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한 국 인

미술가 홍승혜

나 그 네 2009. 1. 16. 17:15

 

미술가 홍승혜

 



 

  

인터뷰 당일에는 사진가가 먼저 도착해 사진을 찍고 있었다. 사진가는 “이렇게 좀 서 보세요, 아니, 이렇게요, 아, 좀 웃어보세요” 하면서 홍승혜와 씨름을 하고 있었다. 기어이 사진가는 “선생님 너무 무서운 분 같아요” 라고 말했다. ‘제발 포즈 좀 취해달라’는 애원이었다. 무표정하고 무채색 분위기인 홍승혜는 전혀 ‘포토제닉’한 사람이 아니기에, 그를 사진 찍는 사람들은 고생할 만도 하다. 하지만 그가 몸담고 있는 서울산업대 조형예술과의 학생들은 홍승혜교수가 친구처럼 친근하다며 좋아한다. 홍승혜에게는 이런 양면성이 있다.

 

 

 


홍승혜의 작품에도 양면성이 있다. 그의 작품의 본질은 ‘기계성’이다. 캔버스에 물감으로 직접 손을 대서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컴퓨터 포토샵 프로그램으로 자동 생성되는 이미지를 인쇄해 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작품을 통해 그는 생명체의 유기적 속성과 따뜻함을 표현한다. 그래서 나는 홍승혜라는 사람이나 홍승혜의 작품이나, 참 이중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이중적’이라는 말을 꺼내자 홍승혜는 “네, 맞아요” 하며 웃었다. 겉으로는 차가워 보여도 마음 여린 그의 성격처럼, 컴퓨터 작업에 오히려 예술적인 면이 크다고 그는 설명했다. “기계가 가지고 있는 민첩함 때문에 저의 직관이 몇 배로 활성화해요. 수공으로 그림을 그릴 때엔 신체의 한계로 으레 걸리는 시간이 있어요. 물감을 바르고 마르기를 기다리고 하는 시간 같은 거지요. 그런데 포토샵은 순식간에 색을 바꾸고 형태를 바꾸니까 선택을 빨리 해야 하는 직관이 더 필요해요. 제 생각이 (컴퓨터의) 행동만큼 빨라져야 하는 것이지요.” 

 

보통 미술가들의 작업실에는 캔버스가 빽빽이 들어서 있고, 곳곳에 물감이 묻어 있고, 조각의 재료로 사용한 물건들이 사방에 널려 있다. 홍승혜의 작업실은 아니다. 그냥 깨끗한 방안에 (포토샵이 늘 켜져 있는) 컴퓨터 한 대가 있을 뿐이다. 책장 가득 온갖 미술이론서가 꽂혀 있고 작품 몇 점이 벽 따라 겹치기로 세워져 있는 것을 보지 않으면, 여기가 미술작가의 방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서 그의 작업실은 그냥 연구실이라 해도 좋다.

 

 

 

홍승혜는 서울대 회화과와 파리 국립미술학교 회화부를 졸업했다. 그 역시 초기엔 아크릴 물감과 수채 물감 들고 꽃과 나무를 그리던 평범한 화가였다. 1997년 어느 날 컴퓨터 앞에 앉아 이리저리 만지작거리다가 새로운 작업의 세계로 들어가게 됐다. “당시 도스체계 컴퓨터의 원시적 도구인 그림판에 들어가서 이리저리 이미지를 가지고 놀고 있었어요. 그 안에서 이뤄지는 이미지의 신속하고 무궁한 변신에 매료됐어요. 화면은 픽셀로 이뤄진 우주였고, 그 픽셀들이 싹이 돋아 자라나고 증식하는 모습이 마치 자연계처럼 느껴졌어요.” 그때부터 그는 컴퓨터로 작업을 하고 있다. 시범을 보여달라고 하자 그는 컴퓨터 앞에 앉았다. 포토샵에는 네모 모양의 픽셀(pixel)이 하나 떠 있다. 그는 네모의 가운데 빈 공간에 줄을 긋기도 하고, 카피, 페이스트, 인버트 등 버튼을 눌러 픽셀을 수십 개, 수백 개로 증식하기도 하고, 색을 순식간에 바꾸고 안팎의 색을 뒤집기도 했다. 1초 간격으로 이미지와 색깔이 순식간에 휙휙 바뀌는데, 어느 순간 그가 말했다. “자, 바로 이런 이미지, 이 거 어때요? 막 하다 보면, 이렇게 어느 순간에 마음에 와 닿는 이미지가 나와요.” 그럼 그 때 그는 프린트 버튼을 누른다. 그 이미지가 알루미늄 판이나 아크릴판에 인쇄되기도 하고, 어느 건물 로비의 벽화로 인쇄되기도 한다. 픽셀이 마치 세포처럼 포토샵 안에서 자동으로 번식하다가, 어느 순간 홍승혜의 마음에 들었을 때 번식을 멈추고 세상에 생명체로 태어나는 셈이다.

 

그는 “원래 나는 무엇을 어떻게 그리느냐 하는 문제 보다는, 공간에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그리는 대상이 공간 속에 어떻게 배치되어있고 다른 물체와 어떻게 관계를 가지는가가 원래 저의 관심이었어요.” 공간을 중시하는 홍승혜에게 미술은 곧 ‘공간을 요리하는 것’이고, 컴퓨터는 공간을 요리하는 이상적인 도구다. 그는 작품 설치를 의뢰 받고 나면 그 작품이 설치될 공간을 우선 연구하고, 그 공간을 새롭게 보이도록 하는 방법을 찾는다. 그래서 그에게 미술은 매우 지적인 행위다.

 

강남 교보타워 로비, 삼성물산 로비, 서울산업대 도서관 등에 그의 벽화들이 있다. 그의 작품들은 네모와 막대기가 나란히 줄을 서기도 하고 서로 뭉쳐 있기도 한 기하학적 형태다. 하지만 차갑지 않다. 미술평론가 윤난지는 홍승혜의 작품을 가리켜 “차가운 디지털 이미지임에도 불구하고 그 우연적인 형태나 섬세하게 조합된 색채를 통해 클릭하는 손끝의 체온을 감지하게 한다”고 했다. 그의 ‘유기적 기하학(Organic Geometry)’이라는 작품 시리즈 제목부터가 이런 이중성을 담고 있다. 자연(유기적)과 기계(기하학), 따뜻함(유기적)과 차가움(기하학), 상반된 두 개념이 함께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가 나의 ‘공간’에 대한 관심을 채워준 거예요. 물체간의 관계, 이상적인 비율, 이런 것이 원래 제 중요한 관심사였거든요. 컴퓨터 그림판에서 생성되는 형상은 외부세계를 재현한 게 아니라 백지에서 출발하는 자연발생적인 형태잖아요. 이렇게 저절로 그려지는 거, 그 게 바로 내가 그리고 싶었던 거라는 걸 깨달았어요.”

 

 

작품 제목을 ‘유기적 기하학’이라고 어렵게 붙이는 것만 봐도 그가 얼마나 지적인 면과 관념적인 면을 중시하는 작가인지 알 수 있다. 그는 학교 수업도 학생들과 대화하는 것 위주로 한다. 어떤 형태의 미술작품을 만드는가 보다는, 학생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런 작품을 하는지가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수업 이외의 시간에 학생들이 자기 작품에 대해 이야기 하는 것을 듣고 대화하는 개인면담이 많다.

작가 홍승혜와 마주 앉아 하나하나 질문을 던졌다. 손이 아닌 머리로 미술을 하는 작가이기에, 그는 미술평론가처럼 이야기를 한다. 하지만 이런 딱딱하고 관념적인 말투 역시 홍승혜라는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술을 컴퓨터에 의존한다는 게 좀 모순적이지 않나요?
“지금은 당연시되고 있는 많은 사물들이 과거에는 새로운 기술의 산물이었어요. 오일페인팅(유화물감)은 15세기 유럽 미술계의 하이테크였어요.”
-어쨌든 선생님 작품은 작가가 아니라 컴퓨터가 그린 것이네요.
“사실 전통적 그림조차도 100% 저자의 몫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그림을 그리는 과정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동력과 생각이 들어가는 지 생각해보세요. 캔버스와 물감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잖아요. 하물며 저 같은 작품 방식은 더 그렇지요. 전 제 작품에 사인을 하기 싫어해요. 과연 이 작품의 몇%가 내 것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 작품에 얼마나 많은 사람의 기술과 생각이 용해되어있나를 생각하면, 작가로서 제가 한없이 작아지기도 해요.”


실제 그는 작품에 서명을 별로 하지 않는다. 워낙 개성이 강한 작품이라 서명 없이도 한눈에 그의 작품인지 알아 볼 수는 있지만, 가끔 컬렉터들이 서명 해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한다. ‘저자’의 고유한 권한을 고집하지 않고 미술의 외형 보다는 그 속에 들어 있는 생각을 더 중시하는 면에서, 그는 현대미술의 많은 작가들과 맥락을 같이 한다.


 

-결국 현대예술의 중요한 특징인 ‘저자의 죽음’을 의도하시는군요.
“텍스트(작품)의 의미가 타자(관객)에 의해 무한하게 형성되고 해체될 수 있다는 점에서 ‘저자의 죽음’이라는 표현에 동의해요. 포토샵에서 작업을 할 때 이미 작가로서의 역할이 축소되는 것을 느껴요. 제 자신도 관객의 한 사람으로써 작품의 탄생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지요. 물론 직접 손을 대는 피지컬(physical)한 행위가 중요한 작가도 있지만, 저 같은 ‘게으른 공상가’에게는 이 게 유효한 작업방식이라고나 할까요.”

 

 

 

가장 최근인 2008년 11월 조선일보 미술관에서 했던 이중섭미술상 수상 기념전에서 그는 공간에 대한 관심과 저자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극도로 보여줬다. 전시장에는 시상식 현수막을 대신한 스티커와 이중섭미술상의 로고인 이중섭 얼굴 마크, 내빈용 의자, 케이터링 업체의 로고와 쓰레기통이 전부였다. 넓은 전시장에서 미술작가의 작품으로 보이는 것은 나무조각 2점과 드로잉 8점뿐이었다. 바닥에 긴 줄 스티커를 격자로 붙여 바둑판처럼 만든 것도 작품이라면 작품일까? 그러니 전시장을 찾은 원로들이 “작품은 어디에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행위를 통해 그는 그 동안 숱한 작품들에 묻혀 보이지 않았던 이 전시장의 맨 얼굴, 즉 흰 벽과 천장, 기둥, 바닥을 보여줬다. 관람객이 격자 무늬 바닥 위에 서서 황당한 표정으로 ‘작품은 어디 있는 거야?’ 하며 주변을 둘러보는 것 자체가 전시체험이 되었다. “작품 생산의 절제를 통해 이미 존재하는 공간을 드러내는 것, 그것도 작가의 역할이라고 생각해요. 작품을 만드는 것도 작가의 역할이지만 만들지 않는 것도 작가의 역할이에요.”

남성용 소변기를 하나 덜렁 놓고 ‘샘’이라 이름 붙인, ‘레디 메이드’ 예술의 선구자 마르셸 뒤샹 이후, 많은 작가들은 저자로서의 역할을 포기했다. 대신 다른 방식으로 관객의 감성과 생각을 일깨워준다. 이런 ‘지적 행위’가 곧 미술이 된 것이다. 감정을 누르고, 표현을 줄이고, 창작행위를 절제해서, 홍승혜는 관객으로 하여금 오히려 미술의 본질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그에게 있어서 미술의 본질은 외부세계를 재현하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외부세계를 달리 보도록 만들고 생각하도록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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