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 뺏지를 보면 지리산을 지금처럼 통으로 보지 못했습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을텐데, 그 중의 하나로는 '야영'문제도 있었네요.
최화수 선생이 만드는 지리산 커뮤니티를 보면,
'그리워라 '야영 전성시대'(3)'라는 제목 아래
"1988년 이전의 지리산에는 20~40평의 단층 슬라브 건물의 대피소들이 있었다.
그것도 노고단, 뱀사골, 연하천, 세석고원, 장터목, 치밭목, 로타리(법계사 앞), 피아골에 있는 것이 전부였다."
또, "지난 1980년대는 야영 장비 등 단단한 채비를 하지 않으면 지리산을 종주하는 것이 불가능했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지리산까지 가는 것도 쉽지 않았지만,
막상 지리산을 올라서 능선 종주를 하는 것도 만만치 않은 일이었던거죠.
지금은 그 누구라도 지리산 하면, 동서로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 이어지는 유장한 능선을 곧바로 떠올리겠지만.
그때는 그렇지 못했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됩니다.
...............
같은 에세이에서
야영 전성시대에는 지리산 주능선 곳곳에 커피나 오미차 등의 음료를 파는 이들이 있었다.
돼지령, 노루목, 토끼봉 등에는 몇 년째 그곳을 지키면서 커피를 팔고는 했다.
이들은 지리산에 일년 내내 야영을 하면서 그 자리를 지켰다. 이들은 마치 도사와 같아서 대화를 나눠보는 재미가 특별했다.
천왕봉에도 등정 기념메달을 새겨주는 청년들이 있었다.
그들은 천왕봉과 가까운 곳에 천막을 설치하고 생활하는 것은 물론이었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천왕봉에서 뺏지와 기념메달을 팔던 곳은 어디였을까요?
...................
최화수 선생은 월간 잡지(?) '우리들의 산'을 만들어 냈습니다.
저는 겨우 몇권만 소장하고 있을 뿐이고, 소장의 Wish List 중에 첫손에 꼽힙니다.
그 전에 잠간 '산에산에'라는 제호로, 지리산 사랑을 표현해 냈는데요.
제 2호 표지는 이렇습니다.
직접 이렇게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1984년 5월에 펴낸 부산PEN산악회 회지 <山에山에> 제2호의 표지입니다.
그 해 5월22일 천왕봉 표지석을 세우던 날의 지리산 천왕봉(1915m)으로 인파가 넘쳐나고 있습니다. 우리도 지리산 천왕봉에 한번 가볼까요?
당시의 등산복 차림을 눈여겨 보실까요. 요즘과 같은 검은색은 전혀 눈에 띄지 않습니다. 등산복 색깔도 시대따라 변한 것이지요.
그러니까 1984년 5월 22일 천왕봉 표지석을 세우는 날인데요.
제 눈길을 강하게 끈 것은 표지판입니다.
녹색바탕에 흰 색의 글씨로 씌여져 있네요.
철판에 페인트칠을 한 걸로 보입니다.
한눈에 보아도 등산지도입니다.
우리는 저 지도에 각각 무슨 글자가 씌여 있을지 대략 짐작을 합니다.
그런데 사진에서는 "천왕봉에서 기념메달을 만들어 판다는 청년들이 '좌판'을 펼치고 있는 모양새를 찾을 수가 없습니다.
정상 너머 쪽에 있겠지 싶습니다.
** 그때의 산, 우리들의 산 -등산 박물관 ** 으로 초대합니다...~~~
[출처] 왜 지리산은 따로따로였을까?|작성자 dar_s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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