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한 국 인

건축가 김승희

나 그 네 2009. 1. 12. 20:24

 

건축가 김승회

 

 

 


“기독교가 국내에 처음 들어왔을 때부터 믿기 시작한 기독교 집안이에요. 그런 집에서 호기심 많은 아이가 나왔으니(웃음). 나쁜 짓은 하고 싶고 착하게는 살아야겠고. 갈등 속에 늘 괴로웠던 것 같아요.” 어린 그의 호기심과 갈등을 풀어준 건 문학과 미술이었다. “예술은 사회에 피해를 안 주면서 일탈할 수 있게 해요. 롤랑 바르트가 말했나요? 예술은 ‘온순한 위반’이라고. 문학이든 미술이든 안전하게 사고칠 수 있는 공간을 좋아했어요.”


하지만 고교 시절은 암흑이었다. 유신 말기, 폭압적이고 통제된 사회 분위기와 학교의 저속하고도 불합리한 요구. 이것들은 기성 세대에 대한 견딜 수 없는 환멸이 되었다. “인생이 너무 힘들었어요(웃음). 겨우 열 여섯, 열 여덟 살이었지만요. 마음 둘 곳도 없고. 잘 알지도 못하면서 니체에 빠졌죠. 니체는 말해요. 오히려 어렵고 힘든 걸 극복하는 게 행복이라고. 고통, 자학을 긍정하는 거죠.” 문학은 일종의 도피처이자 ‘게토’였다. “어린 나이에 치기 어린 니힐리즘에 빠져있었죠. 문학 좋아하는 친구들과 어울렸고요. 그때는 정신을 치료하는 의사가 되고 싶었어요. 그런데 건축이라는 분야가 있더라구요(웃음). 이거 재밌겠다, 잘 할 수 있겠다.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공학과 미술이 결합된 건축은 그의 흥미를 끌었다.


 

 

그러나 당시 건축과 수업은 실망스러웠다. “처음 과제가 1cm 안에 선을 몇 개 긋거나A4용지에 도면을 확대, 축소해오는 단순한 학습이었어요. 아마도 일본식 공업학교의 영향이 아니었나 싶어요. 잘못 생각한 게 아닌가, 자퇴까지 생각했죠.” 그가 마음을 돌렸던 계기는 10박 11일간의 건축답사 여행이었다. 안동 병산서원과 부석사 등 전국 곳곳의 사찰과 옛 건물들을 돌아보면서 옛 건축의 아름다움과 공간감을 발견했다. “소설가가 소설을 쓰게 되는 계기가 소설이듯이, 건축가가 되게 한 게 고건축이었죠. 좋은 건물을 많이 보면 그걸로 고무돼요. 뗄 수 없는 마약이 되는 거죠(웃음).”


대학원 졸업 후 유학을 갔던 미국의 1990년대 초반은 포스트모더니즘과 해체주의가 막 일어나던 시기다. “모든 장르를 다 경험해 본 셈이에요. 동시에 너무 많은 실험이 쏟아져 나와 장르의 무의미함을 느꼈어요. 미국 건축가 존 헤이덕의 글에 이런 대목이 나와요. 어느 날 피터 아이젠만이 전화로 전시(1989년 뉴욕현대미술관의 해체주의 전시)에 참여하겠다고 물었대요. 참여를 거절하고 전화를 끊으면서 존 헤이덕은 이렇게 말하죠. ‘아, 피터 아이젠만이 또 새로운 브랜드를 띄우는구나’ 오히려 김승회 씨에겐 건축의 기본과 기능에 충실했던 1920년대~30년대 모더니즘 작품들이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 1991년 귀국 후 그가 김종성 교수의 서울건축에서 실무를 쌓은 이유도 그것이다. 미스 반 데어 로에 사무실에서 건축을 경험한 김종성 교수는 모더니즘의 정통적인 기반을 가장 정확하고 깊이 있게 이해한 분이었다.

 

 


1995년 일산의 한 주택 설계를 의뢰 받으면서 그는 사무실을 독립했다. “자기 작품을 하고 싶다는 열망이 커져서 개업을 할 수밖에 없었어요. 프로젝트 하나로 개업을 해도 되겠다고 생각했던 건 정말 무모했죠. 주변 선배들이 말릴 때만 해도, ‘이분들 왜 그러지?’ 하면서 의아해했어요(웃음).” 뜻이 맞는 학교 후배인 건축가 강원필과 경영위치 건축사사무소를 열었다. 경영위치(經營位置)는 동양화에서 구도를 잡는다는 뜻이다. 하나의 사물이 아니라, 사물들 하나하나의 관계에 주목하자는 의미다. “모아둔 돈 한푼 없이 시작했어요. 당시만 해도 건축사 자격증이 있으면 2천 만원까지 신용대출을 해주었죠. 그 돈으로 사무실 임대료를 내고 도면을 출력하는 플로터나 컴퓨터는 빌려왔어요. 처음 일년은 둘이서 각자 한 달에 50만원만 가져 가자고 약속했으니 인건비가 안 드는 거죠.(웃음)” 다행히 1월 달에 개업한 후 7월에 보건소 표준설계와 8월 서울대 환경대학원 신축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반 년 만에 직원도 뽑고 구색을 갖춘 사무실을 꾸렸다. 건축가 강원필과의 이상적인 파트너쉽은 디자인, 경영, 실무관리, 실시도면의 완성도 등 경영위치만의 노하우를 만들어갔다. 좋은 출발이었다.

 

 

경영위치를 말해주는 중요한 작업 중 하나는 보건소 연작이다. 1995년 7월 보건복지부 표준설계 공모전은 공공보건의료기관 즉 전국 보건소의 설계 가이드라인을 만드는 작업이었다. “설계비가 보건지소의 경우 300만원, 가장 큰 통합보건지소라도 3천 만원이었죠. 사무소를 운영해야 하는 건축가라면 제정신으론 참여 못하죠(웃음).” 누구도 주목하지 않는 이 작은 공모전에 참여하게 된 것은 순전히 개인적인 기억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간호사셨어요. 보건소는 어머니가 계신 곳이었죠. 주말근무라도 하시는 날엔 보건소에서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제게는 포근하고 아늑한 기억을 가진 공간이에요” 다섯 가지 유형의 표준설계를 하고 나니, 개별적인 보건소 설계 의뢰도 들어왔다. 그러나 보건소를 설계하는 과정에서 김승회 씨는 중요한 문제와 대면했다. 보건소가 들어설 곳 특유의 지역적인 색을 어떻게 드러낼 것인가이다.

 

“지방에 대해 생각을 많이 하게 됐어요. 지역성의 문제는 간단하지 않죠. 한국에선 사실 몇 개의 도시를 제외하고 대부분 전통적인 의미의 지역성은 없다는 결론을 내렸어요.” 지역성이란 그 지역만의 형태나 구법(構法), 지역에서 생산되는 독특한 재료로 드러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네 소도시들은 자신만의 개성을 만들어낼 어떤 기반도 없었다. 전통과 단절한 급격한 근대화의 결과다. “다른 것과 구별되는 차이를 만들어주는 것이 아주 중요해요. 그 지역이기 때문에 남다른 무언가를 새롭게 창조해야 하죠.” 그는 지역성을 하나의 추상적인 전제나 건축양식이 아니라 그 지역 사람들의 삶에서 찾기 시작했다. 그 지역의 지형, 오랜 시간이 쌓인 도시의 구조, 도시의 변화 과정과 주민들의 삶의 방식이 바탕이 된 것이다. 

고성군, 포항시 남구, 옥천군, 홍천군, 강화군, 당진군 등 매해 진행한 20여 개(보건지소까지 40여 개)의 보건소 프로젝트는2007년 정선보건소를 마지막으로 12년의 대장정을 마쳤다. 자칫 문화공간의 소외지역이 될 수 있는 지방 소도시에 대한 한 건축가의 애정 어린 기록이다. “주민들의 긍지가 대단했어요. ‘호텔보다 멋지다’고 하더군요. 비싼 재료를 써서가 아니라 공간이 차별화되니까요. 시장님이나 국회의원들도 오시면 질투를 했어요. 보건소가 이렇게 멋있어도 되는 거냐고(웃음).”


 

공사비가 넉넉했던 것은 아니었다. 적은 예산에 맞춰 디자인을 하는 훈련 덕분에 적은 공사비로 디자인하는 노하우도 생겼다. 건물을 잘게 나누면 다양한 내외부 공간을 만들 수 있지만, 표면적이 늘어나 공사비가 상승할 수밖에 없다. 내외부 공간을 다양하게 만드는 대신 건물을 한 덩어리로 만들어 내부에 로비나 접수처를 한 데 모은 높고 넓은 공용공간을 두었다. 이른바 공간을 오픈시킨 것이다. 단순한 윤곽을 가진 형태를 고안한 덕분에 오히려 좋은 내부 공간을 만들 수 있었다. 한편, 샌드위치 패널과 같은 값싼 재료를 이용해 공사비를 줄이는 방법을 찾았다. 보다 저렴한 재료를 사용하면서도 완성도를 높일 수 있는 디테일을 고민했다.

 

전국 오지를 다니며 ‘장정’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화려함이나 스포트라이트는 없었다. 하지만 건축가로서 지방의 건축문화에 일조한다는 사명감은 컸다. “상당히 고생스러웠지만 일생 일대에 보람된 기회였어요. 착한 건축을 한다라는 말도 많이 들었지만, 프로그램 자체가 착했죠.” 공공건축이 갖는 미덕은 좋은 공공건축물이 들어섬으로써 도시 공간이 나아진다는 데 있다. 도시의 공공성, 공공건축의 수준을 높이는 측면에서 보건소 연작이 갖는 의미는 매우 크다.

 

“보건소는 시, 읍 단위 지방 소도시의 공공공간이자 주변 도시 조직과 반응하는 중심적인 공간이죠. 그래서 도시의 집적된 시간과 공간을 재구축하는 작업이에요. 도시의 구조를 파악하고 규모 있는 건축물을 어떻게 잘 앉힐 수 있을지 고민해야 했어요.” 적은 공사비와 열악한 시공환경, 지역의 문화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설득하는 과정은 힘들었다. 관계자들은 입면 구성이나 동선(動線)에 대한 건축가의 의도에 대해 거부감을 표시했다. 입찰로 참여한 시공업체들은 단순하게 처리하고 빨리 일을 끝내길 원했다. “처음에는 반대가 심했어요. 왜 재료를 이렇게 많이 쓰느냐, 왜 1, 2층에 모두 다 뚫린 로비를 만드느냐. 멋을 부린 게 아니라, 사람들이 들어와서 헤매지 않고 찾아갈 곳을 바로 파악할 수 있도록 한 의도였죠. 나중에 지어진 건물을 보고 찾아오신 분들은 먼저 2층으로 트여달라고 해요. 또 어떤 보건소장님은 건물 내에 그림을 걸지 말라고 하셨어요. 건물 자체가 작품이라고요.”

 

김승회의 건축이 보건소로만 주목 받는 것은 다소 억울한 일이다. 첫 프로젝트였던 일산주택부터 주택 설계는 건축가 스스로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다. 주거의 전형에 대한 고민이다. “어릴 때를 떠올리면 마당이 늘 생각나요. 고등학교 2학년까지 항상 마당이 있는 단층집이었어요. 대청에서 뒹굴뒹굴 책을 보고, 마당에 해피라는 강아지가 있고, 포도나무가 있었어요. 꿈에도 자주 나오는 풍경이에요. 신기하게도 아파트에서 산 지 20년이 다 되었는데, 아파트 꿈을 꾼 적은 없어요. 제 잠재의식에선 아파트를 집으로 안 쳐주는 거죠(웃음).” 그에게 집은 문 하나 여닫는 것으로 마당과 방과 길이 매끄럽게 연결되는 소통의 여백이 있는 공간이다.

 

 

 

“도시는 밀도가 높기 때문에 아파트를 지을 수밖에 없죠. 그러면 왜 저렇게 지을까. 아파트에 대해 조사할수록 자본주의 시스템에서는 어쩔 수 없다는 결론이 나오더군요. 대학원 때였는데, 건축가가 할 수 있는 몫이나 사회를 바꿀 힘이 없다는 걸 알고, 크게 절망했어요. 개업을 하면서 제 스스로에게 약속을 했어요. 이 사회가 원하는 주거의 전형을 만들자고.”


그가 주목하는 주거 문화의 문제점은 두 가지다. 하나는 단위세대(유니트), 즉 자기 집에는 관심이 있지만, 그 바깥에는 관심이 없다. 우리 삶이 파편화되고 이기적으로 변하는 현실이다. 두 번째는 건축을 평가하는 기준이 돈과 고급스런 재료에만 있다는 것이다. 건축이 공간감이나 풍경으로 평가되지 않는 풍토다. “우리의 주거 문화라는 게 상당히 솔직하다고 생각해요. 사람들의 욕망을 철저하게 반영하고 있는 우리의 자화상이죠. 만약 주거가 천박하다면 우리가 천박한 거죠. 하지만 사람들이 아직 삶이나 집을 제대로 바라본 적이 없기 때문에, 자꾸 돈으로 환산하는 것 같아요. 슬프지만 그것이 현실이죠. 그 현실을 인정해야 하구요. 하지만 집도 새로운 방식이 있다는 걸 안다면 사람들 생각도 달라질 거예요.”

 

도시도 마찬가지다. “부모님이 직장 생활을 하셨는데, 말하자면 도시노동자 가족이죠. 도시적인 삶 속에서 자랐어요. 친구들은 시골이나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어하는 향수가 있는데, 저는 그렇지 않아요. 어릴 때부터 살았던 이 도시의 삶과 풍경이 곧 고향이죠. 그래서 잘못된 도시계획이나 도시 정책이 나오면 남의 일이라고 생각 못하고 흥분도 잘해요.(웃음)” 그는 자신이 자란 고향, 서울을 칠판에 비유한다. “쓰고 냅다 지우죠(웃음). 칠판 글을 지워도  여릿여릿한 흔적이 남아요. 그런데 오래된 도시 구역 철거는 너무 깨끗이 지우는 것 같아 안타까워요. 오래 된 골목 길을 보면서 옛날의 흔적을 유추해 보는 게 좋아요. 암호를 해독하듯이 말이지요. 하지만 지금 진행되는 수많은 공사 중에는 마치 사포로 문질러 버리듯이 기억마저 깨끗하게 지운 곳도 많아요. 슬픈 일이죠.”

 

그에게 건축은 ‘삶을 생성하는 장치’다. 현실에 뿌리 내리고, 펼쳐져야 한다. 공사 일정을 맞춰야 하고 건축주의 요구를 받아들여야 하며, 시공을 끌어가야 하는 어려움이 곧 현실이다. 이런 어려움에서도 빼어난 결과를 만들어내는 게 건축가의 몫이다. 그래서 그가 각별히 좋아하는 시인들이 있다. “김수영이나 두보의 시는 현실에서 길어 올린 것이지요. 건축가로 살아가는 치열한 현실, 제 작업을 긍정하는데 힘이 돼요. 건축은 예술이기 이전에 현실이라는 한계에서도 끊임없이 좋은 걸 지향해야 하죠.”

 



그는 건축을 ‘아름다운 예술품’이라는 ‘위대한’ 영역에서 ‘장치’라는 ‘낮은 곳’으로 끌어내린다. 그렇게 한다고 ‘아키텍처’라는 전문영역을 포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야 건축이 생명을 얻을 것 같아요. 간혹 학생들은 예쁜 꽂을 꺾어다가 꽃꽂이하듯 건축을 해요. 물론 예쁘죠. 하지만 볼품없더라도 이 땅의 척박한 환경에 바탕을 두고 건축을 해야 해요.” 그가 건축을 ‘명사’가 아니라 ‘동사’에 비유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그에게 건축은 하나의 이름을 붙이는 것이 아니라, 어떤 태도를 취하는 것이다. 그리고 바람과 공기의 무게에 저항하면서 고유한 궤적을 그리며 기어이 과녁에 꽂히는 ‘화살’처럼, 현실적 어려움을 모두 뚫고 하나의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이 곧 건축가의 역할이다.
“굴뚝과 매연, 엄청난 석축, 간선도로의 끔직한 스피드, 단조로운 공간, 범람하는 이미지, 엉뚱한 법규들이 경영위치의 건축을 낳고 길렀죠. 그 도시의 조건을 긍정하고 그 안에서 만들 수 있는 희망을 찾는 작업이 제가 생각하는 건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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