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ing daily/한 국 인

PIFF 집행위원장 김동호

나 그 네 2009. 2. 10. 13:00

 

영화인 김동호

 

 



 

  

지금은 영화 없인 살 수 없는 사람이 되었지만, 1988년 이전의 김동호 위원장은 1년에 서너 편 정도 영화를 보는 평범한 관객일 뿐이었다. “문화공보부에서 일하긴 했지만, 일반적인 공무원이었죠. 여러 자리를 거쳤는데 예술국장은 한 적이 없었고요. 기획관리실장 8년 동안 전체적인 업무를 관장할 때, 영화법 개정에 간여하면서 충무로의 현실은 어느 정도 알게 되었지요. 하지만 직접적인 영화 행정은 한 적이 없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영화진흥공사 사장에 임명되었으니 영화계에선 ‘낙하산 인사’로 받아들일 만했다. 실제로 영화감독협회는 반대 성명을 발표하기도 했으니, 그의 ‘영화 인생’ 첫 발이 그다지 순조로웠던 건 아니다. “(영화인과의 간격을 좁히기 위해선) 일단 영화를 많이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1988년 이후 제작된 한국영화는 거의 다 보았죠. 영화인들도 많이 만났어요. 영화진흥공사에 4년 있으면서, 영화계 원로부터 젊은 감독들까지 모두 친해졌고요. 그러면서 점차 영화 속으로 빠져들어간 셈이죠.” 법학과 행정학을 전공한 관료로서, 이후 그는 한국영화의 법제와 정책에 대한 논문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고 몇 권의 저서도 가지게 되었다.

 

 

 

김동호 위원장이 영화에 점점 깊이 스며들고 있다는 증거(?)는, 그의 마지막 공직이었던 공연윤리위원회 위원장 시절의 일들에서 알 수 있다. 아마 1993년 극장가에서 <크라잉 게임>(92)을 본 관객이라면 적잖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혹시 이 영화를 아직 안 보신 분은 스포일러 주의!). 이 영화의 대반전은 여성인 줄 알았던 딜(제이 데이비슨)이 남자로 밝혀지는 장면. 닐 조던 감독은 이 부분을 매우 ‘직접적으로’ 표현했고, 당시의 한국 영화관에서 ‘성기 노출’을 대면한다는 건 거의 기적에 가까웠다. 그 시절, ‘당국’은 억압과 규제를 의미했다.

 

“규정상으로는 안 됐지만, 그 부분이 빠지면 영화 전체가 무의미해지니까 허용한 거죠.” 묶여 있던 러시아(구 소련) 영화를 해금시킨 사람도 김동호 위원장이었다. “그땐 이념이 아무 의미 없을 때였으니까요.” 당시의 일에 대해 그는 매우 쉽게 말하지만, 어떤 ‘소신’이 없었다면 결코 쉽지 않았을 터다. 장선우 감독의 <너에게 나를 보낸다>(94)를 통과시키면서 작은 갈등을 빚었던 그는 <쇼군 마에다>(80)로 인해 스스로 공직 생활을 접게 된다. “이미 비디오로 보급되어 있던 영화였죠. 문화관광부에서도 미국에서 제작한 영화이기에 일본영화가 아니라 미국영화로 봐야 한다는 의견이었고, 그래서 당연히 통과시켰던 거고요. 그런데 모 일간지 사회면 톱에 (일본영화가 심의에서 통과됐다는 내용의) 기사가 났어요. 그리고 그 즈음에 통과시킨 <올리버 스톤의 킬러>(94)가 너무 폭력적이라는 여론도 있었고.”


김동호 위원장은 바로 사표를 냈다. 어쩌면 그는 자신의 행동이 사회적 파장을 불러일으킬 거라는 걸 어느 정도는 예상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자신의 원칙 앞에서 성실했다. “영화진흥공사 시절에 많은 영화인들과 만나면서 영화계에 대한 이해가 넓어졌던 셈이죠. 공연윤리위원회로 가면서는, 한국 영화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나름의 이해와 생각이 있던 상태였고요.” 1995년, 34년의 공무원 생활에 마침표를 찍은 그는 그 해 가을에 세 영화인을 만난다. 현재 부산국제영화제(PIFF)에서 함께 일하고 있는 이용관 공동집행위원장, 전양준 부집행위원장 그리고 김지석 수석프로그래머. 그들은 김동호 위원장을 부산으로 이끌었다.


 

 

 

“부산에서 국제영화제를 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의 일차적인 반응은 ‘무관심’이었죠.” 세 사람의 열정에 움직여 집행위원장이라는 자리를 수락했지만, 영화제를 현실화시키는 데엔 수많은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동호 위원장의 지인들은 모두 그를 말리는 상황이었다. 지원을 약속했던 곳도 갑자기 철회했다. 혹시나 영화제가 개최된다고 해도 결국은 1회성 행사로 끝날 거라는 의견이 지배적이었다. 부산은 문화의 불모지라는 인식이 팽배했던 시기였다.


천신만고 끝에 얻어낸 부산시의 지원금은 3억 원. 나머지 18억 원의 스폰서를 마련하는 것이 김동호 위원장의 임무였다. “공직에 있을 때 정계와 재계의 많은 사람들을 만났었고, 특히 문화공보부에서 예산 관련 일을 많이 했던 게 큰 도움이 됐죠.” 아무도 영화제의 존재를 인식하지 못한 상태에서 재원을 확보한다는 건 쉽지 않았던 일이었지만, 김동호 위원장은 결국 1996년 9월13일에 ‘1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식에서 폭죽을 쏘아올렸다. “공직에 있을 때 비교적 창의적인 일을 많이 했죠. 문화예술진흥원(현 문화예술위원회)를 만들거나 국립현대미술관, 남양주종합촬영소, 독립기념관, 예술의 전당 같은 새로운 문화 시설을 조성하는 업무를 했으니까요. 부산국제영화제도 그 연장선상에 있고요. 이런 일을 하는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건 긍정적인 사고였어요. 어떤 어려운 일이라도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다 보면 집념과 추진력이 생기고, 그렇게 노력을 기울이다 보면 해낼 수 있게 돼요.” 영화제가 있었던 지난 13년 동안 저널에서 숱하게 달았던 “작은 거인 김동호”라는 헤드카피. 그 배경엔 조용하지만 불도저처럼 전진했던 그의 행보가 있었던 셈이다.


‘추진력’과 함께, 김동호 위원장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요소는 바로 ‘성실함’이다. 특히 그는 스스로에게 성실하다. “과거에 술을 많이 마실 때나 술을 끊은 지금이나 상관 없이, 몇 시에 잠자리에 들든 새벽 4시30분에서 5시 사이엔 항상 일어나요. 그리고 한 시간씩은 운동을 하죠. 그리고 주말엔 꼭 테니스를 하고요.” 이러한 자기 관리가 없었다면, 거의 30분 단위로 끊어지는 영화제 기간의 살인적인 스케줄과, 매년 스무 차례 이상인 해외 출장을 소화하지 못했을 것이다.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김동호 위원장이 얻은 가장 큰 재산이 있다면 ‘사람’이다. 전세계 수많은 국제영화제 관계자들을 비롯해, 허우 샤오시엔 같은 세계적 거장부터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발굴된 신예까지, 그의 친화력은 넓고 깊다. “신의와 성실이 가장 중요한 것 같아요. 진솔하게 사람을 대하고 믿으며 기탄없이 이야기하고 협력하는 일관된 자세도 필요하고요. 그러면서 많은 사람들과 가깝게 사귈 수 있었죠. 그런 면에서 친화력이 좋다는 얘기를… 많이 듣게 된 것 같네요.(웃음)” 그리고 영화제는 김동호 위원장에게, 사람에 얽힌 많은 추억을 남겨주기도 했다. 어쩌면 그 추억들은, 숱한 난관을 헤치고 10년 넘게 영화제를 이끌어온 것에 대한 보상일지도 모른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해운대에 포장마차가 20개 정도 있었죠. 영화제의 중요 행사가 끝나고 다니다 보면, 각 포장마차마다 꼭 영화인 한두 명은 있어요.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 모든 포장마차에 들러서 술 권하고 받고 다음엔 남포동으로 넘어가서 자갈치 시장의 횟집들 돌고, 그게 영화제 기간의 일과였어요. 그리운 추억이죠.”

 

2006년 1월1일부터 금주를 시작했지만, 술에 얽힌 김동호 위원장의 일화는 영화인들 사이엔 일종의 전설이다. “1회 때 남포동에서, 거리에 신문지 깔고 해외영화제 집행위원장들과 함께 앉아서 소주잔을 기울였던 건 정말 잊지 못하죠. 당시 함께 있었던 해외 영화인들도, 그때의 정취를 지금도 이야기하곤 합니다.(웃음)” 거의 백지 상태에서 준비했던 영화제. 그러기에 1회 영화제의 개막작인 <비밀과 거짓말>(96)이 5,000명의 관객 앞에서 상영되던 그때 그 시간은 영원히 잊지 못한다. 관객에 얽힌 추억을 떠올린다면 5회 영화제를 빼놓을 수 없다. <어둠 속의 댄서>(00)가 상영되던 야외 상영관. 만만치 않은 비가 쏟아졌지만 사람들은 거의 환불을 요구하지 않았고, 2,000여 명의 관객은 빗속에서 우산을 쓰고 영화를 봤다. 감격이었다. 보람이 있다면 ‘부산’이라는 공간에 새 의미를 부여한 것. “1회가 성공하고, 2회와 3회도 계속 성공하면서, 부산에서도 국제적인 문화 행사가 가능하다는 사실을 부산 시민들과 문화 인사들에게 심어주었다는 점이 뿌듯하죠.”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발굴된 감독들이 점점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는 것도 큰 즐거움이었다.

 

 

 

14회를 준비하고 있으니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른 셈. 하지만 부산국제영화제의 핵심적인 부분은 바뀌지 않았다. “1회부터 지금까지, 아시아의 새로운 영화와 감독을 발굴하고 세계화시킨다는 목표는 변함없어요. 바뀌는 건 세부적인 프로젝트죠.” 국제영화제들의 무한 경쟁 시대. 부산국제영화제 전엔 도쿄영화제와 홍콩영화제가 아시아에서 투 톱 체제를 형성하고 있었는데, 부산이 1회부터 성공을 거두면서 도쿄와 홍콩이 밀리기 시작했다. 이후 두 영화제가 부산국제영화제를 벤치마킹하기 시작했고, 한편으론 부산국제영화제도 다른 영화제의 좋은 선례들을 가져와 수용했다. “부산국제영화제도 프로젝트를 개발할 때 외국의 영화제를 벤치마킹하죠. PPP(부산프로모션플랜)는 로테르담영화제의 시네마트를 보고 우리 식의 프로젝트 마켓을 연 것이고, ‘아시안 필름 아카데미’는 베를린영화제의 ‘탤런트 캠퍼스’와 선댄스영화제의 ‘프로듀서스 랩’을 수용한 것이에요.” 제작 지원 펀드를 만들고 교육 프로그램을 창설하고 마켓을 여는 등, 부산국제영화제는 끊임없이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현실화시키면서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 자리를 지켜야 했다. 그 과정에서 김동호 위원장은 튼튼한 버팀목이 되었다. “칸영화제, 베를린영화제, 베니스영화제의 집행위원장들은 영화를 선정하는 총책임자인 ‘수석프로그래머’의 역할을 겸하고 있지만, 저는 영화 선정엔 전혀 관여 안 합니다. 개막작이나 폐막작도, 프로그래머가 좋다고 하면 저는 안 보고 결정할 때도 있고요.” 대신 그는 정부와 지자체와 기업을 만나 예산을 확보하고, 대외 업무를 통해 국제적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전념해왔다. “가장 중요한 업무는 대외 협력 관계를 원활하게 유지하고, 영화제 진행의 윤활유 같은 역할을 하는 것이죠.”


현재 김동호 위원장과 부산국제영화제에게 가장 큰 프로젝트는, 2008년에 착공한 부산영상센터 ‘두레라움’을 성공리에 완성하는 것. 그는 이곳이 단순한 ‘부산국제영화제 전용관’이 아닌, 시드니의 오페라하우스처럼 한 도시를 상징하는 랜드마크가 되길 바란다. 부지 선정 과정에서 “반드시 바닷가에 지어야 한다”는 원칙을 고수한 것도 그런 이유다. “영화제도 이제 기반을 닦았고, 영상센터만 준공되면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다 한 거죠.” 한편 2007년에 설립된 ‘발콘’은 작품성 있는 아시아 영화를 극장, 케이블TV, IPTV를 통해 유통시키는 목적의 콘텐츠 기업. 미국 인디펜던트 무비의 창구인 선댄스 채널 같은, 아시아 영화를 전문으로 하는 ‘PIFF 채널’도 생각하고 있다.

 

 

 


50대 후반의 중년이었던 김동호 위원장은 영화제와 함께 세월을 보냈고 지금은 72세의 노년이 되었다. 그는 70세가 되던 2007년에 부산국제영화제의 조직을 대대적으로 개편해 공동집행위원장 시스템으로 바꾸었고, 세 명의 부집행위원장을 두었다. 그는 영상센터가 부산에서 해야 할 자신의 마지막 일이라고 생각하고, 서서히 은퇴를 준비하는 중이다. “벌써 10년이 넘었으니, 앞으로 올 새로운 10년은 더 젊고 역량 있는 사람이 맡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낭트영화제칸영화제처럼 한 사람이 긴 세월 동안 하는 경우도 있지만,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나타나게 되죠.” 김동호 위원장은 자신이 물러나는 것이 영화제의 “발전적이며 창의적인 개혁”이라고 생각한다. “아시아 최고의 영화제,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영화제 중 하나라는 위상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영화를 찾아내고 발굴하는 창의적 노력이 있어야죠. 그래야 부산국제영화제는 정체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요. 제 뒤를 이어 영화제를 이끌 사람들이 충분히 해낼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오히려 걱정되는 건 ‘포스트 김동호’ 시대의 영화제가 아니라, ‘포스트 영화제’ 시대의 김동호 위원장이다. ‘영화인’으로서 열정을 쏟았던 부산국제영화제를 떠난 그는, 혹시 그 적적함으로 인해 우울증이라도 걸리지 않을지 살짝 기우가 깃들지만, 역시 기우는 기우다. “저는 할 일이 굉장히 많거든요. 빨리 그만둬야 새로운 인생을 설계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여백이 있고, 그 여백에 새로운 그림을 그릴 시점은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고요.” 공직자의 삶, 영화인의 삶을 거쳐 ‘제3의 인생’을 준비하고 있는 김동호 위원장. 만약 젊은 나이에 영화 일을 시작할 수 있었다면 당연히 영화감독의 꿈을 가졌을 거라는 그의 새로운 목표는, 혹시 연출자가 아닐까. 그렇진 않더라도 그가 ‘영화’라는 영토에서 벗어날 것 같진 않다.