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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브러햄 링컨

나 그 네 2009. 1. 9. 13:05

 

에이브러햄 링컨


1863년 1월 1일 오후 2시 백악관 집무실. 그의 손은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내 평생 이 선언서에 서명하는 것보다 더 옳은 일을 한 적은 없습니다. 이 일로 내 이름과 영혼이 역사에 길이 새겨질 텐데, 서명할 때 손이 떨리면 앞으로 이 서류를 본 사람들이 내가 주저했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요.”

 

 

“1863년 1월 1일부터 미합중국에 대하여 반란 상태에 있는 주 또는 어떤 주의 특정 지역에서 노예로 예속되어 있는 모든 이들은 영원히 자유의 몸이 될 것이다. 육해군 당국을 포함한 미국 행정부는 그들의 자유를 인정하고 지킬 것이며, 그들이 진정한 자유를 얻고자 노력하는 데 어떠한 제한도 가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은 남북전쟁이 한창이던 1863년 1월 1일자로, 위와 같이 시작되는 노예해방선언(Emancipation Proclamation)을 공표했다. 바로 전 해인 1862년 9월 22일 그는 노예해방예비선언(Preliminary Emancipation Proclamation)을 공표한 바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40여 년 후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정확히 말하면 흑백 혼혈인)이 탄생했다. 링컨 대통령이 서명한 노예해방선언서 사본 1부가 2005년 11월 뉴욕 크리스티 경매장에서 68만 8000달러에 낙찰되기도 했다. 선언서 원본은 미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되어 있는데, 노예해방선언을 공표하고 1년 뒤인 1864년에 전쟁 비용을 모금하기 위해 필라델피아에서 15부의 사본을 만든 것. 이러한 사실을 통해서도 우리는 노예해방선언서가 공표 당시부터 크나큰 역사적 의미를 지닌 것으로 평가받았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오하이오 주 국회의원 당선자로 링컨을 경멸했던 제임스 가필드라는 인물은 이렇게 말했다. “일리노이의 이류 변호사가 미래의 모든 세대가 기억할 만한 말을 하는 신의 도구로 쓰이다니, 이는 세계 역사상 가장 뜻밖의 사건이네.” 가필드의 말은 사실이었다. 링컨은 지방에서 하찮은 사건만 맡으며 수임료 수입도 변변치 않은, 시쳇말로 별 볼일 없는 변호사였다.

 

 

 

예컨대 링컨은 1855년 6월 특허권 분쟁에 관한 중요한 소송에서 변호인단 일원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같은 측 변호사 조지 하딩은 링컨을 “허름한 행색에 발목까지 내려오지도 않는 바지를 입고, 손잡이 끝에 동그란 공이 달린 파란색 목면 우산을 든 볼품없고 깡마른 꺽다리 촌놈”이라며 비하했다. 역시 같은 측 변호사인 에드윈 M. 스탠턴도 “왜 저 긴팔원숭이를 끌어들였느냐”라며 공공연히 링컨을 무시했다. 링컨의 진정한 리더십은 바로 이 에드윈 M. 스탠턴을 중용한 데서 잘 드러난다. 1861년 대통령 당선 이후 링컨은 변호사 시절부터 자신을 무시해온 정적 스탠턴을 공화당 인사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시 국방장관으로 임명한 것이다. 링컨은 스탠턴이 정직하고 엄격하며 원칙을 밀고 나가는 스타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고, 스탠턴은 과연 링컨의 기대대로 남북전쟁을 승리로 이끄는 데 큰 역할을 했다. 이는 링컨 특유의 포용과 통합의 리더십을 말해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링컨의 생애를 말하는 데 어린 시절의 ‘설화적인 가난’을 빼놓을 수 없다. 무능력한 아버지, 자애롭고 강한 정신력을 지닌 어머니, 그리고 극빈. 링컨의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이름을 서툴게 사인할 때 외에는 글자를 써본 적이 없는’ 사실상의 문맹이었고, 목수와 농장 일꾼으로 전전하는 처지였다. 반면 어머니 낸시 행크스는 어린 링컨에게 성경을 읽어주고, 읽고 쓰는 법을 가르쳤으며, 진심 어린 사랑으로 돌본 현명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였다. 그러나 링컨이 아홉 살 때 그녀는 세상을 떠났고 링컨은 새 어머니를 맞이하게 된다. 다행히도 새어머니 세라 부시 존스턴은 링컨을 친자식처럼 사랑하며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 제대로 가르치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렇다면 링컨의 아버지는 그의 생애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 링컨의 아버지 토머스는 재치 있는 이야기꾼이었다. 남달리 흉내를 잘 냈고 남이 들려준 이야기를 기막힐 정도로 잘 외웠으며, 밤마다 손님이나 이웃들과 이야기 나누는 것을 좋아했다. 이런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는지 링컨은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흥미롭게 각색해 친구들에게 들려주어 넋을 빼놓곤 했다. 링컨은 이런 이야기꾼으로서의 자질에 더해 ‘전설적인 독서욕’으로 닥치는 대로 책을 읽는 아이이자 젊은이였다. 새어머니는 그런 링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특별히 배려하고, 스스로 그만둘 때까지 계속 책을 읽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어주었다.

 

스물두 살 때 집을 떠난 링컨은 뱃사공, 가게 점원, 장사꾼, 우체국장, 측량기사 등으로 일하면서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고 지독한 열성으로 주경야독했다. 스물다섯 살 때 법조인이 되기로 결심한 이후에도 링컨은 철저히 독학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나중에 법조인을 지망하는 젊은이에게 이렇게 조언했다. “책을 구해서 읽고 공부하게. 책을 이해할 줄 아는 능력은 어디서나 다 똑같네. 성공하고야 말겠다는 결심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것을 늘 마음에 새겨두게.” 성공하겠다는 굳은 결심과 의욕, 그리고 엄청난 지식욕과 독서욕이 젊은 링컨이 지닌 단 두 가지 자산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정치인으로서의 꿈은 언제부터 꾸었을까?

링컨은 자신이 시민들에게 존경을 받을 만한 사람임을 증명하겠다는 야망을 일찍부터 품고 있었다. 그는 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기(1837년 취득 및 개업) 전인 1832년에 생가먼 카운티에서 주 의회 의원 후보로 출마했다가 낙선했고, 결국 2년 뒤에 다시 출마해 당선됐다. 이후 8년 동안 유능한 서민 정치가로 활동했는데, 시골뜨기 출신의 변호사이자 서민 정치인에서 일약 전국적 지명도를 얻은 정치인으로 도약한 것은 1858년 일리노이 주 상원의원 선거에서 민주당의 스티븐 더글러스와 벌인 공개 논쟁 덕분이었다. 당시 논쟁에서 노예제도에 대한 링컨의 입장은 그것이 미국 독립선언서의 정신에 위배된다는 것이었다.

 

반면, 더글러스는 미국 각 주와 준주 시민들이 노예제를 택할지 배척할지 결정해야 한다는 자치권을 강조했다. 링컨은 이렇게 말했다.  “자치주의는 옳습니다. 이는 절대적이며 영원합니다. 그러나 노예제 문제에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제 오랜 신념은 제게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고, 인간이 다른 사람을 노예로 만드는 것과 관련된 도덕적 권리는 있을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선거에서 링컨은 패했지만 인상적인 연설과 토론, 그리고 확고한 신념으로 많은 사람을 매료시켰고 결국 1860년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지명됐다. 민주당 계열 신문들은 “삼류 서부 변호사, 조잡하고 어색한 농담을 뒤섞어 무식하게 연설하는 사류 웅변가를 공천한 공화당은 그들의 지성이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는 증거를 보여주었다”고 조롱했지만, 1860년 11월 6일 미국 국민은 링컨을 선택했다.

 

이듬해 3월 링컨이 취임한 지 한 달 후에 남군의 공격으로 남북전쟁이 발발했고, 북군은 수세에 몰렸으나 1862년 9월 노예제 폐지를 공언한 노예해방예비선언을 통해 국내외 여론을 유리하게 이끌면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리고 1865년 4월 9일 남군 사령관 로버트 리 장군이 항복함으로써 남북전쟁이 끝났다. 당시 링컨은 1864년 대선에서 재선에 성공해 연임 중이었다.

 

 

남군이 항복한 지 며칠 뒤인 1865년 4월 14일 금요일 저녁 8시가 조금 지난 시각, 링컨 부부는 워싱턴에 있는 포드 극장으로 <우리 미국인 사촌>이라는 연극을 관람하러 마차에 올랐다. 그리고 10시 12분경, 포드 극장 특별석에서 존 윌크스 부스가 대통령의 뒤통수를 향해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약 9시간 뒤인 4월 15일 아침 7시 22분, 링컨의 사망이 최종 언도되었다. 그로부터 40여 년이 지난 1908년, 코카서스 산맥 북쪽 어느 마을에서 부족장이 톨스토이에게 부탁했다.

 

“그는 천둥 같은 목소리로 말했고, 떠오르는 해처럼 웃었으며, 바위처럼 확고하게 행동했습니다. 그의 이름은 링컨이고, 그가 살았던 나라는 미합중국이라고 합니다. 그곳은 너무 멀어서, 젊은이가 걸어서 거기에 닿을 때면 노인이 되어 있을 거라고 합니다. 그 사람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그로부터 한 세기가 지난 1963년 8월23일, 마틴 루터 킹은 이렇게 연설했다. “한 세기 전, 한 위대한 미국인은 노예해방선언문에 서명했습니다. 우리는 오늘 의미심장하고 상징적인 그 자리에 서 있습니다. 그 역사적 선언은 불의의 불길에 고통을 받던 수백만 흑인 노예들에게 희망의 등불로 다가왔습니다. 긴 예속의 밤을 끝내는 환희의 새 아침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리고 2008년 11월 4일, 미국 제44대 대통령 선거 당선자 버락 오바마는 당선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젊은이와 노인, 부유한 이와 가난한 이, 민주당원과 공화당원, 흑인과 백인과 히스패닉과 아시아계와 미국 원주민, 동성연애자와 이성애자, 장애인과 비장애인, 모든 미국인이 대답을 해주었습니다. 미국은 붉은 주(공화당 우세 주)나 푸른 주(민주당 우세 주)의 집합도 아니고 단순한 개인들의 집합체도 아니라는 메시지를 세계에 보냈습니다. 지금은 물론 앞으로 언제까지라도 늘 우리는 미합중국일 것입니다. (중략) 미국이 오늘날보다 훨씬 더 분열되어 있었을 때 링컨이 말했듯이, 우리는 적이 아니라 친구이고 동지입니다.”

 

 

링컨의 노예해방을 두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한 전략적 판단의 결과라는 평가가 있다. 또 그가 노예해방 자체보다는 중앙집권적 연방주의를 관철시키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는 평가도 있다. 모두 일리 있는 말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평가를 인정하더라도, 링컨 이후 미국 역사가 ‘미합중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의 역사로서 강대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 그리고 노예해방 이후 지난한 굴곡과 투쟁 과정을 거치며 인권 신장의 역사를 이루어올 수 있었던 것은 링컨이라는 ‘거인의 어깨’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이 글이 많이 빚지고 있는 도리스 컨스 굿윈의 <권력의 조건>(21세기북스)은 방대한 분량(829쪽)만큼 매우 상세하게 링컨의 삶을 정치 역정과 리더십, 그리고 많은 동시대 인물을 중심으로 들려준다. 특히 이 책의 원제 ‘Team of Rivals’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자가 새 정부 인선에서 보여준 리더십과 관련해 자주 회자됐다. 즉 정치적 라이벌도 마다하지 않고 능력에 따라 적재적소에 기용해 위기를 극복하려는 진정한 실용의 리더십, 포용과 통합의 리더십을 의미한다.

브렌다 하우겐의 <링컨: 하나 된 미국을 꿈꾼 위대한 대통령>(아이세움)은 길지 않은 분량의 어린이용 전기 도서지만, 링컨에 관한 전기적 지식이 시대 배경과 함께 잘 정리되어 있어 성인이 읽어도 좋다. “링컨의 삶과 시대에 관해 알고 싶은데, 쉬우면서도 잘 정리돼 있는 책 한 권만 추천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면, 필자는 이 책을 추천할 것이다. 단, ‘미국의 자라나는 새싹들’을 위한 ‘위인 전기’ 성격을 띤다는 점은 감안해야 한다. 토머스 J. 딜로렌조의 <링컨의 진실>(사회평론)은 노예해방자로서의 자애로운 위인 링컨보다 철저한 중앙집권주의 정치가로서의 링컨을 집중적으로 조명한 책이다. 현실 정치인 링컨이 씨름했던 과제와 시대적 정치 상황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위대한 인물’이라는 명성에 가려진 링컨의 현실적 면모를 균형 있게 살펴보고자 한다면, 이 책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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