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한 국 인

다큐멘터리 감독 김동원

나 그 네 2009. 2. 6. 06:52

 

다큐 감독 김동원

 

 

 

 


 

김동원 감독의 부모님은 두 분 모두 평안북도 강계 출신이었다. 해방 전 좌익 운동에 잠시 참여했던 아버지는 월남 후 우익이었던 형의 일을 도왔다. 김일성대학에 다녔던 어머니는 월남 후 수도여자의대(고려대 의대의 전신)을 다녔고 의사가 되었다. 김동원 감독이 태어날 즈음, 어머니는 개인 산부인과를 운영하고 계셨다.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던 김동원 감독의 취향은 다분히 대중문화적이었다. 유년기의 가장 큰 놀이는 텔레비전 보는 것이었고, 중학생 시절엔 사진 찍기에 몰두했으며, 고등학생 시절엔 음악에 심취해 그룹 사운드를 결성하기에 이르렀다. 홍콩 액션과 스파게티 웨스턴을 즐겼고, 나탈리 우드 사진을 지갑에 꼽고 다니기도 했다. 재수 시절엔 매일같이 술을 마셨고 내기 당구를 쳤다. “개념 없던 시절이었죠, 하하하.” 그러던 어느 날. 입시가 한 달 정도 남았을 때였다. “그때 당구가 400이었어요.(웃음) 밤 11시쯤 됐나? 당구 쳐서 돈도 잃고 찬바람도 부는데, 갑자기 내가 정말 구제불능이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한 달 동안 미친 듯이 공부했죠.”


신문방송학과에 들어갔지만, 대학 시절의 중심은 연극반이었다. “대학교 2학년 때까지만 해도 세상 모르고 살았죠. 그러다 예쁜 여학생들 많다고 해서 연극반에 갔어요.(웃음)” 그가 대학에 들어갔던 1970년대 중반은 숨막히던 유신 정권 시절. 무대는 그에게 일종의 해방구였다. “그때 연극을 하면서, 인생에서 처음으로 물음표가 생겼던 것 같아요. 선배들과 어울리면서 약간의 의식 변화도 있었고, 무대에 서서 뭔가를 표현할 때 답답한 것이 풀리는 쾌감도 있었고요. 청춘의 객기 같은 것 있잖아요. 막연하지만 세상이 뒤집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반항심 같은 것. 학습되진 않았지만, 그런 부분이 조금씩 커졌던 시기죠.” 당시 들었던 밥 딜런이나 도어스의 음악도 그에겐 큰 영향을 주었다. “영어 공부도 됐고(웃음) 미국에 대해서 생각하는 계기도 됐죠.” 그러면서 그는 “세상이 살 만한 곳이 아니”라는 부정적이고 삐딱한 시선을 가지게 된다. “그런데 그래 봐야 냉소적인 수준이었죠.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어요. 악다구니처럼 노는 게 최고라는 일종의 쾌락주의? 그런 시기였죠.”

 

 

 

군 제대 후에 그는 극심한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충무로로 간다. “영화계의 외양만 보고, 멋있다고 생각했죠. 화려한 동경에서 영화 일을 시작한 셈이에요.” 첫 현장은 이장호 감독의 <바보 선언>(84). 사전 검열에 의해 ‘전면 개정’ 통보를 받은 작품이었다. 그럼에도 그해 연말까지 영화를 찍어야 했다. 영화사들이 제작 실적으로 외화 수입 쿼터를 할당 받았던 시절. 한국영화는 외화를 사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 “한국영화의 위상이 너무나 낮았고, 검열이 있었던 시절이었어요. 그래도 1980년대 중반 넘어가면서 자기 목소리를 내려 했던 젊은 감독들이 등장했고, 나도 뭔가 할 일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을 하고 있었죠. 감독이 되지 못한다면 이론이나 비평 같은 걸로 할 일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 하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할 거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죠.” 그 시절 열심히 시나리오를 써서 제작자에게 가져갔지만, 영화 공부 좀 더 하라는 반응들이었다. “상업영화 감독으로서 재능이 없었던 건 확실해요.(웃음)”


3~4년 동안 충무로에서 일했지만 얻은 것은 좌절감이었다. 영화 대신 웨딩 비디오를 찍었던 답답했던 시절. 그는 우연히 카메라를 들고 상계동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의 인생은 바뀐다. “상계동은 저를 다시 태어나게 한 곳이죠.” 1986년 10월이었다.


 

 

 

“9월에 1분도 안 되는 성화 봉송을 위해, 1월부터 40세대 200여 명이 떨어야 한다.” <상계동 올림픽>에 등장하는 이 한 줄의 내레이션은, 그 당시 서울 빈민들의 삶을 그대로 보여준다. 88올림픽에 맞추어 성화가 지나가는 길 근처는 ‘환경 미화’를 해야 했고, ‘미관상’ 좋지 않았던 상계동 주민들의 터전은 그렇게 철거되었다. 김동원 감독은 알고 지내던 신부님으로부터 부탁을 받는다. 재판 자료로 쓰게, 가재도구 파손된 걸 증거 화면으로 촬영해달라는 것이었다. “전두환 정권 말기였죠. 사방에서 데모가 있었는데, 그게 뭘 의미하는지 잘 몰랐어요. ‘사회구조적 모순’이라는 걸 단어로는 이해해도, 피부로 와 닿진 않았던 거죠. 그런데 상계동에서, 아기 업은 아줌마가 철거 용역들과 대치하고 몸을 날려 포크레인을 막으려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 사회가 이런 곳이었구나’라는 생각을 했어요. 강하게 저를 친 거죠.” 아무 생각 없이 들어간 상계동. 그는 모르고 살았던 ‘세상의 절반’을 알게 된다. 그는 그곳에 5년 동안 있었다. 그곳 주민이 되어 살았던 시간은 소중했다, “그곳의 하루하루가 큰 배움이었어요. 현실에 대한 배움도 있었지만, 사람에 대한 관심이 커졌던 것 같아요. 이전엔 몰랐던 달동네 사람들의 삶이, 매우 건강하고 재밌다는 사실에 괜히 신나기도 했고요.” 김동원 감독에게 상계동은, 영화에 대한 판타지를 깨줌과 동시에 내면의 복잡한 잡념을 없애준 곳이었다. 1988년에 나온 <상계동 올림픽>. 그는 다큐멘터리 감독이 된다.

 

 

 

1991년 <상계동 올림픽>은 야마가타국제다큐멘터리영화제에 초청받았다. 이때 만난 일본 다큐멘터리의 전설적인 감독 오가와 신스케는 김동원 감독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고, 다큐멘터리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지핀다. 한국으로 돌아온 그는 ‘푸른영상’을 만들었다. “다큐멘터리에 대한 자의식이 형성되던 시기였죠. 그래서 동아리 같은 개념으로 주변 사람들을 꼬셔서 푸른영상을 만들었어요. 자기가 가진 카메라와 편집기를 가져와서 서로 도움도 받고 스터디도 했죠. 이후 다큐를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꾸준히 푸른영상을 찾았고요.” 터전을 마련한 김동원 감독은 <상계동 올림픽>의 연장선상에서 꾸준히 공동체에 대한 작업을 해나간다. <행당동 사람들>(94)와 <또 하나의 세상-행당동 사람들 2>(99)는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작품이다. “상계동에서 오순도순 살아가는 공동체 정신을 알게 됐어요. 투쟁에 성공한 사람들이 함께 잘 사는 해피엔딩을 꿈꾸었고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죠. 투쟁도 성공하지 못했고, 공동체 내부에도 분열이 있었으니까요.”

 


이후 그는 여러 철거 지역을 다니게 됐고 행당동에서 어떤 이상적인 모습을 발견한다. “철거가 끝나도 공동체 생활을 이어가는 경우가 거의 없었는데, 행당동은 조금 달랐어요. 상계동에서 실패한 것을 행당동에서 해나간다는 것이 너무 반가웠죠. 다른 철거 지역 사람들에게도 보여주고 싶다는 마음으로 <행당동 사람들>을 만들었어요.” 그리고 <명성, 그 6일의 기록>(97)은 1987년 시민 항쟁 기간에 대한 영화. 당시 김동원 감독은 삶의 터전을 잃은 상계동 주민들과 함께 명동성당으로 들어왔고, 자연스레 ‘6월 항쟁’을 그 중심에서 경험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카메라가 고장 나 당시를 전혀 기록하지 못했던 감독은, 10년의 시간이 지난 후 인터뷰와 자료 화면으로 당시를 회상하고 재구성한다.

 

 

 

<송환>(04)의 시작도 우연이었다. 가깝게 지내던 신부님이 비전향 장기수 두 분을 봉천동으로 모셔오는 걸 도와달라고 했고, 김동원 감독은 별 생각 없이 승합차에 카메라를 싣고 대전의 한 요양원으로 향했다. 그때가 1992년. 이후 12년 동안 기록한 800시간 분량의 테이프는 148분의 다큐멘터리가 되었고 선댄스영화제에서 ‘표현의 자유상’을 수상하게 되었다. “<송환>도 <상계동 올림픽>의 연장이라고 생각해요. 상계동에서 배운 것 때문에 봉천동 산동네에서 살고 있었고, 그러면서 할아버지들을 만나게 됐으니까. <송환>도 사실은 작품을 하려고 했다기보다는 비전향 장기수의 송환 운동을 촉진하고 돕기 위해 생각했던 거예요.” 이때 정부 차원에서 송환이 이루어졌고, 김동원 감독은 잠시 방향을 잃었다. 하지만 이것은 <송환>의 진정한 시작이 되었다. “당시 다큐의 여러 형식에 대한 감이 조금은 잡혔죠. 그래서 ‘내가 관련된 이야기’로서 비전향 장기수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요. 나름 실험이었죠.” 그렇게 만들어진 <송환>은 한국 다큐멘터리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작품이 되었고, 이후 극장용 장편 다큐멘터리의 가능성을 열었다. <송환>엔 “다큐가 세상을 바꾼다는 생각이 사라진 세상”이라는 언급이 있다. 그럼에도, 어쩌면 계란으로 바위 치기일 수도 있지만, 김동원 감독은 다큐를 만든다. “난 그래도 다큐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어요. 다큐멘터리는 어떤 주장이고, 그것엔 설득을 통해 변화를 바라는 의도가 있고, 결국은 관객의 마음을 움직이길 원하는 거니까.”

 

 

 

지난 20여 년 동안, 그의 ‘작업 환경’이 결코 좋았다고만은 할 수 없다. 경제적으로 힘들 때도 있었고, 정치적 이유로 네 번 정도 연행되기도 했다. “경제적 어려움이 얼마나 컸느냐고 묻는다면, 다른 사람들도 살면서 겪는 수준 정도? 연행 당했을 때도 무섭거나 그러진 않았어요. 그것도 상계동에서 배운 건데, 마주치기 전까지는 두려워도 실제로 맞닥뜨리면 그 두려움은 해소가 되거든요. 상계동에서 집을 헐리고 천막 생활을 했을 때, 천막도 빼앗아간다는 얘기가 돌았어요. 그래서 두려움으로 하루하루 살고 있는데 실제로 천막을 털렸죠. 그러니까 오히려 두려움이 없어졌어요. 비닐 덮고 자는 게 그렇게 따뜻한지 알게 되었고.(웃음)”


다큐를 만든다는 것은 ‘사람’에 대한 고민이다. 그것이 다큐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고 또 고통이기도 하다. “내가 다른 사람의 삶에 개입할 권리가 있는가, 내가 이 사람을 이용하는 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들 때가 많아요. 그렇다고 해서 개입을 포기하면, 다큐적 ‘재미’가 없어져요, 저는 어쩌면 운이 좋았죠. ‘사람’ 때문에 고통을 겪은 적은 별로 없었거든요. 아마 작품을 하려는 의도로 만났다면 부자연스러웠을 거예요. 주변의 잘 아는 사람을 찍다가 작품으로 이어졌기에, 그런 딜레마는 거의 없었던 셈이죠.” 하지만 ‘자연인 김동원’이 아닌 ‘다큐 감독 김동원’이기가 힘들 때도 있다 “송환 당일, 할아버지들이 떠나시는데, 마지막 이별을 해야 하는데, 나는 카메라를 들고 있어야 했죠. 카메라를 내팽개치고 싶었어요.” 어머니에 대한 다큐도 그런 이유로 접었다. 어머니를 통해 해방 공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만, 어머니는 그때의 기억을 환기하는 걸 원치 않으셨다. “어렵게 승낙을 받아서 한 번 촬영을 했는데, 너무 힘들어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결국은 프로젝트를 접었어요. 다큐는 대상의 의지에 의해 결정되는 거니까요. 그리고 내가 ‘다큐 감독 김동원’은 포기해도, 아들로서 ‘자연인 김동원’은 포기할 수 없는 거고요.”

 

 

 

최근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서 다큐를 가르치고 있는 그는 어떤 아이러니를 느낀다. “다큐를 가르친다는 게 뭔가 스스로에게 물어요. 정답은 아닌 것 같지만 ‘같이 뒹구는 것’ ‘같이 사는 것’이라고 자답하고요. 저도 다큐를 누구에게 배운 적이 없거든요. 만나는 사람들에게서, 현장에서, 역사 안에서 ‘현실’로서 배웠던 것 같아요.”

 


 

그는 여전히 다큐멘터리를 ‘비판’이라고 생각한다. “굳어진 그 무엇에 대한 저항이죠,. 비판적이지 않은 다큐는, 짠맛을 잃은 소금 같아요.” 그리고 김동원 감독에게 다큐멘터리는 궁극적으로 ‘삶’이다. “최소한 내 삶이죠. 다큐는 가치관을 이야기하는 것이니까. 그 가치관을 남에게 제시하는 것인데, 내가 그 가치관대로 살지 못하면서 다큐 작업을 하는 건 힘들어요. 다큐를 만든다는 건 내 삶에 대한 도전이고 확인이고 반성이죠. 작품의 힘이라는 건 결국은 감독의 삶에서 나오게 되어 있거든요.” 현재 <상계동 올림픽, 그후>를 만들고 있는 그는 다큐 작업이, 일과 삶과 놀이가 분리되지 않은 즐거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연히 다큐를 하게 됐지만, 지금은 굉장히 만족하고 있는 상태예요. 만약에 내가 극영화 감독이 되었다면, 지금도 할 수 있을까요? 다큐가 좋은 건 정년이 없다는 거죠.(웃음) 만약 상업영화 감독이 됐으면, 지금은 어디서 식당을 하고 있을지도 몰라요.(웃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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