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한 국 인

무술감독 정두홍

나 그 네 2009. 1. 13. 18:16

영화인 정두홍

 

 



 

그의 꿈은 영화배우였다. 충청남도 부여에서 태어난, 숫기 없고 조용한 시골 소년이었던 그는 가끔씩 동네 극장이나 텔레비전에서 접하는 액션 스타들의 모습에 ‘환장’했다. “너무 촌이어서 이소룡이나 성룡 영화는 접할 수도 없었죠.” 대신 그에겐 한국 액션 스타의 이미지가 강하게 자리 잡았다. “장동휘 선생님 같은 분들, 정말 멋있었죠. 가죽장갑 딱 끼고 한 방에 그냥! 요즘 영화는 도저히 못 따라간다니까요.”

 


어릴 적 선생님이 칠판에 쓰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을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경구는 알게 모르게 그의 좌우명이 된다. “인생을 허무하게 살고 싶진 않아요. 쉽고 편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마다, 그 구절이 저를 잡아줘요.” 고등학교 시절 태권도를 배우면서 그의 길은 서서히 방향을 잡기 시작한다. 이각수 관장은 정두홍의 재능을 발견하고 무료로 태권도를 가르쳐준 은인. 이후 그는 체육 특기생으로 대학에 진학했고, 시범단에 선발되어 학창 시절 대부분을 해외에서 태권도를 알리며 보냈다.

 

강원도 전방 수색대에서 군 복무를 마치고, 아는 선배를 따라 우연히 접한 충무로 현장은 그에게 충격이었다. 스턴트맨에 대한 따가운 시선, 타성에 젖은 그들의 모습, 비참한 대우…. 배우의 꿈을 접고 스턴트맨의 길에 들어선 건 “내가 이 판을 바꿔보겠다”는 일종의 오기였다. 그에게 ‘개안’의 계기는 임권택 감독의 <장군의 아들>(90)이었다. “처음엔 안 하겠다고 했죠. 머리도 깎아야 한다는데, 제가 그때 뽀글뽀글한 퍼머 머리였거든요. 그때 조감독이셨던 김영빈 감독님이 저를 살살 달래셨는데,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걷다 보니 어느새 미장원 앞이더라고요.(웃음)” 그는 김두한(박상민)과 대결을 벌이는 김동회(이일재)의 스턴트를 맡았는데, 상대 스턴트(김영모)와의 호흡도 잘 맞았고 결과도 좋았다. “그 장면 찍고 칭찬 많이 받았죠. 임권택 감독님이 ‘컷!’이라고 외치자 스태프들이 기립박수를 쳤으니까요.” <장군의 아들>이 준 깨달음은 액션에도 감정이 있어야 한다는 것. 이것은 그에게 중요한 자양분이 된다.

 

그의 20년 액션 인생은 한국영화의 질곡에 갇혀 있지만, 그럼에도 그는 끊임없이 뭔가 새로운 것을 추구했다. “처음엔 정말 멋모르고 덤볐죠. 외국영화 보면 화려하잖아요. 액션 장면에서 심장이 두근두근 뛸 정도니까. 그걸 생각하면서 현장에서 물불 안 가리고 뛰었는데, 결과물을 보면 템포도 떨어지고 리얼하지도 않은 거예요. 그런 고민을 하고 있던 시기, 한국영화는 액션 스타일이 한정되어 있었어요. 나이트클럽에, 각목에…. 개인적으로는 어떤 정체기였죠.” 이때 그는 <런어웨이>(95)로 김성수 감독을 만났고, <비트> 때는 처음으로 카메라를 잡고 뷰파인더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태양은 없다>(99)에선 권투 액션을 시도했다.


김지운 감독과의 만남도 큰 인연이자 기회였다. <반칙왕>(00)에서 레슬링 액션에 도전했던 그는 <달콤한 인생>(05)에서 놀라운 액션 장면의 산파가 된다. “<달콤한 인생> 액션 신은 외국에서 굉장히 반응이 좋았어요. 같이 일해보자는 제안도 꽤 들어왔고요. 사실 액션만 놓고 보면, 제가 과거에 했던 것과 똑같아요. 각목 휘두르고, 창고가 공간이고, 일대다로 싸우니까요. 그런데 액션을 담는 그릇이 달랐던 것 같아요.” 액션 지기’ 류승완 감독과의 만남도 빼놓을 수 없다. “류승완 감독은 홍콩 영화를 좋아하지만, 전 아니었거든요. 둘이 부딪히는 지점이 생겼어요. 관객들도 인정해주실진 모르겠지만, 그러면서 약간은 새로운 스타일의 액션이 나온 것 같아요. 재미가 있든 없든, 한국적 액션의 색깔이라는 게 생긴 거죠.” 스턴트가 천시 당하는 풍토 속에서도 꿋꿋이 버틸 수 있었던 건, 액션에 대한 열정을 지녔던 감독들과 주로 작업한 덕분인 것 같다는 질문에 그는 “극단적인 행운이었다”고 말한다. “그 감독님들 덕분에 덤으로 칭찬을 받으면서 온 거죠.” 그리고 그의 곁엔 ‘서울액션스쿨’이라는 공간과 그 안에서 함께 땀 흘렸던 동료들이 있었다.

 

‘무술감독 정두홍’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공간이 바로 ‘서울액션스쿨’이다. 이곳은 현재 한국 액션영화의 요람이자, 정두홍의 인생이 담긴 곳이다. 서울 대방동 ‘보라매 공원’의 체육관에서 지금은 경기도 파주로 옮겼지만, 장소를 이동하고 시설이 좋아졌다고 해서 서울액션스쿨에 대한 그의 느낌까지 바뀐 것은 아니다. 액션스쿨에 대한 그의 이야기는 왠지 모르게 ‘짠’한 느낌을 준다.


“서울액션스쿨은 정말로 제 인생에서 큰 의미죠. 물론 하나의 단체로 모이면 불협화음도 많아요. 내가 죽거나 일을 그만두면 모두 뿔뿔이 흩어질 것 같다고 말하는 후배도 있고요. 그런 얘기들을 하면, 엄청나게 화내죠.” 서울액션스쿨을 떠올릴 때 그에게 가장 아픈 기억은 2002년의 어느 날이다. 기수생 한 명이 아파서 병원에 갔다기에 가봤더니 병명이 영양실조였던 것. 인원이 자꾸 비어서 알아 봤더니 차비가 없어서 못 오는 후배들도 있었다. 이후 그런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했지만, 충격은 충격이었다. “서울액션스쿨 만든 후에 세 명이 세상을 떠났죠. 최근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에서 (지)중현이가 떠났고…. 이곳은 희망의 공간이기도 하지만 나에겐 무거운 짐이기도 해요. 음… 진한 희노애락이 깃들어 있죠.”


 

그는 스턴트 일을 하겠다는 사람이 있으면 일단 말리고 본다. “아무리 큰소리 치고 들어와도 떠나는 친구들이 많아요. 저처럼 무식하고 단순한 놈이 오래 버티는 거죠.(웃음) 몸이 힘들어서 그런 게 아니에요. 정신적인 거예요. 중현이가 세상 떠나니까, 열 명 정도 액션스쿨을 떠났어요. 힘들어서 떠나는 거냐고 물었더니 아니라고 하더라고요. 그래도 그 친구들은 멋있어요. 죽기 전에 자신이 하고 싶은 걸 하겠다는 생각이니까요. 그러나 그 이면엔, 이러다 죽으면 하고 싶은 걸 못한다는 두려움이 있는 거죠.”

그래도 액션을 하겠다는 사람에게, 그는 반드시 가져야 할 덕목으로 ‘사명감’을 충고한다. “저도 그랬고, 후배들도 그랬고, 우리 스스로가 귀하다는 생각을 못했던 것 같아요. 사실 지금은 잔치를 하면서 즐길 수준은 아니에요. 안정적으로 스턴트를 할 수 있는 시기가 올 때까지는, 어떤 사명감을 가져야죠.”

 


이러한 사명감은 어느새 그의 인격을 형성하는 가장 큰 부분이 되었다. 인터뷰를 하면서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에겐 “내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일종의 책임감과 부담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맞아요. ‘총알받이’가 된 거죠.(웃음) 얼마 전에 ‘2008 라이징 액션 스타’ 프로젝트 때문에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거 보면서 (정)우성이가 가슴 아파 했어요. 이젠 총알받이 역할은 그만 하라는 거죠.” 하지만 ‘누군가 해야 하는 일’이라는 생각은 그를 채찍질했고, 미약한 시작이지만 결국 일을 해냈다. “일단 발을 디디면 쉽게 뺄 수 없는, 그런 공간이 있어요. 그리고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저는 스턴트 일을 하면서 사랑을 더 많이 받아왔고요.” 그래서 그가 슬럼프에 빠지고 힘들 때 찾는 곳은 술집이 아니라 ‘그런 공간’인 바로 액션스쿨이다. “오로지 운동이에요. 그러면 해소가 되요. 누구는 병이라고도 하던데, 운동을 안 하면 확실히 힘이 떨어져요. 운동 하다가 잘 안 될 때, 저 자신에게 욕하다 보면 다른 사람들에 대한 원망도 모두 없어지는 거죠.”

 

그리고 ‘사명감’과 더불어 요즘 그가 중요하게 여기는 또 하나의 덕목은 바로 ‘안전’이다. “예전엔 호되게 몰아치곤 했는데 요즘은 안 그래요. 무조건 안전이죠. 그림이 조금 덜 멋있게 나와도요.” 이젠 직접 액션을 하지 않지만, 그래서 오히려 더 힘들다. “현장에서 후배들이 하는 걸 지켜볼 때, 리허설부터 공포감이 제 몸을 완전히 휘감아요. 지켜보는 두려움이 훨씬 더 큰 거죠.”


그는 한국의 스턴트와 무술 연출 수준이 홍콩이나 할리우드에 비해 절대 꿀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의 고민은 액션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게 하는 시스템과 환경이다. “장비만 조금 더 많아지면, 시간적․공간적 여유만 조금 더 할애되면, 대한민국 액션은 어디 내놔도 절대 꿀리지 않아요. 하지만 지금은 몸으로만 승부할 수는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어요. 머릿속에서 어떤 액션이 떠올라 생각만 하면 안돼요. 다른 데서 먼저 나와 버리니까요.”
물량과 규모가 절대적인, 감정 이전에 스펙터클을 내세워야 하는 액션이기에 그의 아쉬움을 더 크다. 언젠가 홍콩 액션 영화의 프로듀서를 만났을 때, 그는 마음 아픈 이야기를 들어야 했다. 액션 장르를 선택했다면, 홍콩에선 액션 부분에 제작비의 70퍼센트를 사용하고 나머지에 30퍼센트를 사용한다는 것이다. 적어도 상업영화를 한다면, 그리고 세계 상업영화의 추세가 액션과 스펙터클 쪽으로 가고 있다면, 이젠 한국영화도 작게나마 발상의 전환을 해야 한다는 것이 생각이다.

 

‘2008 라이징 액션 스타’ 프로젝트도 그런 생각의 연장선상에서 시작되었다. “기본적으로 액션 영화가 좋으려면 배우들이 액션 실력이 좋아야 해요. 기존 배우들이 아무리 액션을 잘한다고 해도, 견자단이나 이연걸을 따라가겠어요? 대답은 간단해요. 만들어야죠.” 하지만 프로젝트를 성사시키기까지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오디션을 통해 선발된 사람들에게 주는 장학금도 영화계가 아닌 합기도 협회에서 나왔다. “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합기도 협회 회장님께 말씀드렸더니, 그렇게 중요한 일을 왜 영화계에선 안 하냐고 하시더라고요. 정말로 드릴 말씀이 없었어요.”

 

 

응시자가 조금 적었던 것이 아쉽긴 하지만, 그는 프로젝트에 참가한 친구들을 보면서 행복감을 느낀다고 했다. 내년엔 더 많이 올 거라는 희망도 있으며, 오디션을 통해 배출된 액션 배우들이 4~5년 안에 영화계에서 인정받을 수 있는 미래를 꿈꾸기도 한다. “우리도 실력 있는 액션 배우를 키워내면, 성룡 같은 사람이 ‘한국의 누구랑 하고 싶다’ 이럴 수 있는 거죠. 그러면 얼마나 우리 영화의 시장이 넓어지겠어요.” 올해로 영화 액션의 길에 들어선 지 20년. “은퇴할 때가 됐다”고는 말하지만, 요즘은 젊은 친구들과 함께 일할 때 뒤에 빠져 있는 편이지만, 물러나라는 얘기 나오기 전에 빨리 떠나야 한다는 생각도 들지만, 그에겐 아직도 하고 싶은 일이 많다. 얼마 전엔 마흔 살이 넘은 나이에 프로 권투선수에 도전했고, 요가부터 이종격투기까지 가능한 멀티짐을 세우기도 했다. 그리고 언젠가 인터뷰에서 “멜로 연기를 해보고 싶다”고 했던 것이 기억 나, 아직도 그 희망을 버리지 않았냐고 묻자 크게 웃는다.

 

“제가 그런 얘기를 했어요? 하하하. 음… 저는 <맨 온 파이어>(04)의 덴젤 워싱턴이 참 멋있더라고요. 그런 보디가드 캐릭터의 액션을 해보고 싶어요. 액션이 들어간 사랑 이야기도 좋고요.” 언젠가부터 스턴트가 아닌, 엄연한 캐릭터를 가지고 배우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그는 과거 자신의 연기가 너무 무책임했다고 반성한다. “연기를 하면서도 나는 연기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거죠. 창피하게 생각하고, 뒤로 숨으려고 하고…. 지금은 책임감 있게 하고 싶어요. 제가 가진 능력이 적더라도, 그 적은 것을 보여주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싶고요.”


 

마지막으로 ‘내 인생의 액션 영화’를 묻자 그는 여러 영화들을 언급한다. “사실 <300>(06) 같은 영화는 별로고요, 저한텐 <글래디에이터>(00) 같은 영화가 정말 쇼킹했어요. <무사> 준비할 때 <글래디에이터> 보고서 완전히 절망했죠. 두려울 정도였어요. 그리고 <007 카지노 로얄>(06)의 프롤로그 액션 신도 좋았고, <본 슈프리머시>(04)의 카 액션도 대단하죠. <본 슈프리머시>의 액션은 임팩트가 굉장히 강한데, 찍을 땐 오히려 쉽게 찍었을 것 같아요. 그런 스타일의 액션에 꼭 참여하고 싶어요.”

 


여전히 실베스터 스탤론을 좋아하냐고 묻자 “몸을 표현하는 건 그 사람 따라갈 사람이 없다”고 말하면서 살짝 연민의 느낌을 드러낸다. “그런데 스탤론은 이제 액션 영화 그만 찍었으면 좋겠어요. 얼굴에 주름이 너무 많으니까 안쓰럽더라고요. 그래도 <록키 발보아>(06)는 참 좋았어요. 아, 떠난다는 게 저런 거구나…. 나도 저렇게 멋지게 떠나야 하는데…. 이런 생각을 했죠.”


과연 그는 언제 어떤 모습으로 떠나게 될까. 하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일들과, 아직도 품고 있는 꿈들을 듣고 있다 보면, 그도 언젠가는 ‘액션계’를 떠날 거라는 사실이 잘 믿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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