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한 국 인

미술가 조덕현

나 그 네 2009. 2. 6. 06:53

미술가 조덕현

 

 



 

 

조덕현은 연필과 콩테의 드로잉만으로 작품을 일구어낸다. 좀 더 압축해서 말한다면 한국 가족의 낡고 빛바랜 사진에 기초한 ‘추억’을 그린다. 너무도 똑같아서, 그래서 가끔은 섬뜩하게 다가오는 ‘사실적’인 그림이다. 이를 통해 그는 한 개인의 소소한 일상의 삶을 담아내고, 나아가 그의 영육(靈肉)을 관통해온 시간과 역사를 돌아보게 한다.


조덕현은 한국 여성의 삶에 유난히 관심이 많은 작가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작업을 페미니즘이라는 시선으로 묶어두는 것을 원치 않는다. “1991년 딸아이의 아버지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여성, 그것도 한국 사회 속에서의 여성의 인생에 관심이 갔습니다. 그림의 소재로 여성을 다루면서 바느질과 천이라는 재료도 사용해 보았어요. 하지만 한국 여성의 삶을 화폭에 담는 동안 여성사, 그리고 여성의 문제가 말처럼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조덕현의 그림을 여성이라는 화두로 뭉뚱그려 정리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 듯하다. 한 개인의 미시사를 통해 역사라는 거대 서사를 조망하는 작업이라고 보는 게 옳겠다. 조덕현의 그림이 매력적인 까닭은 역사라는 거대한 시대 흐름 속에 제외되거나 소외되었던 개인이라는 존재를 기억하게 만든다는 데 있다.


“우리는 역사라는 이름으로 지나간 일들을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어요. 하지만 과연 우리가 역사라는 이름의 지나온 시간을 온전히 알 수 있을까요? 연필과 콩테로 누군가의 옛 사진을 재현하다보니 역사라는 이름의 거대 서사의 기록에서 빠진 부분이 보이더군요. 완벽하다고 여겨졌던 역사의 몸통에 숭숭 뚫린 구멍을 발견했다고 할까요. 화가인 내가 바로 그 빈틈을 다른 관점으로 바라보는 것, 바로 그 작업을 통해 한 개인의 잊혀진 기억을 복원하고, 동시에 삶의 풍부한 정황을 엿볼 수 있게 하는 것도 의미 있지 않을까요?”

 

 

 

 

인간의 존재감. 조덕현의 그림에 숨어 있는, 이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질감’은 그를 마음의 파문을 불러일으키는 예술가로 자리 잡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8년 5월 30일부터 7월 5일까지 서울 소격동 국제갤러리에서 열렸던 그의 개인전도 그러했다. ‘리 컬렉션(re-collection)’이라는 제목의 이 전시에서 조덕현은 두 여인을 그렸다. 한 명은 1928년에 태어나 19살 때 패션 디자인을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가 돌아온 노라 노(Nora Noh, 본명 노명자, 1928~ )였다. 다른 한 명은 1950년 일본에서 나고 자라 1970년대 미국으로, 다시 영국으로 건너간 이정선(1950~ )이라는 여인이었다.

 

“노라 노는 여성의 몸과 마음을 옥죄었던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당대의 가장 세련된 스타일을 이식하기 위해 혼을 바쳤던 한국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였어요. 이정선은 영국의 주요 일간지 <데일리 메일(The Daily Mail)>의 사주인 로더미어 자작(Viscount Rothermere)을 만나 사랑에 빠진 로더미어 자작부인입니다. 20세기라는 같은 시간대를 공유했던, 그러나 서로 다른 인생을 살아온 두 여자의 이야기라고 할까요.” 


물론 두 여자에 관한 설명은 이것만으로 충분치 않다. 노라 노는 1928년 한국 최초의 방송국인 경성방송국을 설립한 아버지(노창성)와 한국 최초의 여자 아나운서인 어머니(이옥경)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녀 역시 훗날 한국 최초의 패션 디자이너가 되었으니 집안 전체가 ‘최초’라는 수식어를 보유한 셈이다. 눈썰미가 있는 사람이라면 ‘명자’라는 이름을 밀어제친 ‘노라(Nora)'가 무엇을 뜻하는 지 알아챘을 것이다. 노라는 노르웨이가 자랑하는 극작가 헨릭 입센(Hernik Ibsen)의 연극 <인형의 집>(1879년 초연)의 여주인공 이름. 근대극의 출발을 알린, 동시에 여성해방운동을 선포한 이 작품에서 노라는 남편에게 ‘독립’을 선언하고 가출하는 상징적인 장면을 통해 자신만의 정체성을 찾아 나선 여인상을 보여주었다. “노라 노는 단순히 한국 사회에 서구의 패션 트렌드를 전수한 데서 그치지 않고 문화혁명가의 삶을 살았습니다. 최은희, 엄앵란, 김지미 등 당대 한국 영화의 아이콘이 그녀의 패션의 세례를 받았어요. 그녀는 아내와 며느리라는 정체성을 숙명처럼 안고 살던 이 땅의 여인들과 달리 패션 디자이너라는 자신만의 존재감으로 한 시대를 풍미한 여자였습니다.”


 

노라 노가 서구적 문화와 그 가치를 한국에서 실천하는데 노력했다면 이정선은 서구 문화의 중심에서 오히려 한국의 문화와 그 가치를 삶에 접목시키려 했다. 1998년 그녀는 남편 로더미어 자작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흔적을 자신의 조국에 남기겠다는 결심을 하게 된다. 화장한 남편의 재의 절반은 영국에, 그리고 나머지 절반을 한국 무주의 백련사에 안치시킨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한 줌의 재로 묻혀 있는 곳, 그리고 언젠가 자신이 뿌려지게 될 이 공간에 남편의 체취를 남긴다는 것. 그것은 바로 자신이 떠나 있었던, 그렇게 오래도록 비워 두었던 이 땅에서의 공백을 메우고자 한 그녀의 염원이었는지도 모른다.

  

 

 

조덕현에게 사진을 재현하는 행위란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지나간 시간을 ‘발굴’하는 것을 뜻한다. 우리는 알고 있다. 우리 곁을 스친 지난 순간들이 공허함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공허함을 느끼는 이 헛헛한 시간마저도 이내 과거라는 이름의 화석이 되고 만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인간이 불안한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사이의 여백을 느끼게 될 때마다 시간 앞에서 작아지는 자신의 존재를 깨닫기 때문이다. 조덕현 역시 이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그는 ‘기억’이라는 화두를 우리에게 제시한다. 그가 <구림마을 프로젝트>(영암, 2000)와 <아슈켈론의 개>(파리 주드폼 국립미술관, 2000~2001), <이서국으로 들어가다>(2002, 아트선재미술관, 경주보문단지, 경북 청도 백곡리) 등과 같이 땅에 묻혀 있는 것을 ‘발굴’해서 현재의 시점으로 바라보게 만드는 일련의 프로젝트를 시도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지나간 일을 보면 항상 그 나름의 역사적 상황과 관련을 맺고 있어요. 물론 저는 투철한 사명감으로 역사를 다루는 역사가는 아닙니다. 특정 인물이나 사건을 저만의 역사적인 시각으로 다루지 않아요. 예나 지금이나 저를 가리켜 역사를 그리는 작가라고 말할 때마다 겁이 덜컥 나요. 하지만 저에겐 작가의 ‘본능’이 살아 숨 쉬고 있어요. 모든 현상과 존재하는 것에는 흔적과 체취가 있지요. 그것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물며 그것이 인간이라면 더욱 소중하겠죠. 그것이 상상의 옷을 입은 미술품으로 땅 속에 묻혀 있든지, 한국 현대사의 질곡을 낯선 땅에서 바라보아야 했던 노라 노와 이정선 같은 실존 인물이든지, ‘기억’을 통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과거의 공백을 느낄 수 있는 것입니다.”

 


조덕현은 지금도 일곱 살 때 돌아가신 아버지가 그립다고 말한다. 유년 시절 아버지라는 존재에 대한 상실감이 ‘사진’을 통해 인간이라는 존재를 읽어내는 지금의 자신을 만들었노라고 고백한다. 과거의 기억을 아련하게 품고 있는 사진이라는 객관적인 기록과 그 속에 숨어 있는 한 개인의 주관적인 순간이 합쳐지는 것. 조덕현의 작업은 바로 그 지점에 겹쳐져 있다. 하지만 섣부른 단정은 금물이다. 그가 사진을 정밀묘사해서 캔버스에 옮기는 행위는 단순히 과거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바로 현재화된 과거를 끄집어내는 일이요, 우리네 삶을 ‘인문적’으로 탐구하는 일이다. 조덕현의 그림은 개인과 역사,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길’ 위에 서 있다. 조덕현은 지금 그 길을 걷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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