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한 국 인

건축가 장윤규

나 그 네 2009. 1. 28. 12:32

건축가 장윤규

 

 



 

 

장윤규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금호주택문화관 ‘크링(Kring)’을 완공하고 그는 냉탕과 온탕을 오갔다. “건축이 아니다. 그냥 조각품이다” “외부와 내부의 괴리감이 크다.” 전문가들의 비판이 차가웠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재미있어 했고 반응도 뜨거웠다. 연일 사람들이 모여들어 사진을 찍고, 영화를 보고,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눈다. 소문을 타고 국내외 패션 잡지와 해외 건축 잡지에도 소개됐다. 크링은 단순한 모델하우스에서 지역의 문화공간으로 거듭나려는 요구를 충족시켰다. 그러면서도 새로운 마케팅 전략으로서 건축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것이다. 장윤규에게도 크링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크링은 전에 보지 못했던 조각 같은 작품이에요. 아이콘이 되고자 했지요. 그리고 내부는 연극적 세트로 구현해서 관람자들 스스로 새로운 움직임을 갖도록 유도했어요.”

 

 

 

장윤규는 국내 건축가들 가운데 독특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존재다. 그는 조민석과 더불어 국내외 건축계에 가장 많이 추천되는 건축가다. 하지만 아웃사이더의 감수성을 갖고 있다. 그는 남들과 다르고 싶어한다. 이것이 그의 장점이자 단점이다. 단적으로 말하면 이렇다. 그에게 건축은 현실 그대로의 반영이 아니라 현실 이전의 그 무엇이다. 이를테면 보이지 않는 이야기이고 다양한 문화의 교류이며 정신 나간 실험이다. 그에게 건축은 철근과 콘크리트가 조합된 물리적 실체가 아니다. “내게 건축은 생생한 변화이고 내재된 욕망의 발현입니다.” 단단하고 육중한 건물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는 그의 말 자체가 혼란스럽다.

 


장윤규의 건축을 이해하는 첫 번째 단서는 ‘운생동(韻生同)’이란 사무소 이름이다. ‘함께 생동감을 불어 넣자’는 뜻으로 지었다는 ‘운생동’은 기운생동(氣韻生動)이라는 힌트가 없다면 어디서 따온 말인지 좀처럼 알 수 없다. “점집 이름 같다.” “촌스럽다.” 처음엔 반대가 심했다. 그의 반응은 의외다. “무엇보다 사무소 이름에서 생경함과 생동감을 주고 싶었어요. 새롭지 않아요?” 이 이름은 전혀 건축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않다. 오히려 그의 말마따나 낯설고 모호하다. 사무소 이름부터 그는 물리적 실체보다는 건축과 관련된 보이지 않는 현상들의 탐구에 주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다음 단서는 그가 2003년 이후 계속 운영하고 있는 갤러리 정미소다. 연극배우 윤석화의 소극장 정미소 2층에 마련된 갤러리 정미소는 비어있는 창고였다. 그는 소극장 정미소를 폐허의 흔적이 살아있는 공간으로 바꾸면서, 갤러리 운영을 맡았다. 그리고 30여 명의 실험적인 미술가와 교감의 장소로 탈바꿈시켰다. 갤러리 정미소는 짧은 시간 안에 젊은 작가들의 욕망을 대변하는 공간으로 자리매김했다. 갤러리가 들어선 후 정미소에는 꽃집과 찻집도 같이 들어섰다. 다양한 문화 활동의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세 번째 단서는 그가 주로 사용하는 개념어로, ‘클립시티’, ‘인터랙티브맵’, ‘스킨스케이프’, ‘트랜스프로그래밍’ 등의 복합어다. 뒤섞이고 버무려진 이 말들은 그가 공간과 공간, 공간과 스킨, 스킨과 구조, 구조와 프로그램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변종을 만들어 내기 위한 고안물이다. 그가 말하는 “불확정적이며 낯설고 생경하며 잘난 척하는 건축”을 만드는 소스들이다. 익숙해지기를 거부하고 끊임없이 이상한 날것으로 남으려는 그의 몸부림이다. “분명 모호하지만, 일반인에게 더 쉽게 다가서는 방편이기도 합니다. 이상한 오브제는 호기심을 유발시키고, 더 혼란스럽게 해요. 건축이라는 것의 새로운 틀을 제안하기도 하거든요.” 

결국, 장윤규가 즐기고자 하는 것은 건축과 현실 사이의 긴장이다. 그는 그의 건축이 늘 현실보다는 더 과잉이거나 결핍이기를 바란다. 각 기능별로 스테레오타입을 정해놓고 그때마다 주어진 대지 조건에 적응을 반복하는 건축은 어떤 배경과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를 따지기 이전에 그에게는 그저 ‘심심한 건축’일 뿐이다. “뭐 좀 새로운 생각은 없어”는 그를 가장 잘 드러내는 말이다.

 

 

 

장윤규는 현재 상종가다. 그는 실험적 태도를 표방하면서도 현실 세계와의 접점을 나날이 넓히고 있다. 40대 중반의 나이에 이미 코리아센터, 이집트대사관, 서울대학교 건축대학, 광주디자인센터, 광주비엔날레 전시관, 예화랑, 금호주택문화관 ‘크링(Kring)’ 등 굵직한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그리고 일본저널 <10+1> 세계건축가 40인에 선정됐고, 아키텍처 레코드의 <디자인 뱅가드 2006>과 아키텍추널 리뷰의 <커멘디드 어워드 2007>을 수상한 대표적인 한국 건축가 가운데 하나다.

 

그가 설명하는 그 이유다. “20대 후반부터 꽤 전투적으로 개인작업을 해 왔어요. ‘서울건축’에서 일하던 4년 동안 저녁에는 개인 작업실에서 공모전을 준비했어요. 그 후 김승회, 강원필과 ‘경영위치’를 개소하고, ‘아르텍건축사무소’에 파트너로 있을 때도 항상 개인작업을 놓지 않았어요. 그 개인 사무소가 ‘건축실험아틀리에’로, 그리고 오늘날 ‘운생동’으로 이어진 거지요.” 그는 개인작업실에서 다양한 공모전에 응모했다. 그리고 신건축 타기론 국제현상, UIA 바르셀로나 국제현상, 이탈리아 이미지 페스티발, 이스라엘 평화광장 국제현상에 입상하며 자신의 존재를 알렸다.


그는 지금도 공모전에 강한 면모를 보인다. 동숭동 초입에 한창 공사중인 홍익대학교 동숭동 캠퍼스도 설계 공모에서 당선된 것이다. 그만의 특별한 노하우가 있을까? “30대 초반에 코리아센터를 ‘희림건축’과 같이 준비하면서 설계의 전략적 방법을 고민하게 됐어요. 디자인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안 거지요. 포인트를 찾는 것이 중요했어요.” 그리고 대형설계사무소와 협력도 중요했다. “아틀리에에서 벗어나 대형설계사무소와 같이 일을 하려면 그들과의 진지한 조율이 필요합니다. 건축은 한번에 끝나는 게 아니거든요. 협력과 조율은 좋은 건축의 기본 조건이에요.”


 

 

 

그는 시인이자 건축가인 이상을 좋아했다. 집안 환경이 어려웠던 장윤규는 서울공고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건축 공부를 시작한 것. 그리고 서울대 건축과와 같은 대학원을 졸업했다. 시인 이상의 발자취를 따라 10년 가량 건축을 공부했다. 그리고 건축가로 입문했다. 대학, 대학원, 유학, 외국 설계사무소에서의 경험 그리고 40대 데뷰가 일반적인 상황에서 그의 약력은 좀 특별하다.
“한국에서는 (건축가 지망생들이) 공부를 너무 오래합니다. 외국의 시상식에 가보면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 건축가들도 많아요. 대학 졸업 후 공부와 작품을 동시에 하면서 주목 받는 경우가 대부분이거든요. 우리의 경우, 작업해야 할 중요한 시점에 주로 공부를 합니다.” 오랜 학업은 사회와의 거리를 벌려놓고, 경험을 깊게 하지 못한다고 진단한다. “사회와의 부딪침이 적으면 경쟁력이 취약해져요. 자기 색깔도 갖기 어렵고요.” 그리고 사회적 인식에 대해서도 한마디 던진다. “(건축) 작업의 질보다는 어디 출신이냐가 더 많이 작용하는 게 아쉽죠. 작품 자체로 평가하고 있지 않아요. 고객들의 요구가 그렇습니다.” 그의 지적대로 간판 지상주의는 한국 건축의 취약점이다. 더욱 고민해야 할 한국 건축의 정체성이 우선순위에서 밀리다 보면, 외국 건축가의 국내 진출은 더욱 속도를 낼 것이기 때문이다.

 

 

 


장윤규의 앞으로의 바람은 건축가로서 자신의 범위를 넓혀가는 것이다. “도시나 예술과 관련된 일을 한다든지, 스페이스 코디네이터를 한다든지, 무엇이든 간에 건축 밖과 교류를 하고 싶어요. 건축가 역할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영역을 넓히고 싶어요. 가구, 조명 등의 디자인도 하고 싶고, 책도 만들고 싶고, 또 그걸 통해 건축이 문화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어요. 그리고 결국에는 건축가가 아니었으면 좋겠어요.”


마지막으로 그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졌다. 당신에 대한 평가 중 좋아하는 것은? “일반적인 테두리가 없다. 식상하지 않고 다르다. 다른 점에 대한 고민을 읽을 수 있다.” 그럼 당신이 싫어하는 평가는? “가까이 하기 힘들다. 비싸다. 그런데 나 비싸지 않다. 이 말을 ‘꼬옥’ 넣어달라.”

 

 

 

 

 

VMSPACEOBS

 

 

 

 

'Living daily > 한 국 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감독 이명세  (0) 2009.01.28
대장암 수술의 권위 유창식교소  (0) 2009.01.28
한국남자 테니스의 역사 이형택  (0) 2009.01.24
미술가 이용백  (0) 2009.01.22
건축가 김준성  (0) 2009.01.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