旅行/지리산 이야기

진주고등학교 일제 때 교가에 얽힌 에세이

나 그 네 2017. 10. 2. 14:46

아래 글은 진주고등학교 일제 때 교가에 얽힌 에세이입니다.

잔잔하고 담담하게 소회를 밝힌, 그 시절 풍경을 엿볼 수 있는 좋은 글입니다.

1925년 개교된 고등학교는 아마 30년대 넘어서서야 안정되었겠죠.

해방전까지 고등학교를 나누는 것은 아마 아래의 글에서처럼 1937년 중일전쟁입니다.

​그 이전에는 고등학교로서의 낭만이 많았겠지만, 중일전쟁 이후에는 학교가 전쟁의 도구화가 되면서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따라서 일제하 진주고의 본모습은 30년대 중반에서 37년 이전 세대일꺼고요.

37년 이후 세대는 파행적인 학교 생활의 기억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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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말 교가밖에 모르는데...” [황경춘] 추천시글 / [사회문화] 2013/02/04 11:35

복사 http://blog.naver.com/hkc0929/30158549199

 

“일본말 교가밖에 모르는데...”

2013.02.04


일본 제국주의 흥망사(興亡史)에서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대동아전쟁이 시작된 1941년에 버금가는 비중을 가진 해가 1937년입니다.

조선반도 강점 이후 계속된 일본의 대륙침공 공작이 마침내 중일전쟁으로 확대되고,

‘난징 대학살(南京大虐殺)’ 사건으로 일본에 대한 서방세계의 생각이 크게 바뀐 것이 바로 이 해입니다.

승승장구하여 기세등등하던 일본군이었으나,

역사적인 국공합작(國共合作)으로 통일된 중국의 끈질긴 저항과 연합국의 적극적 중국 원조로 전세가 주춤해졌습니다.

당황한 일본은 전력(戰力) 재정비를 위해 악명 높은 ‘국가총동원령’을 비롯한 비상조치를 발표하였습니다.

조선총독부는 새 ‘교육령’을 공포하여 ‘내선일체(內鮮一體)’와 ‘황국신민화(皇國臣民化)’ 등 구호 아래

조선민족을 외형적으로 일본인과 동등하게 취급하는 정신교육을 강화하였습니다.

조선 청년의 일본군 입대 ‘지원’을 대대적으로 선전한 것도 이때였습니다.

당시 우리 조선인이 다닌 초등학교는 ‘보통학교’라 불러, 일본인이 다닌 ‘소학교’와 구별했습니다.

조선인이 보통학교 6년 과정을 마친 뒤, 진학하는 곳이 5년제인 ‘고등보통학교’로 현재의 중학교와 고등학교 과정을 겸한 학교였습니다.

‘소학교’를 마친 일본인이 진학하는 ‘중학교’는 별도로 있었습니다.

그 무렵, 서울을 제외한 지방에서는 조선인 공립 고등보통학교는 한 도(道)에 두세 곳밖에 없어, 입시 경쟁률이 보통 3~4 대 1이 넘었습니다.

검은 색 교모에 산뜻한 교복을 입은 ‘고보생(高普生)’은 시골 아이들의 선망의 대상이었고,

제 경험으로는 학교 소재지 시민들도 우리를 ‘학생’이라 부르며 각별히 대해주었습니다.

우리가 중학교에 입학한 것이 바로 이 격동기 1938년입니다.

3월 중순에 입학시험을 치른 곳은 분명히 ‘진주공립고등보통학교’였는데, 1938년 4월 6일 입학식을 가진 학교 이름은 ‘진주공립중학교’로 되어 있었습니다. 그 사이 조선총독부의 새 교육령으로 4월 1일로 모든 고등보통학교 이름을 일본 학생이 다니는 ‘중학교’로 통일시킨 것입니다.

꿈 많은 저희들의 중학 생활은 이렇게 어수선하게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식량난이나 생필품 결핍은 아직 심각하지 않아,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나 남인수의 ‘애수의 소야곡’을 하모니카로 배우며 친구들과 하숙방에서 청춘의 낭만을 즐기는 여유는 있었습니다.

그런 철없는 우리에게 전쟁의 검은 마수(魔手)는 소리 없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학교 이름이 바뀌면서, 학교생활의 많은 부분이 군대식으로 바뀌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교복이 종래의 학생복에서 군복에 가까운 국방색 복장으로 바뀌고 전투모와 군화도 지급되었습니다.

게다가 군대식 각반을 치고 등교하게 하고, 교문에는 목총을 든 두 명의 상급생 보초도 세웠습니다.

새 교육령은 종래에 허용했던 조선어 과목을 없애고, ‘국어(일본말) 상용(常用)’을 철저히 시행하여, 벌칙을 학교 성적표에 반영시켰습니다.

‘소학교’로 이름이 바뀐 초등학교의 조선어 교육도 폐지되고, 몇 년 뒤에는 조선인과 일본인의 ‘소학교’ 명칭을 ‘국민학교’로 변경하였습니다.

학교에는 강화된 군사훈련을 위한 배속장교가 배치됨과 동시에 교련과 체육 시간도 늘어나고,

3학년부터는 여름방학에 열흘 동안의 근로봉사에 강제 동원되었습니다.

교실에서 합숙하며 7월 말의 뙤약볕 아래 중노동의 후유증에 시달린 저는,

4학년 여름방학에는 친척에 부탁해 모친이 위독하다는 거짓 전보를 치게 하여 강제노동을 면했습니다.

대동아전쟁이 끝나기 2년 전인 1943년에 일본인 5명을 포함한 92명의 동기생이 학창을 떠났으니 금년으로 70년이 됩니다.

10년마다 두꺼운 교지(校誌)를 발간하는 모교는 개교 90주년을 맞는 명년에는  IT시대에 걸맞게 비디오 영상기록 제작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영상기록 담당 후배 한 사람이 서울의 우리 동기 모임을 취재해 갔습니다.

1938년 입학인 우리 14회 졸업 동기생은 매달 14일에 진주, 부산, 서울에서 모임을 가져왔습니다.

40여 년 계속된 서울 모임에는 한때 30여 명이 참석했으나, 지금 그 수는 6명으로 줄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임을 아직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 우리의 자랑입니다.

영상담당 후배는 약 두 시간 동안 우리와 식사를 같이하며, 비디오 촬영과 개별 인터뷰를 한 다음에 교가 합창을 권했습니다.

“우리는 왜말 교가밖에 모르는데...”라고 누가 말하자, “일본말 교가라도 기억하고 계시면, 어떠세요...”라고 그 후배가 충동질했습니다.

늦은 점심시간이고 독방이기 때문에 우리는 일본말 교가를 낮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부르기로 했습니다.

교가 1절은 아직도 그럭저럭 외우고 있었습니다.

군사훈련과 온갖 구박에 시달리던 시절을 회상하던 세대가 일본말 교가까지 부르고 나니,

고생은 했으나 꿈도 많았던 그 시절이 되살아나, 뭔가 착잡하고 씁쓸한 심정으로 서로의 주름진 얼굴을 쳐다보았습니다.  

필자소개

황경춘

일본 주오(中央)대 법과 중퇴
AP통신 서울지국 특파원, 지국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