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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남자 테니스의 역사 이형택

나 그 네 2009. 1. 24. 12:22

 

스포츠인 이형택

 

 

 

 

 

이형택은 강원도 횡성에서 태어났다. 3남 가운데 막내로, 공부보다 노는 데 관심이 많았다. 어느 날 그가 다니던 횡성 우천초등학교에 테니스부가 생겼다. 이형택은 “처음 보는 운동이었는데 신기하고 재미있어 보였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몇 가지 테스트를 받고 바로 테니스를 시작했다. 그러나 어머니와 할머니의 반대가 심했다. 고생할 것을 걱정했다. 이형택은 죽어도 테니스를 하겠다며 떼를 썼다. 어머니는 아들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이형택은 라켓을 잡은 뒤 정말 열심히 훈련을 했다. 중학교 때는 물을 뺀 수영장에 네트를 쳐 놓고 공을 치기도 했다. 그는 어느 날 친구와 연습 경기를 했는데 아웃 된 공을 코트 안에 들어왔다고 우겨 댔다. “그 친구에게 많이 져 무척 이기고 싶었다. 그 친구가 공 자국을 가리키며 아웃이라고 소리 질렀다. 주먹을 주고받으며 싸웠다.” 이형택은 그때 오른손이 부러져 한 달 동안 경기에 나가지 못했다. 이형택의 승부욕을 알 수 있는 일화다.


고등학교에 들어간 이형택은 승승장구했다. 춘천 봉의고 3학년 때 42연승을 달리며 전국대회 6관왕에 올랐다. 적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지막 대회인 장호배 전국주니어테니스대회 결승에서 쓰라린 패배를 당했다. 고교 동기 정성환에게 세트 스코어 1-2로 졌다. 어머니가 보러 온 경기여서 꼭 이기고 싶었다. 이형택은 “화가 치밀어 눈물이 났다. 그때 갖고 있던 모든 라켓을 부러뜨렸다”고 말했다. 고등학교 마지막 대회 결승에서 진 것이 너무 분했다. 이형택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그 경기를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고등학교 때까지 이형택은 우물 안에 있었다. 다른 종목 선수들처럼 태극 마크를 다는 게 꿈이었다. 그 이상은 뭐가 있는지 몰랐다. 스테판 에드베리가 윔블던에서 우승하고 피트 샘프라스가 US 오픈을 제패하는 건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이형택은 건국대 1학년 때 국가대표가 됐다. 그때 새로운 목표가 생겼다. 함께 뛰던 윤용일과 박성희가 해외 대회에 나가는 걸 본 뒤부터다. “이런 것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형택은 조금씩 눈을 떴다. 퓨처스 대회에 나가 승리하면 세계 랭킹이 올라갔다. 동기 부여가 됐다. 더 강한 상대, 더 이름 있는 선수와 겨루고 싶었다. “내가 이긴 선수들이 챌린저 대회에 나가고 세계 랭킹 100위 안에 드는 것을 봤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형택은 1998년 대학을 졸업한 뒤 한 단계 높은 챌린저 대회의 문을 두드렸다. 삼성증권에 입단해 주원홍 감독을 만난 것도 그때다. 주감독은 당장의 성적보다 이형택의 성장 가능성에 주목했다. 승패에 연연하지 않았다. 져도 좋으니 과감하고 공격적으로 경기하라고 가르쳤다. 기본기는 이미 잡혀 있었다. 이형택은 점점 자신감이 붙었다. 공에 힘이 붙었다. 이형택은 실력으로 우물 밖으로 나갔다.

 

이형택은 그해 방콕아시아경기대회 테니스 남자 단체전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소중한 금메달이었다. “소속팀 삼성증권이 IMF 금융위기로 해체될 위기에 놓였는데 금메달을 따 팀이 유지됐다. 나 개인으로는 병역 혜택을 받아 세계 무대에 도전할 수 있었다. 금메달을 못 땄다면 지금의 이형택은 없다. 2000년 군대에 가야 할 상황이었다.”

 

 

 

병역 혜택으로 날개를 단 이형택은 해외 대회에서 성적을 올리기 시작했다. 1999년 요코하마 챌린저에서 우승을 차지했고 2000년 러키 루저(본선 출전자가 기권해 예선에서 떨어진 선수 가운데 랭킹이 가장 높은 선수가 대신 나가는 것)로 출전한 브롱스 챌린저에서 두 번째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브롱스 챌린저에서 우승하면서 자신감이 붙었다. 그때는 치기만 하면 모두 상대 코트에 들어갈 것 같았다.” 이형택의 말에서 힘이 느껴졌다.
이형택은 그해 US오픈에서 새로운 역사를 썼다. 1회전에서 제프 타랑고를 꺾으며 한국 남자 테니스 사상 처음으로 그랜드슬램 1승을 거뒀고 2, 3회전을 넘어 4회전에 진출했다. 이형택은 상위 라운드로 올라갈수록 가슴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자신감이 넘쳤다. 마음은 차분히 가라앉았다. 국내에서는 이형택의 선전에 큰 관심을 보였다. 야구나 축구 소식이 아니면 실리기 어려운 스포츠신문의 1면을 장식하기도 했다. 한국인 메이저리거를 취재하기 위해 미국에 파견된 기자들이 이형택을 취재하기 위해 뉴욕으로 달려갔다. 테니스에 별 관심이 없는 이들도 흥분했다. 그리고 고개를 갸웃했다. “한국에 이런 대단한 선수가 있었나”라며.

 

 

 

16강전의 상대는 피트 샘프라스였다. 윔블던에서 7번이나 우승하는 등 그랜드슬램 14승을 거둔 세계 최고 수준의 선수였다. 세계 랭킹 4위와 182위의 대결이었다. “긴장돼 경기 전날 잠을 한숨도 못 잤다. ‘0-6으로 지는 거 아니야’라는 생각도 했다.” 첫 세트 첫 게임을 잡은 이형택은 그 뒤 부담 없이 라켓을 휘둘렀다. 2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갔다. 이형택의 0-3(6-7(4) 2-6 4-6) 패배였다. 샘프라스는 “수고했다. 좋은 경기였다”는 말을 건넸다. 이형택은 활짝 웃으며 샘프라스와 악수를 나눴다. “샘프라스만 아니면 누구든 이길 수 있었는데.” 이형택의 눈에 약간의 아쉬움이 비쳤다.


이긴 샘프라스보다 진 이형택에게 관심이 집중됐다. ‘감자가 나는 시골에서 자란 동양인 청년이 뉴욕에서 세계 최고의 선수와 경기했다’는 게 화젯거리였다. 이형택은 US오픈 4회전 진출로 2000년 11월 세계 랭킹 99위에 올랐다. 그해 자신이 목표로 세웠던 100위 내 진입을 이뤘다. “조금만 더 열심히 하면 (세계 랭킹이) 더 올라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훈련하는 만큼 성적이 나왔다.” 이형택은 꾸준히 투어 대회에 나가며 100위 권 안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2003년 새해 벽두 테니스 팬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시드니에서 펼쳐진 아디다스 인터내셔널 결승에서 세계 랭킹 4위 후안 카를로스 페레로를 접전 끝에 2-1(4-6 7-6 7-6)로 물리치고 한국 테니스 사상 처음으로 ATP 투어 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카타르 도하에서 경기를 하고 대회 개막 전날 현지에 도착했다. 잠도 제대로 못 자고 1회전을 치렀는데 2회전을 통과하면서 흐름을 탔다. 준결승 상대인 마라트 사핀이 기권하는 등 운도 따랐다. 결승에서는 ‘여기까지 왔으니 잘한 거다’라는 생각으로 마음 편안하게 쳤다.” 이형택은 부진하거나 의욕을 잃을 때 그때를 떠올리며 힘을 얻는다.

 

 

 

프로 테니스선수는 모든 일을 혼자 해야 한다. 힘들다고 라켓을 대신 들어주는 사람도 없다. 경기를 하러 외국에 갈 때도 언제나 혼자다. 그래서 더 외롭고 힘들다. “많은 대회가 미국이나 유럽에서 열린다. 외국 선수들은 투어 자체가 생활이다. 하지만 동양 선수들에게는 대회에 나가는 게 여전히 낯설고 힘들다.” 이형택은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집에서 나와 살았다. 10년 넘게 전세계를 돌며 대회에 출전했다. 말을 붙일 동료도 없다. 오로지 내일 펼쳐질 경기만 생각했다. “테니스를 치는 건 힘들지 않다. 1년에 8, 9개월을 해외에 나가 뛴다는 것 자체가 힘들다.”

 

이형택은 2005년 잠시 라켓을 놓았던 적이 있다. 경기를 하러 이리저리 다니는 게 힘들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운동을 하는 게 싫어졌다. 쉬고 싶었다. 1달 동안 훈련을 안 했다. 그때 선수 생활에 미련을 갖고 일찍 운동을 그만둔 걸 후회하는 선배들을 봤다. 이형택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나는 아직 젊고 이렇게 테니스를 끝낼 수는 없다. 소속팀의 지원을 받으며 해외에 나가는 것 자체가 선택 받은 것이다.” 이후 이형택은 달라졌다. 테니스와 승부에 집착하지 않았다. 편하게 라켓을 잡고 경기를 즐겼다. ‘즐기는 테니스’의 구체적인 의미를 물었다. “설렁설렁 치는 것으로 오해하는 후배들이 있다. 테니스를 즐긴다는 건 질 때 지더라도 열심히 뛰는 것이다. 땀 흘리며 공을 치면 건강에도 좋다. 물론 힘든 것을 즐길 줄 알아야 한다. 고통과 어려움까지 말이다.” 경험이 쌓인 데다 긍정의 힘이 더해졌다. 30살이 넘은 2007년이 전성기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이형택은 그해 윔블던에서 처음으로 3회전에 진출했다. 노련미에 투혼까지 더해졌다. 그리고 다시 세계무대에 자신의 이름을 떨쳤다. 7년 전 좋은 기억을 갖고 있는 뉴욕 플러싱 메도 국립테니스센터에서.


 

 

 

“그 몸으로는 안 된다. 기권하고 나와라.” 주원홍 감독의 말이 들렸다. 하지만 이형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도미니크 에르바티와 맞선 1회전 5세트 게임 스코어 3-3에서 양 쪽 허벅지에 통증이 왔다.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서브 게임은 계속 따 내고 있었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이형택은 더 과감하게 달려들었다. “공이 오면 무조건 세게 쳤다. ‘들어가면 좋고 안 들어가면 말고’ 라는 식이었다.” 마음을 비우고 때린 공이 다 상대 코트에 들어갔다. 에르바티는 당황했다. 허벅지 근육이 끊어질 것 같았지만 이를 악물고 끝까지 경기에 집중했다. 손에 땀을 쥐며 경기를 보던 관중들이 뜨거운 박수와 환호를 보냈다. 세트스코어 3-2(6-7 6-4 7-5 6-7 6-4). 이형택의 승리였다.

 

세계 랭킹 100위 이내 선수들은 스트로크나 서브에서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중요한 순간 집중력에서 승패가 갈린다. 이형택은 위기에 더 강했다. 어렵게 1회전을 통과해 거칠 것이 없었다. “자신감이 최고조에 달했다. 내 공만 치자는 생각을 했다.” 2회전에서 기예르모 카나스를 3-0, 3회전에서 앤디 머레이를 3-1로 제쳤다. 2000년에 이어 또다시 US오픈 4회전에 올랐다. 의미는 7년 전보다 더 컸다. 40위 이내 선수들을 차례로 물리쳤다. 30대에 접어들었지만 실력이 더 좋아졌다. 이형택은 2006년에 이어 2년 연속 아시아 선수 가운데 가장 높은 세계 랭킹으로 시즌을 마쳤다.

 

 

 

한국은 2007년 슬로바키아를 꺾고 20년 만에 데이비스컵 월드 그룹에 올라갔다. 이형택은 단식과 복식에서 혼자 3승을 거뒀다. 하지만 이형택은 마냥 기뻐하지 않았다. 부담을 느꼈다. 30살이 넘으면 슬슬 뒤로 물러나야 한다. 그러나 치고 올라오는 후배가 없다. 이형택은 단식, 복식을 모두 이겨야 했다. 한국은 2008년 2월 데이비스컵 본선 1회전에서 독일에 2-3으로 졌다. 혼자 독일을 상대하기는 버거웠다. 이형택은 한숨을 내쉬었다. “요즘 선수들은 정신력이 약하다. 이를 악물고 경기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 하다. 목표는 높게 잡고 있는데 노력을 하지 않는다. 달리기를 하면 아직도 내가 맨 앞에서 뛴다.”

 

이형택을 보면 경이감을 갖게 된다. 나이가 들수록 더 좋은 성적을 내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형택은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하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안다. 그만큼 뚜렷한 목표의식을 갖고 있다. 이형택은 2008년 세계 랭킹이 100위 권 밖으로 밀렸다. 그러나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다. 다시 올라갈 일만 남았다는 반응이다. “무릎 부상 때문에 3~4개월 정도 대회에 나가지 못했다. 성적이 나쁘면 문제가 되겠지만 내 경우는 대회에 출전하지 못해 랭킹이 떨어졌다. 부상에서 복귀한 뒤 챌린저 대회에서 우승했다. 체력적인 문제는 전혀 없다.”

이형택은 “먼저 세계 랭킹 100위 안에 다시 들어가겠다. 그리고 투어 대회와 그랜드슬램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고 싶다. 최고의 자리에서 은퇴한 안드레이 애거시처럼 명예롭게 선수 생활을 정리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이형택은 취재가 끝나자마자 다시 라켓을 들었다. 그리고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때까지 스트로크를 날렸다. 이형택은 테니스를 즐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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