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한 국 인

영화감독 이명세

나 그 네 2009. 1. 28. 12:35

 

영화인 이명세

 

 


 

이명세 영화의 독특함은 데뷔작 <개그맨>(89)부터 그랬다. 개봉 시엔 흥행에 실패했으나 이후 컬트로 추앙 받으면서, 사람들은 이 영화가 “시대를 지나치게 앞선 작품”으로 평가했다. 하지만 20년 후인 지금 개봉되었다고 해도 상황은 비슷할 거다. 그의 영화는 시대를 앞서거나 뒤서는 영화가 아니라, 다른 길에 서 있는 영화다. “이명세 감독님의 영화는 개봉 당시에 보면 옛날 영화 같아요. 그런데 나중에 보면 또 옛날 영화 같지가 않아요.” 박중훈의 말이다.

 

<M>(06) 개봉 즈음 <첫사랑>(93)과 <M>의 비슷한 느낌에 대해 묻자 이명세 감독은 이렇게 말했다. “<첫사랑> 찍을 무렵에 히치콕의 꿈을 꾸었으니까요. 꿈속에 앨프리드 히치콕이 나타나서 <M>이라는 책을 주었어요. 난 도대체 그 ‘M’이 뭘까 생각했어요. 미스티(Misty)? 그때부터 내 영화엔 안개가 등장하기 시작했죠.” 이명세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이야기하면서 “전송 받는다”는 표현을 종종 쓴다. 하지만 그 전송은 외부에서 메시지를 받아들이는 수동적 작업이 아니다. 그는 자신의 내부에서 오는 그 무엇을 전송 받는다. 그것은 꿈일 수도 있고, 갑자기 떠오르는 깨달음일 수도 있으며, 지나쳤던 일상이 특별하게 보이는 순간일 수도 있다. “어떤 이미지를 떠올리려고 애쓰기보다는, 공간이나 사물로 들어가 보는 거죠. 그 안에서 질문하는 거예요. ‘이 공간의, 이 사물의 의미는 무엇인가….’ 그리곤 전송 받을 때까지 기다려요. 조금 추상적인 방법일 수도 있지만, 내 방법은 그래요.”

 

이명세 감독이 자신의 영화를 스스로 평가하는 기준도 ‘전송’이다. “내 영화에 스스로 점수를 매기는 방식이 있어요. 얼마나 많이 전송 받았는가, 그리고 전송 받은 것을 얼마나 정성 들여 화면에 옮겼는가. 그런 면에서 나름 만족했던 장면이라면… <나의 사랑 나의 신부>(90)에서 최진실이 문득 버스를 타고 어디론가 가는 장면이나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계단 장면, 그리고 <M>의 일식집 인테리어 등이죠. 특히 의 일식집 이미지는 아주 어렸을 때 꾸었던 꿈이에요. 항상 머릿속에 있었던 이미지였죠.” 이처럼 그의 영화는 ‘이미지의 가능성’에서 먼저 시작한다. “아무리 좋은 이야기라도, 그것이 이미지로 표현될 수 있는지를 보는 거죠. 그 이야기가 영화라는 매체로 표현되는 것이 맞는지, 그리고 내가 그것을 영화로 표현할 수 있는지가 우선이고요. 그게 예술가라는 직업의 ‘일’인 것 같아요. 지상의 언어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좋은 것을 가지고 내려와서 지상의 언어로 바꾸는 것.”

 

 

 

이명세 감독의 독특한 영화 작법의 근원은 그의 ‘기질’ 탓이기도 하다. 그는 조금은 ‘특별한’ 아이였다. 초등학교 시절에 ‘죽음’에 대한 공포를 강하게 느꼈고,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으로 잠 못 이루는 날이 많았다. “사람들은 농담이냐고 물으며 재밌다고들 하는데, 고등학교 1학년 때 갑자기 인생에 대한 질문이 찾아왔어요. 그 해답으로 ‘영화감독’이라는 존재가 떠올랐고, 감독이 되기로 결심했죠.” 영화광 시기를 거치면서 ‘결정적인’ 영화를 접한 후 감독을 꿈꾸는 것이 ‘일반 코스’라면, 이명세 감독은 내적 필요에 의해 ‘영화감독’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에게 영화는 “정신의 빵”이었던 셈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가 무슨 계시라도 받은 것처럼 영화감독이 된 건 아니다. “만화도 좋아하고 동화도 좋아하고 영화도 좋아하고 그랬죠. 고급스러운 걸 접한 건 아니지만, 남들 보는 정도로 기본적인 건 다 봤어요. 그런데 내 스타일은, 내가 물어야(꽂혀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영화든 책이든 잘 못 봐요.” 그는 남들이 좋다는 책이나 영화도, 왜 좋은지 자신이 알지 못하면 그 자리에 멈춰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에디슨 같았던 건 아니지만, 왜 이런 성격이 붙었는지 모르겠지만, 어릴 때부터 그랬어요. 수학 시간에 공식보다 ‘왜 루트 기호(√)는 저렇게 생겼을까’가 더 궁금했어요. 영어 시간에도 왜 어순이 주어 다음에 동사인지 궁금했고. 외우라면 외우겠는데 와 닿질 않는 거예요. 공부 못하는 애들의 전형이었죠.(웃음),” 이런 성격은 군 생활에서도 여전했던 모양이다. ‘왜 군 생활을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할 수 없는가’라는 그의 문제의식은 결국 ‘불평분자’라는 낙인으로 귀결되었고, 그는 13개의 부대를 전전한 끝에 제대할 수 있었다.


 

 

 

서울예술전문대학(현 서울예술대학) 영화과를 졸업하고 잠시 연출부 생활을 하긴 했지만, 그의 본격적인 충무로 활동은 배창호 감독의 연출부 시절부터 시작한다. <철인들>(82)로 시작해 <고래사냥>(84) <고래사냥 2>(85) <황진이>(86) <기쁜 우리 젊은 날>(87) <안녕하세요 하나님>(87)까지 총 6편의 영화에서 배창호 감독의 조감독이었고, <꿈>(90)의 시나리오를 함께 썼다. 배창호 감독은 후배의 데뷔작인 <개그맨>에서 안성기, 황신혜 등과 함께 공동 주연을 맡았으며 역시 함께 시나리오를 썼다.


배창호, 이명세 감독의 선배이면서 페르소나였던 배우 안성기는 두 감독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두 감독과 오래 작업했지만, 스타일은 굉장히 달랐어요. 물론 공통점은 있죠,. 영화에 따뜻한 휴머니즘이 흐른다는 것. 그리고 둘 다 영화 속에 나쁜 건 잘 표현하지 못해요. 굳이 차이를 말한다면, 배창호 감독은 현장에서 감정에 충실하고 영화를 마음으로 보는 방법을 알려주려 했다면, 이명세 감독은 디테일에서 따라갈 사람이 없었어요. 항상 놀랄 만한 디테일과 상상력을 지니고 있었고, 배우에게 연기엔 끝이 없다는 걸 알려주는 스타일이었죠.” 배창호 감독 연출부 시절, 그는 인생의 터닝 포인트를 맞이한다. “<황진이> 준비할 때였나? 조감독 시절이었지만, 그때 영화가 뭔지 알았어요. 건방지게 들을 수도 있지만, 아무튼 그랬어요.” 그 깨달음은 그의 데뷔작이 멀지 않았음을 의미하는 것이었고, 10년의 도제 생활을 거친 1989년 여름 단성사에 첫 작품 <개그맨>이 걸리게 되었다.

 

 

 

이명세 감독은 자신의 영화를 두 개의 질문으로 설명한다. ‘영화란 무엇인가’ 그리고 ‘사랑이란 무엇인가’. “그 두 가지 화두를 놓고 풀어간 것이 지금까지 만든 영화들이죠. 그 화두에서 파생된 언어들을 하나씩 영화에 집어넣는 일이었어요. 앞으로도 꾸준히 할 일이고요.” 첫 번째 화두. ‘영화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명세 감독의 고민은 결국 ‘소통’의 문제로 귀결된다. 이명세 감독이 즉흥적 발상을 가지고 일필휘지로 써 갈기듯 이미지를 창조하는 비주얼리스트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는 ‘대중과의 교감’에 대한 고민 안에서 자신의 예술적 비전을 전개시켰다.

 

 

 

“우리가 보는 모든 것이 한낱 꿈속의 꿈인가, 꿈속의 꿈처럼 보이는 것인가”라는 안성기의 내레이션이 영화의 대미를 만드는 <개그맨>은 “숙명적으로 대중 예술일 수밖에 없는 영화의 신기루 같은 느낌”과 “인생과 영화”에 대한 이명세 감독의 표현이었다. 첫 작품에서 대중과의 접점 만들기에 실패했다는 생각이었을까? <나의 사랑 나의 신부>는 “가장 보편적이며 만화적인 방식으로 관객에게 쉽게 접근하려는” 시도였다. <첫사랑>은 “전작의 느낌을 좀 더 확장하고 거칠었던 부분을 다듬어서 수제품처럼 만들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소통에 대한 고민은 최근작에서도 마찬가지다. “<형사 Duelist>는, 제목의 ‘Dueilst(결투자)’에서도 암시되지만 영화와 내가 맞붙어본다는 생각으로 했던 영화였죠. 영화적 움직임의 가능성, 이야기를 떠나 이미지로 전달하는 방식…. 하지만 이 영화는 관객과의 소통 부문을 지적 받았고, ‘정말 소통의 문제인가’라는 생각에 오히려 더 밀고 나가고 극대화해 본 게 인 셈이에요.”


두 번째 화두. ‘사랑이란 무엇인가’라는 문제 앞에서 그는 남녀의 사랑만을 말하지 않는다. <나의 사랑 나의 신부> <첫사랑> <지독한 사랑>처럼 아예 제목에 ‘사랑’을 넣은 직접화법도 있지만, 그의 모든 영화는 다양한 방식으로 사랑을 말한다. “<개그맨>은 백일몽처럼 허황된 꿈과 같은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는 셈이죠.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 형사가 오로지 추적의 한 길을 가는 것도 어떻게 보면 사랑의 한 모습이고요.” 그 어떤 것에서도 찾아낼 수 있는 사랑의 흔적들. 그렇다면 <남자는 괴로워>는, 세상을 떠난 아버지에 대한 감독의 애잔한 사랑일지도 모른다.

 

 

 


한국영화에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은 세기말과 세기초를, 아날로그와 디지털을 이어주는 가교 같은 영화였다. 흥행은 물론 수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의 수많은 장면에 매혹되었으며, 선댄스영화제를 통해 미국에 소개되었을 때 할리우드의 영화인들도 크게 주목했다. 특히 조나단 드미 감독은 이 영화의 ‘전도자’를 자처했고, 박중훈을 <찰리의 진실>(02)에 캐스팅하기까지 했다. 충무로 여기저기서 연출 제의가 왔고, 직접 제작을 한다면 돈도 꽤 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때 이명세 감독은 홀연히 미국으로 떠난다. 그리고 무려 4년을 뉴욕에서 지낸다. 감독 10년 만에 맞이한 절정의 순간에 그렇게 떠나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때 아니면 그러기 어려울 것 같았어요. 영화도 많이 보고 싶었고. 그러면서 영화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보자는 게 첫 번째 목표였고, 두 번째로는 시장을 넓히고 싶다는 욕심이 있었어요.”

 

영화 보고, 영어 배우고, 시나리오 쓰고…. “4년 동안 나 홀로 대학을 졸업한 거죠.” 그러면서 이따금씩 접한, 할리우드 스튜디오 사람들의 일하는 모습은 강한 인상을 주었다. “할리우드가 돈만 가지고 움직이는 곳이 아니라는 걸 알았어요. 우리가 잠깐씩 엿보는 할리우드는 무슨 파티나 하고 그러는 곳 같지만, 그쪽 사람들은 정말 미친 듯이 일해요. 기본적으로 하루에 시나리오 다섯 권은 읽어요. 그걸 10년을 했다면 몇 천 권을 읽은 건데, 그 사람들은 시나리오 보면 머릿속에 구조가 쫙 전개되는 거죠. 그리고 할리우드에서 한두 번 실수하면 바로 아웃이에요. 그게 무슨 뜻이냐 하면, 다신 그 업계에 발을 못 붙인다는 거죠. 아무튼 그쪽 사람들 보면서, 우리가 마치 한량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미국에 있을 때 스튜디오에서 몇 개의 프로젝트를 제안했지만, 이명세 감독은 4년 동안 메가폰을 잡지 않았다. 언어적 문제에 대한 두려움도 있었지만, ‘방식’에 대한 고민이 더 컸다. “장 클로드 반담의 액션을 찍는 식으로, 아시아 감독이 할리우드에 진입하는 일반적인 방식을 선택하고 싶진 않았어요. 꼭 이런 절차를 거쳐서, 단지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결국은 버려질 영화를 만들어야 하는지 고민도 했고요.”

이명세 감독은 현재 미국과 유럽과 일본과 한국을 잇는 다국적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미야모토 무사시의 이야기를 담은 사무라이 액션 영화로, 올해 여름엔 촬영에 들어가는 것이 목표다. 시나리오를 다듬고 있는 요즘, 술과 담배도 끊었고 매일 자전거를 타며 체력도 키운다. “이번 영화는 아날로그적인 방식으로 찍으려고 하는데, 그 고생 길을 누가 따라줄지 걱정이 좀 돼요.”

 

여러 현실적인 문제가 아직 남아 있지만, 차기 작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전송’ 문제가 아닐까 싶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건 전송이 끊길지도 모른다는 사실이에요. 요즘도 그래요. 가끔 생각이 잘 안 풀리면 ‘끝난 거 아닌가’ 덜컥 겁이 나고, 그러다 천신만고 끝에 뚫고 나가면 ‘아직은 아니구나’라며 안심하고. 이런 긴장감이 계속 있는 거죠.” 그 긴장감은 악몽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자주 꾸는 악몽이 있어요. 콘티 안 짠 상태에서 현장에 나가는 거죠. 아니면 현장에 나갔는데, 다른 사람이 내 영화를 찍고 있거나. 얼마 전에도 하나 꾸었는데, 크랭크인 날짜도 안 정해졌는데 프로듀서가 누굴 시켜서 영화를 찍고 있더라고요.(웃음)”

 

언제 찾아올지 모르는 매너리즘과 ‘전송 중단’을 항상 걱정해야 하는 영화감독 이명세. “그래도 ‘24시간 동안 영화만 생각할 것’이라는 원칙은 지키고 있어요. 많이 보고 듣고 느끼는 것도 중요하고요. 하지만 가장 중요한 건 항상 ‘왜’라는 호기심을 놓치지 않는 거죠. 내가 왜 이렇게 시나리오를 써야 하지? 내가 이번 영화도 이렇게 만들어야 하나? 남들이 다 그렇다면 그런 건가? 그런 질문들….”

 


이명세 감독은 전송이 끊기면 영화감독을 그만둬야 한다고 생각한다. 단호하다. “할 일은 있겠죠. 연출부를 해도 되고.(웃음) 사운드 수퍼바이저나 편집 수퍼바이저 같은 것도 괜찮을 것 같고,.” 혹시 학생들을 가르칠 생각은 없으시냐고 묻자, 별로 좋은 생각이 아니라는 듯 미지근한 반응을 보인다. “교수? 음… 상상력이 다 떨어진 상태에서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지… 잘 모르겠어요.”

 

마지막 질문으로 영화감독을 꿈꾸는 젊은이들을 위한 한 마디를 부탁 드리자, 이명세 감독은 자신의 영원한 화두 두 가지로 마무리한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습니다. 영화도 언제나 오래 참아야 합니다. 참을 수 있다면, 언젠가는 소망을 이룰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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