야하는 차 생산을 더욱 기피하게 되었다. 양반들도 차에 대한 세금 때문에 차를 마음대로 마시지 못한다고 할 정도였다. 차 한 홉과 쌀 한 말, 차 한 말과 무명 30필을 바꿀 정도로 차의 가격이 비싸지면서 결국 차의 소비량이 줄고 말았다.

차 문화의 중흥

차 문화가 중흥하기 시작한 것은 기온이 다시 높아지고,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초의선사(草衣禪師, 1786〜1866)와 같은 인물들이등장하면서부터다. 정약용은 강진에서의 유배 생활 중 차를 즐기기 시작하여 차와 관련한 많은 시를 남겼다. 초의선사는 불교뿐만 아니라 유교에도 통달하여 당시의 석학들과 교류하면서 ‘동다송(東茶頌)’등을 지어 우리 차의 우수성을 주장했다. 또 1785년경에는 이덕리(李德履, 1728~?)가 차에 관한 한국 최초의 전문 저작인 [동다기(東茶記)]를 짓기도 했다. [동다기]는 차의 효능을 설명하고, 차 사업을 국가가 직접 관리하여 차를 중국에 수출하며, 그렇게 얻은 수익을 국방 강화에 사용해야 한다는 내용도 담겨져 있다.

한국의 차 문화는 ‘다례(茶禮)’라 한다. 일본의 ‘다도(茶道)’, 중국은 ‘다예(茶藝)’는 크게 보면 모두 예절을 지키고, 차를 마시는 일을 통해 몸과 마음을 닦는 행위를 일컫는다. 다례는 차를 매개로 하여 스스로의 몸을 다스리고, 상대를 배려하며 존중하는 마음과 행동을 외부로 드러내는 행위를 다례의 기본으로 삼는다. 차를 마시는 풍습은 오랜 세월 우리 겨레에게 사랑을 받았다.

차를 마시는 풍습은 19세기 들어 다시 되살아났지만, 일반화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차의 보급은 1970년대 후반부터 활기를 띠기 시작해, 1990년대 이후 건강식품으로 저변이 크게 확대되고 있다. 최근 들어서는 차의 종류도 많아지고, 품질도 좋아졌으며, 생산도 늘어나고 있다.

하지만 2011년 발표된 한 통계에 따르면 한국인이 평균 마시는 차와 커피 소비량은 60g 대 1,800g으로 그 차이가 크다. 시대의 변화와 함께 우리의 차 문화도 새로운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참고문헌: 류건집, [한국차문화사 상, 하], 이른아침, 2007;이기윤, [다도], 대원사, 1997;오미정, [차 생활 문화개론], 하늘북, 2008;이현숙, [조선시대 차산지 연구(소빙기를 중심으로)], [韓國茶學會誌] 9-2호, 한국다학회, 2003;이태진 [소빙기 자연재해와 전란의 피해], [한국사] 30권, 국사편찬위원회, 1998.

김용만 / 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글쓴이 김용만은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국 고대사를 연구하고 있다. 현재는 삼국시대 생활사 관련 저술을 하고 있으며, 장기적으로 한국고대문명사를 집필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고구려의 그 많던 수레는 다 어디로 갔을까], [새로 쓰는 연개소문전], [광개토태왕의 위대한 길] 등의 책을 썼다.

발행일 2012.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