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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츠인 세계를 들어올린 작은 거인 전병관

나 그 네 2009. 2. 6. 06:55

 

스포츠인 전병관

 

 


 

전병관은 어려서부터 운동 신경이 남달랐다. 순발력과 힘이 좋아 달리기, 멀리뛰기, 오래 매달리기 등에서 1등을 놓친 적이 없었다. 씨름을 하면 2명의 친구를 한 손으로 상대해 이길 정도였다. 그러나 운동선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하지 않았다. 2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난 전병관은 집안을 이끌어 가야 했다. 아버지도 자신이 못다 이룬 학사의 꿈을 아들이 이뤄주길 원했다. 1982년 진안 마령중학교에 입학한 전병관은 의사를 꿈꾸며 학업에 매진했다. 성적이 오르자 조금씩 공부에 재미도 붙었다.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전병관의 진로는 바뀌게 된다. 그 해 5월 전교생을 대상으로 체력장이 열렸다. 지는 게 싫었던 전병관은 이를 악물고 열심히 해 상위권을 차지했다. 그런 전병관에게 돌아온 건 높은 점수가 아니라 역도부 가입이었다. 학업 성적을 매기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학교에 새로 생긴 역도부 선수를 뽑기 위해 열린 체력장이었다. 전병관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지만 역도부에 들어갔다. 전병관은 “운동보다 공부가 좋았다. 훈련이 너무 힘들었다. 역도부를 탈퇴하기 위해 일부러 엄살을 피우기도 했다. 그런데 정인영 선생님께서 이를 알아채시고 열심히 하면 운동과 학업을 병행할 수 있다며 나를 달랬다. 어린 마음에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학업과 운동을 모두 잘 하기엔 힘이 부쳤다. 힘겨운 훈련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피곤에 지쳐 잠들기 바빴다. 성적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전병관의 1학기 기말고사 성적은 25등이었다. 10등 안에 들던 아들이 갑자기 성적이 나빠진 이유가 역도 때문이라고 생각한 어머니는 학교로 찾아가 당장 운동을 그만두겠다고 했다. 전병관의 남다른 재능을 눈여겨본 정인영 선생은 “1년만 지켜보자”며 어머니를 설득했다. 판단은 옳았다. 전병관은 1982년 12월 제2회 소년역도선수권대회에서 인상 55kg, 용상 72.5kg, 합계 127.5kg으로 1위에 올랐다. 역도를 시작한 지 7개월 만이었다. 전병관은 그제야 자신이 역도에 재능이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역도 선수로 살아가겠다고 다짐했다.

 

 

 

전병관의 기량은 날이 갈수록 늘었다. 중학교 무대에서 전병관의 상대는 없었다. 1983년 제55회 전국역도선수권대회, 제10회 체육부장관기쟁탈 시도대항학생역도대회, 제3회 소년역도선수권대회에서 1위를 휩쓸었다. 전병관은 중학교 2학년 때 국가대표 상비군에 뽑힌 데 이어 1년 뒤 국가대표가 됐다. 당시 최연소 국가대표였다. 역도대표팀은 1986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서울올림픽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 위해 유망주 육성 프로젝트를 실시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표팀 막내’ 전병관에게 태극마크는 기쁨보다 힘겨움이었다. 힘든 훈련을 마치고 나면 선배들 뒤치다꺼리로 쉴 틈이 없었다. 간식을 나르고 운동복을 빨고 방을 청소해야 했다. 대표팀 선배들과는 나이 차가 커 다가가기도 힘들었다. 전병관의 바로 위 선배가 5살 위의 이형근이었다. 오랫동안 가족과 떨어져 지내야 하는 것도 어린 나이에 감당하기 어려웠다. 외로움에 시달린 전병관은 매일 밤 숙소 옥상에 올라가 눈물을 흘렸다. 그러면서도 서울아시아경기대회에서 꼭 금메달을 따겠다고 다짐했다.


1985년 아시아주니어역도선수권대회 우승과 세계주니어역도선수권대회 준우승을 한 전병관은 서울아시아경기대회의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훈련 때 세계신기록을 세우기도 해 전병관도 내심 금메달을 자신했다. 그러나 전병관은 인상에서 한 번도 역기를 들어 올리지 못하며 실격했다. 전병관의 말이다. “체중 조절 등 국제대회 경험이 부족했다. 경기장을 찾은 부모님이 고생했다며 어깨를 두드려 주고 집으로 내려 가셨다. 죄송스러운 마음에 눈물을 쏟았다. 실격은 내게 큰 충격이었다. 어린 나이에 실패를 감당하기 어려웠다. 그렇지만 고생하시는 부모님을 생각하면 포기할 수 없었다. 2년 뒤 서울올림픽 입상을 목표로 더욱 열심히 훈련했다.”


 

 

 

전병관은 서울올림픽 개막을 앞두고 슬럼프에 빠져 있었다. 자신의 최고기록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무게조차도 들지 못했다. 전병관은 중학교 시절부터 작성했던 자신의 훈련 노트를 보며 스스로 자세를 교정했다. 또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잊고자 노력했다. 효과는 있었다. 그리고 1988년 7월 제23회 한일친선역도경기대회에서 합계 270kg으로 한국신기록을 세우며 서울올림픽 입상에 대한 자신감을 키웠다. 1988년 9월 18일 서울올림픽 남자 52kg급이 열렸다. 전병관은 동메달 후보로 점쳐졌다. 전병관은 인상에서 112.5kg을 들어 올렸지만 메달 가능성은 높지 않았다. 용상 2차 시기에서 147.5kg을 들어 올려야 했다. 147.5kg은 올림픽 개막 1달을 앞두고 훈련했던 무게로 성공 여부는 불투명했다. 게다가 2차 시기가 아닌 3차 시기에 성공한다면 4위에 그치는 상황이었다. 전병관의 머릿속은 복잡했다. ‘내가 저걸 들어 올릴 수 있을까. 잘못하다 다치는 건 아닐까.’ 불안감이 떠나지 않았다. 전병관이 역기를 번쩍 들어 올렸다. 잠깐의 침묵이 흐른 뒤 성공을 알리는 부저가 울렸다. 은메달이었다. 지난 4년 동안 그토록 바라던 올림픽 메달이었다. 전병관은 그날 기쁨에 겨워 잠을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이튿날에는 아쉬움 때문에 잠을 이루지 못했다. 용상 3차 시기에서 157.5kg을 기록하면 세브달린 마리노프(불가리아)와 합계 270kg으로 같지만 체중이 적게 나가는 전병관이 금메달리스트가 될 수 있었다. 전병관은 “용상 3차 시기를 앞두고 난 들어 올릴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되돌아 보니 컨디션이 좋았던 만큼 성공할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도전도 하기 전에 일찌감치 포기한 내 자신이 한심했다”고 옛 기억을 떠올렸다.

 

 

 


서울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따며 자신감을 가진 전병관은 빠르게 성장했다. 그리고 세계 무대를 주름잡았다. 1989년 세계주니어역도선수권대회 56kg급에서 인상 115kg, 용상 157.5kg, 합계 275.5kg으로 1위에 올랐다. 이어 1990년 베이징아시아경기대회 56kg급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서울 대회의 실패를 만회했다. 전병관은 1991년 9월 독일 도나우싱엔에서 열린 세계역도선수권대회 56kg급에 출전해 인상 130kg, 용상 165kg을 기록해 합계 295kg으로 금메달을 땄다. 전병관이 4번째 출전한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거둔 첫 메달이었다. 또 1891년 제1회 세계역도선수권대회가 열린 지 100년 만에 수확한 한국역도의 첫 금메달이었다. 전병관은 1992년 4월 열린 아시아역도선수권대회 60kg급에서도 1위를 차지했다. 3개월 앞으로 다가온 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사상 첫 그랜드슬램을 달성한 역도 선수가 될 수 있었다.

 

전병관은 바르셀로나올림픽 금메달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전병관의 말이다. “24살이 내 전성기였다. 출전하는 국제대회마다 1위를 차지했다. 역도는 정상에 오르기까지 힘들지만 정상을 지키는 건 쉽다. 바르셀로나올림픽을 앞두고 자신감이 넘쳤다.” 경기를 며칠 앞두고 컨디션을 점검하던 전병관에게 희소식이 전해졌다. 친분이 있었던 한 중국 선수가 찾아와 류서우빈(중국)이 허리 부상을 당했다고 알려줬다. 류서우빈은 전병관과 함께 유력한 금메달 후보였다. 1992년 7월 16일 잠에서 깨어난 전병관의 몸은 가벼웠다.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수많은 국제대회에 참가해 경험을 쌓은 전병관은 침착하게 경기에 임했고 인상에서 132.5kg을 들어 올렸다.


인상 1차 시기에서 130kg을 기록한 류서우빈은 전병관을 이기기 위해 2, 3차 시기에서 135kg에 도전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러자 대표팀 코칭스태프가 전병관을 얼싸안으며 “이젠 됐다”고 환호성을 질렀다. 전병관이 용상 기록에서 류서우빈에 압도적인 우위를 보였기 때문이다. 전병관은 용상에서 155kg을 성공해 합계 287.5kg으로 277.5kg을 기록한 류서우빈을 10kg 차로 제치고 시상식에서 맨 위에 섰다. 전병관은 목에 걸린 금메달을 감격에 겨워 만지고 또 만졌다. 전병관의 말이다. “당시만 해도 올림픽 금메달은 쉽게 딸 수 없었다.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런데 내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것도 한국역도선수로서 처음이었다. 서울올림픽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감격스러웠다. 부모님 얼굴이 가장 먼저 생각났다. 부모님께서 역도를 시작한 이후 운동 선수로서 성공할 수 없다며 걱정하셨다. 그러나 올림픽 금메달을 따 내가 실패하지 않았다는 걸 보여드렸다.”

 

 

 

전병관은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에 출전했다. 언론과 역도 전문가들은 전병관의 올림픽 2연패를 기대했다. 그러나 인상 135kg을 들어 올린 전병관은 용상에서 실격했다. 전병관이 용상에서 실격된 건 처음이었다. 실망스러운 성적이었다. 전병관의 말이다. “애틀랜타올림픽은 내가 가장 아쉽게 여기는 대회다. 당시 모든 걸 이뤄 목표 의식을 잃었다. 여기에 역도화 개발에 몰두했는데 올림픽 개막 20일 전에야 완성됐다. 역도화 교체로 인해 제 실력을 발휘할 수 없었다.” 전병관은 2000년 위궤양이 도져 현역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2001년부터 국가대표 여자 상비군을 맡으며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다. 전병관이 가르쳤던 장미란(26)은 2004년 아테네올림픽 여자 75kg이상급에서 은메달을 차지했고 4년 뒤 베이징올림픽에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한국역도는 베이징올림픽에서 장미란을 비롯해 남자 73kg급의 사재혁(24)과 여자 53kg급의 윤진희(23)가 각각 금메달과 은메달을 획득했다. 역대 올림픽 최고 성적이자 태권도(금메달 4개)에 이어 가장 많은 금메달을 딴 종목이었다. 전병관은 이에 대해 앞으로 역도가 다시 올림픽 메달밭이 될 것이라고 자신했다. 전병관은 “옛 역도 강국이었던 동구권 나라들은 약물에 의존하다 몰락했다. 그러나 한국 선수들은 기초 체력이 탄탄하고 기본 자세가 안정되어 있다. 앞으로 점점 더 잘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제자 및 후배들에게 당부의 말을 남겼다. “바르셀로나올림픽을 앞두고 태릉선수촌에서 강사를 초빙해 강연했다. 그 강사가 ‘나 자신을 위해 금메달을 따는 게 아니다. 부모, 코칭스태프, 나라를 위해 금메달을 따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 말을 들으니 경기할 때 긴장도 사라지고 부담감도 없었다. 내 인생에 가장 큰 힘이 됐던 말이다. 선수들도 이 말을 깊게 새겨 들어 편안하게 경기하면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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